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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일보 창간 8주년 기획 특집
권우상 실록비화 - 제1부
일본은 백제인이 세운 나라
제1 부
백제 동성왕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무녕왕(武寧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며 곤지(困支)의 양자이다. 462년 왜(倭)의 나라백제(奈良百濟)로 가는 도상인 각라도(各羅島)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융(隆)이다. 태어난 후 줄곳 나라백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일본어로 시마(島) 또는 사마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를 사마왕(斯麻王)이라고도 하였다. 사마는 그가 태어나자 생모와 함께 백제로 돌아갔지만 정치적 상황이 매우 불안하여 나라백제에 있는 곤지(昆支)에게 다시 보내졌다.
이처럼 백제 왕실에서 왕자를 마음대로 왜(倭)의 나라백제에 보내기도 하고 데려오기도 한 것은 나라백제(奈良百濟)는 백제가 지배하는 영토였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왕자뿐만 아니라 백제의 문물을 왜(倭)에 전파하기 위해 백제 주민을 대거 이주시켰는데 403년(應神 14년) 2월에 백제의 봉의공녀(縫衣工女)가 나라백제에 건너갔는데 이것이 일본열도에서 의봉(衣縫)의 원조이다.
하지만 공녀(工女)가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대이주집단(大移住集團)의 일원으로 간 것이다. 이렇게 백제의 대이주집단은 일본열도 전역 120여 개 현(縣)에 흩어져 살면서 백제의 문물을 전파했다. 당시 왜(倭)는 의복도 없는 신천지 섬(島)에 이러한 선진의 문화를 가진 백제의 대민족집단이 이주하였다는 사실은 바로 백제가 일본열도에서 개척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본열도 전역을 건설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문자도 없고 의복도 없는 원시생활을 하는 원주민 세계에 문자와 각종의 기술과 말(馬) 등 고도의 선진문화를 가진 백제의 대이주집단이 일본열도에 상륙하였다면 당연히 이 집단에서 통치자인 왕이나 천황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왜의 나라백제 응신천황(應神天皇)도 백제주민 대이주집단에서 나온 천황이며, 동시에 나라백제(那良百濟) 최초의 천황이었다.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도성이 무너지고 개로왕이 잡혀 죽을 때 개로왕의 왕자들은 모두 죽었지만 사마(島)는 왜(倭)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506년에 백제 땅에는 전염병이 들고 3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봄가뭄에 농작물이 말라 백성들이 굶주려 국고로써 구제해야 했다.
고구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7월에 말갈을 사주하여 백제의 고목성을 공격하자 고목성이 무너지고 6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나 고구려는 4개월 뒤 11월에 다시 백제의 마수성을 공격했지만 폭설이 내리자 공격을 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백제 무령왕은 507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목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쌓아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자 예상대로 고구려는 말갈과 연합전선을 펼치며 공격해 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그해 10월 고구려는 백제의 한산성을 치기위해 황악산 아래에 병력을 집결시켜 놓고 있었는데 백제 무령왕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군에 대항하여 싸우자 고구려군은 퇴각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의 잦은 충돌은 계속되었다.
512년 9월에 가불성에서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륙의 백제군은 밀려 가불성을 빼앗기고 다시 산성(山城)도 빼앗길 위기에 몰리자 무령왕은 기마병 4천을 직접 이끌고 나가 위천(葦川) 북쪽에서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렸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군은 사기가 되살아났고 고구려군은 이후 전쟁을 자제하고 한동안 백제를 침입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제 무령왕은 자신감을 갖고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위상을 높이는 표문을 올리자 양나라 왕은 백제 무령왕에게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의 봉함을 내리자 백제의 국제적인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이후 백제 무령왕은 423년 한성에 직접 거동하여 내신좌평 인우(印宇)와 달솔(達率) 사오(沙午)로 하여금 15세 이상의 한산하(漢山河) 이북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축조하고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에 대비했다.
무령왕 대에 와서 백제와 고구려가 이처럼 군사적으로 첨예한 대립을 한 것은 동성왕 이후 지속적으로 백제가 영토 확장을 강행하자 고구려의 국제적 영향력을 악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고구려에 옥(玉)을 바치던 섭라(涉羅 : 한반도 섬진강 주변의 가야땅)가 백제에 병합되자 황금을 바치던 부여는 물길의 팽창정책에 밀려 크게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위나라는 황금을 바치지 못한 고구려를 몹시 원망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위나라 왕 세종은 사신으로 온 고구려의 예불실에게 직접 그런 불만을 토로하면서 면전에서 핀잔을 주기까지 하자 고구려는 대국으로서 위신에 큰 손상을 입었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부여를 병합하고 섭라를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백제 무령왕에게 섭라(涉羅)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고구려의 요구를 거부하자 가야는 섭라가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영토하고 주장하면서 크게 반발하여 군사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하면서 고구려, 위나라 양나라, 신라, 왜(倭) 등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백제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백제는 섭라지역에서 물러날 뜻이 없는 것은 물론 섭라(涉羅)가 옛날부터 백제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일전도 불사한다는 각오였다. 백제는 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해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것이라고 맞불을 놓았고, 백제 무령왕은 양나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섭라 지역의 영유권을 인정해 졸 것을 요구했다. 백제가 이토록 섭라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일본열도의 소왕국들은 나라백제(奈良百濟)의 정치적인 영향권에 속해 있었고 왜(倭)의 소왕국들은 백제의 왕족과 신하들이 나라백제로 왕래하는 유일한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왜의 나라백제 조정에서 활동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백제인(百濟人)이었다. 그에 비해 가야는 여러 분국으로 갈라져 있는 힘없는 소국이였고, 국제사회에서도 백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세력이었다.
무령왕이 즉위할 때(501년)에 왜(倭)의 나라백제는 499년에 무열천황(武烈天皇)이 폭정을 일삼고 있었다. 무열천황은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그 태를 보고 사람의 생손톱을 뽑아서 산마(山魔)를 케도록 하였으며 머리털을 뽑고 그 사람을 나무위에 올라가게 한 뒤에 나무 밑둥치를 베어 나무위의 사람이 떨어져 죽도록 하기도 했으며, 하천 수문에 사람을 집어넣고 수문을 열어 센 물살에 흘러나오는 사람을 삼지창으로 찔러 죽이는 행동을 자행하는가 하면 나무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발가벗겨 활을 쏘아 죽이고 여자를 발가벗겨 판자위에 앉히고 말을 끌고 앞으로 가서 교접을 시키고 여자의 음부를 보고 정액을 흘린자는 죽이고 흘리지 않는 자는 관노로 삼는 등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게다가 매일같이 창기(娼妓)들을 불러 놓고 음란한 짓거리를 하거나 나체춤을 추게 하는 등 사람이 할 수 없는 변태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주색에 빠져 지내기까지 했다. 501년 11월에 백제 출신의 왕족 의다량(義茤良)이 살해되자 백제 무령왕은 나라백제의 무열천황 소행이라고 판단하고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부여 씨 왕족인 마나군(麻那君)을 사신으로 왜지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 보냈다.
백제 무령왕과 나라백제 계체천황의 관계는 나라백제에 마나군을 사신으로 보내기 전 무령왕이 나라백제에 머물 때 이미 각별한 사이였는데 그때 무령왕은 계체천황을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이라 불렀다. 남대적은 계체천황의 속명이었고 무령왕의 속명은 사마였다. 그래서 무령왕을 사마왕이라고도 불렀다. 무열천황의 극악무도한 폭정이 지속되고 있을 때 나라백제 내부에서는 반란의 움직임이 있었고 남대적이 바로 반란의 핵심 인물이었다.
504년 10월에 무령왕이 마나군을 나라백제(奈良百濟)에 보낸 것은 남대적과 연계하여 무열천황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남대적은 응신천황(應神天皇)의 5세손인 언주인왕의 아들이었는데 백제 무령왕은 남대적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왕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나군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무열천황을 제거하고 남대적을 천황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의중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함이었다.
백제 무령왕이 마나군을 나라백제에 보내어 남대적을 지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백제 출신 신하들은 남대적을 지지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무령왕은 남대적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왕자(아들) 사아군(斯我君)를 나라백제로 보냈다. 나라백제에 건너간 사아군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법사군이고 이가 곧 왜군(倭君)의 시조였다.
남대적의 세력에 의해 무열천황이 폭정으로 살해되자 나라백제 조정의 장관격인 대반대련, 금촌은 조정 중신들과 의논하여 중애천황의 왜언왕(倭彦王)을 천황에 앉히려 했지만 왜언왕은 살해될까 염려스러워 은신해 버렸는데 이는 남대적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왜언왕이 숨어버리자 대반대련, 금촌 등 중신들은 남대적을 왜의 천황으로 추대하였다.
왜(倭)에 있는 나라백제(奈良百濟)의 천황에 오른 남대적(男大迹 : 繼體天皇)은 이때 본부인이 있었지만 수백향(手白香) 황녀를 황후로 삼았다. 그 이유는 수백향이 남대적을 천황 자리에 앉히는데 큰 역할을 한 백제 세력가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수백향은 황후에 책봉되기 전에 이미 황녀의 신분이었다.
백제사람 중에 황녀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무령왕의 딸 뿐이었다. 결국 무령왕은 자신의 딸을 나라백제의 계체천왕(남대적)의 부인으로 만들어 계체천황은 무령왕의 사위가 된 것이었다. 백제 무령왕의 이런 계략은 왜(倭)에 있는 나라백제(奈良百濟)를 확실하게 속령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나라백제의 천황에 오른 계체천황은 백제 무령왕이 칙서를 달라고 하자 계체천황은 나라백제에 대한 영유권은 백제에 있다는 내용의 칙서를 백제 무령왕에게 전달했다.
계체천황이 나라백제의 왕에 오르기 전에도 계체천황과 무령왕은 각별한 사이였다. 나라백제의 무열천황이 폭정을 일삼으며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을 때 무령왕은 유망한 정치세력이던 남대적에게 구리거울(인물화상경)을 보내어 정치적인 지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나라백제(奈良百濟)의 계체천황은 가야땅 섭리(涉羅) 영유권은 백제에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자 가야는 나라백제에 등을 돌리고 신라에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유지해 오던 왜지의 나라백제와 가야의 공조가 깨진 것이었다. 백제에게 섭라(涉羅)를 빼앗긴 가야 분국은 힘을 합쳐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싸울 것을 결의했다. 가야분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국가는 반파국(伴破國 :고령과 성주 일대의 대가야)이었다. 반파국을 주축으로 한 가야연합군은 자탄(子呑 : 거창)과 대사(大沙 : 하동)에 토성을 쌓아 만거(滿棨 : 함양)에 연결하고 봉화를 올리는 곳과 식량을 두는 창고를 만들어 백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또한 마열비(穈列比), 마수비(麻須比)에 을 쌓고 마구거(麻具棨). 추봉(椎封)에 연결하였다. 그 만큼 가야로써는 섭라를 한반도 백제에 내어 줄 수 없어 일전을 각오했다. 가야분국은 급히 신라에 사신을 보내야 원군을 요청했지만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라는 언제가는 자신들이 가야땅을 차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신라의 원군을 받지 못한 가야연합군은 기문(己汶 : 섬진강 하류 동쪽지역)에서 백제군과 싸우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백제군에서는 진가량(眞加良) 해보(解補) 등의 장수가 기마병을 앞세운 3만의 군사를 총지휘하고 있었고, 가야연합군에서는 반파국 장수 목빈(木彬)이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 나섰다. 백제군의 깃발이 천고바미의 가을 하늘에 펄럭거렸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군과 가야연합군이 서로 살벌하게 대치하면서 4만여 명의 백제군은 가야연합군을 치기 위해 공격대열을 갖추고 있었고, 백제군의 한 무리는 이미 배를 강에 띄워 가야연합군 진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가야연합군은 백제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화살을 비오듯 쏘아대었으나 백제군은 완강하게 맞서 화살을 쏘며 도하를 시도하였다. 백제군의 일진은 이미 강을 도하 하는데 성공하여 가야연합군 진영으로 화살을 쏘며 공격해 왔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백제군과 가야연합군의 치열한 전투가 불붙기 시작하면서 백제군은 이미 도하에 성공하여 가야연합군 진영을 향해 돌진하였다.
백제군이 쏘는 화살은 비오듯이 가야연합군 진영에 떨어졌고, 백제군이 휘두르는 칼날이 햇볕에 섬광처럼 번쩍거리면서 가야군의 머리는 추풍낙엽처럼 땅에 떨어졌다. 사기가 충천한 백제군은 질풍노도와 같이 가야연합군을 참살하였다. 가야연합군의 장수 목빈(木彬)은 전사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가야연합군은 대패했고, 백제군은 섬진강 좌우에 형성되어 있던 임나(任那)지역 서쪽에 있는 상다리(上嗲唎), 하다리(下嗲唎) 사타(沙陀), 모루(牟婁) 등 4개의 현(縣)을 점령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 무령왕은 섭라(涉羅)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었고, 고구려와 접경지역인 한산하 이북 영토까지 장악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끌어 내어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혔다. 그러나 523년 5월 무령왕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백제 무령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순타(淳陀)는 장남이자 태자이다. 513년 8월 왜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서 사망하고 차남 사아(斯我)는 나라백제에 머무르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는 백제가 왜지의 나라백제(奈良百濟)를 통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아(斯我)의 아들은 법사군(法師君)이다.
무령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백제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523년 5월에 무령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는데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결단성이 있었다. 가야가 섭라지역을 백제에 빼앗기자 가야분국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한반도 백제에 대항했으나 대패하자 가야는 한반도 백제에 등을 돌리고 한반도 신라와 손을 잡았다.
또한 왜의 나라백제가 섭라의 영유권이 백제에 있다고 주장하자 가야는 나라백제와도 등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여전히 백제를 응징하기 다각도로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신라는 그 같은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영토 확장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무렵 중국대륙에서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던 북위(北魏)에서는 심상치 않는 분위기 감지되고 있었다. 위나라왕 탁발원굉(卓發原宏)은 한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한족과 선비족의 결혼을 장려하자 선비의 귀족들이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423년에 하북성, 산서성 일대에서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농민들의 봉기도 일어나 국가기강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자 북위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양나라는 이 기회를 이용해 세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백제 성왕은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았고, 이를 눈치 챈 고구려군은 3만의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다. 이 때가 백제 성왕 즉위년 8월이었는데 성왕은 병관좌평 지충(池忠)에게 기마병 2만과 보명 5천을 주어 고구려군과 싸우도록 했다.
병관좌평 지충(池忠)이 거느린 백제군이 패수(청천강)에 이르러 총공격을 감행하자 고구려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퇴각했다. 백제군이 비록 고구려군을 격퇴시키긴 했지만 백제의 힘만으로는 고구려를 상대하여 싸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백제 성왕은 525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양국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이 무렵 백제에게 섭라(涉羅)와 임나(任那 : 대마도) 4개현을 빼앗긴 가야는 신라와 더욱 돈독한 우호관계를 다지고 있었다. 무령왕이 사망 2개월 전인 523년 3월에 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요청했고, 신라는 이찬 비조부의 딸을 가야 구형왕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렇게 되자 백제는 가야를 칠 움직임을 보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대치하는 상항에 있었으므로 왜의 나라백제(奈良百濟)를 움직여 가야를 칠려고 하자 나라백제의 조정은 이 문제로 내분이 일어났다. 근강모야(近江毛野) 세력은 백제를 도와 가야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축자국(筑紫國 : 지금의 北九州)은 가야 공격을 반대했다.
이 때문에 나라백제는 내분을 일으키면서 극한 대립으로 번졌다. 축자국(筑紫國)의 왕 반정(磐井)은 원래 가야 출신이었기 때문에 백제가 장악한 암나(任那 : 對馬島) 땅은 마땅히 가야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가야를 쳐야 한다는 백제 지지파 근강모야(近江毛野) 세력은 5만의 병력으로 가야 지지 세력인 반정에 대항했고, 반정은 자신을 옹호하던 주변 세력과 힘을 합쳐 근강모야의 군대에 대항했다.
이 전쟁에서 근강모야는 패배하여 퇴각하였고, 나라백제의 계체천황은 조정 대신들과 숙의한 후 물부대련(勿部大僆), 녹록화(廘鹿火) 장수 등에게 병력을 주어 다시 반정(磐井)을 치도록 하자 528년 11월에 반정과 녹록화(鹿鹿火) 사이에 일대 혈전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반정은 5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대패하고, 다시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지만 사상자가 속출하고 반정(磐井)이 전사하자 반정의 아들 갈자(葛子)가 항복하고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나라백제(奈良百濟)의 내분은 일단락 됐다.
그런데 이무렵 신라와 가야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523년에 가야 구형왕에게 시집 온 한반도 신라 이찬 비조부의 딸은 가야에 온 뒤에도 신라의 의복을 입고 지냈으며 자신과 함께 있는 1백명의 시종에게도 모두 신라옷을 입도록 했다. 이 때문에 구형왕은 가야 의복을 입을 것을 요구했지만 가야로 시집 온 시조부의 딸은 듣지 않자 분노한 가야 구형왕은 따라 온 시종들을 모두 신라로 돌려 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라 법흥왕이 노발대발하며 왕녀(시조부의 딸)를 돌려 달라고 하지만 가야 구형왕은 이미 부부 관계를 맺었고 자식까지 있는데 어떻게 돌려 줄 수 없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야 구형왕이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자 신라 법흥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가야를 침공하여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마모라(布那牟羅) 등 세 성을 장악하였다.
또한 가야 북쪽 국경의 성을 다섯 개 빼앗아 점령하였다. 이 문제로 가야 구형왕은 신라를 비난하며 백제와 왜지의 나라백제에 왕족을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백제의 성왕은 장수 윤귀(尹鬼), 마나갑배(馬那甲賠), 마도(馬道) 등을 보냈고, 왜의 나라백제는 한반도 백제에 근강모야를 보내 대책을 의논하였다. 가야, 나라백제, 한반도 백제(百濟) 삼국의 중신들은 서로 협력하여 신라에 빼앗긴 가야의 땅을 회복하기로 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내용을 전달했다.
이에 분노한 신라 법흥왕은 이사부에게 군사 기마병 4천과 보명 1천을 주어 가야 남쪽지역을 공략하여 점령하면서 강경하게 나왔지만 나라백제의 천황과 백제 성왕은 별다른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고, 왜지의 나라백제는 내정이 불안정 한데다가 잘게 쪼개져 있는 부족국가 행태로 되어 소왕국 형태인 데다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와 전쟁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해 10월에 고구려의 안장왕이 친히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가 소유한 요새 혈성을 공격해 함락시켜 버리자 백제의 성왕은 장수 연모(燕毛)에게 보병 1만과 기마병 3만을 주어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하도록 했으나 백제 장수 연모는 오곡평원에서 고구려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리면서 연모는 죽고 5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크게 패퇴하고 간신히 목숨만 살아 남아 도주하였다.
오곡평원에서 패배한 이후 백제군은 계속해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했고 그 같은 전쟁은 3년동안 계속되었다. 더구나 날이 갈수록 백제군은 점점 수세에 몰렸고, 결국 532년 7월에는 백제군이 북쪽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또 한번 크게 패하여 백제의 북쪽 영토는 고구려가 거의 점령하여 백제는 몰락 위기를 맞았다.
백제의 몰락은 백제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고이왕이 개척하고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광활한 영토를 확대하느라 수 많은 고난과 전쟁을 치루면서 줄기차게 이어져 오던 백제의 영토가 성왕 대에 이르러 축소되었으니 백제인들의 실망은 이루말 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백제에서는 왜()의 나라백제로 이주하는 백성들이 대거 발생했다.
특히 백제가 고구려와 3년동안의 오랜 전쟁을 하는 사이 3천의 군사를 이끌고 가야에 있던 나라백제 계체천황의 신하 근강모야는 자의적으로 구사모라성(久斯牟羅城)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가야는 백제와 신라에 도움을 요청해 근강모야의 군사를 몰라낼 것을 오청하자 한반도 백제군과 신라군이 연합하여 근강모야의 군사를 성안에 몰아넣고 공격을 가했다. 금강모야가 가야의 구사모라성을 장악한 것은 왜지의 나라백제 계체천황으로부터 받은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 계체천황은 가야땅 일부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협공을 가해오는데다가 나라백제에 머물고 있던 가야의 신하들이 근강모야의 행위를 따지고 나오자 계체천황은 근강모야에게 밀사를 보내 귀환할 것을 명령했지만 근강모야는 부하를 보내어 귀환을 거부했다. 이는 근강모야가 한반도 신라가 없앤 남가라(南加羅), 녹기탄(鹿己呑)을 부흥하여 임나(對馬島)에 합친 후에 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근강모야의 군사는 백제와 신라 연합군과 대치했지만 상황은 점점 근강모야에게 불리하게 몰아갔다. 만약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게 근강모야가 생포된다면 나라백제의 계체천황(繼體天皇)이 내린 밀명(음모)이 탄로할 것이고 그에 따른 백제와 신라의 비난이 만만치 않을터라 왜의 나라백제 계체천황은 불안한 나머지 다시 목협자(木頰子)를 근강모야에게 보내 돌아올 것을 거듭 종용하자 근강모야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는터라 구사모라성을 버리고 임나(對馬島)로 도주했다.
이때 구주(九州)의 축자국왕(筑紫國王 : 磐井王)과 나라백제의 계체천황은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또한 많은 병력이 임나(對馬島)를 거쳐 한반도에 가려면 선박이 필요한데, 구주의 북부에서 교통편을 제공하지 않으면 애초에 바다를 건널 수가 없었다.
이런데도 전쟁을 빌미로 군사를 일으킨 것은 계체천황의 위장작전이고, 실제는 구주(九州)와 나라백제를 타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계체천황이 나라백제의 종속을 거부하고 반역의 군사행동을 한 것이었다.
계체천황은 물부녹록화대련(物部麁鹿火大連)에게 축자국의 반정왕(磐井王)을 토벌하도록 하면서, 장문(長門) 지역은 계체천황이 다스리고 축자국 서쪽은 대장군 물부녹록화대련(勿部簏鹿火大連)이 뺏아서 다스리라고 했다. 이는 계체천황이 영토를 나누어 주며 나라백제를 없애려고 한 계략이었다
528년 대장군 물부녹록화대련(勿部簏鹿火大連)은 구주(九州) 축자국(筑紫國)의 반정왕(磐井王)과 일승일패를 거듭하면서 싸웠다. 그런데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곳은 어정반(御井郡 : 지금의 日本 久留米市)이었다. 임나에 침입한 근강모야의 6만 병력이 본주(本州)로 살아 돌아가지 못하고 529년 근강모야는 남해 안라(安羅)에 건너가서 고작 신라의 3천 군사를 보고 놀라 달아나자 신라군은 근강모야의 군사를 소탕하고 근강모야도 참살했다.
이렇게 하여 왜의 나라백제 계체천황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계체천황 자신도 죽임을 당하자 계체천황의 반란은 막을 내렸고 그는 531년 2월에 생을 마감했다. 계체천황이 죽은 후에 나라백제의 조정은 왕위 계승권 다툼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532년에 금관가야왕 김구해는 왕비와 그의 세 아들 노종, 무덕과 함께 구사모라성을 포위하기 있던 신라군에 항복했다. 가야땅을 차지하기 위한 나라백제 계체천황의 행동은 신라가 가야 땅을 차지하도록 도운 셈이었다.
540년 백제 성왕은 대장수 연희(燕喜)에게 병력 3만을 주어 고구려가 차지한 우산성을 공격하도록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551년에 백제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우산성을 다시 찾기 위해 3만의 기마병과 7천의 보병을 친히 이끌고 보복전에 나섰다. 이때 신라군이 전쟁에 합세하자 백제 성왕은 북쪽에서는 고구려와, 동쪽에서는 신라와 전쟁을 하는 상황이 되었다. 백제 성왕은 우선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한산성을 쳐서 되찾고 장수 달기에게 병력 1만을 주어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도록 하자 장수 달기는 도살성 함락에 성공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5만 병력이 다시 나서자 오히려 백제군은 도살성을 다시 고구려군에 빼앗겼고 백제 장수 달기는 다시 도살성을 탈환했다. 백제와 고구려군은 도살성을 놓고 뺐고 빼앗기는 혈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백제군은 도살성 점령에 성공했고,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도 백제군에게 대패하여 물러났다. 백제군은 그 여세를 몰아 다시 금현성을 공격했다.
금현성을 놓고 백제군과 고구려군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면서 고구려군은 수세에 몰렸고 결국 백제군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하자 백제 성왕은 그곳에 군사 3천명을 주둔시켰다.
또한 백제, 신라, 가야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며 하평양(下平壤 : 대동강 유역의 평양)까지 밀고 들어가면서 신라는 10개 군을 얻었고, 백제도 6개 군을 얻는 큰 전과를 올렸다. 고구려가 이렇듯 백제와 신라연합군에게 맥없이 무너진 것은 돌궐의 갑작스런 기습으로 신성이 포위되고 평양성이 위험에 처하는 어려운 상황이 초래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 고을(高屹)의 활약으로 돌궐군이 쫒겨나자 고구려군은 전투대열을 가다듬고 백제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신라는 마음을 바꾸어 고구려와 손을 잡고 되레 백제를 공격했다. 신라의 이런 갑작스런 배반으로 백제 성왕은 당혹하여 우왕좌왕 하였고, 그 사이 신라군은 한수 이북의 백제 땅을 차지하고 한성까지 장악해 버렸다.
궁지에 몰린 백제 성왕은 금지옥엽 같은 자신의 딸을 신라의 진흥왕의 소비로 내줘야 하는 굴욕적인 조치를 취하여 가까스로 신라의 맹렬한 공격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렸다. 눈물을 머금고 사비성으로 돌아온 백제 성왕은 복수의 칼을 갈았고, 왜의 나라백제에 왕손을 사신으로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자 왜왕이 이를 수락했다. 이때 나라백제는 천황(왕)이 있고 총독이 있는데 총독은 백제의 왕손이 맡았다.
554년 5월에 나라백제군(奈良百濟軍) 1천여 병력과 1백필의 군마가 바다를 건너 백제의 남해안에 도착하자 백제 성왕은 백제를 대장군 진수부(眞秀夫)에게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라고 지시하자 백제의 대장군 진수부는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야군과 함께 첫 공격 목표인 신라의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이 전쟁에 백제 성왕도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대장수 진수부와 함께 출전하여 목숨을 걸고 일전을 각오했다.
관산성은 소백산맥 동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반도 백제의 도성인 소부리(사비)까지는 한나절이면 당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곳에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백제에게는 크나 큰 위협이었다. 신라군이 언제 기습공격을 감행해 올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관산성의 신라군은 백제 성왕의 숨통을 노리는 창날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백제 성왕은 질풍과 같이 군대를 내몰아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의 휘하 병력은 왜군, 가야군, 백제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었다. 백제 성왕의 군사가 몰려오자 신라에서는 장수 우덕과 탐지가 대항하여 싸웠다. 이 전쟁에서 신라 장수 우덕과 탐지는 백제 성왕의 군사를 당해내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자 신라 삼년삼군(현재 보은)의 장수 도로가 군사를 이끌고 합세했다. 도로(都魯)는 노비 출신으로 체격이 건장하고 칼과 창술이 뛰어나 무사로 발탁되었다가 비장으로 삼년삼군의 장수로 적군을 방어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또한 한주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김무력은 가야 구형왕의 막내 아들로그가 이끌던 군대의 대다수는 가야군이었는데 그것은 백제의 연합군에 가담하고 있던 가야군을 몹시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었다. 가야군의 그런 혼란은 백제 성왕의 군사를 통솔하는 지휘체계를 약화시켰고 결국 백제 연합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졌다.
그러자 신라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야 구형왕의 막내아들 김무력과 백제의 태자 창이 이끌고 있던 백제 연합군의 선봉을 치고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백제 성왕은 군사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것도 어두운 밤길을 단지 50여 명의 호위병만 이끌고 나갔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백제 성왕이 밤에 험준한 산길을 이동하고 있다는 척후병에게 첩보를 입수한 신라 삼년삼군의 장수 도로는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 성왕이 이동하는 구천 산속에 매복하여 성왕과 호위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성왕과 호위병이 나타나자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비록 일당 백의 호위병이지만 50여 명으로 5천명의 군사를 당해낼 수 없었고, 결국 백제 성왕은 신라장수 도로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백제의 성왕을 생포한 신라장수 도로는 노비 출신의 장수로서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워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도로는 어떻게 해서든 백제 성왕의 목을 갖을려고 했고, 급기야 그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백제 성왕을 생포한 신라장수 도로는 비록 백제왕이 적국의 수장이긴 하지만 일단 국왕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엎드려 큰 절을 두 번 올리고 나서 말했다.
“비록 적군의 수장이긴 하나 대왕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절을 올린 것이옵니다. 하오나 대왕의 머리를 베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백제 성왕은 도로를 무섭게 노려보면서 대꾸했다.
“왕의 머리를 비천한 종의 손에 맡길 수 없다. 꼭 내 목을 베고 싶으면 높은 징수가 와서 베도록 하라.”
“대왕은 소장이 생포하였는데 다른 장수에게 대왕의 목을 베도록 하는 것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반드시 소장이 대왕의 목을 거둘 것이옵니다. 한번 더 청하오니 허락하시옵소서.”
하면서 도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백제 성왕은 버럭 화를 내며 호통을 치듯
“이놈! 내가 백제 국왕인줄 몰라서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거냐?”
하자 도로는
“우리 신라의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 해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사옵니다. 신라의 국법이 그러하니 억울한들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 ..............?”
백제 성왕은 딸을 신라의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낼 때 신라와 화친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다. 도로가 백제 성왕에게 맹세를 어겼다고 한 것은 바로 신라와 화친의 맹세와 약속을 어기고 관산성을 공격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도로는 다시 말했다.
“소장의 말이 틀렸사옵니까?”
“ .................”
백제 성왕은 할 말이 없는 듯 의자에 걸터 앉은 채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도로의 앞에 던지고는 잠시 하늘을 우르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하늘이시여! 천지신명께서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자리에 앉도록 하셨읍니까.. 으흐흑...”
그렇게 탄식하고 백제 성왕은 목을 도로 앞에 내밀고 말했다.
“나는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자 어서 내 목을 베거라.”
도로는 성왕의 말이 끝나자 성왕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부디 극락왕생 하시옵소서. 대왕의 명복을 빌겠사옵니다.”
도로(都魯)는 칼을 뽑아 높이 치켜 들었다. 도로의 손에 쥔 예리한 칼날의 섬광이 허공에 두어 바퀴 원을 그리면서 얏! 하는 소리와 함께 성왕의 목을 내리쳤다. 잘라진 성왕의 목에선 시뻘건 피가 도로의 옷에 튀었고 땅바닥을 적시며 흘러 내렸다. 도로는 성왕의 잘린 시신을 부하를 시켜 서라벌에 보냈다. 백제 성왕의 시신을 접수한 한반도 신라 조정에서는 성왕의 두개골을 수습하여 도당이 있는 북청의 제단 밑에 묻고 나머지 뼈는 말에 실어 한반도 백제에 보냈다.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 잡혀 참수되었다는 소식이 백제군에게 전해지자 백제의 군사들은 모두 비통해 하며 흐느껴 울었고, 군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전의를 상실한 채 신라군과 싸우다가 퇴각했다. 그러자 신라군은 달아나는 백제군의 뒤를 후리쳐 3만에 가까운 군사들을 몰살시켰고, 백제의 태자 창도 신라군에 포위되어 생포될 위기에 놓였다.
그때 가야군을 이끌고 있는 궁술에 능한 축자국의 왕이 신라군의 선봉에 선 장수를 활로 쏘아 말에서 넘어뜨리자 군사들은 장수에게 모여 들며 우왕좌왕 하자 이틈을 타서 달려가 태자 창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는 엄청난 전쟁 후유증을 남겼다.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가야, 왜, 백제를 하나로 묶어 이끌 수 있는 영도자를 잃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다음으로는 3만의 정예군을 잃은 탓에 향후에는 방어전 일변도의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가까스로 형성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이 첫 싸움에서 완전히 대패하는 바람에 연합군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지고 회의감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태자 창은 개인적으로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고 장수로서는 패전의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야 했고, 그런 자책감을 이기지 못해 태자 창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 하였지만 신하들의 강한 만류로 출가를 포기했다. 그러나 성왕이 죽은 후 3년동안 태자 창은 왕위를 비워두고 참회의 나날을 보내었다.
백제 태자 창이 나이 설흔살이 되던 해 봄 어느날 신하들이 태자 창에게 왕위를 하루 속히 승계할 것을 간청했다.
“태자 저하! 국왕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두시는 것은 아니되옵니다. 속히 왕위에 오르시옵소서.”
“그러하옵니다. 지금 고구려는 우리 백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신라 역시 우리 백제와 원수가 된 터이라 국왕의 자리를 비워두심은 이들에게 침공의 빌미가 될 수도 있사옵니다. 하오니 왕위에 오르시옵소서.”
“소신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왕위에 오르시옵소서.”
“왕위에 오르시옵소서.”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자 태자 창은 부왕의 삼년 상을 치르고 나서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하였는데 이 분이 백제 위덕왕이다. 이때가 554년 3월이었다. 525년 태어났으며 성왕이 전사하자 30살의 나이로 국정을 맡았다.
위덕왕은 등극하자 곧바로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야 했다. 고구려는 3만의 병력으로 단숨에 웅진성까지 쳐들어와 백제를 위협했다. 백제의 옛 도읍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웅진성은 소부리군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백제의 심장부와 같은 이곳에 고구려가 한 걸음에 달려 왔으니 백제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덕왕은 친히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필사적인 총력전을 펼쳐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격퇴시켰지만 고구려가 다시 침입할 것을 염려하여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특히 고구려는 신라와 연합전선으로 공격해 올 수도 있다고 판단하자 백제가 의지할 곳은 왜지의 나라백제와 가야 밖에 없었다. 위덕왕은 그런 판단으로 아우인 계를 나라백제에 밀사로 보내자 계는 나라백제의 흠명천황을 만나 원군을 요청했고, 병권을 쥐고 있던 소아도목(蘇我稻目)의 동의를 얻어 3천여 명의 병력을 얻어 돌아왔다.
백제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신라와 고구려의 협공을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백제, 나라백제, 가야의 공동 대응이 절실한 입장이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몰락한 가야의 재건이 필요했다. 가야의 힘이 강해지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신라가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거기에 나라백제군까지 가세하면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주력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왜지의 나라백제도 역시 가야의 몰락으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터이라 가야 재건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백제 위덕왕은 아우인 계(計)를 왜에 파견하여 나라백제(奈良百濟)와 함께 가야를 복원시키는 제의를 하였고, 나라백제 조정에서는 이에 호응했던 것이다. 물론 백제 위덕왕은 가야쪽에도 밀사를 보내어 신라에 빼앗긴 가야땅을 되찾을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신라를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562년 7월 백제 위덕왕은 장수 찬영(贊永)에게 3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선제 공격하도록 했다. 이때 가야는 신라의 뒤를 후리쳤다. 그러자 백제군은 신라의 반격에 밀려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신라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군을 물리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가야를 공격했다. 가야를 정복할 기회를 엿보며 침략의 명분을 찾고 있던 한반도 신라로서는 가야가 먼저 공격해 왔으니 더 이상 좋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장수 사다함을 앞세워 4만의 군사로 순식간에 가야 전역을 점령해 버리자 그동안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던 가야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가야가 몰락하자 왜지의 나라백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야와 무역을 기반으로 자국의 식량부족을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야의 멸망은 나라백제로서는 자칫 식량 부족에 허덕여야 할 위기상황을 맞은 것이다. 가야의 멸망으로 나라백제는 물론 왜의 다른 나라들(소왕국)도 졸지에 식량난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식량난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라백제는 563년 7월, 백제에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 공략에 나섰다.
그동안 백제 위덕왕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가야의 재건이 아니라 나라백제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신라를 침공하는 일이었다. 백제군과 왜의 나라백제군 5만의 연합군은 한반도 신라를 공격했지만 나라백제군의 장수 기남마려(紀男麻呂)는 신라군의 전략에 말려 1만여 명의 군사를 잃고 백제 땅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 뒤로 나라백제와 백제는 섣불리 신라를 공격하지 못했고, 신라 역시 나라백제와 연합한 백제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으며, 고구려와 연합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백제 위덕왕은 고구려와 신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전쟁 위협이 사라지자 백제 위덕왕은 외교 경로를 통해 고구려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무렵 중국대륙에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남조에선 진패선이 557년 양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세웠고 북조에서도 557년 서위를 무너트린 우문 선비의 북주와 동위를 차지한 한족 고씨의 북제(北薺)가 양립하고 있었다. 백제는 남진과 북제 두 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어 외교적 안정을 꾀하였고, 577년 북주(北周 : 西魏의 실권자인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이 세운 나라)는 북제(北齊)를 멸망시켰고, 581년에 북주(北周)의 외척인 양견이 주(周)나라 왕실을 무너뜨리고 수(隨)나라를 세우자 백제 위덕왕은 수나라의 왕 양견에게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자고 제의하자 양견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589년에 수나라의 왕 양견이 진(陳)나라를 몰락시키고 중국대륙을 통일하자 백제 위덕왕은 수나라를 충동질하여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이끌어 낸다는 계략을 세웠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몰락시킬 당시 수나라의 전함 한 대가 탐라(현재 제주도)에 표류하자 백제 위덕왕은 그들의 배를 수리해 주고 선물까지 가득 안겨 돌려 보냈다.
이 일로 수나라 왕 양견은 백제를 매우 신임하고 굳이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유도한다는 계획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정황을 살피며 수나라 왕 양견에게 그런 의지를 전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백제 위덕왕은 598년에 수나라와 고구려가 중국대륙에서 요동 땅을 놓고 전쟁을 벌이자 백제 위덕왕은 장수 왕변나(王邊那)를 수나라의 왕 양견에게 보내어 고구려는 예의가 없고 오만한 나라라고 비난하면서 만약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백제가 군사지원을 하여 도와주겠다고 제의를 하자 수나라 왕 양견은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터이라 다시 고구려를 침공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백제 위덕왕의 제의를 거절했다.
한편 백제가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충동질하고 군사지원을 하겠다고 한 정보를 입수한 고구려는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 국경을 넘어 와 곡식을 강탈하는 등 노략질을 하며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왔다. 이는 백제의 태도를 시험삼아 한번 떠보기 위해서였다.
( 제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