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품을 받고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성인은 유배 생활을 하다가 407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의 죽은 외아들을 되살리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2,12-14.27-31ㄱ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청하는 것을 무조건 얻는 법
-거룩한 무기력감
박보영 목사 밑에서 자라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사랑이 너무도 커서 자주 신발 없이 맨발로 집에 오곤 하였습니다. 거지가 신발이 없어 벗어주고 오는 것입니다. 옷과 자기 도시락등 먹을 것을 주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길고양이가 버스에 치였습니다. 그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버스에서 내려 고양이를 찾았습니다. 고양이는 죽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고양이는 컨테이너 밑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고양이를 끌어내어 치료해 주려고 컨테이너 밑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는 소리를 지르며 그 손을 할퀴었습니다. 그래도 그 청년은 피를 흘리면서도 고양이를 잡아 끌어내었습니다. 고양이는 하반신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청년은 고양이를 안고 울면서 동물병원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동물병원은 고양이를 살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 손을 내미십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인 줄 알고 손을 피하거나 그 손을 할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도움을 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신 기적을 세 번 하셨는데 이번이 유일하게 청하지도 않았는데 살려주신 예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야이로의 청으로, 라자로는 동생 마리아와 마르타의 믿음을 요구하시며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지만 나인 고을의 과부의 아들은 그냥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살려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청하지도 않았는데 은총을 쏟아부어 주신 것일까요?
세상에는 많은 고양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왜 버스에 치인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을까요? 바로 불쌍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불쌍합니까? 청할 힘조차도 없는 무기력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심지어 과부였습니다. 그녀는 우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그냥 지나치실 수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길거리에서 살던 가출청소년들을 박보영 목사는 집에 데려와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따듯한 잠자리와 먹을 것, 깨끗한 옷을 입으면 그 아이들은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면 다시 바깥세상의 자유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박 목사는 그들이 처음에 입고 있었던 지린내 나는 옷을 다시 입으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코를 틀어막고 그것을 입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손으로 그 옷을 가져다 버립니다. 그다음 목욕을 세 시간씩 한다고 합니다. 박 목사는 이러한 예식을 통해 자신이 아니면 그들은 아무 존재도 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무엇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자꾸 밖으로 나가면 자신들이 무엇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어떠한 신앙과 가르침도 줄 수 없습니다. 움직이는 아이에게 예방주사를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은총은 이렇게 그 주사가 아니면 자신은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자신을 무기력하게 맡기는 이들의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습니다. 기도와 희생을 통해 모두가 완덕의 계단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도 어린 수도자로서 소화 데레사는 한 계단도 못 올랐습니다. 심지어 꿈에서는 자기 나이보다 더 어렸습니다. 아기였습니다. 아기가 오르고 싶은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소화 데레사를 들어 제일 꼭대기에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가장 먼저 완덕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착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없으십니다. 당신은 그저 우리 보조자가 되기 때문이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내가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처지처럼 거룩한 무기력감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총은 이미 받았다고 보아도 됩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모든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A1bwdrX0l90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누가 사람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앵’하고 태어나, ‘휙’하고 살다가, ‘억’하고 죽더라.”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인생이 긴 것 같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얼마 전에 서울 신학교 동창 신부가 강화에 찾아왔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신학교 다닐 때의 사건 사고를 이야기했고, 또 재미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실컷 웃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에 하늘 같았던 교수 신부님들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지금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기다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 명예? 권력?
그 모든 것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일한 것이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억을 많이 간직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최후의 순간에 어떤 기억을 떠올릴 것 같습니까?
고을 성문에서 두 행렬이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일행이었고, 또 하나는 마을에서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죽은 이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과부는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마저 잃은 이 여인의 처지는 어떠했을까요? 당시는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외아들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죽음 앞에서 힘든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서 있는 외아들의 어머니를 가엾이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울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원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기억만을 만들면, 결국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주님께 대한 기억이 구원의 큰 선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천운영).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