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받지 않은 살인사건들 | 의살
우리나라의 법이 조선시대의 법에서 발전해오지 않았다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현행법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일본 아니면 어디겠는가.
우리나라에도 쓸만한 법들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일본의 것들로 뜯어 바꾼 대표적인 사례이지.
가만히 보면 정당방위 측면에서 한국의 법은 공산당의 법과 유사하다.
내 집에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오면 집주인이 잡아야 되는데, 그 강도를 정부에서 관리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공산당과 같은 사회주의에서 오지 않았다면 무엇인가.
내가 농사를 지었다.
그럼 그 농사지은 농산품은 내가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관리한다 하면 그것이 공산당 아니던가.
무엇이 다른가.
만약에 강도의 일례에서 보듯이 그 법에 동의한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 물어보자.
당신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
그 강도가 당신의 집 물건을 강탈하고 가족중 누군가를 죽이거나 다 죽였다면 그것을 국가에서 보상해 줄 것인가?
다 죽은 마당에 누구에게 보상할 것인가.
정당방위가 지금처럼과 달리 합리적이라면 집에 강도가 드는 것은 미연에 방지가 될 것이다.
사실 위의 강도건에서 법이 판단을 개판처럼 하는 이유도 누군가 악용하는 사례(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인 후이거나 죽이기 전 끌어들여 집에서 죽이는 계획범죄) 같은 경우가 있을까 우려한다는 생각에서 이겠지.
요즘 널린 게 cctv인데 과거와 같은 판단기준은 오히려 올바른 판단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되는 것이지.
저 동영상에서 정약용의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판단과 기준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정약용이 그 부녀자의 입장과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고, 정약용이 살아온 환경 또한 부녀자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부녀자가 잘 했다는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에 자신이 겪은 현실에서, 앞으로 아이들이 겪을 이 세상이라는 것이 심히 두려웠다는 것은 사건 자체에서도 느껴진다.
그러면 가해자의 잘못이 최우선 판단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피해자인 부녀자의 잘못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법관의 입장으로 볼때 사건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 아닐까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시대 조선시대 하면서 욕들 많이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직접 여인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편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가 그리 유교적이지도 않고,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남존여비가 뿌리깊지도 않았다는 방증이지 않겠는가.
선조들의 일부를 보고 전부를 오판하는 우를 범한 것이 오늘날 우리 모습이지 않을까 한다.
요즘은 애고 어른이고 겁이 없다.
버릇없다는 말은 이집트 시대부터 있었다고 아해들이 노래를 부르니, 버릇없는 것은 둘째치고 겁까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남에게 해를 끼쳐 자신이 죽을 만큼의 죄가 인정되는 상황 자체를 만든 것에 대해 두려워 해야 한다는 것이인데 그런 것이 없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오히려 당당하다.
그래놓고는 다짜고짜 반말에 욕을 싸질러 놓는다.
그러면 뒤지게 맞던지, 그 정도에 따라 정말 죽을 죄가 인정되 죽던지 양단간에 결정을 누군가 내려주지 않는다면 힘들게 된 세상이 되었다.
단순히 잡아 가둘 잘못과 분명히 구분되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지금의 반역도(국짐)당 인간들과 멧돼지처럼, 잘못은 지들이 해놓고 적반하장 저리가라 할 정도로 목소리 큰놈이 이길 것처럼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러대다가는 정말 멱이 따이는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 인간이라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언가 해가 되는 행위를 했다면 자신도 그에 따른 벌을 언젠가 누군가에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두려워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고, 벌은 항상 죄를 따라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