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와 민족혁명당 >
앞서 보았듯이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상해)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가운데, 일제의 만주 침략과 상해 침략 등으로 항일 통일전선의 필요성이 고조되었습니다. 다시금 통합 논의가 시작됩니다. 대동단결론의 영수라고 할 수 있는 안창호가 부재한 것은 큰 손실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불행히도 일제에 체포되어 결국 순국(殉國)하게 됩니다. 일찍이 1919년 파리 강화회담에 민족 대표로도 파견되었으며, 민족주의와 좌익계열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김규식이 주된 역할을 하였습니다.
북만주에서 내려온 홍진과 이청천의 한국독립당(만주)이 그러한 흐름을 촉진합니다. 이청천과 그의 독립군 부대는 원래 김구가 운영하는 국민당 낙양군관학교의 한인 특별반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김구와 불화를 빚고 탈퇴하였습니다. 이후 남경에 있는 한국혁명당과 결합하게 됩니다. 한국혁명당은 한국 독립당(상해) 출범 당시 신익희 등 소장 독립운동가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결성한 정당이었습니다. 이렇게 1934년 한국독립당(재만)과 한국혁명당은 ‘신한 독립당’으로 통합하였습니다.
신한독립당은 ‘중앙집권제의 민주공화국’을 표방하고 ‘토지와 대(大)생산기구를 국유로 하고, 국가 경영의 대작업을 실시하며, 국민의 생산 소비 등 일체의 경제적 활동을 통제하고, 재산의 사유를 한정하여 생활의 평등을 확보하고, 민족의 고유 문화를 발양하고 국민의 기본교육과 인재 양성은 국가부담으로 하며, 국민의 노동, 학습, 혼인, 언론, 집회, 파업의 자유권을 보장하고, 병역, 조세, 수학, 공작에 관한 절대 의무를 이행하고, 징병제와 국민무장제를 병용하고, 자유, 평등, 호조의 원칙에 기초하여 피압박민족해방운동에 노력한다’는 당의(黨義)를 채택하였습니다. 앞서 보았던 한국 독립당(상해)과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되, 당시 세계 경제 공황 하에서의 흐름이었던 ‘조합국가’ 그리고 협동적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호조)론’을 가미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남만주의 조선혁명당도 관내 민족운동 세력과 협력을 추구하였습니다. 만주에서 일제의 침략이 심화되면서, 조선혁명당은 유동열과 최동오를 관내로 파견하여 중국 국민당 정부에 지원도 타진해 보고, 한국독립당(상해) 및 의열단 등 항일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전선을 모색합니다. 그릐고 앞서 얘기하였듯이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장세윤, 재만 조선혁명당의 조직와 민족해방운동, 사림(성균관대), 제18권, 2002, 98쪽)
독립운동 진영의 새로운 통합 움직임에서 최대 세력은 의열단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한인 공산당 운동은 장개석의 공산당 숙청과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의 원칙으로 그 민족적 기반이 위축됩니다.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 조봉암처럼 국내 공산당 조직에 투신하거나, 김산과 같이 중국 공산당에 가담하여 중국 혁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다만, 김원봉의 의열단만은 비록 공산주의에 친하였지만, 공산당에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코민테른이나 중국 공산당에 종속되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보았듯이 의열단은 일찍이 유일당 운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유일당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도 의열단은 독자적인 정당 형태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중적 협동노선을 강화하고 독자적인 정당 조직을 발전시켰습니다. 1928년 11월 의열단이 천명한 민족 협동노선을 잠깐 인용해 보겠습니다.
“강도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절대 독립을 탈환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협동 통일’뿐이며 모든 주의의 대립, 모든 붕당의 분열이 극복되지 않으면 아니되고, 조선혁명운동도 세계혁명전선에까지 굳게 통일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협동전선은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인 것이며, 우경적이 아닌 전투적인 것으로 그 계급적 기초가 우리 민족 절대 다수이며 가장 혁명적인 노농대중이다”.(한상도, 김원봉, 65쪽)
의열단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상해) 중심의 우경적 통합이 아니라 의열단 중심의 좌경적 민중세력에 의한 통합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좌익 의열단의 큰 자산은 우익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의 인맥이었습니다. 이는 김원봉의 황푸 군관학교의 이력에서 온 것입니다. 김원봉은 당시 사귀었던 국민당 인사들의 도움으로 군사조직을 갖추고, 재정 지원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김원봉은 1932년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여기서 배출된 인원들로 김원봉의 의열단은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당(상해)을 능가하는 세력을 구축하게 됩니다.
김원봉은 그 세력을 기반으로 앞서 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주도합니다.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당(상해)을 ‘압박’하여 새로운 통합정당을 추진합니다. 좌우 합작의 민족 대당 결성의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신한독립당과 조선혁명당 모두 당을 해체하고 의열단 중심의 통합 정당으로 합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독립당(상해)의 주요 인사들까지 설득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한국 독립당(상해)은 진통 끝에 1935년 5월 임시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신당 참여를 가결합니다. 송병조, 조완구, 차리석 등은 그에 반대하였지만, 한국 독립당(상해)도 그렇게 해체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의 이름으로 통합 정당이 만들어집니다.
민족혁명당의 당의는 “혁명적 수단으로써 구적 일본의 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5천년 독립 자주해 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학고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 전체의 생활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고 하였으며, 당강으로는 “일본 침탈 세력을 박멸함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을 달성한다. 봉건세력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숙청하여 민주집권의 정권을 수립한다. 소수인이 다수인을 삭탈하는 경제제도를 소멸하고, 국민 생활상 평등의 제도를 확립한다. 1개 군을 단위로 하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한다. 민중무장을 실시한다. 국민은 일체의 선거 및 피선거권을 갖는다. 국민은 언론, 집회, 출판, 결사,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 여자는 남자의 권리와 일체 동등으로 한다. 토지는 국유로 하여 농민에게 분급한다. 대규모의 생산 기관 및 독점적 기업을 국영으로 한다. 국민 일체의 경제적 활동은 국가의 계획하에 통제한다. 노농운동의 자유를 보장한다. 누진율의 세칙을 실시한다.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은 국가의 경비로써 실시한다. 양로, 육영, 구제 등 공공기관을 설립한다. 국적(國賊)의 일체 재산과 국내에 있는 적 일본의 공사유 재산을 몰수한다. 자유, 평등, 호조의 원칙에 기초한 전세계 피압박민족해방운동과 연결 협조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열단, 신한독립당, 한국독립당(상해)의 당의와 당강을 합쳐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보았던 남만주의 조선혁명당의 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조선혁명당과 의열단 사이의 기본적 연결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관련하여 장세윤, 앞의 글, 74쪽). 혹은 조선혁명당 인사들이 기억하는 조선혁명당의 당의와 당강은 통합 후 민족혁명당의 그것에 기초한 ‘혼동과 착오’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여튼 민족혁명당은 전체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기초하되, 혁명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당시 우리 민족운동의 거의 모든 세력이 대체로 공유하는 관점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좌우를 망라한 민족혁명당이 성립된 것은 우리 민족운동사상 그리고 임시정부의 역사에서 특기할 사항입니다. 초기 통합 임시정부 출범도 당시 이승만, 이동휘로 대표되는 좌우 세력의 통합으로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임시정부 헌법은 아직 ‘광복운동자 대단결의 당’ 즉 ‘민족 대당’이 갖추어지면, 임시정부의 전권을 그 당으로 넘기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임시정부의 헌정사는 새로운 차원으로 이행해 갈 수 있었습니다.
임시정부의 기반이었던 ‘한국독립당(상해)’도 해체되고 대부분의 인사들이 민족혁명당에 합류하였습니다. 임시정부 7인의 국무위원 가운데 송병조와 차리석을 제외한 5명의 위원들도 국무위원직을 사퇴하고 민족혁명당에 합류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집행부는 사실상 와해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의정원 소수의 의원들에 의하여 존속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문제가 민족혁명당에서 해결되지 못하였습니다. 민족혁명당의 주류였던 의열단은 임시정부를 계승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임시정부는 그렇게 간단히 포기될 수 없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임시정부는 비록 전국민적 총의를 모은 대표 정부는 아니었지만,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대동단결하여 설립한 민족 최초의 민주공화국 정부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민족혁명당에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 특히 김구를 대표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결집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오히려 민족혁명당이 분열되는 귀결을 맞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