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고맙습니다. 저도 김용택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철부지 글을 보고도 탓하지 않고 잘 타이르는 모습에서 따뜻한 애정을 느낍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 잘 마무리하시길 빕니다. [12/18-11:14]
김유진이 하리수인가?당신 내 글 필독!!!
먼저.....
선배님들과의 토요일 참석 못했습니다.고개숙여 인간으로써의 약속 어긴점 너그러운 용서 받아주십시요.
김유진씨....
당신 참, 세상 너무 좁게 판단된다고 생각됩니다.김유진씨가 주장하는 부분 인정합니다.단지,극히 일부분을 가지고 마치 전부인양 세몰이 하시고 이곳에 글을 올리는 용기 존경이 갑니다.
암요....비아냥이 아닌 진심입니다.정말 존경 합니다.그 용기...
결론적으로 잘못된 용기는 만용이 됩니다.그 잘못은 김유진씨자체가 아닌 님의 편협된 다방면의 지식이라는겁니다.
우리파월 장병들은 좋은일 더 많이 했습니다.그것은 바로 우리 국익이였습니다.
그리고.....
이분들도 피해자입니다....아셨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요.우리가 지금 이렇게 자유로이 지내는것이 다 누구의 덕이라 생각되십니까?우리는 항상 우리 어르신들에게감사함의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그리고 우리 후손에게도 올바른 시각으로 알려야 되고요...이게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쟁은 항상 상대성이 동반 됩니다. 그 부정적인것....그리고 긍정적인것...당신이 건전한 생각과 진심으로 조국을 위한다면 어찌 이런 당돌한 글을 올리시는지요.
이분들 전쟁을 깊이 알기에 되새기길 원치 않습니다.영화를 만드신다고요?영화가 뭐 동네 장사하는겁니까?그만한 자금 준비는 되었습니까?...
유진씨 의도의 영화는 감성적이라는 것입니다.우리 다수 건전한 국민에게 공감없어요...
현실과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모든걸 감성적으로 판단하시면 위험합니다.여러분야에 박식해야 해답이 나올까 말까 합니다.
저는 단정합니다.
당신의 의견은 민주국가에서 수렴하지만 다수에 의한 다수의 공감 얻기는 힘이 든다는 점 입니다.
님의 글은 이곳에 계신분들에게 묻지 마시고 그리고 장성으로 진급하신분들에게도 묻지 마십시요.한번이라도 국립묘지에 누워계신분들의 영혼을 위로했다면 감히 이런 어설픈 논리성 글 올리지 못합니다.
님의 글은 차라리 우리 위정자들에게 묻길 바랍니다.그리고 보다 더 넓은 분야의 지식에 깊이 연마에 주십시요.
제가 한국군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전쟁은 이런 비극을 낳습니다.모든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극히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군인도 인간이기에 감정과 이성이 있습니다.그러나 전쟁에서는 인간은(군인이건 민간인이건...) 존재하되 이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하나밖에 없는 목숨 누가 지켜줍니까? 바로 자신이 지켜야 됩니다.이게 전쟁이고 생리 입니다.그래서 이분들은 전쟁을 가장 혐오합니다.
왜냐?
전쟁을 실로 체험 했다는 겁니다.경험있는사람과 없는 사람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이곳에 계신분들은 참 암울한 근대 한국사에 태어나서 지금의 우리조국을 있게 만들었습니다.그렇다고 내세우지도 않습니다.이런점 우리 10분의1이라도 배우자는 겁니다.그게 이분들에게 보답이고 후손에게 당당히 물려줄 떳떳함입니다.
절대 가슴의 못질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셨습니까?
그래도 제말 이해 못하십니까?...
저...전쟁 경험 못했습니다.
그러나 군 생활중 다대포 생포간첩사건을 직접 접하면서...
그리고...
제가 존경했던 하급부대의 분대장(제 형님뻘...)으로써 참 다스한 인간성을 지닌분이 근무중 그것도 빗길에 넘어지면서 발사된 총탄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하급자가 충분히 대처할 상황인데도 워낙 인간적이고 부지런했기에 상급자로써 솔수수범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전시가 아닌상황임에도 저는 그 하급자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제가 너무 과격했나요?.....
(지금 이 사건을 생각하면 요즘 부지런한 사람이 환대는 뒷전이고 돌맹이 맞는 세상입니다.이해되나요?)
김유진씨! 당신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혹시 내 후배 카페 박정학에 들어오는 그 김유진씨인가요?
당신 정말 대한민국 국민입니까?
왜 이곳에 계신분들을 가지고 물고 들어지시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 전쟁 아십니까?
사랑입니다.진정한 사랑은 모든걸 새롭게 보여줍니다.
김유진씨...
바보가 되십시요...그럼 김유진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로써 이곳에 계신분들의 역사적 의미를 진정으로 편견없이 받아들이게 될 것 입니다...
제 글에 반박의 글 올려주시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곳에 계신분들까지 매도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인천에서 김용택 배상-
잠자던 진실, 30년만에 깨어나다
ꡒ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무엇을 했는가ꡓ…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비밀해제 보고서․사진 최초공개
<한겨레21>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미군쪽의 공식문서와 사진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는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National Archives &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2000년 6월1일 30년 만에 비밀해제된 것으로, <한겨레21>이 여러 경로를 통해 최근 입수한 것이다.
이 문서들은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에서 주월미군사령관 및 군부 고위장성에게 보낸 보고서와 사진, 각종 첨부문건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A4용지규격 총 554장(겹치는 부분을 제외하면 실제로는 150여장)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100여종의 문서로 이뤄져 있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실재했고, 이에 대한 한-미간 의견교환과 협조가 이뤄졌음을 확인시켜주는 최초의 미국 공식문서이다. 지금까지 국방부는 ꡐ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의혹ꡑ과 관련문서의 실재 여부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해왔다.
이 보고서는 ꡐ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의혹ꡑ과 관련해 크게 세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중 1968년 2월12일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에서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은 <한겨레21>이 지난 280호 현장르포 ꡐ단명의 길, 디엔반의 비명ꡑ과 306호 표지이야기로 특종보도한 ꡐ베트남 양민학살, 중앙정보부가 조사했다ꡑ의 취재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건은 처음 알려지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퐁니․퐁넛촌 보고서에 첨부된 20장의 현장사진이다. 이 사진은 한국군이 마을을 공격하고 철수한 뒤 미군 상병 본(J.Vaughn)이 도착해 촬영한 것으로,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여성과 아이들인 것으로 드러나 있다
물론 베트남전의 궁극적 책임자인 미군쪽이 작성한 비밀보고서엔 한국군에 대한 미국쪽의 편견이 개입됐을 여지가 있다. 작성자의 일방적인 주관에 근거해 작성된 부분도 있을 수 있으며 일부 사실은 부정확할 가능성도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겨레21>은 자료 속에 등장하는 한국군 관계자들에 대한 확인취재를 하기도 했다.
<한겨레21>은 앞으로 이 자료를 작성한 미군쪽 관계자들도 취재해서 후속보도할 예정이다.
편집자
(사진/미군 상병 '본'이 한국군의 퐁니․퐁넛촌 공격 직후 찍은 여성과 아이들의 주검사진(맨위). 아래사진에 대해 그는 ꡒ이 아이는 몸 어느곳에도 상처가 없다.근처 연못에서 익사한것으로 보인다ꡓ고 적었다)
1969년 12월23일.
베트남 사이공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샘 샤프(Sam H.Sharp) 대령은 자신을 발신자로 한 비밀보고서 한부를 주월미군사령부 참모장 타운젠트 소장에게 제출한다. 제목은 ꡐ1968년 2월12일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ꡑ.
이것은 시작이었다.
정확히 18일 뒤인 1970년 1월10일,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또다른 고위장교 로버트 쿡(Robert M.Cook) 대령도 비밀보고서 한부를 참모장에게 건넨다. 제목은 ꡐ1969년 4월15일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ꡑ.
그리고 바로 이튿날인 70년 1월11일, 쿡 대령은 또다른 사건의 보고서를 같은 상관 앞으로 보낸다. 역시 사건날짜만 다른 제목이었다. ꡐ1968년 10월22일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ꡑ.
연말연시, 미 국무부엔 비상이 걸리다
세 가지 사건이 잇따라 보고된 것이다. 68년 2월12일, 69년 4월15일, 68년 10월22일, 이날에 각각 일어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의혹. 각 보고서에는 여러 가지 첨부문서가 덧붙여졌다.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 및 미국․한국․월남군 병사들에 대한 조사반의 인터뷰 내용과 진상조사 결과, 사건현장의 사진, 각종 메모들….
물론 감찰부와 참모장 사이에서만 보고서가 오간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워싱턴의 미 국무부와 사이공의 미국대사관, 그리고 주월미군사령부는 ꡐ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ꡑ 문제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왜 그랬던 것일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각종 보고서들의 내용을 짜맞춰 정황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1970년 2월24일 열리는 미국 상원의 사이밍턴 청문회를 두달 앞두고 미 국무부는 어떤 정보를 입수한다. 68년 7월 랜드재단(Rand Corporation)이 미 국방부의 용역을 받아 ꡐ베트콩의 정치양식ꡑ(The Viet Cong Style of Politics)이라는 보고서(이른바 ꡐ랜드보고서ꡑ)를 발간했고, 여기엔 한국군의 잔혹행위에 관한 사항이 일부 포함돼 있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이 문제가 일부 의원들에 의해서 제기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미 국무부는 이에 따라 주월미국대사관을 경유해 주월미군사령부에 메시지를 보낸다(주월미국대사관에 한국군의 학살 의혹에 관한 정보를 요구했고, 대사관은 이 훈령을 받은 즉시 주월미군사령부에 국무부의 요구를 전달했다). ꡐ랜드보고서ꡑ에 나온 한국군 학살 의혹 사건들과 함께 ꡒ당신들이 가지고 있을 정보ꡓ(infomation that you may have)를 추가로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 메시지를 수신한 주월미군사령부는 감찰부로 하여금 ꡐ랜드보고서ꡑ에 나온 한국군 잔혹행위 의혹의 진상과, 그동안 내부적으로 조사된 바 있는 해병 제3상륙전부대(당시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 해병부대) 내부의 조사문건을 확보토록 했다. 이 문건은 미 국방부 합참의장(휠러)과 태평양사령관(메케인)을 경유하여 미 국무부에 보고된다.
그런데 주월미군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주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ꡐ랜드보고서ꡑ가 아니다. 네이선 라이츠(Nathan Leites) 교수가 베트콩의 정치적 동기를 연구하기 위해 베트남 학생들을 시켜 포로․난민 수백명을 인터뷰한 이 자료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에 대해,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는 ꡒ근거가 박약하다ꡓ는 결론을 내렸다. 9명의 인터뷰 과정에서 나온 한국군의 양민학살 의혹(랜드보고서 87~93쪽에 실렸음)중 8개의 증거자료가 단순한 풍문에 근거한 듯 여겨져,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가 미 국무부의 ꡐ추가정보 요구ꡑ에 따라 보고했던 3가지 사건은 달랐다. 이 사건들은 랜드보고서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먼저 각 사건의 개요를 보자.
심상치 않은 세가지 사건
(사진/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비밀보고서표지(맨위)와 감찰부 로버트 쿡 대령이 사령부 참모장에게 보낸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의혹'보고서)
1. 1968년 2월12일 사건.
장소 : 쿠앙남(Quang Nam)성 디엔반(Dien Ban)현, 퐁니(Phong Nhi)․퐁넛(Phong Nut)마을. 상황 : 한국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가 마을 주변을 일렬종대로 지나던 중 저격을 받자 마을을 공격. 앞 소대에서 민간인들을 후송시켰으나 뒤에서 대부분 사살됨. 희생과 손실 : 79명(또는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 해병 1명 부상.(<한겨레21>이 확인한 해당일 작전명 : 괴룡1호 작전)
2. 1969년 4월15일 사건.
장소 : 쿠앙남성 지 쑤옌(Di Xuyen)현, 푹미(Phouc My)사.
상황 : 한국 해병 2여단 2대대7중대3소대가 지뢰제거 중 폭발사고 뒤 저격받은 것으로 추정. 그뒤 다시 저격받는 과정에서 수류탄 사고로 한국군 사망. 한국군 전략촌을 무차별 공격. 그뒤에도 4.2인치 20발과 81미리 20발 포격, 그중 일부가 전략촌에 떨어져 미 육군 장교 1명과 2명의 사병이 부상.
희생과 손실 : 베트남 민간인 4명 사망, 12명 부상, 7명 구타, 대규모 재산피해. 지뢰폭발로 한국 해병 1명 사망, 4명 부상, 미 해병 다수 부상.(<한겨레21>이 확인한 해당일 작전명 : 승룡10호 작전) 쪽과 33쪽 상자기사 참조
3. 1968년 10월22일 사건.
장소 : 쿠앙남성 호앙 쩌우(Hoang Chau)마을.(현재는 사라진 구 남베트남 정부 지명. 확인 결과 호아바아(Hoa Bang)현, 호아 쩌우(Hoa Chau)사일 가능성. 현재는 쿠앙남성에서 다낭(Da Nang)시로 편입.
상황 : 한국 해병 2여단 2대대 6중대 1소대가 야간방어진지 구축 중 저격당하자 마을을 공격한 뒤 포위(<한겨레21>이 ꡐ해병전투사ꡑ를 확인해본 결과 당일 유사한 작전을 벌인 중대는 2대대 5중대 1, 3소대로 나옴)
희생과 손실 : 베트남 민간인 22명 사망(8명의 어린이와 12명의 성인- 합계 불일치- 필자 주), 베트남 민간인 16명 부상(5명의 어린이와 11명의 성인), 13마리의 물소 사살, 95채의 주택이 100% 파괴, 1천개의 저장고 파괴. 초기 작전중 한국 해병대 대원 일부 사망.(<한겨레21>이 확인한 해당일 작전명 : 승룡3호 작전)
*** 세 작전 모두 <파월한국군전사>와 <해병전투사>에는 민간인 피해가 언급돼 있지 않다.
먼저 첫 번째 사건을 보자.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에 따르면, 퐁니․퐁넛마을 주변에서 작전하던 한국 해병대에 의해 주민들이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사살되었다. 보고서는, 몇몇 피해자들이 칼에 찔렸고 한 젊은 여인은 가슴이 도려내어졌으며 총 79명(또는 69명)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고 마을이 불태워졌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당시 사건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미 혼합작전 소대 본(J.Vaughn) 상병은 처참하게 죽은 주검들을 자신의 카메라로 촬영했고, 인화된 흑백사진들은 그뒤 각각에 대한 본의 설명과 함께 조사반의 조사보고서에 첨부된다. 사건 6일 뒤인 2월18일, 미 해병 제3상륙전부대 참모차장의 구두명령에 의해 두개 마을의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당일 조사반의 보고서가 해병 제3상륙전부대 사령관에게 전달된다. 이틀 뒤 보충조사가 실시되고, 4월16일엔 해병 제3상륙전부대 사령관의 이름으로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몰랜드에게 보고서가 올라간다. 보고서 후반부엔, 당시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해병2여단장 김연상 준장(여단장 임기 66.12.20~68.8.4)에 대한 임기연장을 거부한 이유를 분석한 내용도 나온다. 암시장 거래등의 책임을 물어 여단장을 해임했지만, 실은 퐁니․퐁넛 사건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다.
한-미-월 합동조사반이 구성되다
(사진/퐁니․퐁넛촌에서 이 사진을 찍은 '본'은 ꡒ가슴이 도려진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ꡓ라는 설명문을 달았다)
퐁니․퐁넛 사건을 보고받은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은 4월29일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중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ꡒ제네바협약의 서명국으로서 미국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내려진 것ꡓ이라며 한국군 해병들의 전쟁범죄 가능성을 물었다. 채명신 사령관이 이 편지에 응답한 것은 6월4일. ꡒ퐁니․퐁넛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음모ꡓ라는 결론이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한국군의 III급 비밀 조사보고서도 첨부했다. 이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주월한국군의 ꡐ한국군 양민학살 의혹ꡑ 관련 자체보고서이다.
미군쪽 자료에 따르면, 당시 주월한국군은 ꡐ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ꡑ과 관련해 자체조사뿐 아니라 미국-남베트남 정부군과 함께 합동조사반에 참여했다. 그것은 두 번째 사건인 69년 4월15일 사건 때문이었다. 이는 소탕작전을 실시하던 한국 해병 2대대7중대3소대가 저격을 받은 뒤 1명이 부비트랩 매설지점에서 수류탄을 제거하려다 폭발사고로 사망하자, 이에 흥분하여 전략촌에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다음날, 베트남 제1군단 사령관 호앙 수언 람(Hoang Xuan Lam), 이동호 해병 제2여단장, 미국 해병 제3상륙전사령부 니커슨(W.Nickerson) 중장 명의로 1969년 4월15일 사건에 대한 합동조사반 구성이 공표된다. 이 한-미-월 합동조사반에는 해럴드 체이스(Harold W.Chase) 미군 해병 대령, 차오 칵 낫(Cao Khac Nhat) 베트남 육군 중령, 이영주 해병 제2여단 소령이 참여한다.
조사결과가 보고된 것은 69년 5월10일. 합동조사반은 남베트남 제1군단 사령관에게 보낸 극비문서를 통해 다음을 포함한 7가지 결론을 내렸다. ꡒ지뢰와 수류탄 폭발로 인해 지뢰제거팀에 희생자가 발생했고 저격으로 인한 고통을 당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나, 한국 해병이 광분 상태에서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ꡓ 이와 함께 합동조사반은 문서에서 ꡒ한국 해병여단은 푹미촌의 민간인들에게 발생한 사망․부상․상해․재산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이른 시일 안에 지급할 것, 책임자들에게 적절한 징계처분을 내릴 것ꡓ 등을 권고하고 있다. 이 합동조사보고서 문서에 대해 당시 해병 제2여단장인 이동호 준장도 사인을 했으며, 이는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에 첨부돼 있다.
68년 10월22일 일어난 세 번째 사건도 두 번째와 비슷하다. 그 전날 밤 10시께 호앙 쩌우마을 외곽에 야간방어 진지를 구축한 해병 2대대 7중대 3소대가 규모를 알 수 없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대원 일부가 사망한다. 해병대원들은 즉각 마을을 향해 M72 LAW 및 소화기를 이용해 직격사격으로 대응하고 마을을 포위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2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한국군은 주민들을 한곳으로 모이게 한 뒤 약탈을 했다는 것이다. 사건 하루 뒤 마을 주민들이 이 사건에 대해 항의시위를 준비하자, 한국군 해병대는 20포대의 쌀과 200포대의 옥수수유, 30통의 식용유를 지급했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ꡒ절대로 절대로 언론에 알리지 말라ꡓ
위의 세 가지 사건은 모두 베트남 중부지역인 쿠앙남성에서 1년2개월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연속되는 ꡐ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ꡑ에 대해서 남베트남 정부의 태도는 어땠을까. 또 한국군에 대한 현지의 민심은 어땠을까.
다낭시에 파견된 미군쪽 정치고문 제임스 맥(James F.Mack)은 1969년 4월25일, 주월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Nicholas G.W.Throne)에게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다. 제목은 ꡐ한국군 해병 제2여단이 1969년 4월까지 쿠앙남 지방에서 행한 활동개요ꡑ. 16종의 첨부문서가 붙은 이 보고서엔 ꡐ학살 의혹ꡑ뿐 아니라 당시 쿠앙남성에 주둔했던 한국군의 양태들이 묘사돼 있다.(28~30쪽 기사 참조) 이 보고서는 한국군을 대단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제임스 맥의 보고서에 따르면, 69년 4월15일 사건 직후 그와의 인터뷰에 응한 쿠앙남성 디엔반현 현장 레 킴 부(Le Kim Vu)는 이렇게 말한다. ꡒ우리 성에 주둔중인 한국군에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라고 부탁하기가 꺼려진다. 마을로부터 사격을 당하면 1968년 2월12일 사건이나 그뒤 사건과 마찬가지로 주민을 모아놓고 그들 중 몇명을 보복사살할까 두렵기 때문이다.ꡓ
다시 1970년 1월로 돌아가보자. ꡐ한국군의 잔혹행위 의혹ꡑ과 관련해 급박하게 돌아가던 미 국무부-주월미국대사관-주월미군사령부 라인은 번개를 맞는다. 1월10일치 <뉴욕타임스>에 실린 재월 인문과학연구소 전 소장인 테리 램보(Terry Rambo)의 글 때문이었다. 람보는 이 글에서 ꡒ한국군이 수백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을 살해했고 주월미군사령부의 고위장성이 한국군에 대한 조사를 중단시켰다ꡓ고 주장했다.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 미 국무장관은 즉각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ꡒ한국군 관련사건에 관한 보고서가 절대로 절대로 언론에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ꡓ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주한미대사 포터(Porter)는 1월10일 로저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ꡒ한국의 <동화통신>이 <뉴욕타임스> 보도에 대한 한국 정부 관계자의 반응에 관해 보도했다ꡓ고 전하고 있다. 포터는 또한 다음과 같이 한국 내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ꡒ청와대에서는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최규하 외무장관 등이 모여 긴급히 우리와 토의했다. 청와대는 한국 언론매체들이 이 이야기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했다.ꡓ 그리고 포터 대사는 13일 뒤인 1월23일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또다른 전문에서 ꡒ1월22일 두명의 한국군 장교가 한국해병의 베트남 민간인학살 의혹 보도를 조사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출발했다ꡓ고 전하고 있다. 전문에 나온 장교 두명은 합참 작전참모부장 김여림 준장과 합참 정보참모부 무관 담당 김명희 대령이었다(33쪽 상자기사 참조).
어쨌든 미 국무부의 우려와는 달리 70년 2월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ꡐ한국군의 잔혹행위 의혹ꡑ은 큰 논란이 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가 관련보도를 하는 등 ꡐ찻잔 속의 태풍ꡑ도 없지 않았지만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뒤 ꡐ한국군 잔혹행위 의혹ꡑ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은 비밀로 취급돼 30년 동안 기나긴 잠을 자야만 했다.
고경태 기자k21@hani.co.kr
베트남의 뜨거운 감동!
ꡐ한국군 양민학살ꡑ 사죄 노력, 한국에 대한 선입관을 전복하다
(사진/'구수정과의 교류'가 끝나자 베트남 청년들의 꽃다발이 이어졌다)
ꡒ베트남 교민들과 무슨 ꡐ웬수ꡑ라도 졌나.ꡓ
호치민에서 사업을 하는 박아무개(38)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겨레21>이 사사건건 교민들에게 딴죽을 건다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지난 5월 ꡐ신라이따이한 문제ꡑ를 제기할 때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한번쯤 경종을 울려줄 만한 교포사회의 현실 아니었던가. 그런데 6개월이 채 안 돼 ꡐ베트남전의 한국군 양민학살ꡑ 문제가 또 터졌다. 더구나 이 기사는 베트남의 유력 언론인 <투오이쩨>와 <일요 투오이쩨>가 ꡐ받아ꡑ 크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한달도 안 돼 호치민의 베트남인들 중 이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돼버린 것이다. ꡒ30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을 새삼스럽게 들추는 게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답답하다ꡓ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 <한겨레21>이 9월2일치(273호)로 보도한 ꡐ베트남 특별종단르포-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ꡑ는 이제 베트남 국민 모두의 관심거리가 됐다. 호치민국가대학 교정에서 만난 넛(21․신문방송학과 2학년)은 <한겨레21> 르포를 소개한 <투오이쩨> 기사를 아예 복사해서 수첩에 지니고 있었다. ꡒ처음 보도됐을 때는 둘 이상만 모이면 ꡐ한국군의 양민학살ꡑ 이야기를 했다. 북부지방 출신 친구들은 ꡐ처음 듣는다ꡑ고 하고 실제 양민학살이 있었던 중부지방 출신들은 ꡐ이미 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ꡑ라고 해서 토론이 끊이지 않았다.ꡓ <일요 투오이쩨>가 관련기사를 3주 연속 보도하는 것은 물론 일간지 <투오이쩨>도 이 문제를 다루면서 그 위력은 더해갔다. 시클로(자전거 인력거) 운전사들 사이에서도, 시장통에서도, 미용실에서도 ꡐ한국군의 양민학살ꡑ이 화제로 떠올랐다.
(사진/호치민국가대학 한국어학과 3,4학년 학생들. 한국인들의 양민학살 사죄 노력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져 자신들도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 청년들, 고개를 숙이다
한국군의 양민학살. 그것은 정말 베트남 교민들에게 해롭기 짝이 없는 이슈인 것일까. 그러나 기자가 만난 베트남인 중에는 교민들 생각과는 정반대의 반응이 많았다. ꡒ한국인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인 줄 몰랐다.ꡓ ꡒ한국이 왜 경제발전을 이룩했는지 이제야 알겠다.ꡓ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다. 많은 베트남인들은 지금 한국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보내고 있다.
왜 그럴까. 여기서 한 가지 ꡐ사실ꡑ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 호치민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말해 ꡐ한국군의 양민학살ꡑ이 아니다. 베트남 언론이 30년 동안 단 한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문제를 ꡐ한국 언론인이 최초로 용감하게 폭로했다ꡑ는 점을 그들은 높이 사는 것이다. 더불어 이 기사 이후 지금 한국에서 ꡐ사죄의 성금운동ꡑ이 진행되고 있다는 데에 놀라는 것이다.
11월28일 일요일 오후 3시, 호치민청년문화회관 2층 교류관. 외국인과의 교류행사가 자주 열리는 이곳에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내용의 토론회가 열렸다. 제목은 ꡐ구수정과의 교류ꡑ. <한겨레21> 273호에 ꡐ한국군 양민학살 현장르포ꡑ를 썼던 호치민의 구수정 통신원이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ꡒ한국 용병은 왜 그토록 잔인했고, 아이들까지 죽일 정도로 이성을 잃어야 했나ꡓ, ꡒ한국은 여전히 미국에 예속되어 있는가ꡓ, ꡒ한국이 노근리 사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한다면 베트남에도 사죄해야 하는 것 아닌가.ꡓ 행사장을 가득 메운 200여명의 베트남 청년들이 던지는 질문은 무거웠다. 그러나 구수정 통신원의 말은 그들의 마음을 적셨다. ꡒ과거 우리 민족의 잘못을 이야기한다는 건 내게도 고통이었다. 그러나 내가 하지 않았더라도 머지않은 시기에 그 누군가 했을 것이다. 과거는 스스로 문을 닫을 수 없다.ꡓ 한국 유학생 대표는 사과문을 낭독하고 고개를 숙였다. 베트남 청년들은 ꡒ당신들의 용기를 사랑한다ꡓ고 했다. 그리고 ꡒ우리는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돼 있다ꡓ고 말했다. 30년 세월을 거슬러올라 아버지 세대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안고 만난 한국과 베트남의 젊은이들이 ꡐ화해의 가슴ꡑ을 열고 하나가 된 것이다.
ꡒ상상할 수 없었던 일ꡓ
ꡒ외국인과 정치적 주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연 것은 회관이 생긴 이래 처음이다.ꡓ 호치민 청년문화회관장 응웬 쑤언(42)은 이날 자리가 ꡒ베트남 청년들의 요청ꡓ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ꡒ<일요 투오이쩨>에 기사가 실린 뒤 많은 청년들이 ꡐ어떻게 하면 구수정을 만날 수 있는가ꡑ 하고 물어왔다. 우리는 베트남 청년들이 기사를 통해 알게 된 구수정을 직접 만남으로써 깊은 감흥과 교훈을 얻기를 바랐다.ꡓ
덕분에 구수정 통신원은 베트남에서 ꡐ유명인사ꡑ가 됐다. 마치 ꡐ한국 젊은이를 대표하는 인물ꡑ처럼 된 것이다. <투오이쩨>에 그의 얼굴이 여러 차례 실리면서, 그의 얼굴을 알아본 호치민 시내 호텔 종업원들이 커피값을 안 받는 일까지 생겼다. 호치민을 벗어난 나짱․닌호아 등 중부지방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이들 때문에 당황하기 일쑤다.
<일요 투오이쩨>의 기사를 작성했던 투이응아(37) 기자는 ꡒ<한겨레21> 기사소개와 한국인들이 사죄를 위해 성금을 모으고 있다는 글이 나간 뒤 당 위원회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ꡓ고 자랑했다. 그는 이 기사로 투오이쩨 신문사 전 기자들이 뽑는 ꡐ이달의 기자상ꡑ을 수상했다. 상금은 그달치 월급을 두배로 받는 것.
투이응아 기자는 ꡒ이번 보도가 한국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의식의 근저를 흔들어놓았다ꡓ고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 마음 밑바닥엔 한국인들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웅크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본적으로 ꡐ베트남전 참전ꡑ이라는 역사에다 최근에는 한국기업 관리자들의 현지 노동자 구타사건까지 얽혀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몇년 전부터 베트남에 수입된 ꡐ한국드라마ꡑ들이 그 부정적 이미지를 상쇄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요즘엔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가 대히트다. 하노이방송과 호치민방송은 물론 주요 지방방송의 황금시간대는 모두 한국드라마가 점령하고 있다). 투이응아 기자는 ꡒ드라마가 한국에 대한 인상을 극히 일부 ꡐ개선ꡑ하는 데 그쳤다면, 한국의 ꡐ한국군 양민학살ꡑ 성금운동은 한국에 대한 기존의 선입관을 ꡐ전복ꡑ했다ꡓ고 풀이했다. 자기 나라의 역사적 죄악을 스스로 고백하고 사죄하는 모습에서 한국의 ꡐ아름다운 저력ꡑ을 느낀다는 것이다.
양민학살이 일어난 지역에서도 그랬다. 두달도 채 안 된 젖먹이 아들을 안고 있다가 집에 침입한 한국군에 욕을 보았고, 바로 옆에서 베트콩도 아닌 미군 소속의 남편이 사살당하는 기막힌 장면을 봤다는 칸호아성 닌호아현의 쩜티 육 할머니. 한국인들의 성금운동에 대해 ꡒ상상할 수 없었던 일ꡓ이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게 한국은 너무 ꡐ가혹한 기억ꡑ으로만 자리잡고 있었던 탓일까.
로이터 통신도 관심 표명
<한겨레21>이 제기한 ꡐ베트남전의 한국군 양민학살ꡑ 문제는 작은 태풍이 되어 호치민을 때렸다. 그리고 덩치를 키우며 베트남 남부에서 중부로, 중부에서 북부로 조용하지만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 아니 이젠 전세계로 향할지도 모른다. 세계 유수의 통신사인 영국의 <로이터 통신>까지 이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이터 통신>쪽은 곧 구수정 통신원을 인터뷰한 뒤 12월 중순부터 취재에 들어갈 예정이다. <로이터 통신>의 하노이 주재사무소 관계자는 ꡒ빈딘성에서만 1천여명이 죽었다니…. 밀라이학살도 504명 아니냐. 이렇게 큰 규모의 학살이 어떻게 세계에 알려지지 않을 수 있는가ꡓ 하고 놀라워했다. <로이터 통신>은 그러나 ꡒ학살 자체에 대한 고발이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인이 스스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한국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아 전세계에 알리고 싶다ꡓ고 말했다.
이제 문제는 한국 정부다. 정부차원의 ꡐ겸손한 사과ꡑ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베트남인들의 감동은 배신감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부는 전전긍긍할 뿐이다. 오히려 ꡐ베트남의 노근리ꡑ가 될까 숨기기에만 급급한 형편이다. 한국을 거쳐 호치민을 때리고, 하노이를 넘어 전세계로 향할 ꡐ한국군 양민학살ꡑ의 태풍은 언젠가 해일이 되어 한국 정부를 덮칠지도 모른다.
호치민=고경태 기자
"양민인지 아닌지 가려보자"
연쇄인터뷰/ 주베트남 한국군 초대사령관 채명신
지난 65년부터 69년까지 주베트남 한국군 초대사령관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채명신(73․대한해외참전전우회장) 예비역 장군과의 인터뷰는 몇번의 시도 끝에 어렵사리 전화를 통해 이뤄졌다.
채 장군은 <한겨레21>의 몇 차례에 걸친 인터뷰 요청에 ꡒ베트남전 참전 전우들이 분노하고 있다ꡓ며 ꡒ할말은 법정에서 하자ꡓ고 거부하다 12월2일 오후 5시께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전화로 이뤄진 인터뷰인 탓에 요즘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다.
채 장군은 한 시간 가량 진행된 전화 인터뷰에서 ꡒ먼저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진상조사 결과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확증이 나오기 전에는 베트남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ꡓ고 밝혔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다룬 <한겨레21> 273호 기사를 읽어봤나.
(사진/"우리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베트남 인민을 돕기 위해 베트남으로 건너왔다." 칸호아성 닌호아현 백마부대 주둔지 부근 야산에 자리잡은 백마부대 참전기념탑)
=한번 읽어봤다. 그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베트남 양민들이 한국군에게 죽고 강간당했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 사람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한국군이 그렇게 했다면 먼저 어떤 부대가 어떤 기간 동안 어디서 어떻게 작전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이런 기록은 <파월전사>에 수록돼 있다. 또 군대 행동의 소소한 일까지 다 기록하는 <전투상보>를 통해 그들의 주장과 대조해봐야 알 수 있다. 그래서 시간과 장소가 완전히 일치되면 한국군이 작전한 것으로 알 수는 있다. 작전 경과와 행태는 기록을 봐야 알 수 있다. 조사해봐야 한다.
-베트남에서는 희생자 가족들의 증언과 함께 정부의 공식기록에도 한국군에 의해 5천여명의 양민이 희생당했다고 하는데.
=저쪽(베트남)의 기록 가운데 한국군 관련 내용을 발췌해서 우리 것과 대조해봐야 한다. 저쪽의 기록과 우리 기록을 대조해 합치되면 작전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들어맞으면 그들의 주장에 등장했던 사람들(가해 한국군)이 지금 살아 있으니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이 합동조사해봐야 알 수 있다. 우리도 군인 5천명 정도가 죽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양쪽의 조사 결과 진상이 나올 때까지 그들을 양민이다, 아니다라고 규정할 수 없다.
-당시 베트콩과 양민을 어떻게 구별했나.
=베트콩은 표내고 다니지 않는다. 정글보다, 사이공 시내보다 농촌 민가에 위장한 베트콩이 더 많았다. 군복이나 계급장 같은 것 없었다. 아낙네도 베트콩이고, 노인네도 베트콩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베트남 정규군의 지역부대에 편입된 상태였다. 우리는 무장하지 않은 베트콩과 싸우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불법적인 나라가 아니다. 양민학살이라는 말로 수천명의 주검을 모독하지 말라.
-당시 작전에 참가하는 한국군에게는 어떤 지침이 하달됐나.
=ꡒ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ꡓ가 우리의 기본 전략방침이었다. 이 지침은 전투에 참가한 한국군 모두가 숙지했다. 물론 그런 지침이 있었다 해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다. 아군 비행기의 네이팜탄 공격에 우리가 많이 희생당하기도 하는 판이었으니 하물며 민간에서야 그런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양민의 피해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진상을 정확하게 조사해야 한다. 그 이전에 성급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양쪽의 진상조사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나.
=저쪽도 죽은 사람들이 양민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이 양민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들이 입증하고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양민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들이 일방적으로 한 얘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현재 한국과 베트남은 새로운 동반자로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한국기업의 진출도 활발하다. 전쟁수행 당사자로서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의 뜻이나 화해의사를 전할 생각은 없는가. 베트남전 당시 미 국방장관이었던 맥나라마는 회고록에서 ꡒ베트남전은 잘못된 전쟁이었다ꡓ라고 적고, 당시 월맹군 총사령관이었던 보이엔 잡 장군에게 사과의 뜻을 보내 그를 감동시켰다. 그들은 한국에서도 이러한 조처를 기대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국가의 명령을 받들어 작전을 폈던 일개 장군이 할 일은 아니다. 작전 지휘관인 내가 할 성격의 문제도 아니다. 맥나라마는 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으니까 미국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전쟁에 잘못 개입했다는 데는 나도 동감이다. 여러 가지 군사작전 방식이 전혀 한국군과는 맞지 않았다. 처음 나도 미군과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 베트남도 한국과 같은 동양문화권 아닌가. 뿌리깊은 동양문화를 미군은 이해하지 못했다.
-전투지침에서 미군과 갈등을 빚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예를 들어 베트남에서는 어린애들도 담배를 피웠다. 아이들이 군인만 보면 담배달라고 따라다닌다. 미군들은 자기들 습관대로 그냥 준다. 하지만 우리들은 절대 주지 않았다. 대신 혼을 내줬다.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다.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베트남전은 정치전이었다. 미군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전투방법도 정반대였다. 심지어 ꡒ양민을 보호해야 한다ꡓ는 한국군의 지침에 대해 미군은 비웃었다.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다. 마오쩌둥이 말했던 ꡒ인민은 물이요 베트콩은 고기다ꡓ라는 원칙에 입각해 인민과 게릴라를 유리시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전략이었다. 물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그래서 종교활동을 돕고 무료치료 봉사 등을 해줬다. 이렇게 만들어야만 전쟁을 이길 수 있었다. ꡒ100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해야 한다ꡓ는 원칙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 고민이었다. 미군은 그런 전쟁의 경험도 없으니까 잘못 개입한 게 사실이다. 한국군의 작전방침과 정반대였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미군은 베트남전의 실패를 교훈으로 걸프전에서 승리했다. 요즘 사람들은 베트남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베트콩이 얘기하는 것은 모두 옳고 한국군이 얘기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베트남전이 정치전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베트남전은 정치적인 전쟁이었지 군사적인 전쟁이 아니었다. 원래 시각이 그렇다. 그러한 시각부터 미국은 달랐다. 기본이 달랐기 때문에 미국은 실패한 것이다. 맥나라마 장군 얘기는 상당부분 공감한다. 맥나라마 장군의 사과는 미군대표로서 한 얘기이다. 그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유감을 표시할 입장이 아니다. 나라의 명령을 받고 수행한 사람일 뿐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책임을 다한 것일 뿐이다.
-유감 표명도 어려운가.
=한국군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베트남전의 주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한국군이 미군과 동등한 입장에서 참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도적으로 전쟁을 수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과할 위치에 있지 않다. 자유우방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이다. 한 나라의 안보라는 것이 그 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베트남전 참전은 우리의 진의가 아니었다.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도 한-베트남간의 불행했던 역사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나. 처음 듣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의례적인 얘기로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건 당시 국방장관한테 들어라. 아직 살아 있다.
-합동 진상조사는 필요하다고 보는가.
=진상조사는 환영한다. 모든 의혹에 대해 진상조사는 당연한 일이다. 저쪽에서 죽은 사람들이 양민이었다고 한다면 모든 기록을 제시해서 우리 기록과 대조해 확인해야 한다. 우리쪽 사람들이 살아 있으니 이 사람들 얘기도 듣고 해서 판단해야 한다. 노근리도 진상규명 해서 확실히 밝혀야 한다. 하지만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 일방적으로 떠들어대서 한국과 미국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저의를 가지고 진행한다면 문제다.
-조사결과 양민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양쪽에서 확인된다면 잘못된 데 대해서는 솔직하게 사과해야 한다. 저쪽에서도 만약 딴 생각을 가지고 사실이 아닌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사과해야 한다. 한국군의 잘못으로 판명된다면 사과할 의향이 있다.
-합동진상조사를 정부에 촉구할 생각은 없나.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 당신들(<한겨레21>)이 양민학살이라고 단정하고 주장했으니까 법적으로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기사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제소하겠다는 뜻인가.
=아직 죽은 자들이 양민이라는 증거가 없는 가운데 나온 주장이기 때문에 명백한 명예훼손이다. 유가족과 자녀들의 명예도 걸린 문제다. 정신적인 피해보상을 받아야 한다. 고소를 준비중이다. 하지만 주체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해외참전전우회가 주축이 돼서 작업하고 있다.
-합동진상조사 결과를 기다릴 생각은 없나.
=일단은 명예훼손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법정에서 판가름나야 한다.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는 과정에서 진상조사가 이뤄질 수도 있다.
-소송은 개인의 생각인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참전했던 전우들 가운데 과격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지금 그들을 달래고 있는 입장이다.
-참전했던 동안 한국군의 양민사살에 대해 보고받은 적 있나.
=보고는 고사하고 그런 소문을 들어본 적도 없다. 들었으면 당연히 현지에서 조사했을 텐데 그런 일 없다.
조성곤 기자csk@hani.co.kr
한겨레21 1999년 12월 16일 제287호
김유진 이 못된 것아!
베트남 전에 관해 토론을 하고 싶으면 이 곳에 '베트남전 토론실'이 마련 되어있으니 그곳에다 올리길 바라며, 그런 글을 올리는 저의나 당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올려라. 요즘 당신이 올리는 글은 얼마전 까지만 하여도 신물나게 보아 온것으로 이미 그 것에 대한 토론을 숫하게 하여 온바다. 이제 그런 허접스런 내용은 일고의 가치가 없으니 그렇게 알라! 그 따위 글을 이곳에 올려려 우리들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하느냐?
강정구 한홍구 같은 쓰레기 공산주의자 처럼 너도 개혁파를 자처하는 군상 중에 하나이냐? 어디서 한겨레나 강정구, 한홍구가 주장하는 억지 논리를 이곳에 늘어놓느냐? 이 곳을 지저분하게 만들지 말라! 그들처럼 우리도 미군철수나 동조하길 바라느냐? 밥먹고 할 일이 그렇게도 없으면 년말에 어려운 이웃돕기라도 해라!
제대로 된 공산주의자도 아닌 어중간한 빨갱이 짓은 아무곳에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그런 글은 전교조나 한겨레의 구기자 강정구 한홍구 같은 놈들과 읽고 즐기기나할 것이며, 부디 철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 빨간물 들이지 말라! 하고 싶으면 '베트남전 토론실'로 와서 제대로 된 너의 생각을 늘어놓아 보거라!
김 유진 이라는 인간
허허허 참! 어이가 없군!
당신의 글을 읽어 봤는데.............
당신이 지금 몇살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쩌면 내 아들하고 비슷할라나?
내 아들 둘도 군(軍)에 갔다온지 약 5년이 됐어니 당신은?
그런데 당신은 부모 형제가 있는지?
당신은 정말 구제 불능인 인간인것 같아.......
되 먹지못한 강정구가 내 중학교 동창(동기)인데 그 작자도 우리 동기 모임에도 나타나지 못해. 나타나면 월남전쟁에 나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국가의 명령으로 월남전쟁터로 잡혀갔었는 내가 그 인간을 그냥 두지는 안을꺼니까.....
그런데 당신은 아직 뭘 모르고 찌껄이고 있는것 같군.
모르면 가만 있어면 2등이나 한다고...........
당신은 6.25와 보릿고개를 아는가?
1960년대의 배"杵年 시절을 당신은어찌 알겠는가?
우리의 파월로인한 그 댓가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는것을...............
네가 월남에 있을 그당시(1967년) 당신은 이 세상에 태어 낫는가?
그당시 "채 명신 사령관님"께서 내가 있었던 말단 분대에까지 이런 명령의 하달이 있었지. "백명의 VC를 놓지드라도 한명의 양민을 구출(보호)하라"
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오히려 우리가 그당시 VC들 한테 당했었지. 왜냐하면 그당시 전쟁을 하면서 대민지원을 했었는데 월남의 전쟁은 전,후방이 없는 곳이고 부모형제끼리도 아군과 적군으로 있었고 해서 대민지원을 나가서도 우리가 피해를 봤었지. 당신이 전쟁터에서 같이있는 옆 전우가 적의 총,포탄을 맞고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 그냥 있겠는가?
또한 월남전쟁에서 VC들의 아군,적군을 구별하지못하는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전쟁터에가서 모든군인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아군 손들어적군손들어 해서 선별을해서 총을 쏘아야 되겠구만...........
한심한 인간!
전쟁터에 가면 전우들은 피를나눈 친 형제 친 부모 보다도 더 긴밀한 사이가 되는것이 전쟁터의 전우이지. 당신은 아직 뭘 모르고 찌껄이는데 그냥 있어면 2등이나 해. 내가 월남전쟁터에 잡혀갈때(나자신도 모르게 차출로 인하여 휴가한번 못가고 갔음) 그당시(1967년)남한과 북한의 GNP가 남한은 겨우 60 여$이었고 북한은 120 여$이었지.당신이 뭐? 안다고 찌껄이고 있는지?
당신의 선임하사라는 인간은 아마 월남에 안 갔다온 인간인지도 몰라.
왜냐하면 내가 귀국하여 우리 동네에서 내 친구들 한테 당했었지.
그 친구가 얼마나 월남전쟁에 대해서 나 보다도 더 잘 알고있고 정말 갔다온 나 보다도 월남전쟁에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속았었지.
그러나 얼마있지않아 그 친구가 들통이 났었지.
그 친구 월남전쟁터에 안 갔다오고 줏어들은것이 너무많아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깜쪽같이 내가 속았지.
당신의 그당시 선임하사도 내 친구와 같은 인간인지도 몰라.
월남전쟁터에 갔다온 사람은 실제 자기가 겪었던 지역과 전투밖에 몰라.
왜냐하면 매일 매복에 적군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니까 어떻게 그런 시간이 있겠어.
월남전쟁은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없고 오히려 그놈들(민간인)들이 우리를 유혹(대민지원을 나가면)
을해서 적당히 이야기하고 우리가 지원이 끝나고 돌아서서 오면 뒤에서 총을쏘는 놈들인데 그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죽지않을려면 우리를 속인 그곳에있는 놈들을 총으로 작살을 내야하지 않겠는가?
당신이라면 그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적군과 아군"을 선별을해서 총을 쏘겠는가?
모르면 가만이 있구려........
우리 월남 참전자 노병들의 가슴에 못을 박지말고..........
당신의 부모,조부모가 년세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당신의 가족친지님들께 월남전쟁에
대해서 한번 들어 보구려.........월남 전쟁에 참전했던 분들께.......
당신은 이런소릴 자꾸하면 당신의 부모형제분들께 욕만 먹이는 것 밖에 없어니...
당신이 하고있는 일이나 열심히하여 부모형제가 바라고 이 나라의 유용한 인물이되어 당신의 후손들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주길 바라오.
나는 곧 60 의 나이가 되네.
앞으로는 왜곡된 당신의 생각을 바로잡아 좋은삶을 살고 지금껏 당신이 올린글 같은것은 다시는 올리지 않길 바라오.
그리고 강태공이라는 전우도 60의 나이이니 말같은것 조심하시요.
한심한 김유진
불쌍한 강태공님!!
웬지는 모르지만 베트남 전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했습니다. 미군만이 양민에 대한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을까? 아닐 것이다 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베트남전 관련 싸이트들을 찾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군을 영웅으로 미화시켜 놓았더군요.
분명 한국군도 양민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을텐대 왜 없을까 하고 고민을 하다 친한 친구로부터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겁니다.
'자료가 부족한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나쁜 일들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지금도 의혹은 많은데 증거가 될 자료가 항상 부족하잖아요? 그렇게
[뒤가 구린 일들에 자료를 남긴다는 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을 위해선 절대로 있어선 안되는 일이지요.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내부고발자를 죄악시 여기는 풍토에선 말이죠. ]
아직 우리나라에는 월남전 참전용사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지금의 군 장성중에는 월남에 파견되어 중대장 대대장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가 운좋게 살아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 워낙 많은 젊은 장교들이 죽었기 때문에 살아남기만 했어도 진급대상이었죠. 실제로 우리군에서는 실전경험이 있는 군인이 있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죠.
그런데 실제로 우리 군이 월남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요? 제가 군대에 있을 당시에 우리 중대 선임상사님이 월남참전용사셨죠. 거기에서 전투중에 일어났던 일들은 말로 다 못할 정도라고 하더군요. 양민 학살, 방화, 강간, 즉결처형. 지금 베트남의 어느 마을에서는 한국인이 '살인자' '악마'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땅에 전쟁이 영원히 없어져야하는 이유입니다.'
베트남인에게 사죄해야만 합니다. 진실은 어느 순간, 드러날 겁니다. 걱정되지 않습니까? 불안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숨기려고만 하십니까? 후배들에게 자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이 곳에 올릴 자료들의 내용은 허구일까요? 거짓 증언일까요? 용공 세력들일까요? 아닙니다. 나는 진실을 케낼 것입니다. 베트남전이 주 배경이 되는 영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년에 나는 베트남으로 갈 겁니다. 설마 거기서 듣게 될 전쟁의 진실...그로 인해 충격 받아 설마 쓰러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거품 물고 달려들지 마십시오. 저는 진실이 승리한다는 ㄱ덧을 압니다. 아니!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결국, 패배자인 것입니다.
모든 참전 군인들을 살인자로 몰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순하고, 착하고, 선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다만 나는 진실을 알고 싶은 것 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말입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진실은 언젠간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저를 제 글을 짓밟으신다면 그것은 뒤가 구리니까 그게 밝혀지고 알려지면 자존심에 타격 입으니까 아무런 잘못 하지도 않았는데도 살인자로 몰리는 것이 억울해 진실을 숨기려고 거짓말 한다고 저는 생각할 것입니다. 증언을 한 사람들을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가는 것도 역시 나쁜 일이 있었구나...그래서 그걸 숨기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부디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하시고,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강 태공: 김유진 당신이 마치 우리와 같이 월남전을 경험한 것 같은 투로 말하고 있는데 당신의 군 생활시 중대 선임상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어설픈 영운주의에 물들은 정신병자 같은 인간이 나의 주위에서도 보았다. 언제 어느곳에서 우리 한국군이 '양민학살' '방화' '강간' '즉결처형'을 하였는지 그 자를 내 앞에 데려다 증명을 해라! 그럼 내가 당신의 말을 수긍하마. 내가 말하는 것은 당신이 보기에 비이선적인 논리이고 당신이 말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마치 당신의 머리에 든 것만이 전부인 것인양 말하는 구나. 당신이 만든다는 베트남전 관련영화에 상단한 호기심이 간다. 그렇다고 내가 보러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말라! 당신의 하는 짓을 보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가 못될 것 같으니까 [12/17-08:42]
김유진: 빨갱이? 공산주의자?? 억지논리와 철학으로 뭘 어쩟기겠다는 겁니까? 비이성적인 논리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책이나 한자 더 보고 오시지 그래요? 강태공님!!! [12/17-08:42]
강 태공: 적어도 어떤 신념을 가지고 대중을 위한 영화를 만들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정도라면 당신이 들었다는 중대선임상사의 아야기가 진실인가 부터 확인을 하라! 어줍잖은 전쟁영웅담이나 듣고 와서 이곳에다 전부인 것인양 지꺼리느냐! 당신의 영화 평론은 보나마나 강정구, 한홍구 같은 작자들이 보고 극찬을 하겠구나. 어줍잖은 인권 운동가 처럼... '베트남전 토론실'에 와서 떠들라니까 말귀를 못알아 듣는구나. 이후부터 이곳에서는 너의 글에 대꾸를 않을 것이며, 현재 올려저있는 당신에 대한 나의 글도 당신이 보았다니 삭제 할 것이며, 당신의 영화 선전같은 하찮은 글도 삭제 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12/17-08:52]
참전자: 김유진씨. 만약에 말입니다 그런사람 들이 있었다면 당신이 뭐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그렇게도 할일이 없소 당신이 보고 듣고 했으면 그곳 월남인들에게 직접 사과하면 되지않소 나도 쾅남성 듀이센군 슈엔비면 에 억지춘향이라고 나의 의사와 하등관계 없이 파월 당했소...적의 부비츄랩에 죄없는 우리 동료들이 공중 분해되는것을 보았소 !!! 고국에 게신 그분들의 부모 형제 들의 마음한번 만이라도 생각해보았소 .당신의 친형 [12/17-08:59]
강 태공: 끝으로 한가지 더 당신의 글을 삭제하는 이유를 윗글에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나의 궁금증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그런데 무슨 내가 되지도 않는 억지 논리와 철학적이니 이성, 비이성을 따지며 논리적이니 아니니 하는 헛소리나 늘어놓는가? 그럼 당신의 정체는 뭔가? 내가 볼때는 당신은 소아 병적인 증세가 다분한 아마 누구앞에 나서서 말도 자기의 주장을 떳떳이 내세우지 못하고 뒤에 숨어서 남의 이야기나 하는 자 같다. [12/17-09:02]
전상학: 인간아 세상더 살아보아라 그리고 더도말고 너갗은 화상덩어리 자식 딱하나만 나서 길러보아라 불쌍허다 너의
부모가 너갖은걸 색끼라고 여직길렀쓰니.내글왜 없쎄서,놈인지 새벽글에는 저군생활할때 어쩌구 병신빨갱이 지
랄하네 빨갱이 [12/17-10:34]
안흥종: 김유진씨 양민학살,부녀자 폭행,어디서 들은 이야기 인지 구체화시켜 올려주기 바랍니다.전투 수색중대 출신으
로 15개월 동안 작전 매복 경험자로서 증언 해 주리다.당신이 나쁘다기 보다 당신 교육을 제대로 못시킨 우리 기
성세대가 잘못이 있다고 자책합니다.한정된 공간이라서 메일로 궁금한점 문의 하시요.경험자의 답변 드리겠습니
다. [12/17-12:34]
잘들어 보세요
김유진씨 당신은 네가 보기엔 이중 인격자 에 해당하는 人間 이라고 볼수밖 에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총을 들고 그런사항에 노여드라면 어떻게 행동을 하여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아마도 출행량 을 쳐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겁자요 . 자기만 살 겠다고 도망을 쳤을 것입니다.
민족에 반역자 에 해당하는 사항입니다.
친한 친구도 못밉고 이율배반한 아주나쁜 습성에 고약한 악질마음이 도사리고
자기만 잘났다고 허풍에 큰소리 치는 나약한 이중적 사고을 가진 저질 쓰런 人間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항상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돼어야 만 합니다.
김유진씨 당신은 이북에 김정일 괴수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북에 김정일 괴수 하고 생각이 너무나도 같읍니다.
나불대는 입 모양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읍니다.
60년도 우리국민이 헐벗고 못먹든시절 기억 나십니까 .
파월장병들의 노고에 감사할 줄 모르고 배가 쳐부르니 입이 있다고
함부로 쇠바닦을 마음되로 놀리니 한심하기 그지없읍니다.
그렇게 할일이 없어면 공원에 가서 쓰레기 청소하든지 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