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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
<이사야서의 말씀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 제2독서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0,9-1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 복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초대 교회 전교의 패러다임: 특별하면서도 오를성싶은 나무가 돼라!>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내가 먼저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좋은 것은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대부분 더 믿는 사람에게서 옵니다.
사제가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렇다면 전교는 이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전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요?
믿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을 주려는 것이 전교는 맞지만, 바로 믿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납니다.
‘최고의 스타들은 왜 키가 작을까요?’
『언씽킹』이란 책에 나온 소제목입니다.
2008년 미국에서 수입이 가장 많았던 10명의 배우를 봅시다.
1. 해리슨 포드, 2. 애덤 샌들러, 3. 윌 스미스, 4. 에디 머피, 5. 니컬러스 케이지, 6. 톰 행크스, 7. 톰 크루즈, 8. 짐 캐리, 9. 브래드 피트, 10. 조지 클루니
배우로서 ‘주연’이란 말을 떠올리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키가 크고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기에 거론된 주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은 니컬러스 케이지뿐입니다.
그런데 니컬러스 케이지가 조각 미남인가요?
조각 미남이라 한다면 톰 크루즈나 조지 클루니를 많이 말씀하십니다.
조지 클루니는 178cm이고 톰 크루즈는 176cm입니다.
물론 저보다야 다 크지만 서양인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키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말론 브랜도, 멜 깁슨, 로보트 드니로, 알파치노, 실베스터 스탤론, 숀 팬, 맷 데이먼 등의 평균 키는 175cm입니다.
우리나라의 BTS 평균 키가 177.3cm입니다.
유일하게 RM만 181cm이고 나머지는 평균 175cm인데 모두가 사랑합니다.
우리나라의 배우들도 보면 키가 크면 소위 얼굴이 좀 만만하고 얼굴이 좀 부담스러우면 키가 만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180cm인 송강호 씨는 키가 크지만, 얼굴은 조각 미남이 아니고 이병헌 씨는 미남이지만 키는 좀 작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어떤 여자에게 매력을 느낄까요?
분명 솔직해서 자신을 다 드러내는데 또 뭔가 신비감을 감춘 여자입니다.
그냥 한 번 만났는데 다 알 것 같은 여자는 매력이 없습니다.
남자도 특별한 것을 꿈꾸고 누군가를 만날 때 특별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신 부담스러우면 안 됩니다.
오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면이 있으면서도 단순한 아름다움까지 있다면, 그래서 ‘가능할 거 같은데?’라는 마음을 주는 여자가 가장 매력 있습니다.
종교는 분명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르지 못할 나무만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오르지 못할 나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만 강조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것만 강조한다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불친절한 복음 전파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살기 부담스러운 나라에서 내 아이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특별합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화해서 우리나라에 살려면 어떨까요?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게 낫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기 부담스럽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경쟁을 시키며 한국인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이상한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있으면 자신 안에 있는 하나의 특징만을 강조하며 그것만을 부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매력적으로 되려면 큰 사고 안 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부자가 아니면 무시당하는 문화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력적인 나라가 되면 자녀도 많이 출산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저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그냥 어울려 사는 것을 ‘친교’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럽지 않은 공동체가 무엇일까요?
‘가족’입니다.
가족이 부담스러우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속할 용기를 얻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리만치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아버지!”란 믿음만 강조할 게 아니라 우선은 모든 사람이 어울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어머니, 형제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것이 오를성싶은 나무가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서로 친교를 이루며 사랑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사람들은 성체성사를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가진 것을 나누고 주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 했을까요?
성경에서 초대 교회 선교모델을 한 번 살펴봅시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사도행전 2,43-47)
일단 성직자들이 ‘놀라운 일과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물론 성사 거행보다 더 큰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친교’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 친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사제들의 몫입니다.
그 친교는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이 바탕이 됩니다.
이를 위해 성사가 존재합니다.
성사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게 해줍니다.
이런 친교의 행복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맺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세상에 ‘매력을 발산’합니다.
누구나 친교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겸손해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보고 들어와 ‘신도들의 모임이 커집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선교 방법이었습니다.
현재 성당에서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형제들 간의 친교를 이루는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교적 인원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냉담자를 말할 때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하고 성체성사 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기적을 통해 ‘친교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사의 목적이 친교입니다.
형제간의 친교를 지향하지 않는 성사는 어쩌면 방향을 잃고 무조건 달리는 자동차에 기름을 계속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전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듯, 믿는데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형제간의 친교로 참으로 행복하고 그 공동체가 구원의 백성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너지를 채우는 것에만 목표를 두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면, 열심히는 하는데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먼저 특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성사입니다.
성사가 있기에 교회는 특별합니다.
하지만 성사만 강조한다면 교회의 특별함보다는 오르지 못할 나무로 보일 수 있습니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과 특별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할 수 있어도,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누가 부담스러운 사람과 사귀고 싶겠습니까?
자신을 성장시켜 줄 특별함은 갖추어야 하지만 성사만 강조하며 부담을 주는, 그냥 특별함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960년 펜실베니아 중부에 있는 로제토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단 것을 좋아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고 녹초가 되도록 일했으며 비만도 흔한 이 마을에서 거의 심장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수 마을은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정착촌이었습니다.
그 마을은 계층이 없는 소박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듯하고 친절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바로 건강과 장수에도 직결된다는 의미로 ‘로제토 효과’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냉담자를 정할 때, 성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 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해야 합니다.
적어도 한 성당 공동체에서 친교를 나누는 사람에게 신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가야 합니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없다면 어쩌면 교회도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들어 결국에 사라지는 길로 가는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성체가 아닌 공동체가 선교하게 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 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 5,16)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1코린 1,17)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어느 모임은 릴레이 성경 읽기를 합니다.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 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개신교 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 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원규, 감신대 종교사회학 교수)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 홍보나 공연, 작품 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비대면 시대를 맞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하게 되는데 성경 말씀을 소홀히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
완전하신 하느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거룩하신 하느님...
이런 호칭들은 하느님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완성된 하느님이시기에 모자람도 부족함도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여러 면에서 전혀 완성과는 거리가 먼 분처럼 느껴지십니다.
당신이 사신 평생인 30여년 조차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데, 당신이 이루신 일이라고 해도 목수로 시작한 인생이 전부였고, 우리가 아는 조금이라도 성공한 사람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위험한 발언처럼 ‘주님의 인생은 어쩌면 실패한 인생이다’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게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교회의 고백에는 의심이 없지만, 그러기에 주님이 세상에서 이루신 일들은 어느 하나 ‘마침표’나 ‘닫힌 괄호’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늘로 오르시는 자리는 주님이 결정하신 우리와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영원히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지만 적어도 사람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장면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도 탐탁하지 않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부활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모두 옳았다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세상에 계시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아직 의심 속에 있었다는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는 순간에도 제자들은 깨닫지를 못했고,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시는 순간에도 틈만 나면 자신들 중 누가 높은가를 두고 다투거나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했던 제자들입니다.
칭찬보단 꾸지람에 가까운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한 녀석은 스승을 팔았고, 한 녀석은 알몸으로 도망쳤으며, 스승을 지키고자 다짐했던 큰 제자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합니다.
엉망진창이고 아무리 급했던 사건이라 하더라도 순식간에 모두 사라진 상황에 주님은 그야말로 사방이 막힌 상태에서 재판과 죽음에 이르는 순식간의 사건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예언과 함께 시작된 공생활이었지만 하느님의 삶은 바람 앞에 순식간에 꺼져버린 촛불과 같았고 아예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그분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제자들이 아닌 여인들이었고, 부활의 첫 목격자 역시 이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은 제자들이 아니라 고작 전해주는 소식에 긴가민가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이 전해져도 계속 믿지 않았던 이들은 결국 주님을 만나고서야 알게 됩니다.
그들은 스승의 예언조차 믿을 수 없었던 셈입니다.
그런 주님이시니 그분의 공생활과 구원사건을 어찌 성공한 삶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 후 40일을 보내시고 제자들을 준비시켰음에도 제자들은 이 모양이었습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의 이미지가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위험한 도전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정말 모든 것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이 제자들을 통해 당신을 믿고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되리라 알고 계신 듯 사명을 주십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의 사람들은 그분을 닮아 완전해야 하는데, 완전하신 하느님이 부족한 이들에게 완전한 가르침을 맡기셨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당신이 살아 계실 때에야 당신이 가서 완성하셨다 치지만, 이제 이 사람들이 스스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주님은 주저하지 않으시고 하늘로 오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함께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복음의 사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고 잘 준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생길 때마다 우리의 반성과 고민은 깊어지고 대책을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 하나는 이 시작의 모습이 놀랍게도 이런 엉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고민을 하는 우리가 그들에게 이 귀한 신앙을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전혀 모자람 없이 말입니다.
주님의 확신은 우리의 어떤 것보다 강하십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이 세상이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주님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어리석지만 하느님은 분명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부족함이 바탕이 아니라 그냥 있는 모습으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의 세상도 첫 제자들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한 분 하느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 부산교구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들 -꿈, 고백, 실천>
오늘은 제95차 전교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전교 주일 담화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4,20)
올해 전교 주일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보고 들어 마음에 지닌 것을 우리가 저마다 책임지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도록 하는 요청입니다.
전교 사명은 언제나 교회의 특징이니, 교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교 소명은 과거의 일이거나 이전 시대의 낭만적인 흔적이 아닙니다.
특히 요즈음과 같은 코로나 19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시대에 우리 삶의 반경을 넓히고, 우리의 관심권에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주님과 함께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도 우리의 형제자매라고 기꺼이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우리 모두 참된 선교 제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전교주일, 우리의 신원이 새롭게 확인됩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참된 전교 제자들이 될 수 있겠는지요.
거창하지 않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전교 제자들답게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어제 수도형제와 언뜻 주고 받은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루가 참 빨리 갑니다.”
“하루만인가요, 하루도, 일주일도 한달도 일년도 금방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생도 금방입니다.”
평범한 대화지만 깊어가는 기도의 계절 가을과 함께 시리도록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더불어 시편 90장 10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새삼 짧은 인생,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서 깨어 잘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갖게 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복음 선포의 선교적 삶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할 때 삶은 역동적이 되고 생동감이 넘치며 방향감 역시 뚜렷해질 것입니다.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 살아갈 때 비로소 인생 무지와 허무로부터 벗어나 참으로 의미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꿈입니다.
머리의 꿈입니다.
우선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비전이, 희망이 생생해야 합니다.
사람은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이들이 사라지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주가 보장되어도 타락하게 되고 나태해집니다.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집니다.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내면은 날로 황폐화 됩니다.
정말 지옥은 꿈이, 비전이, 희망이 사라진 곳입니다.
우리의 꿈은 비전은 희망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 되는 꿈이요 비전이요 희망인 하느님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그가 받은 환시를 통해 우리의 꿈을 환히 보여 줍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으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얼마나 멋진 꿈이며 비전입니까!
언젠가의 꿈이, 비전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주님의 집’에서부터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앞당겨 실현되는 꿈이자 비전이요 희망입니다.
이어지는 영원한 평화의 비전은 얼마나 황홀한지요!
“그분께서 민족들의 재판관이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으리라.”
언젠가 그날의 꿈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우리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실현되어야 할 평화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입니다.
참으로 꿈이 없다, 비전이 없다, 희망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몸소 하느님의 꿈이, 비전이, 희망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영적 야곱 집안의 공동체가 되어 그렇게 살아가라고 격려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둘째, 고백입니다.
가슴의 고백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대부분 고백 언어입니다.
오늘날의 비극이자 불행은 고백이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꿈을, 비전을, 희망을, 사랑을, 믿음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는 것이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마음을 담아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찬미를, 감사를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고백의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사랑이요 희망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고백기도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 시간입니다.
참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공동전례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2독서 로마서에서 특히 강조하는 바 ‘고백’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아름답고 고무적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주님께는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고백하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부르는’을 ‘고백하는’ 말마디로 바꾸니 더 실감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믿음을, 사랑을, 희망을, 찬미를, 감사를, 기쁨을, 평화를, 행복을 고백할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 이런 고백기도를 바칠 공동전례기도 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평생 살아도 주님을 몰라, 주님을 잊어 이런 고백기도 한 번 못해보고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망하겠는지요!
이런 고백기도보다 영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내적 위로와 치유를 주는 수행도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향한 한결같은 사랑의 고백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여 우리를 신망애(信望愛)의 사람, 진선미(眞善美)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니, 이런 우리의 모습 자체가 그대로 참 좋은 복음 선포입니다.
셋째, 실천입니다.
발의 실천입니다.
꿈과 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실천의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관상의 친교는 활동의 선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꿈의 사람만이, 고백의 사람만이 비로소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가 되어 실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열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통해 늘 현재화되어야 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과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세례를 강요할 것도 없습니다.
각자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삶의 모범을 보여 이를 보고 배우고 깨닫고 감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이웃이 주님을 만날 때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일을 일컬어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 칭합니다.
이는 특히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승들에게 어울리는 선교입니다.
바로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환대함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환대를 통한 선교입니다.
그러니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선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큰 울림을 줍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 복음을 선포하라 파견된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신망애의, 진선미의 삶 자체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우리 믿는 모두에게 주어진 복된 사명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꿈의 사람, 고백의 사람, 실천의 사람으로, 참 아름답고 행복한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 살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ㄴ)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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