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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간맥맥(相看脈脈)
말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는 뜻으로, 전남 영암 출신 문인 최경창과 함경도 기생 홍랑의 사랑 이야기이다.
相 : 서로 상(目/4)
看 : 볼 간(目/4)
脈 : 줄기 맥(⺼/6)
脈 : 줄기 맥(⺼/6)
출전 : 남학명(南鶴鳴)의 회은잡설(悔隱雜說)
전남 영암군에 내려오는 사랑 이야기로, 남학명(南鶴鳴)의 문집 '회은잡설(悔隱雜說)'에 있다.
洪娘, 洪原妓, 愛節有姿色.
홍랑은 홍원 땅 기생인데 절개를 좋아하고 자색이 있었다.
少爲崔孤竹所願, 及孤竹歸京師, 娘追及雙城而別, 還到咸關嶺.
젊어서 최고죽(최경창)에게 사랑받았는데, 고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쌍성까지 따라갔다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함관령에 이르렀다.
値日昏雨暗, 作歌一章, 寄孤竹.
날은 저물고 비가 내려 침침해지니 노래 한 장(章)을 지어 고죽에게 부쳤다.
後, 娘聞孤竹有疾, 即日發行, 凡七晝夜到京.
후에 홍랑은 고죽이 병이 난 소식을 듣고 그날로 떠나 이레 만에 서울에 왔다.
然, 以邦禁, 不得留.
그러나 나라의 금지령 탓에 머물 수 없었다.
孤竹病已, 送娘, 贈詩曰.
고죽은 병이 낫자 곧 홍랑을 보내며 시를 전했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말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향기로운 난초를 건네주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제 하늘 끝 저 멀리로 가면 얼마나 걸릴꼬
莫唱咸關舊詩曲(막창함관구시곡)
험관의 옛 노래를 그대여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이제 청산이 비구름에 어둡네
孤竹沒後, 自毁其容, 守墓於坡州.
고죽이 죽자 홍랑은 얼굴을 훼손하고 파주에서 묘소를 지켰다.
壬辰之亂, 負孤竹詩稿, 得免兵火.
임진란이 터지자 고죽의 시집를 짊어지고 다녀 전쟁 불길을 면했다.
及死, 葬孤竹墓下.
홍랑이 죽자 고죽의 묘 아래 묻어 주었다.
전남 영암 출생으로 1568년 급제한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이 34세 때 북해평사로 함경도 경성에 부임했을 때 기생 홍랑을 만나 사랑했다. 홍랑이 법을 어기며 병문안 간 게 빌미가 돼 최경창은 파면되고, 45세에 암살당한다. 최씨 문중은 홍랑의 절개를 기려 선산에 묻었다.
최경창(崔慶昌)과 홍랑(紅娘)의 순애보
조선 선조 때 홍원(洪原)땅의 예기(藝妓)이자, 재색을 겸비한 여류시인이기도 하였던 홍랑(洪娘)은 이름을 애절(愛節)이라 하였으며,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사대부 가문의 족보에 오르고, 선산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을 보면 홍랑이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의 소양과 재질은 양반 사대부나 시인 가객들에 뒤지지 않았다.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많은 남자들의 유혹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만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을 만나면서 세세생생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을 엮어가게 된다.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인데다가 악기를 다루는 재주와 활 솜씨 또한 뛰어났던 인물인데, 1568년 과거에 급제하고, 5년 후인 1573년(선조 6년)에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게 된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예로부터 국방의 요지로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경창은 처자를 남겨두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인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은 경성 땅의 기생이던 홍랑의 미모와 재능에 매료된다. 이들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홀로 고적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결정적인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결국 홍랑은 군사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최경창과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1574년(선조 7년), 두 사람의 사랑 앞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고, 당시 관아에 속해 있는 관기는 해당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속절없는 이별 앞에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이 서울로 떠나는 날,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가며 최경창을 배웅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옆에 피어있는 산 버들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홍랑은 그 버들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묏버들 가려꺾어...'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고죽의 마음 또한 오죽했으랴. 홍랑으로 부터 건네받은 연정가인 시조 한 수를 한문으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옮겨 '번방곡(飜方曲)'이라고 이름 붙여 각각 나눠 가졌다.
번(飜)이란 '번역한다'는 의미이고, 방(方)이란 '즉시'란 뜻이니, 번방곡은 '즉시 번역한 노래'라는 의미이다. 고죽이 번역한 칠언고시 '번방곡'은 그의 문집 '고죽유고(孤竹遺稿)'에 실려 있다.
번방곡(飜方曲)
折楊柳寄與千里(절양유기여천리)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人爲試向庭前種(인위시향정전종)
주무시는 방의 창가에 심어 두고 보시옵소서.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생신엽)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면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잎이 시들었다가도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묏버들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 이 연정가(戀情歌)처럼, 최경창이 떠난 뒤 홍랑은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이별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이듬해, 병으로 자리에 누워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홍랑은 서둘러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러 병석에서 신음하는 최경창을 만난다.
홍낭은 수척해진 최경창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1년 반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쌓였던 그리움을 눈물로 녹여내려는 듯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 수발을 들었다. 홍랑의 정성으로 최경창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으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이 최경창을 간병하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양계의 금(兩界禁; 함경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을 어겼다는 이유와,
마침 명종 왕비 인순왕후의 국상이 있었던 직후라 정서적인 분위기까지 겹쳐서 파직을 당하게 되었고, 홍랑은 서울에서 추방되어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리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서울을 떠났다.
최경창은 떠나는 홍낭을 이별하면서 절절히 가슴을 오려내는 심정을 담아 '송별(送別)'이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相看脈脈贈幽蘭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라
至今雲雨暗靑山
지금도 궂은 비구름에 첩첩 청산이 어둡구나.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자신처럼 여겨 달라던 홍랑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을 읊조렸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선조 9년)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부음은 그녀를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라. 이제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다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마땅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앉아서 울고만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 끝에 홍랑은 몸을 씻거나 단장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은 홍랑은 또한 커다란 숯 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스스로 벙어리가 되기까지 했다.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친 뒤에도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은 자기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묵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년)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파란 많고 한많은 한 여인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전 국토가 황폐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내고, 최경창과 부인 선산임씨(善山 林氏)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있는 그녀의 묘비에는 '시인 홍랑지묘(詩人 洪娘之墓)'라고 쓰여져 있다.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양반 사대부 문중까지도 감동시켜,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최경창의 묘소 바로 아래에 그녀를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쯤 그들은 이별도 없고, 갈등도 없고, 전쟁도 없는 천상에서 재회하여 전생에 못다 이룬 숭고한 사랑을 만끽하고 있으리라.
홍랑의 무덤 옆에는 1980년대에 전국 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洪娘歌碑'가 다소곳이 서있는데, 그 시비 앞면의 '孤竹詩碑'에는 홍랑의 '묏버들...' 시를 최경창이 漢譯한 翻方曲이 새겨져 있고, 뒷면 '洪娘歌碑'에는 그녀의 '묏버들...' 원문이 새겨져 있는 톡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살아서는 만남과 이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은 후에는 영원히 함께 있으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세운 사람의 정성과 재치를 느끼게 하는 노래비가 아닐 수 없다.
최경창(崔慶昌)은 해주 최씨 전한공파(典翰公派 )19세 손으로 전라남도 영암출생.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1561년 진사과(進士科), 1568년 문과(文科)에 급제. 관직은 부사(府使)에 그쳤고, 청백리에 올랐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귀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간이 최립(簡易 崔笠) 등과 수창(酬唱)하여 그들을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렀으며, 송강 정철(宋江 鄭澈), 만죽 서익(萬竹 徐益) 등과도 절친한 교유(交遊)를 가졌다.
시와 문장에 있어서는 당풍(唐風)지향의 시풍을 진작시켜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손곡 이달(蓀谷 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린다.
버들가지로 정표 삼은 홍랑의 가비(歌碑)
홍자성의 '채근담'에 "기생도 늘그막에 남편을 따르면 한 평생의 분 냄새가 사라지고, 열녀라도 머리가 센 뒤에 정조를 잃으면 반평생의 절개가 물거품이 된다. 옛말에 이르기를 '사람을 보려거든 그 후반생을 보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명언이다"라 하였다.
조선조에 있어서 우리 문학사중 가장 애절한 연정가(戀情歌)로 유명한 예기(藝妓)의 실증된 내용, 즉 실화로 선조 년간에 채근담의 교훈처럼 살다간 기생이 있었다.
그 이름은 홍랑(洪娘)으로 함경도 경성의 이름난 기생이자 시문에 뛰어난 여류시인으로 삼당 시인의 한사람인 최경창(崔慶昌)의 문집 속에 그녀의 문학작품과 함께 전해오면서 후세에 여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오고 있다.
고죽 최경창의 후손들은 홍랑의 묘비의 묘제(墓題)를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라 쓰고 있다.
시문에 능한 고죽 최경창
최경창은 본관이 해주로 호가 고죽(孤竹)이다.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팔 문장으로 불리었다. 당나라의 시문에도 능하여 삼당파(三唐派)의 한사람이기도 하였다.
삼당파 라는 것은 조선 선조 때의 최경창, 백광훈, 이달 세 시인을 일컫는 말로 고려시대 이래 한국의 시인들이 대개 중국 송나라의 소동파, 황산곡 등의 시를 배워왔는데, 이 세 사람은 당나라의 시문을 배우는데 힘을 기울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수준은 만당(晩唐)에 머물렀으며, 성당(盛唐)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고죽은 1568년(선조 1) 수물 아홉 나이에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그 5년 후인 34세 되던 해인 1573년(선조 6)에 함경북도의 북도평사로 부임하면서 홍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북도평사(北道評事)란 조선의 정 6품의 외직 문관으로. 병마절도사 밑에서 일하는 벼슬이었다. 본래 이름은 병마평사(兵馬評事)이고 약칭으로 북평사, 평사이다.
그 임무는 병마절도사를 도와 도내 순행과 군사훈련, 무기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 점검, 군사시설 수축 등의 임무를 대신하였으며 병마절도사 유고시에 그 임무를 대행하였다. 이는 변방에 무신 수령이 많이 임명되고 병마절도사의 권한이 막중하여 문신관료가 보좌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성(鏡城)의 예기(藝妓) 홍랑
함경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함경북도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기생의 출신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아무나 쉽사리 꺽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가지나 담장 및의 꽃을 의미하는 노류장화(路柳墻花)에 머물지 않았다.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잘 다듬어진 예기(藝妓) 홍랑이었다. 그래서 홍랑은 관아의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고 미색을 흘리는 여느 기생과는 달리, 그 품성과 재주가 남달랐다.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이미 양반 사대부나 유명한 시인 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며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들의 유혹은 도를 더해갔으나 홍랑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죽(苦竹)과 예기(藝妓) 홍랑의 맞남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최경창이 북도평사로 함경도의 경성에 나타나면서 서로 만나게 되면서 세세토록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으로 인연을 맺게되었다. 예기 홍랑의 뛰어난 가무솜씨와 시문의 능력에 짝이 될 만 한 사람이 바로 최경창이었다.
최경창 또한 탁월한 문장가인데다, 어릴 적 영암에서 노략질하는 왜병들에게 피리를 불어 왜병들이 감탄을 하며 물러나게 할 절도로 음률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났던 인물이었는데, 북평사로 부임하면서 서로 정신적으로 상대할만한 짝을 만나게 된 것이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예로부터 국방의 요지로 취급되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은 이미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 중의 오지인 함경도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함경도 경성의 최고 예기(藝妓)였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기였기 때문에 관리와 만나는 일은 매우 자유로웠을 것인데, 홀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우선 정신적으로 딱 맞는 동료이자 짙고 은밀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처지가 되어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최경창의 남긴 기록에 의하면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동행하여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며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사랑에의 시련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오고 말았다. 중앙정부의 부름을 받은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구속당하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별을 눈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떠 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 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불후의 명 시조 "묏 버들 가려 꺽어"
함관령 고개를 더 이상 넘을수 없는 홍랑,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산자락 길옆에 서 있는 산 버들이었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정표인양 건네 주며 구슬프게 연정가 인 시조 한 수를 읊었다.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산비탈에서 자라고 있는 버들가지를 꺾어 정표로 준 홍랑의 기발한 생각을 고죽인들 왜 모르겠는가. 버들가지란 잎이 시들었다가도 땅에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나무인 것을.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항상 님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다는 것을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곧 바로 한문시 번방곡(飜方曲)으로 번역되고
고죽은 홍랑의 연정가인 시조 시 한 수를 노래로서 건네 받고, 곧바로 한문으로 번역하여 '번방곡'이라 이름 붙여 홍랑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번방곡(飜方曲)의 번(飜)이란 번역한다는 의미이고, 방(方)이란 곧 바로 그 즉시의 뜻이니 곧바로 번역한 노래라는 뜻이다. 그 한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折楊柳寄與千里人(절양류기여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新生葉(수지일야신생옆)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최경창이 한역한 칠언고시 번방곡은 그의 문집인 고죽유고(孤竹遺稿)에 실려 있다. 고죽유고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바 있는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되어 있다.
홍랑의 묘역 앞에 서 있는 시비를 살펴보면, 그 제목이 '홍랑가비(洪娘歌碑)'라 되어 있다. 그리고 최경창이 변역한 글제목이 번방곡이라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이들 두사람이 이별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홍랑이 먼저 노래로 불러 준 내용을, 곧 바로 번역하니 곡(曲)이 아니었을 가 한다. 그래서 고죽유고를 찾아 살펴보면, "노래 한 장을 지어 나에게 주었다(作歌一章以寄余)"는 구절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고죽의 병석을 찾아온 홍랑
홍랑은 고죽과의 이별 이후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 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풍문을 타고 멀고 먼 함경도 경성의 홍랑의 귀에까지도 들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홍랑의 가슴은 애절하기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다. 죄경창의 기록에 의하면 "칠 주야 동안 쉬지 않고 찾아왔다"고 하였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차츰 회복되어 갔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왔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양계의 금이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당시 사회의 표적이 되어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때는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 왕후가 돌아 가신지 1년이 채 안된 국상 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별의 시간을 맞이하여 고죽은 홍랑에게 애절한 시 한 수를 읊어 주었다. 시의 내용을 뜯어 살피면 이보다 더 애절할 수가 없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마음속 정감이 고동 치지만 그윽한 난(蘭)님을 보내오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제 가면 아득히 먼 곳 어느 날에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 옛날의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길 어둡겠지.
홍랑은 고죽에게 그윽한 향을 풍기는 난(蘭)과 같은 존재였다. 시문의 첫 연에 맥맥(脈脈)이란 "서로 말 없이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정감이 고동치는 모양"을 표현한 말이다. 그들은 이번의 이별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슬픈 일화만 남기고 만다.
얼굴을 난도질하고 시묘 살이 했던 홍랑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이후 복직이 되어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 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곧 바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특히 다른 남정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고 살았다.
고생은 그뿐이 아니었다. 고죽의 묘소가 한강 하류 인근이라 겨울이 되면 차가운 강바람도 참아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하여 3년을 지나고, 차마 떠날 수 없어 수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계속하였다.
고죽유고(孤竹遺稿)가 남아 있는 것은 홍랑의 공적
근 10여 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그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 국토가 황폐화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고죽 최경창의 묘소와 그녀의 무덤이 있다.
1969년 6원에는 홍랑의 묘비를 세우며 비제(碑題)를 '詩人洪娘之墓'라 하고 고죽의 15 대손 태호씨가 비문을 찬 하였다. 홍랑의 묘소 아래에는 1981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의 화원 50여명이 추렴하여 세운 홍랑가비(洪娘歌碑)가 서 있다.
그러나 홍랑의 애절한 가비가 서 있는 이 묘역은 개발이라는 시대적 변화의 물결을 타고 불원간 다른 곳으로 옮겨 져야 할 처지이다. 고죽의 후손들이 파주는 물론이고, 전남 영암, 경기 안성 등지에 살고 있는데 서로 자기네 사는 곳으로 이장하려 하고 있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해주 최씨 종중의 설명이다.
▶️ 相(서로 상, 빌 양)은 ❶회의문자로 재목을 고르기 위해 나무(木)를 살펴본다는(目) 뜻이 합(合)하여 나무와 눈이 서로 마주본다는 데서 서로를 뜻한다. 나무에 올라 지세(地勢)를 멀리 넓게 보는 모습, 목표를 가만히 보다, 보고 정하는 일, 또 보는 상대, 상대의 모습 따위의 뜻으로도 쓴다. 지상에서 제일 눈에 잘 띄는 것은 나무이기 때문에 木과 目으로 합(合)하여 쓴다는 설도 있다. ❷회의문자로 相자는 '서로'나 '모양', '가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相자는 木(나무 목)자와 目(눈 목)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相자는 마치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래서 相자의 본래 의미도 '자세히 보다'나 '관찰하다'였다. 相자는 나에게 필요한 목재인지를 자세히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자세히 보다'를 뜻했었지만, 후에 나무와 눈의 대치 관계에서 착안해 '서로'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相(상, 양)은 (1)얼굴의 생김새 (2)각 종류(種類)의 모양과 태도(態度) (3)그때그때 나타나는 얼굴의 모양새 (4)옛적 중국(中國)의 악기(樂器)의 한 가지. 흙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은 작은 북과 같음. 손에 들고 장단(長短)을 맞추어 두드림 (5)물리적(物理的), 화학적(化學的)으로 균질(均質)한 물질의 부분, 또는 그리한 상태. 기상(氣相), 액상(液相), 고상(固相)의 세 가지가 있음 (6)명사(名詞) 뒤에 붙어서 그 직위(職位)가 각료(閣僚)임을 나타내는 말 (7)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서로 ②바탕 ③도움, 보조자(補助者) ④시중드는 사람, 접대원(接待員) ⑤담당자(擔當者) ⑥정승(政丞) ⑦모양, 형상 ⑧방아타령 ⑨악기(樂器)의 이름 ⑩자세히 보다 ⑪돕다 ⑫다스리다 ⑬가리다, 고르다 ⑭따르다 ⑮이끌다 ⑯점치다 ⑰생각하다 그리고 ⓐ빌다, 기원하다(양) ⓑ푸닥거리하다(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서로 호(互)이다. 용례로는 서로 서로를 상호(相互), 서로 도움을 상조(相助), 두 가지 이상의 요소가 서로 효과를 더하는 일을 상승(相乘), 서로 어울림이나 상호 간에 교제함을 상고(相交), 서로 짝짐이나 서로 함께 함을 상반(相伴), 서로 반대됨 또는 서로 어긋남을 상반(相反), 서로 믿음이나 서로 신용함을 상신(相信),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 마주침을 상치(相値), 서로 같음을 상동(相同), 서로 고르게 어울림이나 서로 조화됨을 상화(相和), 남녀가 불의의 사통을 함을 상간(相姦), 서로 마주 보고 있음이나 마주 겨룸 또는 그 대상을 상대(相對), 생김새나 모습을 양상(樣相), 잘 알려지지 않거나 잘못 알려지거나 감추어진 사물의 참된 내용이나 사실을 진상(眞相),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위치나 양상을 위상(位相), 실제의 모양을 실상(實相), 사람의 얼굴의 생김새를 인상(人相), 겉에 드러나는 추한 몰골을 흉상(凶相), 서로서로 도움을 일컫는 말을 상부상조(相扶相助), 서로 돕는 일을 일컫는 말을 상호부조(相互扶助),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움을 일컫는 말을 상애상조(相愛相助),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그리워해 잊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상사불망(相思不忘), 뛰어난 선비도 지나치게 가난하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서 활동할 길이 열리기 어렵다는 말을 상사실지빈(相事失之貧), 서로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을 이르는 말을 상망지지(相望之地),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만나보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상사불견(相思不見), 오직 생각하고 그리워함을 일컫는 말을 상사일념(相思一念), 서로 사랑하는 도리를 일컫는 말을 상애지도(相愛之道),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오행이 상생하는 이치를 일컫는 말을 상생지리(相生之理),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맑지 않다는 뜻으로 윗사람이 옳지 않으면 아랫사람도 이를 본받아서 행실이 옳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상즉불리(相卽不離), 서로 욕하고 싸움을 일컫는 말을 상욕상투(相辱相鬪), 서로 높이고 중하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상호존중(相互尊重),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며 상대를 대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학식이나 업적이 크게 진보한 것을 이르는 말을 괄목상대(刮目相對), 간과 쓸개를 내놓고 서로에게 내보인다는 뜻으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귐을 일컫는 말을 간담상조(肝膽相照), 같은 병자끼리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겨 동정하고 서로 도움을 일컫는 말을 동병상련(同病相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묵묵한 가운데 서로 마음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심심상인(心心相印), 부자나 형제 또는 같은 민족 간에 서로 싸움을 일컫는 말을 골육상잔(骨肉相殘), 사물은 같은 무리끼리 따르고 같은 사람은 서로 찾아 모인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유유상종(類類相從), 수레 덮개를 서로 바라본다는 뜻으로 앞뒤의 차가 서로 잇달아 왕래가 그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관개상망(冠蓋相望), 생각이나 성질이나 처지 등이 어느 면에서 한 가지로 서로 통함이나 서로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일맥상통(一脈相通) 등에 쓰인다.
▶️ 看(볼 간)은 ❶회의문자로 看(간)은 눈위에 손끝을 대고 바라보는 모양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見(견)과 옛 음(音)이 비슷하여, 같은 근본에서 분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❷회의문자로 看자는 '보다'나 '바라보다', '관찰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看자는 手(손 수)자와 目(눈 목)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看자는 눈 위에 손을 올려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看자는 사물을 세심히 관찰하기 위해 눈언저리에 손을 갖다 대고 살펴본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看자는 단순히 '보다'가 아닌 '자세히 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看(간)은 ①보다, 바라보다 ②지키다, 감시하다, 번서다 ③관찰하다, 헤아리다 ④가리다, 고르다 ⑤방문하다 ⑥환대하다, 극진하게 대접하다 ⑦진료하다 ⑧행하다, 분별하다 ⑨결정되다, ~에 달려있다 ⑩대접(待接), 대우(待遇) ⑪해득(解得)한 것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묏자리를 잡으려고 산을 살핌을 간산(看山), 책을 소리내지 않고 읽음을 간서(看書), 교도소에서 죄수의 감독과 사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간수(看守), 자세히 보아 살핌을 간심(看審), 그러한 것으로 여김을 간주(看做), 아픈 사람의 곁에서 돌봄을 간병(看病), 환자를 돌보는 사람을 간호인(看護人),보아서 속을 확실히 알아냄을 간파(看破), 상점 등에 내 건 표지를 간판(看板), 앓는 사람을 잘 보살펴 구호함을 병간(病看), 활용하여 봄을 활간(活看), 돌이키어 봄 또는 여러 사람이 차례로 돌려봄을 회간(回看), 탐탁하지 않게 보아 넘김을 헐간(歇看), 조용히 바라봄을 서간(徐看), 싫도록 봄을 포간(飽看), 가로로 줄을 친 안에 벌여 적은 표 또는 글을 가로로 보아서 읽어 감을 횡간(橫看), 자세히 살피어 보도록 여쭈어 아룀을 주간(奏看), 모르는 사실을 알아 내기 위하여 샅샅이 찾아보거나 살펴봄을 추간(推看), 자세히 살펴 봄을 검간(檢看), 세로로 줄을 친 안에 벌려 적은 표를 직간(直看), 눈여기어 보지 않음을 범간(泛看), 고향 생각이 간절하여 낮이면 고향 쪽 구름을 보고 밤이면 달을 보며 거닌다를 일컫는 말을 간운보월(看雲步月), 나중에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제간하회(第看下回), 서로 한 자리에서 마주보고 사무를 인계함을 일컫는 말을 면간교대(面看交代), 달리는 말 위에서 꽃을 본다는 뜻으로 사물의 겉면만 훑어보고 그 깊은 속은 살펴보지 않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주마간화(走馬看花) 등에 쓰인다.
▶️ 脈(줄기 맥)은 ❶회의문자로 脉(맥)의 본자(本字), 䘑와 衇는 동자(同字)이다. 血(혈; 몸 속을 흐르고 있는 피)과 삼수변(氵=水, 氺; 물)部가 없는 派(파; 시내가 여러 갈래로 흐르는 모양)의 합자(合字)이다. 몸 안의 혈관을 나타낸다. 나중에 血(혈)을 月(월→ 肉)로 바꾸어 쓰었다. ❷회의문자로 脈자는 '줄기'나 '혈관', '맥박'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脈자는 ⺼(육달 월)자와 派(물갈래 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派자는 물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혈관'은 심장에서 시작하여 신체의 여러 기관으로 피를 운반하는 줄기를 말한다. 그러니 脈자는 혈관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脈자는 사람의 혈관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지만 줄기가 서로 연결되거나 얽혀있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래서 '문맥(文脈)'이라고 하면 글의 성분이 서로 연결된다는 뜻이고 '맥락(脈絡)'은 사물이 이어져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脈(맥)은 ①줄기 ②맥 ③맥박(脈搏) ④혈관 ⑤혈맥 ⑥수로 ⑦진맥하다 ⑧연달아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幹(줄기 간, 주관할 관, 우물 난간 한), 梗(줄기 경/막힐 경, 얼음 뜰 채), 絡(이을 락/낙, 얽을 락/낙), 莖(줄기 경) 등이다. 용례로는 끊이지 않는 모양을 맥맥(脈脈), 혈맥이 서로 연락되어 있는 계통을 맥락(脈絡), 심장이 오므라졌다 펴졌다함에 따라 뛰는 맥을 맥박(脈搏), 맥박이 뛰는 정도를 맥도(脈度), 문맥에 통하는 흐르는 이치 또는 맥을 짚어 보아서 병을 짐작하는 이치를 맥리(脈理), 몸 가운데에서 손으로 짚어서 맥박이 뛰는 것을 알 수 있는 곳 또는 사물의 중요한 곳을 맥소(脈所), 맥박이 쳐 움직임을 맥동(脈動), 맥박의 수나 강약으로 병세를 판단하는 진단법의 하나로 진맥을 맥진(脈診), 광맥 속에 섞여 있는 광물들 가운데 가치가 별로 없는 돌을 맥석(脈石), 심장에서 혈액을 몸의 각 부분에 원심적으로 보내는 혈관을 동맥(動脈), 여러 산악이 잇달아 길게 뻗치어 줄기를 이룬 지대를 산맥(山脈), 살아 있는 목숨을 이어 가는 근본이나 어떤 일이 이어져 가는 근본 또는 목숨과 맥을 명맥(命脈), 손목의 맥박을 짚어 보아 병을 진찰하는 일을 진맥(診脈), 맥박이 자주 뛰는 일을 빈맥(頻脈), 글의 성분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문맥(文脈), 정계나 재계나 학계 따위에서 같은 계통이나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의 유대를 인맥(人脈), 일의 실마리 곧 일이 나타날 단서 또는 대가 오래된 자손을 묘맥(苗脈),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약한 맥락을 사맥(死脈), 뻗어나간 산줄기의 끄트머리를 잔맥(殘脈), 낱말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앞뒤의 유기적인 관계나 낱말과 말이 변천해 온 경로를 어맥(語脈), 일이 이루어진 경과나 또는 경로를 내맥(來脈), 피가 통하는 줄기를 기맥(氣脈), 맥박이 끊어짐 또는 산의 혈맥이 끊어짐을 절맥(絕脈), 갈래가 진 여러 줄기 가운데서 으뜸이 되는 줄기를 주맥(主脈), 동물의 몸에서 피가 도는 줄기 또는 조사로부터 이어져 내려 온 종지를 혈맥(血脈), 인연이 닿는 길 또는 이어져 있는 맥락을 연맥(緣脈), 이리저리 흩어져서 질서나 체계가 서지 않는 일 또는 한의학 어지럽게 뛰는 맥을 난맥(亂脈), 강이나 바다에서 배가 다니는 길 또는 땅속에 흐르는 물의 줄기를 수맥(水脈), 산맥이나 혈맥 따위에서 원 줄기에서 갈라져 나간 줄기 또는 주맥에서 좌우로 뻗어나간 잎맥을 지맥(支脈), 땅속 지층의 죽 이어진 맥락을 지맥(地脈), 인체의 중앙에 있어 상하를 관통하고 있는 맥을 독맥(督脈), 맥동파의 폭이 작은 맥박을 소맥(小脈), 황금의 광맥을 금맥(金脈), 생각이나 성질이나 처지 등이 어느 면에서 한 가지로 서로 통함이나 서로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일맥상통(一脈相通), 기운이 없어지고 맥이 풀렸다는 뜻으로 온몸의 힘이 다 빠져 버림을 이르는 말을 기진맥진(氣盡脈盡), 혈맥이 서로 통한다는 뜻으로 골육 관계나 뜻이 맞는 친구 사이를 이르는 말을 혈맥상통(血脈相通), 병이나 상처가 중하여 목숨에 관계됨을 이르는 말을 명맥소관(命脈所關), 십념의 깊은 뜻을 스승으로 삼아 서로 이어받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십념혈맥(十念血脈), 사람이 격분하거나 흥분하면 혈맥의 펼쳐 움직임은 강한 모습을 띄게 되지만 그 속은 마르게 됨을 이르는 말을 장맥분흥(張脈憤興), 서로 계승하여 법통을 전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혈맥상승(血脈上昇), 핏줄이 서로 통함을 일컫는 말을 혈맥관통(血脈貫通), 조리가 일관하여 계통이 서 있음을 이르는 말을 맥락관통(脈絡貫通)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