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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빈 구도소설 대행스님의 대담집「道」책 풀이
즉 그러니까 김정빈 구도소설 대행스님의 대담집「道」책(신앙수기 ‘103. 道를 통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편 130-132페이지【「道」책은 약 32년 전에 읽었음】참조)의 주인공인 대행스님《《《인터넷 다음 카페글「한마음 선원 대행스님」‘1. 유년시절’ 편【소녀 대행이 밤조차 아늑한 위안이 된 것은 바로 내면의 소리 덕분이었다. 버림 받은 고독한 아홉 살 소녀의 내면에서 ★참 자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소녀는 그 내면의 목소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한한 애정을 보내고 있었다.
“아빠....”
견딜 수 없는 고독감에 그녀는 소나무 등걸을 쓸어안고 나직이 뇌었다. 뼈져린 고독의 한 영혼에게 위로의 목소리로 다가오는 그 미지의 존재에 대해서 소녀는 그저 ‘아빠’라고 불렀다. 육신의 아빠로부터 버림받은 한 소녀의 혼은 이제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불생불멸하며 영원한 아빠★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2. 깨달음’ 편【1945. 8. 15 해방이 되기 전, 그러니까 그녀의 나이 열여덟 살이 되던 때였다. 항상 내면의 ‘아빠’의 인도를 받던 그녀에게 벼락같은 의식의 각성이 열려왔다. 그전에도 항상 감응은 왔지만 이처럼 시원한 열림은 아니었다.
★어느 날 ‘아빠’가 물었다.★
“네가 일할 때는 내가 너와 하나가 되고, 일을 안 할 때는 네가 나와 하나가 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그리고 또 이렇게 물었다.
“자(子)가 부(父) 앞으로 가면 부와 하나가 되고, 부가 자 앞으로 오면 자와 하나가 되느니라, 무슨 까닭이냐?”
대행이 대답했다.
“마음에는 체가 없으니, 마음이라는 것은 이름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 부와 자는 둘이 아닙니다.”
그날은 퍽 추운 한 겨울이었다. ★다시 ‘아빠’가 물었다.★
“여름이 옳은 거냐? 겨울이 옳은 거냐? 겨울이 좋으냐? 여름이 좋으냐?”
그러자 대행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여름과 겨울이, 사계절이 어떻게 둘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춥다 덥다 하는 거지 진리라는 것에 춥다 덥다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였다. 그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 천지가 한데 합쳐지는 거 같았다. 산하대지가 일제히 하나로 모이고 천지가 그냥 하나로 뭉쳐져 불덩어리가 되더니 서서히 작아지면서 ‘펑!’하고 불구슬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깨달음! 그러나 당시에 그녀는 그것이 깨달음인줄도 몰랐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천天은 지地를 다스리면서 산하대지의 일체 만물을 다 기르는데, 우리 인간들은 제 각각 천차만별로 마음에 따라서 저렇게 죽이고 살리고 싸우고 하니 참 너무도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인터넷 다음 블로그「대행스님의 삶과 깨달음 3」 : 한암 스님은 형식적으로 계를 주기보다는 곧바로 마음의 본분을 묻는 선문답을 던져왔다.
무려 4년 만에 다시금 한암 스님에 의해 정성스러운 삭발이 끝나고 나자 큰스님의 비수처럼 날카로운 질문이 떨어졌다.
“지금 누가 계를 받았느냐?”
“스님께서 계 주신 사이가 없고, 제가 계 받은 사이가 없습니다. 다만 한 마리 학이 청산에 훨훨 날 뿐입니다.”
★“네가 죽어야 너를 볼 것이다.”★
“죽어야 할 나는 어디 있으며 죽여야 할 나는 어디 있습니까?”
“네 마음이 어디 있느냐?”
“목마르실 텐데 맑은 물 한잔 드십시오.”
“내가 지남철(자석)이요, 네가 못이라면 어떻게 되겠느냐?”
“못도 지남철이 됩니다.”
그에 이르러서 한암 스님께서는 감탄하시고 말았다.
“네가 정녕 너로구나. 가거라. 네 법명은 청각淸覺이니라.”
노행자는 큰스님께 정성스러운 삼배를 올렸다.
아마도 한암 스님께서는 자신의 현생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셨던 것 같았다.
그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이 아니던가.
강토는 갈갈이 찢겨졌고 모든 사람들의 삶은 뿌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서 휩쓸렸다.
그 와중에도 한암 스님께서는 결코 절을 떠나지 않다가 1951년 3월 단정히 앉으신 채로 태연하게 입적하셨다.)】, ‘3. 부산생활’ 편【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이제 그녀의 나이는 열 아홉이었다.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하염없이 걸었다.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멀리 부산이었다.
부산까지의 여정은 그야말로 고초의 연속이었다. 남못지 않은 일솜씨를 타고났던 그녀는 당시 미군이 주둔해 있던 근처에서 군복을 수선해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부산에서의 생활은 대행에게 최초의 물질적인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워낙 근면이 몸에 배인 데다가 친절했기 때문에 군복 수선의 일감은 쌓이고 쌓였다. 이듬 해 봄이 되자 그녀는 경제적인 면에서 제법 여유를 가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해가 바뀌고 이듬해 봄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일자리에 앉자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낮이 조금 지나서 네 가게로 어떤 손님이 찾아 올게다. 세상에서 가장 측은한 사람이 찾아올 거야.
네가 아니면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고통스러워해줄 사람이 없어. 모든 사람들이 침을 뱉고 눈살을 찌푸리는 그 가여운 사람에게 네가 인정을 베풀 수 있겠니? 그리고 여자인 네가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겠어?”
대행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빠’가 말하는 그 측은한 사람이 문둥병자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행은 속삭였다.
“전 두려워 하지 않아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오늘 오후다.”……
“저, 저, 저....”
“말씀하세요. 옷이 아주 험하게 됐군요.”
“사실은 그게.... 제 옷을 좀 누벼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좀 죄송해서.... 돈도 없어요....”
“거기 좀 앉으시겠어요? 제가 갈아 입을 옷을 한 벌 드릴테니까요.”
대행은 우선 집히는 대로 남자 옷 한 벌을 집어 사내에게 준 뒤 사내의 갈갈이 찢긴 옷에 천조각을 대어 옷을 누비기 시작했다. 한 시간 쯤 걸렸을 것이다.… 다만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무심코 안을 들여다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쳐 버렸다.……
‘병.... 병.... 병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아빠!”
“대답해 주세요. 도대체 병이란 것은 무엇인가요? 왜 우리는 이처럼 고통스럽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요?”
“아가야....”【【【※ 12번이나 있으나 줄였음 (인터넷 다음 마리아의 구원방주 ‘사랑의 메시지’「2017. 10. 22. 성모님 : “사랑하는 작은 영혼, 내 아가야!”」,「2021. 6. 23. 예수님 : “사랑하는 내 아기야,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네가 그리도 사랑하고 좋아하는 예수다. 나와 내 어머니의 성심의 사도이자 성체의 사도인 내 사랑하는 작은 영혼아!”」,「2023. 4. 7. 예수님 : “5대 영성을 실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는 내 작은 아기야! 고맙구나.”」참조)】】】
그 목소리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아가야, 나는 네게 질문을 할 뿐이다. 대답은 네가 찾아라. 나는 네게 대답해 줄 수가 없어.”
“아가야, 아는 게 문제가 아니란다. 할 수 있는 게 문제란다. 아는 일은 누구로부터 배울 수 있겠지만, 하려면 자기가 직접 겪는 수밖에 더 있겠니? 넌 네가 직접 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해.”
“그럼 저 문둥병자는 어떻게 하지요? 아빤 제가 의사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아니란다.”
“그럼 아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육신의 병의 뿌리는 존재의 병이란다. 넌 그 뿌리를 캐내야 해. 그렇게 되면 넌 영육을 모두 치료하는 의사가 될 수 있지. 넌 수술기구가 없이도 수술을 할 수 있게 되는 거란다.”
“제가요? 그건 도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옛 성인들은 그런 힘을 가지셨다는데요?”
“누구든 가질 수 있지.”
“그렇지만 전 지금 군복 수선을 하고 있는 일개 아녀자일 뿐인 걸요.”
그러나 그에 대해서 내면의 목소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모든 존재의 본질적 고통을 또 다시 절감한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따라서 걸어갈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처럼 아홉 살 때부터 내면에서 ★참 자기의 목소리★라고 하고 ★불생불멸하는 영원한 아빠★라고 하는 그 내면의 목소리의 인도를 계속 받듯이 즉 대행스님처럼 말하자면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참 자기의 목소리★와 계속 주고받고 대화를 하고 그 내면의 목소리의 인도를 계속 받듯이(430-432, 437-440, 465-466페이지 참조) 또 인터넷 다음 블로그「한마음요전 (대행스님 행장기, 법어집) 수혜(修慧)편 - 3. 깨달음의 증장 - 이젠 죽어서 보리라」편에서 보면【스님께서는 다시금 아빠와 마주 서셨다. 전쟁의 참화를 체험하면서 처절하게 맞닥뜨려야 했던 삶의 의미를 더욱 투철히 알고자 하셨다. 스님께서는 그 동안 온갖 고통과 시련의 위안처가 되어 주었던 아빠를 다시 찾으며 분명한 대답을 듣고자 하셨다.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아빠는 왜 만날 수 없습니까?” 스님께서는 식음을 전폐하며 정진하셨다. 밤샘은 몇 날 며칠이고 또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나 ★번번이 “네가 죽어야 나를 보리라.”는 응답이 있을 뿐이었다.★ 스님께서는 점점 “죽어야 나를 본다”는 의문을 풀지 않고서는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그때는 정말로 이 육신이 죽어서라도 내가 오랫동안 아빠라고 불러 온 나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참한 전쟁을 목격하면서 산다는 게 도무지 귀찮은 일이라 여겨지기도 했지만 아빠를 만날 수 있다면 차라리 육신을 포기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죽기로 작정하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곤 했다. 새벽 어스름에 출발하는 화물차 바퀴 밑에 드러누워 차 떠나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고 담배를 물에 풀어 벌겋게 우러난 물 한 사발에다 키니네 스무 알을 타서 마신 일도 있었다.”】즉 깨달은 후에도 왜 교리적인 부분을 착각하고 자살까지 하려고 하였던 것인지.... 즉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그런 眞空妙有한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 체험일 것인데 왜 내면의 아빠는 “네가” “나를” 하고 구분하시는데 대행스님은 “아빠”와 “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지.... 즉 루이사 피카레타「천상의 책」에서도「★예수님께서 나의 내면에서 나오셨다.★」고 하였듯이.... (영성시집 ‘214.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피앗」과「우리 (성삼위)」②”’ 편 387페이지 참조) 즉 루이사 피카레타나 우리 황데레사 어머님처럼(473-474페이지 참조) 즉 성서에서 보면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그런 불생불멸하는 전능한 참 자기의 목소리인 말씀이나 모습까지도 알아듣고 볼 줄도 알아야 할 것인데.... 즉 그러니까 출애 33장 18-23절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편《《《【18절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20절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22절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 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영광」: 구약성경 총366절 + 신약성경 총170절 = 구, 신약 총536절【주님의 영광 39 + 3 = 42, 내 영광 8 + 1 = 9, 주님께 영광 7 + 0 = 7, 나의 영광 13 + 1 = 14, 당신의 영광 16 + 4 = 20, 당신 영광 10 + 0 = 10, 그분의 영광 17 + 2 = 19, 하느님의 영광 10 + 18 = 28, 그 이름의 영광 4 + 0 = 4, 당신 이름에 영광 3 + 0 = 3】참조)★】》》》에서 말씀하셨듯이 또 요한 11장 25절에서「“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하신 예수님께서 14장 1-14절 ‘길과 진리와 생명’ 편【6절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에서 말씀하셨듯이 즉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장 30절 참조) 하고 또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장 28절 참조) 하고 말씀하셨듯이 즉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주인 생명의 주인이시듯이....(441, 479, 481-482페이지 참조) 즉 대행스님도 “내면의 아빠”를 그리 체험하면서도 그 “내면의 아빠”가 바로《《《성삼 가족수도회 기도서 9페이지 삼종기도 후렴「◇ 신덕송(아침) :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심으로,… ◇ 망덕송(낮) :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심으로,… ◇ 애덕송(저녁) :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한없이 좋으심으로,…」참조》》》진리, 자비, 사랑, 지혜의 근원이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듯이....(집회서 1장 1-10절 참조)【(영성시집 ‘216.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견성(見性)과 계시(啓示)」③”’ 편 489-497페이지 참조)】
모세가 계시(啓示)를 보고 도(道)를 배웠어도.... 하느님께 충실한 종 일 수밖에 없듯이
즉 마태 23장 1-36절 ‘위선자에 대한 책망’ 편「8절 “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9절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에서 스승과 아버지는 한 분뿐이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런데 ★청봉스님처럼 대행스님도 법문을 들어보면 “왜 종이 되려고 하느냐? 네가 주인이 되어야지!” 하고 또 예수님이 “나를 믿어라!” 하는 것은 실수한 것으로 본다고 하면서 각자가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하듯이★ 즉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를 믿어라!” 할 수 없는 위치이고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할 수 있는 전능한 위치에 계시면서 계속 믿도록 가르치셨듯이 즉 그러니까 대행스님은 내면에서 ★참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 불생불멸하는 영원한 아빠★라고 하면서도 “나를 믿어라!” 하는 분이 예수님인줄 깨닫지도 못하듯이....【(신앙수기 ‘75.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다는 말의 뜻이 풀림’ 편 54-58페이지, 영성시집 ‘196. 믿음의 힘을 깨달음(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편 241-243페이지, ‘207. 문득 구원(道)의 화두(경지)를 깨달았습니다’ 편 320페이지 참조)】즉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전능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10계명을 주셔도 또 사무엘상 15장 23절「그분을 거역하고 그분께 대드는 것은 우상을 위하는 것만큼이나 죄가 되오.」하였듯이 즉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기 전에는 진리를 잘 몰랐듯이....(417-424, 439-447, 450, 455-472, 479, 483, 485, 489-490페이지 참조) 즉 성서에서는 나의 종 아브라함, 나의 종 야곱, 나의 종 모세, 나의 종 욥, 나의 종 이사야, 나의 종 다윗, 나의 종 예언자들, 성모님도 루가 1장 38절「“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셨는데....(488-489, 573-575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자연이 초자연과 피조물이 조물주와 하나라고만 말한다면 이것은 모세가 계시(啓示)를 보고 도(道)를 배웠어도....《《《(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당신 길(道)」: 구약성경 총3절 + 신약성경 총0절 = 구, 신약 총3절【당신의 길(道) 21 + 0 = 21, 내 길(道) 17 + 2 = 19, 나의 길(道) 8 + 0 = 8,《시편 95장 10절「사십 년 동안 그 세대에 진저리가 나서 나는 말하였노라.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다. 그들은 내 길(道)을 깨닫지 못하였다.’」, 103장 7절「당신의 길(道)을 모세에게, 당신의 업적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리셨다.」, 히브리서 3장 10절「사십 년 동안 그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세대에게 화가 나 말하였다.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道)을 깨닫지 못하였다.’」참조)》(영성시집 ‘192. “나는 전능한 신(하느님)이다”’ 편 233-234페이지 참조)】》》》하느님의 계시(啓示)에 도(道)에 한 부분을 깨달은 것일 수밖에 없고 하느님께 충실한 종 일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아무리 계시(啓示)를 보고 도(道)를 깨달았다고 해도 자연이 초자연과 피조물이 조물주와 하나라고만 말한다면 이것은 계시(啓示)자와 계시(啓示)를 보(받)는 자의 차이로 인한 결핍된 편협한 도(道)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신앙수기 ‘101. 선생님(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편 117-127페이지, 영성시집 ‘198.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불이(不二)」①”’ 편 246-261페이지, ‘206. 불교와 계시종교의 차이점「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 편 298페이지 참조)】즉 그러니까 이제는 모세성인처럼 도(道)를 크게 깨닫든 대행스님처럼 도(道)를 작게 깨닫든 모세성인에게 도(道)를 가르치신 하느님이 아니라면 대행스님에게 도(道)를 가르치신 내면의 “아빠!”가 아니라면 자기가 뭔데 하느님의 종이 아니고 내면의 “아빠!”의 종이 아니고 주인이 된다는 말이겠습니까? 즉 그러니까 이제는 수도승이든 수도자이든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면의 “아빠!”라고 하는 분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이시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하게 알아듣고 깨닫고 풀이할 수가 있는 단계가 왔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그러니까 나는 그전에 김정빈 구도소설 대행스님의「道」책을 읽고 종교통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안양 한마음선원에 가서 그런 움직임이 있는가를 살펴보기도 하였지만 그런 움직임은 발견하지를 못했다는 기억이 있는데.... 이제야 깨달아지는 것은 다른 스님들은 도(道)를 깨달아도 어느 순간 깨닫고 오도송을 읊은 것만 있으니 비교할 수가 없지만.... 대행스님은 내면의 “아빠!”의 소리를 계속 듣고 도(道)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니 모세성인과 대행스님은 비교해 볼 수가 있다는 것과 또 김강철(바오로) 신앙수기에서 종교통일이 이루어진다는 반야심경의 풀이를 믿고 어느 정도 풀이는 해왔지만.... 이제는 막연히 종교통일이 오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모세성인과 대행스님의 도(道)를 이런 논리로까지 비교하고 설파하는 방식으로 종교통일에 대한 기초를 놓으심으로서 종교통일에 대한 화두가 이렇게 풀리게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이제야 깨달아집니다.【(신앙수기 ‘34. 神철학이란 책이 있을까?’ 편 21-22페이지, ‘35. 스님들이 道 닦는 꿈(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꿈)’ 편 22페이지, ‘101. 선생님(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편 117-127페이지, ‘103. 道를 통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편 130-132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요한 3장 11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에서도 니코데모와 이야기에서도 말씀하셨듯이....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증언도 믿지 않는다면 누구의 증언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즉 그러니까 ★‘니체의 사신론(死神論)’에서 마태 5장 44절을 비판한 것처럼 예수님을 신(神)이 아니라 인간으로만 본다면 비판 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가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만큼 이 얼마나 웃기는 망상의 비판인지 이제는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영성시집 ‘68. 니체의 사신론(死神論)’ 편 60-62페이지 참조)★【(영성시집 ‘216.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견성(見性)과 계시(啓示)」③”’ 편 498-501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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