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信天함석헌
공자님도 너희가 홀로를 삼가라 그러셨고, 예수 말씀도 너희가 기도 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지금 사람들은, 우리에겐 홀로란 별로 없지 않은가, 거의 없어지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사실은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사회가 유기적이게 됐기 때문에 사람의 살림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우리 지금 사는 걸 보면, 더군다나 지금 우리나라 사람은, 사람이 다 같이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개인주의적으로 많이 가는 것 같아요. 그러면 홀로란 도무지 없지 않은가? 전혀 없지야 않겠지만 그런 생각이 있어요.
홀로란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내가 나를 상대로 하고 있는 때를 가리키는 말인데, 우리에게 자기를 문제로 삼아서 진지하게 파고들어가려는 태도는 아주 부족하지 않은가? 겉의 살림이 편리하게 됐기 때문에 자극을 주는 것도 아주 많아서 그것에만 정신이 팔리지, 나를 문제로 삼는 일은 종교야말로 나를 문제로 삼는 건데 그런 사람은 거의 없지 않나?
어제 밤엔, 그전에 여기 일본 사람으로서 한국말 배우느라고 한 일년 있다가 간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요새도 가끔 편지를 하는데, 나이가 아마 서른은 훨씬 넘은 여자분인데, 그분의 편지 속에 “금년 봄에 혼담이 왔기에 거절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님은 대단히 슬프게 생각합니다.” 하는 말이 있어요. 그런 편지가 왔기에 그저 답장을 쓰려고 붓을 들었는데,자연히 생각하지 않았던 깊은 얘길 하게 됐어요.
그래 거기 대답이 “종교살림을 하는 사람이니까 혼담 오는 걸 거절하고 혼자 살겠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바울이 말하기를 ‘60전의 여자를 믿지 말라’ 그런 말이 있지요.” 그래 그런 얘길 하면서, “당신이 결심을 단단히 했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이제 차차 가노라면 늙어갈 때에 외롭다고 하는 문제가 당신한테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대해서 마음이 어떨지 결정됐는지 모르지만, 그런 게 문제 아닐까?” 이러고 나니 자연히 문제를 좀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바울이 왜 그런 말을 했는고 하니, 사람을 아니까. 사람이라는 건 작정했노라, 약속했노라 그러지만 늘그막에 가서 내 한 몸을 어떡하지 그럴 때에는 참 문제가 달라져요. 지금은 세상이 이렇게 건천으로만 도는 것은 밖의 것이 아주 편리하게 돼서, 그러니까 그저 인생의 말년이라 이런 생각을 심각하게 생각할 기회가 없지만, 가다가 어느 때에는 반드시 그게 문제가 될 거예요.
노후에 홀몸으로 살기가 어렵다는 건, 실지 살림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그 문제만이 아니고, 내가 나를 어떡하나 하는 문제가 문제돼요. 지금의 세상이 어려울수록 근본문제는 나에 있는데, 왜 여러 사람이 모이면 의젓하게 다 나와서 이렇게 믿는 사람으로 자처하고, 혼자 있을 땐 딴 생각이 나게 되나? 그걸 이기기란 왜 어려운가? 사람이란게 그렇게 돼 있어요, 사람이.
내 욕심이란, 감정이란 그런 거니까, 그건 말로는 쉬운 것 같은데 극복하기란 참 어려워요.
옛날 어느 유명한 우리나라 재상 이야기가 있지 않아요? 양반 집안인데 남편이 일찍 죽고 아들이 하난가 둘이 있어서 데리고 혼자 살게 됐는데, 집을 이사했는데 새 집에 가서 청소를 하다가 아궁이 밑을 들쳐보니까 항아리가 있는데 금은보화가 가득 있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이가 아들한데는 말도 않고 덮어버렸어요. 그러고는 아무 말도 않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아이들을 잘 키워서 과거를 해서 재상이 됐더랍니다. 그래 친구들이 찾아왔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 온담에 말하기를 “이 자식아, 네가 어떻게 돼서 있는지 아느냐?” 그러고 훈계를 하면서 “내가 20 조금 넘은 다음 홀로 됐는데, 너를 길러낼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하고는 엽전 한 닢을 끄집어내서 보이는데 보니까 글자가 안 보일만큼 반들반들 닳았더래요. “이게 무언고 하니 내가 젊어 혼자 됐는데, 혼자 있노라니 밤이 깊고 하면 무슨 생각인들 안 나겠느냐? 그걸 이기려 하니 이길 수가 없어서 방안에서 이 돈을 굴려서 구석으로 굴러가면 쫓아가서 가져오고, 가져오고 그렇게 지내오는 동안에 이 돈이 이렇게 닳았다.” 그러고는 이사오던 때의 애기를 해주었는데, “내가 왜 그걸 안 알렸느 냐 하면, 그걸 알리면 필시 사람들이 모두 큰 횡재 했다고 그러겠는데, 그러면 너희가 못쓰게 되고 사람질을 못하게 되겠기에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도 않고 그랬느니라” 하는 얘기가 있어요.
그래서 사람이 나를, 내 속의 깊이를 지켜가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얘긴데, 옛날엔 사람이 사람 노릇 하려면 그랬어요. 신앙이요 뭐요가 그래 어려운 것 아니에요?
그래 아까 편지한 그 사람한테도 “당신이 결혼을 않겠다는 건 좋소. 그걸 깨치라고 그러고 싶진 않지만, 그러려거든 그럼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만일 결혼을 했더라면 남편한테 부었어야 할 그 사랑을 이젠 어머니한테 다 부으시오. 그러노라면 이제 당신이 가노라면 여러 가지 속의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이 있는 때가 있을 것이오. 그걸 이겨내야 하는데, 그것이 당신에게 크게 어려울 것이오. 하지만 그 비통한 것을 겪어가노라면 필시 아마 당신의 그 비통을 참으면서, 그러면 그 비통이 도리어 당신의 마음을 격려해주는 힘이 되어서, 이제 하나님께서 월리엄 블래이크가 말한 대로 ‘사람의 일생이란 금실토리 하나씩 맡아가지고 나오는 것과 같다. 그걸 자꾸자꾸 감아가노라면 마지막에 영원 문까지 갈 거다’는 말과 같이, 그 비통을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에게 바짝 아마 가게 될거다. 그저 회답이나 쓰자는 거였는데 이상하게 이런 말이 나왔소” 그랬어요. “나는 나이 80이 넘은 사람이지만, 80이 넘고 또 가족도 다 있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살아가노라면 혼자 살기란 참 불편한 점이 많이 있다, 그러니까 당신도 그런 걸 좀 생각하시오…”
이 문명이 발달했다니까 혼자서 살아가기가 참 쉽지 않아요? 먹거나 입거나간에 기성품이 잔뜩 돼 있으니까 돈만 있으면 사람의 신세 안지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쉽다면 참 쉬운데, 그런고로 내가 내 속에 외로움을 느껴볼 시간이 없어요. 내가 나 혼자서 내 살림을 하노라고 그래야 외로움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칼릴 지브란은 “가장 외로운 사람이 위대한 사람”(The loneliest man is great man)이라는 말을 한 일이 있지요.
외롭다는 건 내가 나를 지켜가자니까 외롭지, 지켜갈 생각이 없는데 무슨 외롭고 어쩌고가 있어요? 그러니 도대체 사람들이 건성에 떠서, 내가 하나님 앞에 대면하고 과연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순간이 온다면 인간이 과연 “고맙습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그럴 수가 있을까? 마지막이 되면 아무래도 달라지겠지, 안 달라지겠어요? 그렇지만 그 생각이 없이 사라질 땐 그저 그날이 그날인가 보다. 소위 쾌락하게 산다는 거, 돈도 모으고 뭐 출세한다든지 그런 데만 팔렸지, 내속을 정말 다 죽는 그 순간에 가서, 하나님과 대결하게 되는 때에 거기 염려없이 그 품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그 확신이 있을까?
그러니 그거 없이 지금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편리해진 대신에 아주 저 마음은 파산상태에 간 사람들 아닌가? 그래 어제 저녁에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1984.2.26 퀘이커서울모임 감화말씀(정리 조형균)
퀘이커서울모임 월보 3 1984.1월
저작집30; 15- 107
전집20; 19- 396,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