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黃東奎) - 청령포(淸泠浦)
늦눈
대철(大哲)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시인들을 몽땅 내쫓았다며,
노점상인 쫓듯이, 좌판들을 뒤엎고!
거 참 잘한 짓이지
가객(歌客)은 이따금 불러 창(唱) 한차례 듣고
술 멕여 보내는 거여.
아문!
술 먹고도 행복지 않은 자나
행복지 않은 체하는 자들은 꼬리표를 달도록.
꼬리표를 달아 어디로?
청송 보호감호소?
아니, 영월 청령포로 보내지.
스스로 자수해 신고하는 자도 있겠지.
어느 늦눈 뿌린 날 오후, 영월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려
택시 잡아타고 청령포로 달려가
강을 가로질러 매어논 와이어를 잡고 건너는
밑이 평평한 배를 타고 서강(西江)을 건너곤
며칠 동안은 소리쳐 불러도 모른 체하라고
사공에게 돈 주며 사정하는 자도 있겠지.
눈 뿌린 끝이 환한 날.
금표비(禁標碑)
삼면이 강물이고 뒤에는 육륙봉(六六峰) 험준한 봉우리
그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송림(松林) 오천 평.
“동서 삼백 척 남북 사백구십 척
이 밖으로는 절대 나갈 수 없음”.
늦겨울 햇빛 눈부신 눈이불 속에
송림이 따스하다.
금표비 곁에 조그만 움집 하나 짓는다면
힘든 계절 하나를 예서 나고 싶다.
먹을 것 한 짐 싸지고 들어가
눈을 쓸고
종아리까지 빠지는 삭정이와 솔잎 걷어
밝고 가벼운 불 지피고
아침 저녁 서강물로 씻어내면
정신의 군더더기는 며칠 내 절로 빠지겠지.
꿈속에서마저 살이 마른 며칠 후
새로 구멍 뚫어 허리 조인 혁대를 매고 강가에 나가
불러도 건너오지 않는 사공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이건 비밀이다.
신발과 양말 벗고 몸이 더 가벼워져
흐르는 얼음장 피하며 물을 살짝살짝 밟고
유유히 걸어 강을 건너볼 것인가?
청령포의 봄노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얼음장 하나에 네댓씩 올라가
때로는 발을 구르며
긴 막대들을 삿대처럼 저으며.
얼음장들이 노래하고 있다.
강 건너에는 어느샌가 여자애 여남은 명이 모여
재잘대고 깔깔대며 얼음뱃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저녁 햇빛을 받아
얼굴들이 모두 환하다.
빛나는 것들이 재잘대고 깔깔거린다.
얼음들이 노래한다.
청령포가 오르내린다.
노래하고 웃는 것들 앞에서
노래하고 웃는 몸짓이라도 해야 할까
마음을 온통 바람에 맡기고......
저놈 봐!
애 하나가 자지러지듯 웃다가 미끄러져 물 속에 빠진다.
앗 차거!
그 애와 내가 동시에 떨며 건져진다.
위아래 이가 힘차게 부딪칠 때
한참 밝게 웃는다.
*황동규[黃東奎, 1938. 4. 9.~, 서울 출생, 부친 황순원(黃順元)] 시인은 서울대학교 영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수학한 후 교수를 역임하였고,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등단하였고, 세련된 감수성을 바탕으로 서정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풍장’, ‘비가’(196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등이 있으며, ‘사랑의 뿌리’(1976), ‘겨울의 노래’(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꽃의 고요’, ‘사는 기쁨’,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2001), ‘삶의 향기 몇점’(2008) 등의 산문집이 있습니다.
*시인은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위 시는 “황동규 시전집” ‘어떤 개인 날~악어를 조심하라고?’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인데,영월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되어 일 년을 보내고 죽임을 당한 곳, 청령포 송림 안에는 단종의 행동을 제약하는 명령문이 새겨진 금표비가 지금도 서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