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 이렇게 썼다]
햇무리로 사는 행복 / 백우선
알든 모르든 받아주든 물리든 천 리 밖이든…
해에겐 듯 달에겐 듯
내 혼은 그의
훈暈
—졸시 「훈」, 『네오포엠』 제238호(2019.9.18.)
내 성명에서 명/이름의 영문 표기는 WOO SUN이다. 이 단어의 뜻은 ‘해를 그리워하다/사랑하다’쯤이 된다. 곧 향일向日, 애일愛日이다. 그리고 이 뜻을 함축하고 있는 사물로는 ‘햇무리/일훈日暈’이 아주 제격이다. 그리하여 나는 ‘해의 둘레에 둥글게 나타나는 빛 테두리’ 곧 ‘햇무리’를 사이버공간의 닉네임으로 쓰고 있다. 참고로 달 언저리에 둥그렇게 생기는 구름 같은 허연 테는 ‘달무리/월훈月暈’이다. 박용래 시인의 시 「월훈」*도 있다.
여수 돌산도의 향일암은 풍광도 좋고, 새해 첫날 해맞이 터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내 영문 이름으로 인해 더 좋아하고 시를 몇 편 쓰기도 했다. 그 중 한 편은 이렇다.
향하는 해가 있는 곳//
향하는 부처가 있고//
향하는 보살이 있고//
향하는 금거북이 있는//
중생을 향하는 그들이 있는 곳//
밝고 따뜻한 양광//
중생을 향하는 중생이 있는 곳
—졸시 「향일암 1」
애일당은 강릉 사천진리 교산蛟山 기슭에 있었고 허난설헌과 허균이 태어났던, 그들 외가의 당호이다. 친가 마을인 초당과 멀지 않다. 교산은 조그맣고 낮아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교룡蛟龍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허균은 이 산 이름을 자기 호로 삼았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시대의 반항아이며 이상국 건설을 염원했던 사람이다. 그의 「호민론豪民論」, 율도국이 나오는 『홍길동전』을 보면 그런 정황을 알 수 있다. 그는 역적모의 혐의로 참수되고 말았으니, 애일당이라는 그 밝은 당호보다 교산이라는 자조(?)적인 호의 영향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국시인협회 2019년 사화집의 주제는 ‘주소’이다. 이 주제 관련 시작품 원고 청탁을 이메일로 받았을 때 금방 떠오른 것이 ‘햇무리’였고, 자연스레 내 주소는 해나 달의 둘레라는 점이었다. 해와 달, 일월이 비유나 상징이라 하더라도 그 ‘일월’과 하나가 될 자신은 없고, 얼마만큼 가까이할 수 있는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일월의 먼 훈/빛무리가 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담아본 것이다. 일월인 ‘그’가 누구냐고 물으면 바로 묻는 당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정말 ‘그’가 묻는다면 차마 바로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엉뚱하게 둘러댈는지도 모른다. 일월, 해와 달에 해당하는 ‘그’가 만해 한용운의 ‘님’과 같다고 하면 오히려 더 적절한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족 하나. 여자를 뜻하는 woman은 wooman에서 왔을 것으로 보인다. ‘남자를 그리워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남성 중심 사고가 낳은 말일 것이다. history 대신 herstory를 쓰듯 앞으로 여자들은 남자를 뜻하는 말로 wooher, woher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월훈月暈 /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첫댓글 읽고, 또 읽고
배우고 공부합니다..💗
햇무리...새삼 멋지십니다 ...
생각해 보니 정말 딱 어울리는 훈! 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