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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린의 대상을 지내고 계축년인 1913년 새해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헌정옹호운동이 일어나고 2월10일에는 민중들이 의회를 둘러싸고 어용 신문사와 경찰을 습격해서 일본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내각을 무너뜨리고 한일 병합의 원흉이자 현 일본 자민당 파벌정치의 뿌리인 가쓰라 내각을 퇴진시켰다.
가을에 추수가 끝나고 남순은 딸을 낳았다.
두 아이의 애비가 된 서른넷에 광국은 무엇이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마침 경성서 목상이 내려와 산 임자 에게 나무를 사고 겨우내 나무를 베어내어 내년 봄에 뗏목을 띠운다고 하면서 서너 사람이 제동의 행랑에서 밥을 지어 먹기로 하고 세를 들었고 산판이 시작되는 날 목상이 미리 부탁해서 담근 술과 제물을 차려 놓고 오늘 첫 번째로 베어야 할 소나무 아래에서 인부들의 안전을 위하여 산치성(山致誠)을 지냈다.
그런데 불이 날 위험 때문인지 소지(燒紙)는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벌목꾼 한 사람이 소나무를 도끼로 찍었고 이어서 차려진 제물을 음복을 하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 광국도 톱과 도끼와 낫을 가지고 산판일을 나섰다.
나무는 산 아래에서 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베는데, 나무를 자를 적에는 미리 넘어갔으면 하는 쪽을 사분의 일 정도를 톱으로 자르고 반대편에서 자르면서 거의 다 잘라갈 무렵에 밀면서 자르는데 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
이어서 도끼로 가지를 쳐내고 잔가지는 낫으로 처내고 최저로 작은 나무는 열여덟 자에 끝 부분이 두 치 이상 나오는 것까지 벌목을 했다.
여기저기서 나무 넘어가는 소리에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에 온 산이 떠들 썩 했다.
하루 종일 나무를 배어내고 저녁이면 지개에다 땔나무를 한 짐을 해서 지고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고 도끼를 갈고 낫을 갈고 광솔 불을 밝혀놓고 줄로 톱날을 갈아서 다음날 일할 준비를 하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겨우내 베어낸 나무를 산 아래 강가에 까지 운반을 해야 하는데 나무가 잘 내려가도록 적당한 곳을 골라서 나무를 길게 늘어놓고 산꼭대기에서 둘씩 넷씩 목도를 해서 발을 맞추어.
“어여차, 어여차, 어영치기, 어영치기 돌고, 돌고 놓고, 놓고.”
앞뒤 좌우 사람이 구령을 붙여가며 나무를 옮겨서 올려놓고 미끄러트렸는데 나무는 요란한 소리를 나무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섣달 열엿샛날 광국의 당숙모 이자 영달의 아내 옥선이 죽어서 광국은 물골안에 가서 장사를 지냈는데 아버지 영린이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신세를 많이 졌지만 제대로 은혜도 못 갚았는데 돌아가시고 말았다.
돌아와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설을 쇠고 몇 칠 동안 위에서 부터 아래로 나무를 끌어내리고 하루 종일 목도를 해서 정리하면서 뗏목을 만드는데, 열여덟(6m) 자 길이의 통나무 33개를 언 강에 옮겨놓고 꺽쇠를 박고 칡넝쿨을 끊어다 역어서 앞 동가리를 제일 굵은 목재로만 골라서 궁궐 떼로 만드는데 하루가 걸렸고 앞 사공의 운전에 따라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앞 동가리와 부동 떼 동가리는 조금 띠워서 연결을 해서 나무 굵기는 앞 동가리보다 약간 가는 것으로 만들고 다음 동가리는 조금 가는 것으로 역어 가면서 만들고 그보다 작은 나무로 역어가며 마지막에는 석가래 화목 등으로 쓸 나무로 끝동가리를 엮는 것으로 닷새를 넘게 걸려서 뗏목이 지었다.
앞 동가리 앞에는 강다리를 세우고 노를 걸고 좌우에 삿대를 걸었고 상앗대도 준비를 해 두었다.
그렇게 뗏목 두 채를 짓는 동안에 설이 지나고 입춘도 지나고, 보름이 가까워지자 강물이 풀려서 무꾸리 까지 와서 강 치성을 올리는데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돼지머리를 놓고, 산나물 세 접시, 메 세 그릇, 포 한 개, 삼색실과, 목상 앞 사공 뒤 사공을 상징하는 소지용 한지 석장을 마련하여 뗏목의 안전을 빌었다.
그리고 마침 경성으로 이사를 가는 이삿짐을 실어서 웃짐치기 가 되었다.
광국은 부정을 탄다는 풍습에 남순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쌀 한가마를 받기로 하고 뒤 사공으로 떠났다.
십여 년 전 영린이 임진강 나루에서 뱃사공을 초죽음을 내던 때를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광국이 뗏목에 오르자 긴 장대를 가지고 광국에게 이게 상앗대로 밀어서 뗏목을 강 가운데로 가게 해야 한다며 시범을 보여주면서 밀라고 해서 밀었다.
그러면서 상앗대를 향상 옆에 두고 있다가 여울목에서 뗏목이 부딪치지 않게 밀어야 한다고 하면서 저기 홍천강과 북한강이 합치는 합수머리에서는 소용돌이가 있으니 빨려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상앗대로 밀어서 건너편 강가로 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북한강 물줄기가 더 세서 쉽게 합수머리를 지나서 강을 따라 한가롭게 떠내려가고 가끔씩 물살이 빨라지고 바위가 많은 곳을 지날 때에는 모두 상앗대를 가지고 좌우로 밀면서 지나고 노를 저으며 물이 흐르는 데로 내려오다 사기막에서 사기그릇을 웃짐치기로 실고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두물머리에서 날이 저물어 주막에 묶었다.
다음날 매알미를 지나서 광나루를 지날 때에는 뗏목의 속도는 느려지고 노를 짓기 시작했고 그리고 조금 지나 신 시 무렵 노룬산을 지날 때에는 누군가 아리랑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한 소절씩 받아 가면서 강가에 나와 있는 누군가 들으라는 듯이 소리가 커지고 구성져 갔다.
우수나 경칩에 물 풀리나 합강정 뗏목이 떠내려간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창랑에야 뗏목을 띄워나 노니 아리랑 타령이 절러 난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합강정 뗏목이 많다고 하되 경오 년 포락에 다 풀렸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앞 사공 뒷 사공 물 조심 하게 포아리 물 사품이 치솟는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행기초매 돌돌 말아 옆에다 끼고 총각 낭군 가잘 적에 왜 못 갔나.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왜 못 갔나 왜 못 갔어, 왜 못 갔나. 총각 낭군 가잘 적에 왜 못 갔나.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네가 날 날만치 생각을 하면 가시밭길 천리라도 발 벗고 가리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다가 집을 짓고 정든 임, 올 때만 기다린다.
산천이야 푸릇해서 나가시던 임은 백설이 흩날려도 아니나 오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울타리를 꺾으며 는 나온다더니 행랑채를 돌라져도 왜 아니 오나.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나갔던 임이라도 오실라나 물명주 단중 위에 누기가 친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오시라는 정든 임은 아니나 오고 구지랑 청파리만 모여만 든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봄철인지 갈철인지 난 몰랐더니 뒷동산 행화춘절 날 알리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나물 가세 나물 가세 나물 가세 우리 집 삼 동세 봄나물 가세.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모시 대 삽추싹 쓰러진 골로 우리 집 삼 동세 보 나물 가세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오동나무 뚝 꺾어서 열녀 당 짓고 정든 임 오기를 기다린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저녁을 먹고서 썩 나시니 양짓말 큰 애기가 날 오라 한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어머니 할머니 날 좀 보소 어른이 될라고. 깜장 털 났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울 넘어나 담 넘어나 달음질 뛰다. 시무나무 가시에 발 찔렸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시무나무 가시를 파내다가 보니 암탉에 서방이 홰를 친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포아리 신영강을 다 지나니 덕두원 썩정이가 날 반긴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도지거리 갈보야 술 거르게 보맥이 여울에 떼 내려온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세월이라 갈라 거든 제 혼자서 가지 알뜰한 청춘은 왜 데리고 가나.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산이나 높고 서 골이나 짚지 조그마한 여자 속이 깊을 손가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오리님 나리님 잔 지침 소리 물 말은 흰 이밥도 중추가 민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넘기기 좋기는 막걸리 사발 놀기나 좋기는 새 장고 복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뗏목을 타고서 하강을 허니 광나루 건달들이 날 반겨한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뗏목에 생활이 하 좋다더니 신식에 생활로 다 글렀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만 왜 여느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그렇게 아리랑이 끝나갈 무렵 뚝섬나루에 도착해서 뗏목을 대고 짐도 내리고 이튿날 하루 종일 뗏목을 뜯어서 강가에 쌓고 목상과 심을 본 일행은 목상과 함께 뚝섬과 광나루 중간쯤 되는 곳에 있는 주막에서 노방초 하나씩 옆에 짝을 지어 앉히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방초가 부르는 노래에 춤을 덩실덩실 추거나 노방초의 간드러진 애교에 술 마시는 것보다 엉덩이 쓰다듬는 일에 열중인 일행도 있었다.
광국은 그동안 산판일을 하면서 쉬는 시간에 타지에서 와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랑삼아 이야기 하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다른 계집의 애교를 받아보니 쑥스럽고 부 자연스러웠다.
술기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어울리다 보니 군중심리가 작용을 해서 게서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튿날 조반을 먹고 부지런히 강을 끼고 걸어서 간내월로 돌아왔고 다음 날 부터는 산판을 한 산에서 잘라서 처박힌 나무들을 해다가 일 년 동안 땔 나무를 해다가 쌓았다.
농사일이 한참이던 양력으로 6월28일에는 제일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발칸 반도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거의 전 영역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1829년 그리스의 독립을 시작으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자치령으로 바뀌거나 독립하게 되었다.
1904년 프랑스는 스페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모로코를 분할하기로 했으며, 모로코에서 자유로운 권리를 보장받는 대가로 영국의 이집트진출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독일은 모로코의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제국의 막강한 힘을 극적으로 과시하면서 탕헤르를 방문했고, 1905년 3월 31일 자신의 요트에서 모로코의 독립과 주권국가임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제1차 모로코 위기"라 불린 국제적 위기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이 사건은 1906년 1~4월에 열린 알헤시라스 회의로 위기를 벗어났는데, 여기서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치안담당 권리를 확보했다.
1908년 2월 18일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2차 회담이 열려 모로코의 독립을 재확인하는 한편 프랑스의 "특수한 정치적 이익"과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의 경제적 이익이 인정되었다.
그런 반면에 오스만 제국에서 청년 튀르크당이 혁명을 일으키자 발칸 국가들을 긴장에 휩싸였다.
이는 청년 튀르크당이 당시 오스만 제국 헌법의 “모든 민족의 평등”대신 “튀르크인의 평등”을 슬로건으로 하는 극단적 튀르크 민족주의을 내세웠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인해 발칸 반도의 영토를 잃은 오스만 제국의 재침(再侵)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09년 북쪽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해 발칸 국가들의 위기감을 더욱 부추겼다.
1911년에는 모로코에서 지역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1911년 7월 1일 독일이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港)에 전함 '판터호'를 파견하면서 제2차 모로코 위기 가 발생했다.
독일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사실은 프랑스를 위협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 아가디르 사건으로 그해 여름과 가을 동안 전쟁 이야기가 오르내렸으나, 국제협상이 계속된 끝에 1911년 11월 4일 회담이 타결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이 회담에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대신 독일은 프랑스령 콩고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았다.
스페인은 처음에는 이러한 결정에 반대했지만, 영국의 중재를 통해 1911년 11월 27일 프랑스-스페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스페인 경계를 약간 수정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는 1911년 모로코 위기 이후에 국제적인 불 안정기를 이용해 오랜 숙원이던 북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을 이루고자 했고 오스만 제국의 두 속주가 이권이 침해당한다는 사실을 구실 삼아 1911년 9월 28일에 오스만 제국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다음날 9월 29일 선전 포고를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이탈리아 투르크 전쟁으로, 이탈리아군은 신속하게 트리폴리, 다르나, 방가지 등의 도시를 점령했으나 이슬람교도들의 저항으로 이탈리아군 사령관 카를로 카네바는 작전을 해안 지역으로 국한시켜야 했다.
1911 ~ 1912년에 열린 열강의 협상으로 탕헤르와 그 주변지역은 국제화되었다.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졌다고 판단한 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등 발칸 국가들은 1912년에 '발칸 동맹'을 맺고, 러시아 제국의 지원 아래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1차 발칸 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알바니아도 독립을 위해 군사를 파견했다.
1912년 5월에 이탈리아 해군이 투르크 근해의 그리스 로도스 섬과 도데카니사 제도의 일부를 점령했으나 전쟁은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12월 16일에 런던에서 개최된 강화 회담에서는 아드리아노플 할양 문제 때문에 회의가 진전되지 않았고,
1912년 7월~12월에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승리를 거두고 이후에 제1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 발칸 국가들의 위협까지 받은 오스만 제국은 1912년 10월 18일 스위스 로잔에서 우시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에게 트리폴리와 키레나이카 등 리비아를 넘겨주고 이탈리아는 도데카니사 제도에서 철수할 것을 약속했으나 이탈리아는 계속 그 섬들을 점령했다.
1912년 11월 알바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이슬람 공국의 성립을 선포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가 아드리아 해로 세력을 넓히는 걸 견제하기 위해 알바니아의 독립을 지지했다.
북쪽으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력한 견제에 직면한 세르비아 왕국은 제1차 발칸 전쟁의 결과로 맺은 강화 조약과 함께 얻는 영토 배분을 놓고 동맹국인 불가리아 왕국과 강경하게 대립하였다.
발칸 동맹국들은 1912년12월 이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한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있었다.
1913년 1월 23일에 오스만 제국에서 청년 튀르크당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휴전이 취소되고 전투가 재개되었다.
결국 그 해 5월 30일에 휴전 협정을 맺고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주변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불가리아 왕국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를 제외한 루멜리아(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대부분을, 그리스 왕국은 크레타 섬과 남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 · 남부 이피로스를, 세르비아 왕국은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를 합병하거나 세력권 내에 넣었고, 알바니아가 독립하였다.
불화의 시작은 불가리아 왕국이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세르비아 왕국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차지하면서, 세르비아 왕국은 이에 불만을 품고 그리스 왕국, 루마니아 왕국과 함께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 왕국에 맞섰다.
결국, 1913년 6월 29일에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지방 전부를 차지할 목적으로 세르비아 왕국과 그리스 왕국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제2차 발칸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루마니아 왕국뿐 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몬테네그로 왕국도 세르비아와 그리스 동맹에 가담해 불가리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불가리아 왕국군은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 등을 맹폭하며 맞섰으나 외교전과 군사전에서 밀리고 있었고, 그 사이에 오스만 제국이 동부 트라크야 지역을 회복했다.
결국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발칸 국가들과 전쟁을 해야 했던 불가리아 왕국은 끝내 항복을 선언한다.
불가리아의 패전으로 7월 30일부터 루마니아 왕국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8월 10일에 체결된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불가리아 왕국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 왕국에, 마케도니아 지방 대부분을 세르비아 왕국과 그리스 왕국에, 동부 트라크야를 오스만 제국에 내주었다.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영토를 이 전쟁에서 대부분 잃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크게 원망했고, 러시아와도 사이가 멀어졌다.
이 전쟁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때의 패전은 불가리아 왕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 서는 계기가 되었다.
사라예보 사건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젊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이자 대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된 사건으로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전 남슬라브인들의 통일, 구체적으로는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로부터 독립하여 독립국인 세르비아와 합칠 것을 원하였다(남슬라브 운동).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군대의 사열을 보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프린치프와 네디엘코 카브리노비치 및 4명의 혁명가 학생들이 음모를 준비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 내에서 게르만인과 슬라브인이 평등하게 지내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는 이러한 온건 정책이 오히려 세르비아인의 결집 의지를 약화시킨다고 여겼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슬라브계 민족이 동등하게 동맹에 참여할 수 있는 제3의 왕국을 수립하려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구상은 통일된 단일 민족 국가를 열망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차는 일차적으로 카브리노비치가 던진 폭탄을 맞아 테러를 당했으나, 뭔가가 날아오는 것 같이 보였던 운전사가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차 뒷바퀴에 맞고 뒤따라오던 차 밑에서 터져, 16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고 모든 사람들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루트를 변경해 지름길로 가기로 했으나, 실수로 운전사에게 미리 말하지 않아 운전사는 길을 잃고, 골목에 숨어있던 프린치프가 달려 나와 총 두 발로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
사건이 있은 직후 시민들은 세르비아인을 습격하고 그들의 가게를 약탈하였다.
사건이 발생한 사라예보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였으며 프린치프 또한 오스트리아령 보스니아에 사는 세르비아인일 뿐 세르비아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위해서 동맹국 독일의 협조를 요청했고, 여기서 외교사 최대 실수로 평가되는 “백지 수표”를 빌헬름 2세가 약속한다.
오스트리아를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1878년에 체결된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 동맹은 독일이 주도하고 오스트리아가 따르는 구조였음에도,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 때부터 오스트리아가 주도하고 독일이 따라가는 것으로 전도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일찍이 이것은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건네준 백지수표를 믿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후통첩을 48시간 안에 답하라고 보냈다.
1. 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1. 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할 것.
1. 반(反)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 것.
1.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것을 허용할 것.
이 조항들을 내민 오스트리아의 속셈은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최후통첩이 노린 것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많다.
각 조항들이 세르비아의 주권과 자존심을 짓밟는 항목들이어서 전쟁을 의도했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오스트리아가 보낸 최후통첩에는 최후통첩을 거부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르비아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이 최후통첩을 "시한이 정해진 요청문"으로 분류해서 세르비아 정부에 전달했다.
생길지도 모를 파국을 피하고 싶었던 세르비아 정부는 1, 2, 3항까지는 굴욕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4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고, 결국 세르비아는 이 최후통첩을 거부한다.
오스트리아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가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 프랑스에 동시에 최후통첩을 발했다.
러시아에 대한 최후통첩은 “총동원령을 해제하라. 안 그러면, 전쟁 상태로 간주한다. 12시간 내 답변하라.”였는데, 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는 “만일 독일이 러시아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면 프랑스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18시간 내 답변하라.”라고 했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국가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고 답변했다.
8월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 각국은 서로 선전포고를 했다.
8월3일에는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걷잡을 수 없게 전쟁을 확대 되었고 다음날인 4일에는 미국은 중립을 선언 했고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8월11일에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에 선전 포고를 해서 확전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8월16일에 용산에서 원산까지 가는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그런가 하면 8월23일에는 멀리 떨어진 일본제국까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8월28일에는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타넨베르크 전투를 개시되었고. 8월30일에는 세계 최초의 공습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제국의 공군기가 파리에 폭탄을 투하했다.
11월2일에는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5일에는 영국이 키프로스를 합병하면서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서 제 일차 세계대전은 확전되었다.
광국의 딸 언님이의 첫돌이 지났다.
그리고 광국은 이번에는 작년에 왔던 목상의 기별을 받고 인제로 산판일을 떠났다.
사구미라는 곳에 미리 방을 얻어 놓고 작년처럼 산 치성을 드리고 산판일을 시작했다.
네 명이 돌아가면서 밥을 해먹으며 겨우내 나무를 베고 끌어 내렸다.
그리고 남보다 일찍 스무사흘 날 이틀을 걸어서 집에 와서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고 설을 맞아서 설을 쇠고 초닷새 날 다시 사구미로 떠났다.
뗏목을 짓고 소양강 얼음이 풀리고 뗏목을 타고 내려 소양강을 내려오는데 물살이 센 곳이 많아 엄청 힘이 들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샘밭 봉의산 아래에 뗏목을 대고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은 오미라는 곳에서 자고 다음날에는 남이섬 아래 샘말 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숯을 웃짐치기로 삼십 섬을 실고 게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점심이 지날 무렵 간내월을 지나서 어리실 에서 하룻밤을 자고 사기막에서 사기그릇을 웃짐 치기로 실고 하룻밤을 자고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뚝섬에 도착하였다.
뗏목에 짐은 내리고 뗏목을 뜯어서 정리를 하고 일행은 노방초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또 광국은 간내월에서 농사일을 시작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언님이가 마마에 걸린 것이다.
작년에 재명이는 동내 구장이 우두를 안 맞으면 징역 또는 구류를 살아야 한다고 해서
우두를 맞았는데 언님이는 아직 어려서 남순이 예방주사를 맞히지 못 했는데 언님이가 열이 나고 얼굴과 손 이마에 발진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남순이 큰 올케인 복순이 보더니 손님이네 했다.
그리고 토하고 온몸이 열이 나서 불덩이 같았다.
남순이 밤을 세워가며 물수건을 갈아가며 애를 태웠는데 나흘 만에 숨지고 말았다.
복순이 이야기는 고비를 못 넘겨서 그렇다며 안타까워했다.
광국과 남순은 한 동안 아장 아장 걸으며 엄마 아빠를 부르며 재롱을 떨던 언님을 일은 슬픔에 졌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다시 일을 해야 했고 농사를 짓는 일을 시작해야 했고, 가을 추수가 끝나자 다시 목상의 기별을 받은 광국은 벌목 일을 하러 떠났다.
그런데 광국이 작년과 마찬가지로 간내월에 아버지 제사와 설을 쇠러 왔는데 큰처남 제동이 많이 편찬다고 해서 가 보니 많이 쇠약해 있었다.
설을 쇠고 나무도 떨어져 가는 것 같아서 나무도 해놓고 하면서 이럭저럭 열흘이 지나서 내일은 인제로 가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 까 제동이 마흔 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순의 아버지 역할을 하다시피 한 제동의 사망은 남순을 안타깝게 했다.
그리고 광국이 제동의 장사를 치루고 보름이 지나서 인제에 가서 뗏목을 짓고 뗏목을 타고 가서 뗏목을 정리하고 집에 도착한날 장모 순이가 위독하다고 해서 광국은 저녁을 먹다 말고 급히 남순과 함께 처가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음력이월 초여드렛날 73세의 나이로 한 달 전 죽은 아들 제동을 따라서 가고 말았다.
남순은 다시 한 번 오빠에 이어 한 달도 안 되어 어머니를 일는 슬픔을 맞아야했다.
그해 7월에는 구라파에서 솜 전투가 시작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8월에는 황제의 동생 이은이(영친왕)의 배필로 일본 왕족 이방자 가 결정되었다.
모두 수군대며 나라가 제대로 망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해가 가고 1917년 새해가 되더니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던 러시아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 사병들이 이른바 러시아 혁명의 첫 단계인 3월8일에 혁명이 일어나서 3월15일에 리콜라이2세가 폐위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러시아제국이 멸망했다.
광국도 그렇게 한해가 가고 새해가 되었으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나이도 사십을 바라보는 서른아홉이 되었다.
그리고 광국은 음력으로 삼월 스무 날 가산 당숙이 영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에 가서 장자를 지내고 왔다.
정사년 3월28일 남순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리고 이름은 재운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독일은 작년에 전차를 전쟁에 투입하더니 잠수함을 등장시켜 중립국 상선마저 격침을 시키자 중립을 선언한 미국이 이 시기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결심하고 4월6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1917년 6월19일 영국 하원에서 부인들의 참정권 승인했고, 9월15일에 러시아가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11월 7일 러시아에서는 10월 혁명(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이기 때문에 10월 혁명으로 불린다)이 시작 되었다.
10월 혁명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블라디미르 레닌이 인솔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분파)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으로 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이지만, 공산주의 10월 혁명의 진짜 주체는 레닌 등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닌, 민중들이었다.
식민지 착취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총독부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으로 국유지불하에 의해 1917년 말 7만 5178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최대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 등은 식민 치하의 한국인들이 일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국내에서 유행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의 침투를 우려하였다.
인촌 김성수는 민족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우고, 우선 그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 하였다.
인촌은 무명옷으로 교복을 정했을 때, 옷감의 국내 자체생산 및 조달을 생각하고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그의 사업계획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류주식회사'를 윤치소 등 으로 부터 인수하고,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을 위해 일본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김성수는 기계의 성능을 직접 시험 까지 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한반도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우리나라의 뜻있는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인촌은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저명한 인텔리들을 설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1918년 봄 인촌은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 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등을 방문하여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인촌이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인촌은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고보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립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 공모주였다.
국내 의류업체들은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 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 출발점은 아니었다.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정상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되돌려 1918년5월7일 루마니아 왕국이 동맹국에 항복하여 부쿠레슈티 강화조약(부쿠레슈티 강화조약은 1918년 5월 7일, 루마니아의 부프테아에서 맺어진 루마니아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 간에 맺어진 조약으로, 이 조약으로 루마니아는 동맹국에 유일하게 항복한 나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작 당시 루마니아의 왕이었던 페르디난드 1세는 조약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서명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을사늑약 서명을 거부한 것과도 같다). 이 조약은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파기되었으며 동맹국에 빼앗겼던 영토도 수복했다.)을 승인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한창이던 러시아에 공산정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 제국과 단독강화를 맺으려 하자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로 군대를 파병했고, 영일동맹에 의거하여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일본은 다른 연합국의 시베리아 파병요구에 대해 적극적 수용론과 소극적 참여론이 있었으나, 일본 정계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파병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역사학자 레오나드 험프리즈(Leonard Humphreys)에 의하면 당시 일본의 참여에 대해 당시의 일본은 영토획득의 야심, 러일전쟁 후에 획득하지 못했던 이권의 탈취, 지정학적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이유도 있었다.
즉 천황제와 양립할 수 없는 공산주의가 일본에 파급되는 것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드디어 8월2일에 시베리아 파병을 선언하였는데 다음날 도야마 현에서 시베리아 파병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반발하는 일본인들이 봉기 폭동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했지만 유럽전선에 묶여있는 다른 연합군에 비하여 여력이 있는 일본은 7만 3천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전쟁으로 참여로 제정이 필요해진 일제는 8월16일 조선에 곡류 수용령을 공포하고 조선인 들이 거두어들인 곡식을 거두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공출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9월30일 불가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항복을 시작으로 10월30일에는 오스만제국 11월3일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제국 이 연합국에 항복 했고 11월9일에는 빌헬름2세가 혁명으로 퇴위 네덜란드로 망명을 해서 독일제2제국이 붕괴되고 11월11일 독일제국이 항복하여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러시아에 백군과 붉은 군대 사이에 내전에 개입한 일본군은 아군의 육해공 협공으로 시베리아 적을 소탕함이라는 선전 포스터를 붙여가며 선군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제는 1918년 지세령을 개정하여 지세를 지가의 1.3% 만큼 부과했고, 1918년의 지세액은 전년보다 13% 정도 증가했다.
지세액 증가의 지역별 차이는 매우 커서 경기도·강원도·경상남도·경상북도·평안북도 등에서는 매우 높은 증가율을 보였는데, 경기도·강원도의 경우는 50% 이상의 증가를 보였다.
일제는 1918년 11월 조선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최종 정리보고서를 작성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자 땅 주인이 도지를 올려 받겠다고 했다.
이유는 공출 한 만큼 올려야 한다는 것으로 세금의 전가였다.
광국은 토지조사사업이 남의 일로 치부 했었는데 남의 일이 아니었다.
광국과 같은 소작인들 뿐 만 아니라 겨우 자작으로 연명을 하던 사람도 공출을 낸 만큼 점심을 굶어가며 연명을 해나가고 있었으나 돌아오는 봄이 문제였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오년 독감(스페인 독감)이 걸려서 광국은 보름을 넘게 고생을 하다가 겨우 낳아서 벌목을 하러 인제로 일을 떠났다.
1919년1월21일에는 선황제(고종)폐하께서 승하를 하면서 민심을 술렁였다.
그리고 광국은 아버지 제사와 설을 쇠러 간내월에 도착하였는데 황제의 독살 소문이 돌았다.
첫댓글 뗏목 아리랑 참 눈에 선하네요
그렇게 힘들게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