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사도행전(10장~13장) 묵상
※ 최초로 선교사가 파송되다(행13:1~3)
사도행전 13장에는 세계 최초로 선교사를
이방인들에게 파송한 안디옥 교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13:1)
다섯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이름이 소개되어 지고 있다.
다섯 명의 이름을 한 사람씩 거론한걸 보면
안디옥 교회에는 말씀을 잘 가르치는 선지자와 교사가
다섯 명씩이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안디옥 교회는 말씀이 충만한 교회였다.
보내는 교회의 첫 번째 모습은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라는 것이다.
다섯 명의 이름 안에는 다양한 정보가 들어 있다.
다섯명의 리더가 모두 사회적 배경이 달랐다.
먼저 바나바는 사도행전4:36절에,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라고 적혀 있는 걸 보아
유대인이긴 하지만 구브로 현재 싸이프러스(Cyprus)라고 불리우는
요즘 시리아 난민들이 많이 온다는 구브로 섬 출신이었다.
그 다음 리더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인데 니게르는 흑인이라는 의미이다.
이 당시 북아프리카인 중 크리스챤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떤 연고인지 북아프리카에서 온 리더였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이다.
구레네는 요즘식으로 하면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있는 도시이다.
곧 이 사람도 북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왕족 출신이다.
그런데 헤롯 왕가는 순수 유대인들은 아니었고 이두매족 출신이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사울이다.
물론 사울은 유대인이지만 출생지는 다소라는 소아시아의 작은 도시였다.
다섯 명의 선지자 내지 교사들이 모두 이처럼 다양했다.
어떻게 이들은 이처럼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었지만
교회를 하나로 이끌고 나갔을까?
어느 신학자는 말하기를 사도행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안 나온다고 하는데 이유는 사랑은 그들의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섯 지도자가 서로 사랑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쉽게 확신할 수 있다.
안디옥 교회는 말씀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던 것이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의 ‘Art of Loving’이라는 책이 있다.
‘사랑의 기술’로 한국에서도 번역된 책인데,
그 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그때 그때마다 노력하고 개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다섯 명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달랐지만
공통적인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모두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이민자들 그룹이었다.
그들은 말씀 안에서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안디옥 교회가 왜 이처럼
세계 역사를 바꾸는 교회가 되었는지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떠난 자들의 교회였고 떠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들) 교회였다.
이처럼 조화로운 안디옥 교회에 놀라운 일이 생긴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그들은 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금
식하고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는 인류 최초의 선교사 파송식이었다.
안디옥 교회는 말씀의 교회, 사랑의 교회, 기도의 교회였는데
이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최초로 세계 선교사들을 보내게 하신 것이다.
그들은 기둥 같은 교회의 지도자 둘을 선교사로 과감하게 보냈고
그 결과는 엄청난 이방 선교의 열매를 거두었다.
좋은 교회 좋은 선교사들이 뭉쳐서 좋은 복음의 열매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3).
나는 얼마 전 광주의 양림동 호남신학교 동산에 묻혀 있는
서서평 선교사의 무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너무 존경스러워 무덤 앞에서 그녀의 비석을 붙들고 울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의 원인은 놀랍게도 만성 영양실조와 풍토병이었다.
선교사 생활비로 받았던 월급은
자신의 몸 하나 지켜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소식은
선교사들뿐 아니라 당시의 광주 지역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녀가 남긴 재산이라고는 자신의 몸을 가릴 담요 반쪽,
노동자의 일주일 품삯에 지나지 않는 7전과 강냉이 가루 두 홉이 전부였다.
그녀는 한센인들로부터 아들 딸 13명을 입양해 키워냈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받아들여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성경학교(李一聖經學校·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시작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어머니”라 불렀다고 한다.
그녀가 죽자 당시의 언론들은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하여
`작은 예수`라며 그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동아일보》는 1934년 6월 29일 자 사설로
‘위대한 인류애, 서서평씨 영전에’라는 글을 올렸다.
보리밥 된장국에 고무신을 끌고 다녔던 서서평을 소개하며
큰 존경과 애통을 표하는 글을 게재했다.
그녀가 기꺼이 택한 가난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부와 재물을
한국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눈 데서 비롯됐다.
그녀가 한국 땅에 와서 행한 삶의 방식은
누가 강요해서 이행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를 사랑하는 믿음의 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에 수백 명의 광주천(光州川) 거지들과 한센병 환자들,
과부들과 고아들이 어미 잃은 시름과 슬픔에 울음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통곡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마치 비행기 소리 같았다고 한다.
그녀는 뼛속까지 조선인이 되고자 애썼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
남자용 검은 고무신을 신었다고 했다.
된장국은 그 독특한 냄새 때문에 서양 사람들이 가장 혐오했지만,
그녀는 된장국을 먹으면서 조선에 동화되기를 자처했다.
그녀는 늘 고아들을 등에 업고 다녔다.
당시에는 한국의 고아, 병든 자를 양육하기 위해
미국에서 들어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 처녀 선교사들이
광주 양림동 선교사촌에 살고 있었는데 서서평을 비롯해
수피아 여학교 교장이었던 플로렌스(Florence Root),
도슨(Dodson), 매퀸(Mcqueen Anna),
프리처드(Pritchard Margart) 등이 그런 분들이다.
한국 교회는 이제 그 사랑의 빚을 세계선교로 되갚아야 한다.
나도 선교사이지만 그런 위대한 선배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감히 선교사라고 불려질 자격이 없는 자라는 생각이 든다.
- 꿀송이 보약 큐티, 365일 성경 통독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