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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 병사들과 피난민들을 모두 배에 실은 후 폭파되는 흥남 부두, 보이는 군함은 미국 Berger호
최근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지금도 상영중인 영화 <국제시장>의 모티브를 제공했던 흥남철수작전의 배경이 되는 <장진호 전투>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당시 미군이 갖고있던 일본군의 지도에는 장진호를 초진호로 표기하고 있어 지금도 미군은 <장진호>를 <초진호>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역사상 가장 고전한 전투이자 성공적인 후퇴의 교본으로 알려질 정도의 전투였는데 만약 후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한반도 측에서 보면 영화 <국제시장> 도입부에서 보는 피난민들의 흥남철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미군이 완패해서 동부전선에서 중공군이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왔다면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이 퇴각해 쫓겨내려오던 서부전선의 미8군의 상황도 극도로 어려워졌을 겁니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해서 간간히 영화로 나오거나 <브레이크 아웃>이라는 책(아래에서 소개)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헐리우드에서 장진호 전투를 그린 <혹한의 17일>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가 있고 중국측에서도 맞불 작전인지 모르지만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중국측 입장에서 보는 <장진호 전투>를 그리려 하겠죠.
영화 <집결호>를 만들어 유명한 펑샤오강 감독이 메가폰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두 영화 모두 하루빨리 개봉됐으면 합니다. 양측의 시각을 비교해서 보는 즐거움도 쏠쏠할 것 같습니다.
[ 장진호 전투(1950.11.27~12.11) 이야기 ]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 이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미군이나 한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맥아더의 정치적 목적과 중공군에 대한 형편없는 저평가 등이 뒤섞인 가운데 마치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레이스에 열중하고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도꾜의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모두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병사들에게 잔뜩 안겨주어 병사들의 가슴은 부풀어 오를대로 올라 있었습니다.
* 인천 상륙작전 후 맥아더 원수와 미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맥아더 왼편)
맥아더 사령부는 엉뚱하게도 중공군의 개입은 아예 없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에 두고 압록강 대포위 작전을 계획합니다. 사실 중공으로서도 당시 국내 사정이나 국력의 여건상 개입하기 힘든 조건이기는 했습니다만 당시 공산주의 사회의 연대감을 생각한다면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중공측에서도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반드시 참전한다는 의사를 주 북경 인도대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맥아더는 휘하의 군대를 8군과 10군단(해병1사단,육군7사단)으로 나누고 8군은 워커장군 지휘 하에 서쪽 지역으로 개성->평양->사리원을 축으로 해서 서쪽으로 기동하고, 10군단은 알몬드 장군 지휘 하에 동부지역 원산으로 상륙하여 낭림산맥을 가로질러 압록강 쪽으로 북진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으로 북진해서 거대한 집게발 포위망을 형성, 잔여 북괴군을 완전 섬멸한다는 계획이었죠.한국의 지형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낭림산맥으로 양분된 양 군단의 유기적 협동이 어렵고 북한군의 속절없는 패전으로 큰 저항없이 빠른 속도로 밀고 올라갈 수 있기야 했지만 중공의 전쟁개입 경고와 한반도 북부의 엄청나게 추운 날씨, 산악투성이인 지형상의 특징들은 무시해 버리기에는 대포위 작전을 전개하기에는 큰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의 대성공에 잔뜩 고무된 데다가 중공군을 한없이 깔보고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인데다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신과 같은 존재인 맥아더에게 워싱턴 합참본부 뿐만 아니라 대통령까지 이래라 저래라할 만한 입장이 못되었죠. 끙끙거리면서 그저 지켜보는 수 밖에는...
거기다 10군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맥아더의 직속 부하 알몬드 장군은 한술 더 떠서 설사 중공군이 있더라도 설마 이런 험지를 뚫고 공세를 펼치지 않으리라는 오판을 하고 있었습니다.오히려 그는 10군단이 신속한 공세로 적을 밀어 부치면 8군보다 먼저 북한군을 포위해 성공적 작전을 펼 수 있으리라는 공명심에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더욱 다급하게 북진 레이스를 재촉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장진호의 주역이자 10군단의 주력인 미 해병 1사단의 사단장인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이런 무모한 계획이 사뭇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당시 동부 지역의 작전 구역은 작전거리가 480km나 되는데다가 도로 상태도 극히 좋지 않아서 거의 외길로 이루어진 위험한 산길을 통과해야 했던 겁니다.
*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 1사단장
그가 없었으면 미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역사적인 흥남철수작전도 없었을 것이라는게 후세 사가들의 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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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단의 병력조차 분산되어 보병 1연대는 원산, 5연대는 신흥, 7연대는 수동쪽에 분산 배치되었고 기갑 장비들은 타부대로 전출 명령까지 받은 상황에서 진격을 외치고 있었으니 우려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죠.
그리고 간간히 중공의 포로들이 잡히기도 한지라 절대 우습게 볼 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포로로 부터 미군을 포위 섬멸할 것이라는 정보까지 입수하였는데도 동경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와 알몬드 장군의 이러한 낙관론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중공군 관련 정보들은 아예 깔구 뭉갰던 거죠.
* 엄동설한의 장진호(미군은 초진호라고 합니다)
하지만 미 해병 1사단장인 스미스 장군은 맥아더 직속 부하였던 알몬드 장군의 진격 명령에 거의 불복종에 가까운 형태로 차근차근 후방을 구축하면서 장진호에 들어갈 때까지, 알몬드 장군에게 집중배치 요구를 끊임없이 주장해 결국 장진호에 들어갈 때 까지 병력을 가까스로 모을 수 있었죠.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스미스 장군의 이런 신중한 판단이 없었으면 미 10군단은 중공군에게 철저한 궤멸을 당했을 겁니다.
더구나 스미스 장군은 병력의 집중배치 뿐만 아니라 좁은 교통로를 미리 인지하고 하갈우리 등 군데군데에 보급창을 설치하고 야전 활주로(하갈우리 바로 밑 장진)를 개척한 것은 참으로 선견지명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11월 7일 경 해병 1사단의 선봉인 7연대는 황초령 인근에 진입한 뒤 15일 경에는 하갈우리로 25일에는 장진호 서편 유담리까지 진출합니다. 그리고 5연대는 하갈우리 북쪽에, 1연대는 후방을 담당하는 형태로 배치되었죠.
* 장진호 전투를 보여주는 지도, 이 지도에는 안나와 있지만 장진호 오른편에 미육군7사단
1개연대,1개 포병연대, 1개 전차중대가 있었는데 해병들과는 달리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때 중공군은 기도비닉(조용히 들키지 않고 움직인다)을 유지한 상태로 장진호 인근에 매복 하고 있다가 미군이 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유담리의 축선으로 길게 늘어져 배치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니까 토막토막 잘라서 각각 잡아 먹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겁니다.
* 최전선 유담리 전투
이때 중공군 9병단 지휘관인 송시륜 장군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1927년 농민 무장군으로 시작해 1930년에는 홍군 20군단 참모장을 지내면서 실전에 강했고 한국으로 들어온 중공군들 또한 일본군과 국민당군과 싸우면서 경험치를 늘린 실전적인 군대였습니다. 비록 장비면에서 미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실력은 무시할 것이 못되었죠.
* 중공군 9병단 사령관 송시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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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1월 27일, 중공군은 길게 늘어진 미 해병1사단을 공격해 16개 보병중대 중 3개 중대를 격파하고 고지를 점령해 사단의 병력을 각각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고립시켜 버립니다. 미 해병대는 상황의 악화를 막고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서남쪽으로 철수를 했지만 이미 상황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 중공군의 작전도,토막토막 잘라서 포위섬멸하겠다는 것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날씨까지 연합군을 괴롭힙니다. 11월 초에 이미 첫눈이 내렸고 기온은 급강하 하였으며 모두들 알다시피 개마고원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지역에 속해 야간에는 평균기온이 영하 30~40도까지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처음부터 이런 추위를 크게 생각치 않았고 더 추워지기 전에 전쟁을 끝낼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던지라 동계 장비도 열악했지요, 참호를 파려해도 땅이 얼어 파지지를 않았고 구호용 혈액과 몰핀도 얼어 붙는 바람에 위생병이 입에 몰핀을 넣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 오! 신이요!! 이 사진은 당시 퓰리처 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연히 차량이나 야포 등도 고장나기 일쑤였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땅을 파고 참호를 파지 못하자 시체를 쌓아올린 다음 거기에 물을 뿌려 굳혀 진지를 구축하기도 했으니 이 동장군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공군도 마찬가지라 대규모 지원을 받기 힘든 중공군은 동사자가 속출했고 미군의 야포에 파고 들어갈 땅도 장비도 없어 그대로 노출되 공격 받아 큰 피해를 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추위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웅크리고 있다가 얼어 죽거나 집단으로 투항하는 일도 종종 있었죠. 너무 추워 정신들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양쪽 다 모든 것은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다시 전투 이야기로 돌아가서 11월 27일부터 벌어진 전투로 능선을 따라 포위하고 있던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투는 밤새도록 이어졌고 탄약이 다 떨어져 가는 5연대와 7연대 병력은 백병전도 불사하며 고지를 지켜냅니다.
* 중공군 포로들
하지만 동시에 하갈우리쪽과 고토리쪽도 공격이 있었고 28일 쯤에는 완벽하게 절단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하갈우리 쪽에는 사단본부 지휘소가 있었고 후방 지원과 방어를 위해 고토리에 1연대 병력이 있었는데 스미스 장군은 고립을 막기 위해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의 중공군을 격퇴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려고 고토리의 풀러 연대장에게 지시합니다만 보낸 1개 중대는 중공군의 강력한 방어망에 갇혀서 실패하고 맙니다.
두번째 시도는 영국 41 코만도 연대가 미군과 미 해병 900명 가량이 다시 돌파를 시도합니다만 중공군의 집중 사격에 피해를 키웠고 당시 현장에 있던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긴급히 상황을 보고합니다만 스미스는 막히면 전체가 다 무너질 것을 알기에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돌파구를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 피곤과 추위와 싸우며...
어찌어찌 뚫고 하갈우리까지 들어갑니다만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후일 이 돌파구를 죽음의 계곡이라 이름 붙이죠.이렇게 포위 당한 상태에서 양측은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최악이고 양쪽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비전투 손실 또한 만만찮고, 장비가 좋다지만 대규모 중공군의 포위 병력에 고립무원 상태인 상황이다 보니 중공 관영언론은 12월 4일 보도에서 "미 해병 1사단 곧 포위 섬멸" 이라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퍼뜨렸습니다.
* 진격 나팔의 중공군
미국 언론들도 상황이 최악임을 알리고 있었으며 그러자 미국 내에서도 정예 병력이라고 알려져 있는 해병 1사단이 전멸 위기에 놓여 있다고 미국내 여론은 난리도 아니었습니다.솔직히 그 상황이면 전 병력이 항복하고 포로가 된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2월 1일 스미스 장군은 결단을 내립니다. 일단 5연대가 유담리를 방어하고 있으면, 7연대가 하갈우리 쪽으로 돌파하고, 7연대가 하갈우리에 도달할 즈음에 5연대도 하갈우리로 후퇴한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때를 즈음해서, 야전 지휘관으로는 너무 신중한게 아니냐며 임시 비행장 설치시 비판을 받던 장진 비행장이 드디어 복구를 완료하고 기능을 시작합니다. 오후 2시경 C-47 수송기가 이 활주로를 이용해 보급품과 부상자를 나르기 시작했고 이것은 고전을 하던 미 해병대에 숨통을 트여줍니다.
* 후퇴하는 미군 퍼싱 탱크와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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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2월 4일경이 되면 5연대와 7연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23km를 뚫고 하갈우리로 후퇴합니다, 당시 5연대와 7연대는 장비와 부상자들을 거의 잃지 않고 후퇴했는데 후퇴 속도는 1km를 전진하는데 무려 4~5시간이나 걸렸다고 하지요.
* 유담리를 점령한 중공군
당시 이 후퇴 장면을 목격한 부대원들과 지휘부는 "마치 유령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라며 이 포위망 돌파의 고난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수송기를 통해 하갈우리로 들어온 종군 기자들이 스미스 장군을 인터뷰 하기 시작했고 이때 어느 기자 하나가 후퇴작전이냐는 질문에 그 유명한 답을 합니다.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이요"
(뭐 사실 상 사방이 포위된 상황이니 후퇴가 공격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요) 12월 5일에 스미스 장군은 작전회의를 통해 12월 6일 흥남으로의 공격 (후퇴)를 결정합니다. 워낙 5연대와 7연대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휴식과 함께 부대를 재편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 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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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계획에 따르면 5연대 전투단이 (영국 41코만도, 육군 31연대 전차중대, 포병1연대 포함) 하갈우리를 방어하는 동안 7연대 전투단 (육군 7사단 31연대 임시대대, 포병11연대 2개 대대, 사단 지휘부 포함)이 고토리를 뚫고 하갈우리에서 완전 철수하면 5연대 전투단이 다시 고토리로 들어와 후방을 방어하며 전투 항공단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사지를 빠져나간다는 계획으로 진행시켰습니다.
* 혁혁한 공을 세운 미 해병 항공단의 코르세어 전투기, 동해상의 항모로부터 날아옵니다
그리고 초기 5km 까지는 계획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이 이렇게 다잡은 맛있는 먹잇감을 그냥 보낼 리가 없지요. 특유의 게릴라식 전투로 미군 철수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기습을 통해 기동 가능한 차량을 먼저 잡아버리고, 도로를 막고 있다가 급습하고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의 10만에 달하는 민간인 피난민들이 미군 부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니 중공군은 민간인으로 위장해 미군들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2월 9일에는 군단 사령부로부터 10군단 전 병력은 흥남 지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12월 10일 6시 선두부대가 함흥에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12월 11일 저녁까지 후위 부대 전부가 함흥으로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 명복을 비는 군종 신부(목사)
그리고 흥남 부두에서 14일 부터 24일까지 전설적인 해상 퇴각이 벌어지는데 무려 민간인 10만과 UN군 12만이 겨우 백수십척의 배로 탈출하는 전설적인 흥남 철수 작전이 이루어집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전사 3637명, 비전투 사상 3657명을 기록했고 중공군 또한 부상 12500명, 전사 25000명으로 부대 자체가 와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덕분에 초기 중공군 계획대로 흥남까지 밀고 내려간다는 것은 좌절될 수 밖에 없었지요. 또한 이런 심각한 타격으로 인해 서부전선의 미8군까지 기사회생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남으로...
* 미해병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전우의 시체를 전장에 놔두고 후퇴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주렁주렁 시체를 싣고 본인들은 걸어가는 해병들
에
* 남으로...
* 피곤과 추위와 싸우며
* 눈으로 뒤덮힌 산하
* 배에 오르는 피난민 대열
* 피난민들과 함께...
* 어디서 본듯한?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나오는 장면
* 시체 1구라도 더...
* 얼마 남지 않았는데...
*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해병 전우들,이들은 이후 매년 만나왔다고 합니다.
이름은 <Chojin a few>, '초진에서 살아남은 전우들' 뭐 그런 뜻 아니겠어요?
* 마틴 러스가 쓴 <장진호 전투>이야기, 마티 러스는 이 책을 쓰느라 살아 돌아온 해병들을
일일이 만났다고 합니다. 굉장히 사실감이 있고 재미가 있어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에서는
위에서 애기한 것보다 몇배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아울러 스미스
소장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과 알몬드 군단장의 형편없는 지휘력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미 해병들 근성의 진면목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미해병 1사단은 태평양전쟁
당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전설적인 부대라고 합니다. <브레이크 아웃(Break Out},탈출>
첫댓글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가족을 위해 분투하는 가장의 애처러운 희생에 눈물이 나왔지만 조금은 교과서적인 내용과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과장된 몇몇장면만 아니었다면 훌륭한 영화가 되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전투에 얽힌 참상들..잘 읽었습니다. 수고많았삼!!
역시 시네마천국 회장님다운 예리한 안목입니다. 맞는 지적입니다. 근데 원래
이런게 윤제균 감독 스타일이예요, 과장법이 심하고 신파조로 흐르는게...윤감
독의 <해운대>도 그런 분위기가...하여튼 단 한편의 영화로 우리 현대사를 관통
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하기는 하죠. 특히 그 시대를 살았던 노년층
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 천만관객을 동원한 비결이 아닐까 해요.
덧붙여 한가지 더...위에서 소개한 <장진호전투>이야기가 뒷부분에서는 약간
흐지부지된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데, 근데 이걸 정리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요.
유담리 전투,하갈우리 전투, 고토리 전투, 기타 등등을 기술해야 하는데...아무
튼 위에서 소개한 책<브레이크 아웃>을 읽어보는 수 밖에는 별 도리가...
결론적으로 미군이 장진호 전투를 무사히 치르고 중공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
면서 큰 손실없이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스미스 소장의 지휘력과 준비성,미해
병대의 투혼,공군을 비롯한 미군의 화력 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요. 서부전선의 미8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고 꽁지빠지게 후퇴한 걸 보면 잘 알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