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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백성의 삶 (수 8:30-31)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오늘은 "천국백성의 삶"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감리교를 만든 존 웨슬레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존 웨슬레가 기도하다가 잠이 들어 꿈에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서기 전에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천사에게 “저 위대한 메도디스트 운동을 하던 감리교인들이 얼마나 천국에 들어와 있습니까?” 그러자 천사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명부를 한참 뒤지더니 “미안하지만 감리교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웨슬레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그럼 내 신앙이 잘못된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영광스런 칼빈의 5대 교리를 강조하던 장로교인들이 다 천국에 온 모양이지요? 그들은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사는 한참을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장로교인은 한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웨슬레는 “그렇다면 아무래도 우리 종교개혁은 대단한 실수였나 보군요. 그러면 천주교인들이 다 온 모양인데 그들은 얼마나 들어와 있습니까?” 이번에도 천사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웨슬레는 천사의 대답에 큰소리로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왔단 말이오?” 천사는 방긋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 천국에는 감리교인도 장로교인도 천주교인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만 와 있습니다.” 그러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어도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풍성하게 누리고 어떤 그렇지 못하고 삽니다. 천국백성으로 합당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아이성 전쟁 직후 이스라엘이 에발산에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하며 두 산에 나누어 서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으로 맹세하며 약속한 말씀입니다. 이 일은 신명기 27장과 28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꼭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가나안은 약속의 땅으로 그 땅의 주인이 되려면 하나님과 약속한 대로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두려워하는 거룩한 삶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성을 정복한 후에 더 깊숙이 북쪽으로 30km지점으로 나가 에발산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약속했습니다.
즉 이 약속을 어기면 가나안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이걸 구원에서 취소된다고 적용하면 교리적으로 잘못된 주장이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늘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생활의 기본입니다. 누구를 위한 제단이었습니까? 30-31절에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아주 조건이 특별합니다. 귀한 진리가 담겨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위한 제단이 아닙니다. 예배하면 은혜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은혜 받기 위해서 예배하면 예배의 목적에 위배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예배해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분석해 보면 은혜 받으려는 마음도 일종의 욕망입니다. 나쁜 욕망이 아니지만 한 편으로 이 마음이 온갖 문제를 일으킵니다. 체험이 없으면 불만을 품게 되고 무언가 바라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마음이 활짝 피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서 주시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해주셔야 화평한 마음으로 나갈지 이 욕망들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고 찬양을 방해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18:3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우리를 택해 주시고 거룩하게 해주시고 자녀 되게 하시고 영광스런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자녀 삼아주시고 예수 안에서 영광스럽게 해주신 것만 생각해도 찬송이 나옵니다. 이처럼 어린이처럼 하나님을 나의 전부로 삼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되지 않으면 그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2.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어야 합니다.
어디에 쌓은 제단입니까? 30절 하 반절에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것 역시 특별합니다. 거기에는 나란히 에발산과 그리심산이 있습니다. 에발산은 저주의 산이고 그리심산은 축복의 산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제단은 에발산에만 쌓았습니다. 축복의 그리심산이 아니라 왜 에발산이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성경학자 매튜헨리는 ‘이는 율법으로는 우리가 마땅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며 그리고 우리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매튜헨리는 상당히 은혜로운 학자이기 때문에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성지를 소개한 사진을 보면 그리심산은 푸른 풀로 가득한데 에발산은 풀 한 포기 없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바위과 자갈로만 된 산이었습니다. 지진이라도 지나간 듯 폐허를 보는 듯했습니다. 이게 바로 죄악된 우리들의 원래 모습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고 생명 한 점도 없는 황폐한 심령인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단을 쌓았듯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날마다 사모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황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죽는다는 절실한 마음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세요. 천국은 게으른 자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 노래 기억하시지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우리가 어릴 때 불렀던 윤석중 작사, 박태준 작곡의 추억의 노래입니다. 이 분들이 다 예수 믿는 분들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복음적인지 하늘나라, 땅의 나라 다 통하는 노래입니다. 게으르면 천국의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 없으면 에발산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말씀 안에서 변화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 특별한 규정이 보입니다. 31절에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어야 합니다.
여기 율법책이란 출22:25에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했고, 또 신27:6에는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했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정으로 쪼다 보면 돌 위에 올라가게 되어 하체로 인해 제단이 부정하게 되고, 철은 전쟁의 상징으로 거룩함에 합당하지 않으며, 이미 썼던 헌 돌은 새로운 은혜를 상징하기에 합당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이 부정한 마음, 악한 마음, 불신의 마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봐주시지만 장성할 때가 되었는데도 어린 짓을 하면 봐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5:21에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했고, 롬12:1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어도 옛 날로 돌아가면 그 은혜 다 쏟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벧후2:20-22에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했습니다.
그 심령에 타오르는 정죄의 불길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현세에서 경험하는 1차 마음의 지옥입니다. 답답하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666을 받은 자처럼 심령에서 끝없는 고통과 타오르는 불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666은 모든 죄악의 총체를 가리킨다.' 라고 했습니다. 보혈의 공로를 모르거나 회개하지 않거나 그것이 그렇게 두려운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이런 괴로움이 올 수 있지만 그러나 성도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4. 몸과 마음을 드리고 속죄의 은총을 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31절 하 반절에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신27:7에 보면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번제는 전체를 태워 드리는 헌신의 제사요,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 그리고 이웃과 화목의 은혜를 감사하며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제사입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세요. 그리고 화목제와 같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을 날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롬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구원해 주신 은혜를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예수 안에서 허락하신 온갖 은총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누리는 비밀입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아버지의 용납하시는 사랑과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 받았음을 믿고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더라도 용서 받은 그 화평의 믿음 안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확신이 없으면 은혜가 사라집니다.
이 누리는 믿음의 훈련을 열심히 하세요. 그 뿐 아니라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자녀 삼아주시고 하늘의 복을 주신 것을 영광의 찬송으로 영광 돌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1.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2.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같은 이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저 도적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3.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 솟듯 하는 피권세 한없이 있도다 한없이 있도다 한없이 있도다 샘 솟듯 하는 피권세 한없이 있도다 4. 날 정케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살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5. 이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노래로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이와 같은 찬양과 영광이 바로 그 복을 누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 몸과 마음을 다 드려 날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도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발산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며 약속의 땅의 백성으로서 살기로 약속했듯이, 우리 모두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예배하고, 사모하고 갈망하고 가까이하고, 늘 회개하며 정결하게 하고, 그리고 날마다 화평한 마음으로 구속의 은총을 찬양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풍성함을 영원히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여!! 삿 2장에 길갈에서 보김에 온 여호와의 사자의 책망을 듣고 소리 높여 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가슴 치며 회개하게 하소서. 초대교회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있었던 그 성령의 능력을 주옵소서.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메도디스트운동을 일으킨 요한 웨슬레와 같이, 1904년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과 같이, 1905년 인도 카시에서 일어난 대부흥과 같이, 1906년 미국 아주사 거리의 마굿간에서 일어나 대부흥처럼, 그리고 1907년 한국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처럼 우리에게도 부흥의 불길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국백성의 마음 (수 8:32-35)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오늘은 "천국백성의 마음"이라는 제목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 했던 말씀처럼 천국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벗어야 할 마음의 껍질이 있다면 몇 겹이나 될까요? 아마 수십 수백 겹도 더 될 것입니다.
가재 게 새우 같은 갑각류는 크는 과정에서 탈피를 수없이 반복합니다.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있어도 되겠지만 몸이 커가기 때문에 탈피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어류들이 탈피하지 못하면 죽는 일도 발생합니다. 우리는 구경이지만 그들로서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순간입니다. 몸은 커 가는데 벗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혹은 벗었는데 속히 단단해지지 못해 물렁거리면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도 성장하려면 우리 생각이 수없이 바뀌어야 합니다. 말씀의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바뀐 후에는 속히 견고해져야지 견고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어떤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사람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옛날 옳지도 않은 그 케케묵은 이야기를 지금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는데 그 사람의 믿음은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발산에서 제사한 후에 그 돌제단에 율법을 기록하고 또 낭독하면서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맹세하는 장면입니다. 당시에는 음향기가 없었기에 앞에서 한 마디하면 옆 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그대로 외치고 또 다른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다시 외치고 또 다시 외치며 메아리쳐 가는 그 영광스런 광경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한 것은 한 말씀도 잊지 않고 그 말씀을 생명으로 알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처럼 천국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고 또 새기고, 그 말씀을 붙들고 또 붙들고, 지키고 또 지키며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말씀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백성으로서 합당한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내 생각과 주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신27:2에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4절에도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그랬습니다. 글을 쓰려면 돌들이 완전히 감추어져 평평한 벽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생각과 주장도 이렇게 감추어져야 합니다. 석회 바른 벽처럼 하얀 백지처럼 어린이의 마음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이 내 생각과 내 주장이 우리에게 달라붙어 얼마나 괴롭히는지 그 주장이 우리를 복 받지 못하게 합니다. 원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이 원수입니다. 그래서 롬8:5-8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했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으려면 순종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고난을 통해서 깨닫거나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히5:8-9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이 필요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 모습으로 우리의 모본이 되셨습니다.
2. 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32절에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석회로 하나 된 돌에 율법을 기록했습니다. 율법을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 깊이 새기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넘어진 것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잠3:1-4에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마음에 새기려면 시1:2의 말씀처럼 늘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후3:3에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했습니다.
시19:7-11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새긴 사람만이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복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3. 말씀에 대한 생사의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33-35절에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이 언약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아직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이 언약을 맺을까요? 생사의 각오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해병대가 자빈박 전투에서 크게 당한 것도 아군 관할인 안전지대인 줄 알고 통과하다가 월맹군의 매복에 걸렸습니다. 그 후 자빈동 전투에서 몇 배로 갚지만 이스라엘은 완전 적지였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거류민까지 함께 언약했을까요? 이런 과정 없이 기업 주면 진짜 속된 말로 개판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있는 사람들을 일군 세워야지 믿음 없는 사람 큰 직분 주면 그 교회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정신 차려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이 언약은 가나안의 주인으로서 사느냐? 쫓기느냐? 축복이냐? 저주냐? 하는 생과 사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중심으로 좌우로 절반은 축복의 산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저주의 산인 에발 산 앞에 서서 맹세하면서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편에 설 건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5:31-33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하셨습니다.
율법 강조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내 심령이 죽는다는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레위 제사장들처럼 말씀의 칼날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말2:5-6에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낭독한 말씀은 신명기 27-28장의 말씀이었습니다. 27장은 예를 들면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15-17절) 이처럼 각 항목마다 아멘으로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28장에는 그 말씀을 지키는 자와 거역하는 자가 받을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조금만 읽어드리면 신28:1-2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했습니다.
그런데 14구절이 축복의 말씀이고, 54절은 저주의 말씀입니다. 저주가 훨씬 많지만 영문에서 부정+부정은 긍정인 것과 같이 저주를 강조한 것은 한 사람도 저주 받지 말고 축복 받으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본문 33절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대로" 했다고 했습니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30:15-16에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하면서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19-20절)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인간의 생각이 가득하다면 석회를 바르듯 무가치하고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누가 미혹하고 손짓한다 해도 나는 말씀 떠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 붙들어 천국의 기업을 이 땅에서부터 온전히 누릴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