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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사람들의 신앙(행 17:10-15)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려면 항상 우리의 삶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모셔들이면 우리가 머무는 곳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분주하게 살아도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소리치고 크리스챤이라고 이야기해도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 이곳이 바로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평안과 하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에 보면 마태, 마가, 누가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던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세 사람은 동일하게 한 마디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갔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때에는 주와 함께 죽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칼을 빼어 대적할 만큼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멀찍이 뒤따라 간 베드로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주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를 멀찍이 따라갔더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늘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과 함께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 행동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생각이 달라집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삶의 양태가 달라집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을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평안과 자유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곤고할 때에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면서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승리의 노래를 부를 그날을 생각하면서 믿음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영광된 그날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완전하게 세워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내게 주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십시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사도 바울은 늘 어렵고 힘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누가 가라고 파송한 것도 아닌데,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거기 고난과 핍박이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그곳을 갑니다.
그는 늘 핍박가운데서 쫓겨다니듯이 그렇게 이곳저곳을 다녔습니다. 왭니까? 오직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바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복음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면서 여러분의 심령에 복음의 열정이 뜨겁게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고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 일 후에 그는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이곳에까지 쫓아옵니다.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다가 소요를 일으켜서 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바울과 믿음의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결국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서쪽으로 75km정도 떨어져 있는 베뢰아로 갑니다. 베뢰아에 온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에 대하여 짧은 구절이지만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다시 한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에 보면 우리는 베뢰아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오늘 우리도 베뢰아 성도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베뢰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리고 베뢰아 성도들에게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은 무엇입니까?
1. 베뢰아 사람들은 더 너그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너그러워서…" ‘너그럽다’는 말은 “마음이 넓고 크다”는 뜻이고, 개역성경에서는 ‘신사적이다’는 말로 번역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바울의 전도할 때, 베뢰아인들이 좀 더 ‘편협하지 않고 객관적인 자세’로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나이가 들수록 자기 생각이 고착화되어 더 심화됩니다. 편견이란? 편협한 생각(치우친)으로 예컨대,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사람이 싸우고 있다면 누가 잘못했겠어요? 감정적으로는 다 일본사람이 잘못했을 거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일본사람에 대한 편견입니다. 그러므로 가서 실상을 들어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선입견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미리 가진 생각으로 예컨대, 혈액형에 대한 선입견(A형은 어떻고,,), 지역에 대한 선입견(충청도사람, 전라도사람, 경상도사람) 보통, 충청도사람이 언행이 ‘느리다’라고 하지만,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실례로, 예전에 ‘보신탕을 드실 줄 아시나요?’ 충청도말로 하면 어떻게 하는 지 아십니까? 개혀? 간단합니다. ‘춤 같이 추시겠습니까?’ 충청도말로 하면? 출 텨? ‘돌아가셨다’ 충청도말로? 갔 슈!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고정관념이란? 마치 못처럼 박혀있는 생각들, 이런 고정관념은 오랜생활속에 굳어져 버린 생각입니다. 이 고정관념이 신앙 안에서 있으면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들을) 때에는 이런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좀 더 ‘너그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좀 더 편협하지 않고 객관적인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베뢰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너그러운 마음을 신앙 안에서 해석하면 예수님의 마음인 온유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유는 마냥 부드럽기만 한 나약함이나 무능이 가져온 비굴한 상태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강한 자의 성품이자 ‘통제된 강력한 힘’입니다.
힘이 아무리 강해도 통제되지 않으면 그저 파괴하는 힘, 즉 폭력이 됩니다. 바람, 파도, 핵에너지 등이 통제되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지만 잘 통제되면 생활에 꼭 필요한 에너지가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처럼 온유는 일정한 방향, 바른 목적으로 힘을 통제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선 타고난 힘과 재능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가진 능력을 어떻게 잘 통제해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는 걸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잠 16:32)“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모세는 본래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의 강함이 통제되지 못하자 충동적으로 애굽인을 죽이고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이후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후, 나이 들고 힘이 없어진 그때 하나님은 비로소 출애굽 사명을 맡겼습니다.
오랜 광야 생활과 하나님의 연단으로 자신의 강한 성격을 통제할 수 있게 된 모세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말씀으로 훈련되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자로 재봅니다. 그리고 말씀이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은 것같아도 말씀이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앞에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신앙생활에 가장 큰 장애가 내안에 있는 나자신입니다. 내 생각, 내 욕심, 이것이 옛사람의 속성입니다. 이 옛사람의 속성을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믿음으로 못박아야 새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더 너그러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도전으로 다가와야만 합니다. 양문교회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대로 안된다고 너무 앞서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내 생각을 넘어선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더 너그러운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람 참 멋있다'라는 칭찬을 받는 인격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복음적인 신사가 되어서 하나님께 사랑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양문교회 성도들이 베뢰아 교인들보다 더 너그러운 모습을 가지므로 아름답고 멋진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니까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들었다. 여러분,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여기에서 '간절'이라는 말은 헬라어에 보면 '열망하여 사모한다, 심히 매우 좋아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말씀을 열망하면서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심히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들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도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집중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서 집중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흔히들 어린아이와 어른은 기억력의 차이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어린아이는 한번만 들어도 안 잊어버리는데 어른들은 듣자마자 잊어버립니다. 노인들이 잔소리가 많은 이유도 자기가 한 말을 곧잘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30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한 것을 또 말합니다. 그런데 교육학에서는 노인과 어린아이의 기억력에는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기억력은 마찬가지인데 어린아이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기때문에 무슨 말을 듣든지 집중적으로 듣고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듣습니다. 그러니까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기억을 잘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해서 들을 때부터 절반 밖에는 안 듣는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딴 생각을 하면서 듣습니다. 다른 것을 상상하면서 듣습니다. 자기 경험으로 비판하면서 듣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이 잘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절반은 딴 데 있기 때문에 집중이 안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에게서는 이런 절반의 소유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간절히 사모하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까? 시편 119편 131절에서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마음의 자세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편의 기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으면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는 40절에서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들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의미는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는 마음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갓난아이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젖은 생명입니다. 단순히 먹고 즐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갓난아이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젖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를 분명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세상의 인생 철학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강의를 듣는 것처럼 듣고 즐기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죽고 사느냐의 문제로 서야 합니다. 나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3. 베뢰아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 말씀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약속의 말씀으로 임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을 나의 것으로 믿고 받아 들일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의 태도가 너무 중요합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하나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더니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추상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내 안에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 말씀이 우리가운데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고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축복의 말씀으로 임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이 세상의 어떤 베스트셀러도 우리의 인생에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해 주지는 못합니다. 내 인생을 바꾸고, 내 가정을 바꾸고, 이 민족을 바꾸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 한 말씀 속에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된 인간에게 허락하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약속된 이 모든 약속이 다 저와 여러분들의 것이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을 애독하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준수하라.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사랑하라.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애독하고, 성경을 준수하고, 성경을 사랑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약속이 저와 여러분의 소유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보십시오. 베뢰아 성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상고’했다는 것은, 성경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복음을 듣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매일 성경을 상고하면서 그것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 위험한 사람은 성경을 덮어놓고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왜, 어떻게’ 믿는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위태위태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성경과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알기 위해 연구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지 아니하면 믿어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져야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되고 들어도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날마다 즐겨 읽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밥을 먹는데 한 달 먹을 분량을 하루에 다 먹었다고 해서 한 달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했듯이 우리는 매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발길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모스 선지자는 이 시대를 향해서 경고의 말씀을 전합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목말라 하고 굶주리는 것은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고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육신이 기갈된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된 것이 더 비참하고 괴롭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갈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요, 악한 대적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때 마음껏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이 침침해서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마음껏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귀가 어두워서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나와 내 자자손손이 주 앞에서 복 받는 비결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고,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목사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져야 믿음이 성장하고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은혜와 체험이 저와 여러분에게 날마다 시간마다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3절에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도 베뢰아 성도들을 본받아서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편견이 없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사모하고, 날마다 그 말씀을 상고하며 남을 배려해 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제 우리들의 신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변화없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살아가시렵니까? 이제는 좀 달라진, 좀 더 성숙된 신앙으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점점 더 힘을 가지고 더 많이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는 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뜨거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