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기도
주님...
주의 긍휼을 구하며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주의 말씀 앞에 섰사오니 나의 죄를 보게 하시고 먼지만한 죄라도 깨닫게 하셔서 주의 말씀의 검으로 끊어내 주시옵소서.
그것을 끊어내는데 아픔이 뒤따르지만 주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겨내게 하시고 오직 주의 가죽옷, 보혈의 옷, 그리스도의 옷으로 입혀 주옵소서.
주님의 보혈만이 나를 정결케 하실 수 있사오니 주님의 피가 내 몸을 적셔 나의 더럽고 추한 정욕과 죄를 다 녹여 주시옵소서.
주의 권능으로 나를 죄의 자리에서 건져내사 주의 품안에 품어주소서.
입만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입은 다물고 오직 주의 권능의 팔에 안겨 사는 주의 신실한 종이 되게 하소서.
나는 할 수 없사오니 오직 주의 긍휼을 바라나이다.
오늘도 오직 주님을 갈망하오니 내게 지각을 여시어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지적 수준보다 영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사 44:9-20
제목 : 엔학고레의 샘 곧 생명의 샘에 달려가 생수를 마시며 다시 생명을 회복하다.
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10.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
11. 보라 그와 같은 무리들이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12. 철공은 철로 연장을 만들고 숯불로 일하며 망치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며 그의 힘센 팔로 그 일을 하나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고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피로하니라.
13.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14. 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15.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16.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19.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20. 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
* 나의 묵상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우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상은 헛것이라고 주님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 허망하기 때문이다.
신상을 깎아 만들고 우상을 부어 만드는 자들은 다 수치를 당할 것인데, 그들은 철을 달궈서 그것을 망치로 쳐 우상의 형상으로 다듬다가 아무리 힘센 대장장이라도 배가 고프면 힘이 빠지고 피곤하기 마련이다.
그런 상태에서 우상을 만들면 그 우상 또한 제대로 세워지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나무를 깎아서 우상을 만드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집에 두어 그 우상에 절을 하면서 복을 달라고 빌기도 한다.
그런데 그 우상을 만든 재료인 같은 나무로 일부는 잘라서 떡을 구워 먹기도 하고, 일부는 잘라서 추운 날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하기도 하며 그 일부는 잘라서 깎아 우상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은 그들이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면서 행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고 마음이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생각도 지식도 총명도 없어서 같은 나무로 떡을 구우면서 같은 나무로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땔감으로 쓰기도 하며 그 나머지 나무를 가지고 우상을 깎아 만들어 거기에 절을 하면서 복을 비는 것이 얼마나 허탄하고 어리석은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마약을 먹고 환각에 빠져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그 뒤에 따르는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시간을 고통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은 우상이 헛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매몰되어 또 다시 그것을 찾아 엎드려 절하고 이전보다 더 심하게 그 자리로 기어 들어간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다.
나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기에 눈에 보이는 우상에 절을 하거나 그런 곳에 가서 무엇을 비는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수많은 우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나는 순간순간 내 안에 있는 우상에 굴복하고 만다.
정욕의 우상, 돈에 대한 집착의 우상,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명예의 우상, 음란의 우상 etc.
나의 마음을 앗아가는 이런 우상들에 쫓기는 순간 마치 마약을 먹은 사람처럼 그것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곤 하였다.
그것이 부질없음을 알지만 나의 의지로는 헤어 나오지 못한다.
아니 헤어 나오고 싶은 의지를 발동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는 쾌락의 즐거움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나는 한편으로는 주님을 섬기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상을 섬기는 자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는데도 말이다.
(고후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믿는 자라면 어찌 이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물며 목사인 내가 말이다.
그러나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우상의 존재들은 쉬 물러나지 않는다.
내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안 된다고 여기면서도 이를 내 안에 머물도록 붙잡아 두는 경우도 허다할뿐더러 그런 일이 지속되면 나도 모르게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러면 죄에 대한 경각심도 흐려지고 오늘 본문 20절 말씀처럼 내가 붙들고 있는 우상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나의 생각과 몸이 전혀 따로 노는 것이다.
여기에 나의 한계가 있다.
나는 주님을 믿고 섬기면서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우상을 섬기는 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나는 한 나무로 떡도 구워먹고 다른 가지로는 추위를 물리치기 위하여 땔감으로도 쓰며, 나머지로는 우상을 깎아 만들어서 그것에 절을 하며 복을 비는 것과 다름 아니다.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내 심령이 썩어 문드러져도 그런 줄 모르고 세상의 것, 육신의 것, 정욕적인 것을 즐겨하던 나는 주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할 자임을 고백한다.
오늘 삼손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된다.
(삿 15:18)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나는 나름대로 복음을 전하며 생명을 알지 못하던 자들에게 생명으로 살게 하는 사도적 직분을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내 안에 숨겨진 우상들로 인하여 목말라 죽게 된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주님께 외마디 비명이라도 질러야 할 판이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목마름을 해갈하여 주사,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소서.”
삼손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주께서 한 우묵한 곳을 터트려 샘을 만들어 주셨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케 된 것이다.
그래서 삼손은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다.
엔학고레는 ‘부르짖은 자의 샘’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야곱의 우물을 매일 찾으며 그 갈한 목을 축이는 수가성 여인을 신적 의지로 친히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셨다.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다시 터져나오는 엔학고레의 샘, 주님의 생명샘을 사모한다.
아무리 입으로는 복음을 외쳐도 내가 순간순간 정신을 잃어버리면 정작 나 자신이 생명이 없는 우상에 매몰될 수 있음을 기억하여 오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님이 주시는 그 영생의 샘물을 마시며 기운을 차려 오직 복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목을 잘 간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안에 갈한 심령으로 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나를 뒤덮어 나로 하여금 생명의 말씀 외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했던 것을 회개하오니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의 말씀이면 충분한데, 내 마음을 빼앗겼음을 인정하며 다시 주님께로 나아가나이다.
나를 받아주소서.
죄로 얼룩진 나를 주의 보혈로 씻어 정하게 하시고 주의 품안에 안겨 살게 하소서.
더 이상 목마름이 아니라 주의 품안에서 풍성한 생명으로 사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