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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무엇인가? (2)
일반적으로 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고 있지만, 불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지 않고, 오직 일체 만법의 법성인 자기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불교 이외의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이와같은 이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세계적으로 가장 수준 높고 가장 깊은 진리로서 천고만고에 변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만법의 법성 즉 자기 자성을 바로 깨치는 이것이 불교의 근본 특색으로 되어 있느니 만큼, 만약 이 노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의 모든 조사(租師)스님들이 자기 자성,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이지 절대신이나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부처를 이룬(成佛)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생명선이며, 영원한 철칙이며 만세의 표준입니다.
불교는 성불(成佛), 즉 부처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서 성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읍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놓았는가?
금강산이 천하에 유명하고 좋기는 하나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안내문이 필요합니다.
금강산을 잘 소개하면 '아! 이렇게 경치 좋은 금강산이 있었이구나. 우리도 한번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드디어 금강산을 실제로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내문이 없으면 금강산이 그렇게 좋은 곳인 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읍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입니다.
팔만대장경에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 부처란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보고 부처님이 귀하고 높으며 불교가 좋은 줄 알아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문자로 된 안내문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훌륭하고 좋은 법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겠읍니까?
이러한 언어문자의 기록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에 의지하여 실제로 길을 가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을 가려고 하면서 서울 안내판이나 소개문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있어 보았자 서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걸음을 걷든지 두 걸음을 걷든지 남대문으로 쑥 들어서야지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언어문자인 팔만대장경이 성불하는 노정기인 줄 분명히 알면 그것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언어문자를 무시하고 배격하며 교가(敎家)에서는 언어문자를 숭상한다고 흔히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교는 꿈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지 딴 외도(外道)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가에서도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지, 안내문만 읽으면서 평생을 지내라고는 하지 않았읍니다.
교가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높은 교가 화엄종(華嚴宗) 입니다.
특히 당(唐)나라 현수(賢首)스님이 그때까지의 화엄종 교리를 집대성하여 종조(宗組)가 되있으니,
교가에 있어서 현수스님 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없을 만큼 교가의 대표적인 스님인데, 다음은 그 스님의 말씀입니다.
"이 큰 화엄연기법은 일체 만법이 구족하니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그것을 깨칠 것이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말로써 해석한다면 연기법을 보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해석을 끊고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정견(正見)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해석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평생을 헛일만 하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들어갈 것이요, 만약 입으로는 말하나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은 곧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이다."
교가의 권위자인 현수스님이 이 화엄연기법은 언어로써는 알 수 없고 오직 마음 가운데 이것을 깨쳐야 바로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는, 불법(佛法)이란 오직 자성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를 이해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엄종의 화엄연기법도 부처님 법이니 만큼 깨친다는 원칙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읍니다.
그래서 만약 누구든지 언어문자만을 따라가고 마음 속에 깨치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며 평생에 헛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화엄경 80권 가운데서는 진정한 연기법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고, 오직 내 마음 속에서 깨쳐야만 그 화엄연기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데려다 어떤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그려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대답을 하겠읍니까?
천번 만번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읍니다.
아무리 잘 그려 놓아도 그림 속의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 실제의 사람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언어문자는 노정기나 소개문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 금강산이나 서울인 줄 알아서는 영원토록 금강산도 서울도 못보고, 평생 헛일한 미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현수스님 뿐만 아니라 교가의 모든 큰스님들도 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현수스님 말씀 처럼 마음 가운데서 깨쳐야지 여기서 한발짝이라도 벗어나면 불교가 아닙니다.
선이나 교나 자성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라는 것이 명확하니 공연히 평생을 헛일한 미친 사람이야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신라의 화엄종조로서 유명한 의상(義湘)스님은 남아있는 저술이 별로 없으나, 그 대표적인 저술 법성게(法性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친 지혜로써 알 바요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
불법이란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일체 만법의 법성, 자성을 깨쳐야 하는데 그것은 언어문자의 이해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성·자성은 일체 언설과 이론을 떠나 있으므로 언어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알 수 있겠읍니까?
이 자성·법성이라는 것은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어 일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증지(證智), 즉 깨친 지혜로써만 알 수 있고 다른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깨친 법성은 참으로 깊고 미묘해서(深深微妙) 일체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사량분별이 멸한 것이라, 오직 깨쳐야만 알지 언어문자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퇴옹성철선사
첫댓글 감사합니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_()_
행불하십시요.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고맙습니다._()()()_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