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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였다. 자기 서재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귀가 나타났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 본 루터는 기가 질렸다. 앞이 캄캄했다. 맥이 탁 풀렸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리기까지 했던 죄를 다 적어 놓은 것을 보았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준다. 자세히 보았더니 요사이 지은 죄를 다 기록했다.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야?”라고 물었다. 루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런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바로 살아! 너 이 죄값은 어떻게 할래?” 이 때 루터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 있는데 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는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하는 말씀이 기억났다. 그래서 루터는 새 힘을 얻어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여 있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졌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그때 마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당신은 오늘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그 죄를 예수가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는다면 담대히 일어서십시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역을 위한 필요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도록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새 언약의 예법 성경 : 히 9:11-22 우리는 지난 시간에 첫언약의 예법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첫언약에도 예법이 있고 나름대로 효력이 있기는 하였지만 거기에는 한계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도 이 한계성을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한계를 극복하고 완전하게 한 새언약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새언약을 이루신 분이셨습니다. 오늘은 새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새언약의 중보자로서 예수님의 사역은 첫언약의 예법과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에수님이 보여주신 새언약의 예법은 어떠합니까? 1. 장막의 성격이 다릅니다(11절).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직무는 옛 언약에 주었던 그림자의 원형적 성취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것의 구체적인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부르심을 받은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오셨습니다. 선지자로서 오셨습니다(신 18:15,18). 왕으로 오셨습니다(마 2:2). 이런 삼중직으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옛 언약이 온전케 할 수 없었던 것을 온전케 이루셨습니다. 첫언약은 모세마저 둘째 장막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지 못했습니다만은 예수님은 어느 누구라도 그 안에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새 언약의 장막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 언약의 예법은 출 36:1-8에 기록된 손으로 지은 장막과는 대조가 됩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지으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성전 안에 그의 영역이 제한될 수 없습니다. 행 17:24에 보면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한다고 하셨는데 손으로 지은 것이 어찌 하나님의 임재를 제한할 수 있겠습니까?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은 장인이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신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무한히 자신을 낮추시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왕상 8:27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초자연적인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기에(단 2:45) 손으로 지은 성전에 갇힐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새언약의 장막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의 장막은 창조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친히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창조된 것들에 속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창조”란 말은 A.V.에서는 “집”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새 언약의 장막은 이런 것들에 속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장막은 크고 온전했습니다. 새 언약의 장막이 온전하다고 하는 것은 제사장의 온전하지 못함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크고 온전한 장막이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장막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장막으로 비유하는 이유는 그 안의 모든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기 때문입니다(골2:9). 더 큰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신성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지상에 있는 어떤 피조물보다 더 탁월하고 영광스러웠던 것입니다. 장막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구약의 성막을 능가했습니다. 모세의 장막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태양이 달이나 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장막은 옛 장막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후 승천하사 자기의 구속사역에 근거해서 중보사역을 행하고 계시는 하늘 성소는 크고 온전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2. 제사의 내용이 다릅니다 새언약은 그 제사의 내용에 있어서도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새언약은 순종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어서 다릅니다. 새언약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순종을 따라 드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순종하시므로 드리신 제사가 옛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점에 있어서 다릅니다. 주님은 순종하시므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중보 사역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드릴 제사의 탁월한 성질과 효력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새언약의 중보로 세우셨습니다. 영원한 약속 속에서 아들을 지명하여 중보자가 될 것을 합의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한 방식으로 이루셨습니다. 당신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 주셨습니다. 둘째로 짐승의 피가 아닌 중보자 자신의 피를 드렸다는 점에 있어서 다릅니다. 옛언약 하에서 드려진 짐승의 피는 정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흠없는 자신의 피를 손수 드렸습니다. 그 피는 성육하신 피요(행 20:28), 보배로운 피였습니다(벧전 1:19). 모든 피를 정케 하는 피였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당신의 피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직접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성결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드리신 것은 이제 다른 피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단번에 드려진 속죄었습니다. 속죄는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죄에 대한 보상을 해야만 하고, 죄인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려야 하고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율법의 저주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피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고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주님은 종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마땅한 속전을 지불하고 건져내시기 위해서 당신의 피를 지불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산건으로 당신의 피를 드리시고 단 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 가셨습니다. 이 속죄는 다시는 반복이 필요 없는 영원한 속죄였습니다. 3. 효력이 다릅니다(13,14절). 새 언약은 그 효력이 옛 언약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단번 속죄이니 만큼 다시 드릴 필요가 없다는 점에 있어서 그 효력이 절대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언약은 모든 구원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 그 효력이 절대적입니다. 첫째로 육신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그 효력이 다릅니다. 새 언약은 육체를 정결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마 9:1-8에서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는 말씀을 통해서 육신의 질병을 온전히 치료하셨습니다. 출 15:26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양심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그 효력이 다릅니다. 새 언약의 제사는 외적인 죄의 치료 제사와는 다릅니다. 죄를 효과 있게 처리하므로써 양심을 해방 시켜 주셨습니다. 죄책감과 죄로 더럽혀진 데서 양심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원죄까지도 치료하신 주님은 이 전에는 죄로 더럽혀져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배제당한 인간이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속죄를 이루고 인간의 내부를 향해서는 양심의 자유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제 그 양심을 회복시키시고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죽은 행실은 죽음으로가는 행실이요, 죽음으로 끝나는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쓸모 없는 것들이요, 열매도 없는 것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마음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면 영원히 파멸될 것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기에 충분하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섬기기에 충분합니다. 새 언약은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기에 충분하도록 해줍니다. 완전한 복종으로 말미암는 거룩한 사역의 섬김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줍니다. 경배하며 예배하는 섬김입니다. 죄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인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심이 깨끗해진 결과입니다.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므로 우리는 살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결하게 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칼빈의 말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씻김을 받은 것이 다시 새로운 더러움으로 자신들을 빠뜨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결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합니다(15절). 새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쇠하거나 폐하거나 없어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은 보증자로서(창 43:9참고), 중보자로서(히 12:24참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알리는 사자로서, 언약을 확증하는 유언자로서 사역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기업은 영원한 기업입니다. 영원한 기업은 큰 구원이라고 하는데 성화와 영화를 포함하는 가장 포괄적 의미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 구원은 행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졌으며 약속으로 주어진 것입니다(롬 4:14). 이것은 신실한 약속이므로 박탈되지 않습니다(살전 5:24).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롬 4:16). 하지만 이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효과적 부르심을 받아 진정으로 하나님께 회심한 자들이 이 기업을 얻을 자들입니다(요 1:12). 이들은 모두 거룩하게 된 자들이고 하나님의 참되고 영적인 백성들입니다. 세상과 육체의 일을 등지고(창 12:1)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을 얻도록 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4. 유언과 첫언약과의 관계(16-22절)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새언약의 예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유언과 첫언약과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연성과 그 효과를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더욱 더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언은 어떤 것입니까? 유언의 효력(16,17절)은 죽음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죽지 않으면 유언은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언으로 첫언약을 설명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반드시 필연적인 것이란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세처럼 그 기업이 우리의 것이 되기 전에 죽으셔야만 되었습니다. 죽어야만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자기의 것을 양도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유언은 언약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이고 여러가지 은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요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이 시행될 근거를 확증하셨습니다. 죽음을 초래하는 유언은 그 의미로 피를 내세워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죽게 되었고 피 없이는 용서함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피흘리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구약의 이런 행위는 그리스도를 내다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를 통해서 더러운 것을 정결케 하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피의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사람에게 뿌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편의 상호 조약이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물을 섞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의 물과 피를 말합니다. 피를 언약책에 뿌렸습니다. 이것은 책과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율법을 거스려 범죄한 어떤 죄라도 피로써 속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붉은 양털은 그의 인격의 영광을 말하고 우슬초는 예수님의 외적인 보잘것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피로서 장막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우리의 양심에 그 피를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은헤롭게 받아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깨끗해도 보배 피가 없이는 안됩니다. 피뿌림이 없는 모든 예배는 더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옛언약의 예법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상징이나 모형이 아닌 실체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새언약의 예법으로 오셨습니다. 새언약으로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드리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인간을 온전히 구원해 주셨습니다. 모든 언약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보혈의 공로를 힙입고 그 앞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이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첫댓글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함께 함이라 놀라 지 말라 나는 네 하나 님이 됨이라 내가 너 를 굳세게 하리라 참 으로 너를 도와 주리 라 참으로 나의 의로 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멘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영광과 복음과 선교와 설교와 목회와 치유와 상담과 지혜와 능력과 유모와 기도와 찬양과 전도와 겸손과 성결과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고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오늘도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