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떨어진 사람들로 하여금 천하의 명승지 제주도를 관리하게 한 조물주의 뜻을 헤아려
보며 찾아간 곳은 서귀포시 강정(江汀)마을의 구럼비 해안. 구럼비 바위.
한쪽(해군측)은 폭파한 후 그 자리에 기지를 세우기 위해 구럼비 폄하에 올인 중이고 또
한쪽은 구럼비 보존을 위해 결사적인 곳이다.
1.2km 용암 너럭바위 구럼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스포트를 받고 있는 것일까.
제주어(語)로 녹나뭇과에 속한 상록 활엽교목인 까마귀쪽나무를 뜻한다는 구럼비.
그러나 강정마을 해안의 구럼비는 이와 전혀 다른 어원을 갖고 있단다.
바닷가에 아홉 채의 초가 암자가 있었다 해서 '구암비'(九庵比)였는데 변음된 이름이며
해군이 주장하는 제주해안 도처의 구럼비 용암들과는 전혀 다른 천혜의 유산이라는 것.
화순(안덕면)과 위미(남원읍) 등이 후보지로 거론되었을 뿐 지형적으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구럼비로 급선회 하여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제주도 전역에 걸쳐서 날로 더욱 파괴일로에 있는 무수한 황금자연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도 왜 구럼비 바위의 보존을 위해서만 목숨이라도 걸겠다는 것일까.
이 와중에도 제주 해안의 명물 중 명물이라는 구럼비 바위는 폭약에 찢기기 시작하였고
서서히 사라져 가는 중이다.
그래도, 신부와 수녀는 폭파용 화약의 운반과 공사 차량의 출입을 저지하겠노라고 길을
점유 중이고 경찰은 그들을 들어 옮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처음 보는 늙은이의 눈에는 일촉즉발의 위기, 전운이 감도는 듯 한데도 마치 익숙해진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할까.
많은 충돌과 연행 및 구속, 법정싸움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끝에 서로 터득한 지혜일까.
우선, 제주시에서 시작한 수소문의 결과에 적잖이 놀랐다.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별무관심이며 내 친구 시인까지도
은어맛이 좋은 해안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애매모호한 제주인의 정체성 탓일까.
강정마을 주민들까지도 다를 것 없다.
7년 세월에 지쳤고 체념했거나 실리를 충분히 챙겼기 때문인가.
내가 만난 마을민들은 하나같이 방관자들이다.
추위에 고생하는 젊은이들이 안쓰럽다는 노년층과 노동당(소위 종북자를 뜻할 것이다)
으로 보는 이도 있기는 하나 그들까지도 관심 없다는 시선이다.
구럼비의 사수를 부르짖고 있는 이들은 소수의 지역단체 구성원들을 제외하면 구럼비
바위에 매료되었다는 외지인들로 보인다.
그들은 온 마을이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고 앞에서 말했듯이 자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거나 귀중한 유산을 지킬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것인가.
구럼비 바위 사수의 의지도 두 갈래로 나뉘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해군기지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구럼비 바위는 보존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므로 다른
후보지를 물색해야 한다는 쪽과 군사기지 없는 평화의 섬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1함대(동해시)와 2함대(평택시)가 양 해를 지킨다면 남단을 지킬 함대도 있어야 한다."
"육국과 공군에 열세인 해군의 몸불리기에 왜 제물이 되어야 하는가.
해군함대에 이어 전투비행단이 들어설 것이며 평화로운 섬은 물 건너 가고 만다.
우리가 왜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해군기지를 우리의 평화로운 섬에 설립해야 하는가"
전자도 후자도 맞는 말이다.
특히 후자는 이미 현실이다.
동해의 제1함대는 자기네의 아파트는 물론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여러 마을 주민들을
몰아냈으며 서해의 제2함대도, 남해의 작전사령부도 모두 그랬는데 강정만은 예외?
현장인 강정천 강정교 앞에 도착해 처음 만난 사람은 김군으로 통한다는 24세 처녀.
다리 입구 난간에 기대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그녀는 4년 전(20세때) 제주 여행 중
들렀다가 반해버린 구럼비 바위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 곳에 살고 있단다.
앳된 얼굴과 달리 결의가 찬 말마디마디에 놀라웠는데 잠시 후에 벽보와 팸플릿을 통해
업무방해와 경찰 폭행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3개월여 만에 석방된 김은혜임을 알았다.
"동영상에서 찍히지 않았다고 때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는 해괴한 유죄판결.
증거주의는 어디로 가고 '정황'으로 판결한 판사의 눈에는 23세(당시)의 가녀린 여인이
힘센 경관을 폭행한 것으로 보였나.
유죄판결로 법정구속함으로서 그녀를 더욱 강하게 연단된 투사로 만들었다.
그녀의 출옥 일성이 "판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가 여기에서 함께 살아야 할 이유를
더 절실하게 느낀 시간이었다"
마을에서 삯일을 하여 생활하며 구럼비 바위 지키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는 그녀가 과연
구럼비 바위의 잔다르크(Jeanne d’Arc)가 될 수 있을까.
"구럼비 바위에 매료되어 평택에서 가족을 대동하고 이사왔는데 구럼비 바위가 사라져
가도록 방관할 수 있느냐"는 한 젊은 부인의 의지는 더욱 강렬하고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 바위를 지켜내 기어코 평화마을을 만들겠다며 자기네의 승리를 확신하는 여인.
집회 장소로 가는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보는 늙은 길손의 마음이 착잡했다.
문제의 현장 한복판에 늘 서있는 백수(白鬚)의 문정현 신부도 젊은이들과 함께 떠났다.
확실한 가톨릭교도는 신부와 수녀일 뿐 내가 만난 젊은이들의 신앙도 다양하다.
상이한 종교가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그들이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가 상당한
격려가 되리라.
"나는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쓰느라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원합니다"(플래카드)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 안에서 뜨개질을 하며 1인 시위 중인 강정천 다리 위의 김은혜(위)
아래는 그녀에 대한 벽보
위의 뒤에 보이는 섬은 서건도(좌)와 범섬(우)
강정천 ~ 구럼비 바위(위)
강정천변과 공사장으로 통하는 도로변(아래)
나무들이 입고 있는 뜨개옷과 편물지붕 벽걸이 등 장식물들은 시위자들이 뜨거나 전국에서 보내온 것들이란다.
강정천변은 제주 올래길의 1코스란다.
시멘트 벽, 정자의 기둥과 바닥과 의자, 우체통과 안내판 등에는 깨알같은 낙서로 여백이 없다.
여백을 놔두지 않기로는 스페인이 우리보다 더한다.
그러나 그들의 낙서가 난해한 그림인데 반해 우리의 낙서는 읽기도 민망한 저속한 내용들이다.
우리의 민도(民度)가 읽혀지는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