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면류관
3장 9, 접촉(接觸=觸)의 특징에 관하여
왕은 물었다.
『존자여, 접촉(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맞부딪치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두 마리 뿔 돋은 숫양이 싸움을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눈(眼)은 한 편의 숫양으로 볼 것이요, 형상(色)은 다른 편의 숫양으로 볼 것이며, 접촉(觸)은 두 양의 맞부딪치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그것은 두 개의 악기를 마주치는 경우와 같습니다. 눈은 한 쪽의 악기로 볼 것이오, 형상은 다른 한쪽의 악기로 볼 것이며, 접촉은 두 개의 악기가 마주치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밀린다팡하>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죄를 지켜 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며 내가 주님의 말씀만을 바란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진실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시편> 130편)
오늘 <밀린다팡하>에서 “접촉은 두 개의 악기가 마주치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를 보자.
단순 접촉인가, 사고인가.
오늘 시편에서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를 보자.
이 문장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간 현실 세계에서 낭패를 보기 쉽다.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이다.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왜 종에 따라 다른 철에 꽃이 필까? 곤충에 의해 꽃가루가 이동하는 식물의 꽃피는 시기는 대개 특정 곤충의 활동시기, 생활사와 관련되어 있다. 복수초가 겨울의 추위가 남아 있는 이른봄에 꽃을 피우는 것도 이때 벌써 활동을 개시하는 곤충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는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쏟아지는 곳에는 피나물, 현호색, 애기나리 등 많은 풀꽃이 피어서 아름다운 봄의 풍경을 연출한다. 키가 작은 풀꽃들은 대개 곤충에 의해 꽃가루가 이동하기 때문에 나뭇잎이 가리기 전인 이른봄에 꽃을 피운다. 참나무, 오리나무, 자작나무는 봄철 새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을 피운다. 이들은 풀과는 달리 꽃가루가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풍매가 대부분이다. 잎이 있으면 바람에 날리는 꽃가루의 이동이 막히기 때문에 참나무, 자작나무, 오리나무는 벌거벗은 채 꽃을 피운다.]
위 글에서 “참나무, 자작나무, 오리나무는 벌거벗은 채 꽃을 피운다.”라는 문장을 보자. 생리적인 현상으로 읽히지 않고 시적인 문장으로 읽힌다.
<성경 속 나무 스토리텔링>에 나오는 글을 보자.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다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가복음 15:16~20)
4대 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체포된 뒤, 유다인의 왕나사렛 예수라는 조롱과 모욕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갈대로 왕홀을 만들어 쥐게 하였으며, 그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웠다.
많은 성서 연구자들은 그리스도의 면류관을 마든 가시나무는 가시대추(Zizyphus spina-christ L.)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식물학자 칼 폰 린네 역시 이 나무로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만들었다고 믿고, 가시대추의 종소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 나무는 갈매나무과에 속하는 가시가 있는 대추나무로 묏대추나무와 비슷하다. 히브리어 이름은 아타드(atad) 또는 나아쭈쯔(naatsuts)이고, 영어 이름은 크라이스트 쏜(Christ thorn), 즉 ‘그리스도의 가시’라는 뜻이다.
이 나무는 키가 1~3m 정도 자라는 상록관목으로, 가지가 길게 자라면 늘어지는 성질이 있다. 지중해 연안 즉 레바논, 팔레스타인, 시나이 등에 널리 분포하며, 예루살렘 구시가 주변 특히 골고다 근처에 많이 생육한다. 잎은 어긋나고 달갈형이고 대추나무 잎을 닮았으며, 턱잎이 변한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를 달고 있다. 황록색의 작은 꽃은 잎겨드랑이에 모여 핀다. 열매는 둥글고 누런색이다가 검게 변하는데, 먹을 수는 있지만 맛이 없어서 대추야자나 무화과처럼 귀한 과일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가시면류관의 소재가 된 나무로 몇 가지를 더 꼽고 있다. 그 중에 팔리우루스 스피나 크리스티(Paliurus spina-christ)라는 학명과 Christ thorn(그리스도의 가시)이라는 별명을 가진 대추나무 종류를 꼽는다.
이 나무의 어린 가지는 유연해서 화환을 만들기가 용이하다. 키가 1~3m 정도 자라는 낙엽관목으로 크지 않기 때문에, 로마 병사들이 가지를 구하기가 쉬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턱잎이 변한 가시가 지그재그로 나는데, 그 중 하나는 길고 곧게 서며, 다른 하나는 짧고 아래를 향해 구부러져 나있어, 매우 사납고 험상궂은 느낌을 준다.]
아, 가시대추는 본 적이 없고, 묏대추나무도 본 적이 없고, 대추나무는 자주 보니, 이 대추나무를 보면서 가시면류관을 떠올려 하는구나.
<길고 긴 나무의 삶>에 나오는 글이다.
[19세기 영국에 상록수 열풍이 불면서 공원이 증가했다. 에든버러에서는 마운드 아래 옛 식물원이 웨이벌리 역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인벌리스의 새 식물원 터는 훨씬 넓었고 새로 확장할 기회도 생겼지만 운송에 문제가 있었다. 으리으리한 온실을 새로 짓는다는 야심찬 계획에 소중한 나무들이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정원사들은 단념하지 않고 수레바퀴와 도르래를 갖춘, 거대한 목재 나무 운반장치를 만들었다.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조끼를 입은 남자들의 무리가 거대한 사이프러스가 높이 실린 수레를 잡아당기고 있다. 운송을 지휘하는 사람은 중산모를 똑바로 쓰고 연미복을 입은 신사로, 아마 식물원의 큐레이터인 듯하다. 구경꾼으로는 허리에 손을 얹은 (그리고 분명 이 모습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풍만한 여성이 있다. 사진 속 거대한 사이프러스는 분명 A급 스타였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에 변조를 가하는 종(種)이다. 어쩔 수 없다.
<나무처럼 생각하기>에 나오는 글이다.
[나무를 벗 삼았던 옛 조상들로부터 우리는 나무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육체를 물려받았다. 나무는 인간의 형태를 만든 첫 번째 틀이다. 또한 자신의 흔적을 우리 몸에 새기고 우리의 형체를 조각하고 진화하는 여정을 안내했다. 우리는 주변을 가득 메운 나무와 항상 가까이 살아가던 옛 조상들에게서 사는 법을 배우고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위 글에서 “나무는 인간의 형태를 만든 첫 번째 틀이다.”라는 문장을 보자. 보고 배우고 닮는다는 데, 진짜 우리는 나무 같은 구조를 갖게 되었을까. 흥미롭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그는 이것들과도 관계를 청산하였으며, 이것들도 그의 내면에서 죽어버렸다.]
문장을 꼼꼼히 보면서 든 생각은 언어라는 게 실체가 없다고 막 나가는 것 같다. 그 꼬임이 예술 같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대추나무에 가시면류관이 입혀졌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 훌륭한 예수의 머리에 얹혀진 가시 면류관
피가 흐르는 얼굴들
그분이 감내했을 고통들
그 고통들에 비하면 너무 쉽게 사는 세월들
대추나무에 가시면류관이 입혀졌다
나무 공부가 때로는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