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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의 산, 인릉산
한가위 명절이 며칠 안 남아 이번 주말에 서울을 벗어나 산에 가려면 아무래도 오고 가는 길에 고생 좀 해야 할 것 같다. 하여 서울 안에서 어느 산을 찾아갈까 하다가 오래간만에 인릉산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인릉산이라고 하면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청계산에서 한 줄기 뻗어 내려온 능선이 달래내 고개를 지나 다시 뻗어 오르는 것이 인릉산. 인릉산은 이렇게 뻗어 올랐다가 세곡동 탄천 앞에서 내려앉는다. 이제 나는 청계산 옛골에서 차를 내려 청계산을 찾는 많은 등산객들 틈에 섞여 걷다가, 10:44경 고속도로 굴다리 앞에서 나 홀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속도로 왼편을 따라 달래내 고개로 오른다.
인릉산은 못 들어봤어도 달래내 고개는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교통방송을 듣다보면 통신원이 경부고속도로 교통상황을 얘기하면서 “달래내 고개는 어쩌고 저쩌고...” 지금은 달래내 고개가 경부고속도로 판교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교통상 중요한 곳이 되었지만, 조선시대 세종, 세조 때에는 이 달래내 고개가 한창 논쟁의 중심에 있기도 하였지. 세종 12년(1430) 풍수학자 최양선이 청계산의 지기(地氣)가 이 능선을 따라 헌릉(태종의 능)까지 내려오는데 중간에 천천현(穿川峴, 달래내 고개)이 기운을 끊고 있으므로 고개를 막아 통행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상소를 한 것이다.
최양선의 상소에서 청계산의 기를 잘 받을 수 있는 곳에 헌릉을 썼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에 이어 조선의 기틀을 튼튼히 한 태종의 능이 지기(地氣)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 신하들로서는 중요한 문제였으리라. 그래서 최양선의 상소에 따라 고개를 막아야 하니 마니 논쟁이 계속 되었는데, 농민들의 통행을 중요시한 세종은 좀 더 검토하라며 시간을 끌다가 돌아가셨고, 논쟁은 세조대에도 계속되어 결국 세조가 막아버렸다. 그러나, 백성들의 민원 제기와 계속되는 반론에 결국 1464년 고개가 파손되지 않도록 고개에 잔돌(薄石)을 깔고 통행을 재개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조선시대에서는 기의 흐름을 중요시하여 오랜 시간 논쟁을 할 정도의 달래내 고개를 오늘의 후손들은 급속한 경제 재건을 위해 빠른 고속도로의 건설이 필요하다며 아무런 고민 없이 달래내 고개를 뭉개버렸다.
풀을 헤치고 조심스레 능선 위로 올라가 전진하는데, 등산로처럼 보이는 길을 따라 전진해보나, 길은 어느 무덤까지만 이르는 길. 어차피 이 능선도 옛골에서 성남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의해 잘리므로 조금만 더 전진하면 그 도로가로 내려서지 않겠냐는 생각에 무리하게 전진해보나 계속 촘촘히 재어오는 덤불들에 의해 전진은 느리기만 하고... 햐~아~~ 밑에서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찻소리가 바로 옆에서처럼 가깝게 올라오는데, 지금 이곳에선 아무도 없이 나 홀로 헤매고 있으니... 결국 나는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고 왔던 길을 후퇴하다 오른쪽으로 하여 아까 출발한 굴다리 쪽으로 내려선다. 후유~ 시작부터 힘을 너무 소비했다.
아까 차에서 내린 곳에서 길을 건너는데, 왼편에 고속도로에서도 볼 수 있게 높이 달린 광고판에서 한 소녀가 손가락을 오른쪽 귀 옆으로 돌리고 있는데, 그 옆의 광고 문구는 ‘대한민국은 일진이 좋다’. 그런데 나에게는 저 소녀가 나를 보고 ‘길도 없는 산속을 너 혼자 들어가다니, 너 돌았냐?’ 하며 머리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돌리는 것 같고, 문구도 ‘너는 일진이 안 좋다’로 보인다. 이렇게 출발부터 일진이 안 좋더니, 오늘은 등산 마칠 때까지 계속 일진이 안 좋아, 결국 풀독으로 피부과 의원을 찾아야 했다.
길을 건너 인릉산 옆으로 흐르는 농로를 걷자니 2008. 1. 6. 이 길을 따라 인릉산을 오르던 것이 생각나는구나. 그때는 앙상하게 헐벗은 산을 올랐는데, 오늘은 풍성한 인릉산의 품으로 오른다. 농로가 끝나고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성남시계(市界) 능선일주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지금 올라가고자 하는 곳은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에 있는 제6구간. 등산 인구가 늚에 따라 시 경계를 따라 산을 걷고자 하는 산꾼들도 늘어나니 성남시에서 시 경계를 따라 등산로를 정비한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나도 성남시계 능선은 구간 구간으로 대부분 걸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서울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능선도 대부분 걸어보았구나. 서울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무박 3일로 하여 계속 도는 슈퍼 산꾼들도 있다는데, 나는 꿈도 못 꿀일.
12:20경 주능선으로 올라와 철조망을 끼고 정상을 향해 오른다. 철조망에는 ‘이 지역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민간인 출입, 사진촬영을 금함’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철조망은 가다가 끊기고, 또 가다보면 왼편에 있던 철조망이 오른편으로 있으면서 등산로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철조망에 만들어놓은 문을 통해 나가야한다. 무슨 군사보호구역이 이래? 사람들의 산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산을 넓게 통제하던 군부대도 결국 이런 압력에 못 이겨 군사보호구역을 최소화 하다보니 이런 버려진 철조망 유물도 남게 되는 것이리라.
오르막 능선을 오르는데 앞에서 산악자전거가 내려오면서 계속하여 여자 포함 4명의 자전거꾼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저번에 인릉산을 찾았을 때는 산악 오토바이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산악자전거를 만나는구나. 저번에 산악 오토바이를 만났을 때는 이들이 오를 때 무리하게 가속을 하면서 파헤치는 흙을 보며 조금 눈살이 찌푸려지던데, 산악자전거야 그 정도는 아니겠지? 헬기 착륙장이 있는 목동산 정상을 넘어 내려가 12:50경 햇빛이 들지 않는 평평한 안부 능선에서 준비한 김밥을 꺼낸다. 인릉산은 알려지지 않은 만큼 찾는 이도 별로 없어 점심을 먹는 동안 지나가는 산꾼은 한명도 없다. 지금 이 시간이면 청계산에서는 점심 먹을 만한 마땅한 자리 잡기도 쉽지 않을 텐데... 하긴 여기까지 오면서 산악 자전거팀을 제외하곤 나 홀로 산꾼 2명밖에 보지 못했다.
사람이 오지 않으니 마음 놓고 내 거시기 꺼내 오줌발 깔기고 출발. 가면서 보니 아까부터 하나, 둘 쓰러져 있던 나무들이 점점 더 그 쓰러져있는 빈도수가 늘어난다. 얼마 전 태풍 곤파스에 쓰러진 것일까? 곤파스는 인천쪽에서 상륙하여 동해안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곳에 쓰러져 있는 나무들은 하나같이 능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즉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쓰러져 있으니 태풍 곤파스와는 방향이 맞지 않는다. 어느 센 바람에 이렇게 쓰러졌을까? 1:08경 해발 326m의 인릉산 정상까지 왔다. 능선 왼편은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반대편으로는 성남 시가지가 보인다. 인릉산은 순조가 잠들어 있는 인릉(仁陵)의 조산(朝山)이기에 인릉산(仁陵山)이라고 한단다. 오늘 산행지를 인릉산으로 한 것도 헌릉과 관계있는 달래내 고개부터 하여 마지막에 헌인릉을 둘러보려고 한 것.
이제 헌인릉 쪽으로 내려가야지. 내리막 능선을 2분 정도 내려가니 콘크리트 벽돌로 만든 2단형 구축물이 있다. 군사시설물 같아 보이는데 도대체 이게 뭐지? 만들다 만 듯이 쌓다만 벽돌도 있고...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능선을 계속 직진하는 것이고, 하나는 왼편으로 갈라져 간다. 어느 쪽으로 가야하나? 이정표도 없고, 전에 산행 기억으로는 가다가 왼편으로 갈라서긴 하였는데, 그게 정상에서 이렇게 빨리 나타나나? 나는 다음에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갈 생각으로 일단 주능선을 계속 탄다. 이쪽으로 오면서는 쓰러진 나무는 더욱 많아져 어떤 구간에서는 계속 쓰러진 나무를 타고 넘어야 한다.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이다. 그런데 그렇게 쓰러진 녀석 중 한 녀석은 억울하게 쓰러져 죽은 것 같다. 나무의 체구가 작고 유연해 보이는 몸체로 보아 웬만한 태풍에도 몸을 눕힐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억울하게도 덩치 큰 나무 옆에 있다가 애꿎은 피해를 입었다. 덩치 큰 녀석이 쓰러지면서 혼자 저승 가기 싫어서인지 이 녀석을 덮쳐 같이 쓰러진 것.
능선을 내려가면서 왼편을 쳐다보니, 어? 왼편으로 또 하나의 능선이 달리고 있다. 아뿔싸! 아까 거기가 능선의 갈림길이었구나. 헌인릉은 저 능선 왼편이 틀림없는데, 이제와서 다시 올라갈 수도 없고... 가다보니 오른편으로 성남비행장이 바로 밑으로 보인다. 이 능선 오른쪽이 성남비행장이었구나. 비행장을 보니 다시 날고 싶은 생각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듯 간질간질. 2008. 12. 초경량 항공기 조종사 자격을 따고 난 후 작년에 내가 타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제대로 날지를 못하고 있으니...
가면서 왼편으로 갈리는 길을 열심히 찾으나 보이지는 않고, 이대로 계속 가다간 더욱 더 멀어질 것 같아 이번에도 길 없는 왼쪽 골짜기로 내려선다. 내려가면서 쌩쌩 지나가는 찻소리는 점점 가깝게 들리고, 이윽고 찻길이 보이는데 용인-서울간 고속도로가 굴에서 빠져나와 계곡을 가로 질러 바로 다음 굴로 들어가고 있다. 고속도로 굴 밑으로 하여 내려가니 한적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이 골짜기는 ‘깊은 골’이다. 후후!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비하면 얼마나 깊은 골이겠냐마는, 누군가가 서울 주위에서 이 정도면 깊은 골 아니냐며 이름을 지은 모양이군. 마을 구멍가게에 들어가 길을 물으니 골짜기를 내려가면 성남 비행장이고, 헌인릉을 직접 가는 버스는 없단다.
아이고! 이거 완전히 반대쪽으로 내려왔네. 어쩐다? 지난번 인릉산에 왔을 때에 인릉산을 내려와 다시 대모산과 구룡산을 타지 않았던가? 원래 오늘도 시간이 나면 다시 대모산을 오를 생각이 아니었나? 나는 이런 생각에 다시 깊은 골 반대쪽 산 사면으로 오른다. 능선으로 오르니 반가운 이정표는 성남시계 능선일주 제6구간인 오야동 능선. 아까 인릉산 오르던 곳이 5구간인 상적동 능선이었으니 바로 인접 구간이고, 이 능선을 계속 오르면 아까 갈라서던 능선과 만난다는 얘기겠지? 나는 다시 힘을 내어 능선을 오르는데, 또다시 나타나는 이정표는 오른편 길로 가면 헌인마을이 나타난다고. 그렇지! 전에 이 길로 하여 헌인마을로 내려갔었지. 그럼 이리로 가야하는데, 나는 오기가 있어 아까 갈라진 곳까지는 가보자 하니, 이윽고 1시간 47분 만에 아까 능선 갈라지던 곳에 도착.
오늘 산꾼들 용어로 알바 많이 하는구나. 이제는 제대로 길을 내려오면서 범바위산 전망대에도 선다. 전망대에 서니 바로 건너편으로 대모산과 구룡산이 가깝게 보이고, 그 너머로 강남의 번화가가, 다시 그 너머로 남산, 남산 너머로 인왕산, 북한산, 도봉산의 산군이 뚜렷이 보인다. 왼편으론 청계산과 관악산이, 오른편으로는 한강 건너 아차산, 불암산, 수락산이 보이고... 알바 하더라도 도로 올라오길 잘했다. 하마터면 이 경치를 못 보고 내려갈 뻔 했으니...
이제 헌인마을 쪽 등산로로 들어서 내려가다보니 예전에 보았던 폐가가 된 군막사 건물이 보인다. 폐허의 건물을 지금은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이 지붕을 덮고 있다. 폐허 건물을 뒤로 하고 전진하는데, 어? 또 길이 사라졌다. 조금 더 전진하면 길이 나타나겠지 하며 전진하나 길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전진하다간 또 숲속에서 헤맬 것 같아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려고 아까의 폐허 막사로 돌아가고자 하나, 이 또한 어느 곳이었는지 모르겠다. 해가 많이 기울어진 것을 보며 순간 나는 당황하며 무리하게 숲을 헤치고 나가다 여기저기 긁히기까지... 겨우 폐허 막사에 도착하여 다시 길을 찾아 내려가니 내려간 곳은 한창 아파트 건설중인 세곡 택지개발지구.
후유~~ 몇 번의 알바와 숲속 헤맴으로 이미 기운 빠진 다리를 끌면서 헌인릉에 도착하니 시간은 4:58경. 표를 끊고 능역으로 들어간다. 바로 앞에는 순조와 순원왕후를 모신 인릉이다. 정조가 너무 일찍 죽어 순조가 11살에 등극하는 바람에 안동 김씨 정순왕후가 수렴청점을 하면서 중흥(中興) 군주, 정조의 정치를 철저히 부정하고, 이후에도 계속 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정조에 의해 잠시 부흥하려던 조선의 왕조는 몰락의 길로 들어섰지. 비각을 들여다보니 원래 순조의 시호는 순종이었는데 홍경래 난을 평정한 것을 기려 철종 8년에 순조로 바꾸었다고 한다. 보통 조(祖)라고 하면 창업군주와 창업에 버금가는 공을 세운 임금에게 붙이는 것이라고 하는데, 글쎄~ 순조도 그런가? 홍경래 난도 따지고 보면 왕이 정치를 잘못하여 일어난 것이고, 세도정치로 왕조를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는데 그 공적을 기려 시호의 격을 높인다? 글쎄다. 당시 기득권층이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역사의 전체 흐름에서 보면 순조가 정조의 정치철학을 이어받지 못한 것은 조선의 불행이었는데...
다시 발걸음을 태종의 능인 헌릉으로 옮겨간다. 태종은 조선의 임금 중에서도 피를 많이 묻힌 임금이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고려 왕족들을 거제도로 데려간다며 배에 태워 수장시키고,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 그래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지? - 고려의 유신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지. 왕이 되어서도 왕자의 난 때 자기를 도운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을 죽이고, 아들 세종의 장인 심온도 죽이고... 지금 보이는 저 무덤에는 태종과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가 같이 묻혀있다. 그런데, 민씨는 남편인 태종이 자기 오빠들을 죽이자 평생 태종을 원수처럼 대했는데, 죽어서 저렇게 나란히 묻혀서는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헌인릉을 나서면서 태종이 그렇게 손에 피를 묻혔지만 그 덕분에 세종이 걱정 없이 선정을 베풀어 한글을 만들고 조선의 학문과 예술, 과학을 꽃 피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오른편으로 저물어가는 태양광선이 나의 눈을 부시게 한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돌리니 그쪽에 보이는 건물은 국정원. 가만있자... 지금 국정원 자리가 세종의 능, 영릉이 여주로 옮겨가기 전에 자리하던 곳이 아닌가? 버스를 기다리면서 태종과 순조를 생각하며, 조선의 르네상스라고도 하던 영조와 정조 때의 실학과 새로운 사조의 부흥을 생각해본다. 순조가 충분히 정치를 펼칠 때까지 정조가 조금 더 살면서 순조를 교육시켜 자기의 정치이념을 제대로 계승시켰다면 이웃나라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굴욕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리 저리 조선의 역사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내가 타고 갈 버스는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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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릉산,래내고개, 등등 그 많은 산 이름 어찌다 외우시나요 모든 사회생활을 공부()하시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