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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어제 술을 드셨냐고 물었습니다.”
동건이 갑자기 먹먹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고개가 기운 축을 중심으로 미끄러지듯 수연을 향했다. 그러나 다시 빠르게 시선이 경찰관 쪽으로 돌아왔다. 어이없다는 듯 종긋하게 눈초리에 힘을 준 동건의 얼굴과 마주한 경찰관은 확실한 물증을 가지고 피의자와 대면할 때의 조소한 표정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선생님 다리위에는 작년부터 자살방지를 위해 전 교량 위에 설치한 CCTV가 실시간 모니터링 되고 있습니다. 종합상황실에 확인해본 결과 선생님께서 다리 한복판에서 급작스럽게 차를 세운 뒤 무단횡단을 한 채 도로 건너편으로 건너와 쓰러지는…….”
경찰관의 시선이 다시 수연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수연이 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의 동건에 대한 배려였다. 동건의 일관된 표정을 확인한 경찰관은 말을 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그 행동을 한 시점부터 자신의 배려를 무시 한데서 오는 보복심이 가미된 문장 하나를 말에 끼워 넣었다.
“두 시간 전후 다리위에선 선생님을 제외하곤 그 어떤 사람도 카메라에 찍힌 사실이 없었습니다.”
동건은 난데없이 과거 속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동기들과 장난삼아 마취제를 흡입해 보았던 그때의 기억이, 마취제로 인해 인위적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비현실감, 카오스적 무질서, 기만감 같은 것들이 한데 몰려와 뇌리에 둔중한 충격을 가했다. 그 충격에 영혼이 빠져나간 듯 몽환적
시선을 하고 있는 동건에게 경찰관은 끝내 음주 측정을 할 수 밖에 없다며 혈액 샘플을 요청하였고 얼마 후 낯익은 간호사에 의해
채혈당한 동건의 넋 나간 얼굴에다 대고 경찰관은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빠져나간다.
병실에 동건과 수연만이 남게 되자 한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경찰관이 문밖으로 사라진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그가 남기고간 말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동건의 시선이 문에다 고정한 채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힘이 들어간 미간, 크게 앙다물 은 입술을 보아 계속해서 자신의 기억의 테이프를 되돌려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동건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던 수연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고 있었다.
밤새 동건의 곁을 지키느라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도톰하게 살이 올라있던 눈 밑은 하루 사이에 퀭해져 보였고 볼 살 또한 핼쑥해진 것이 민민해 보였다.
병실 안은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24시간 난방이 되었던 탓도 있지만 병원에온 이후로 물 한 모금 입에다 대지 않은 탓에 탈수
증상까지 있었던 수연은 침묵을 지켜 주기위해 참고 참았다가 결국 메마른 목에다 침을 바르기 위해 한차례 목 넘김을 했다.
그러나 오히려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기침을 일으키고 만다.
수연의 기침 소리가 있자 그때서야 병실에 자신 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동건. 시선을 돌려 수연을 향했다. 그러나 깊은 상념 속에서 빠져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지 바로 말하지 못하고 텀을 두더니 입을 연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시는 것이…….”
“전 동건씨 말을 믿어요."
수연의 동문서답에 동건을 쓸쓸한 미소로 화답했다. 사실 조금 전에 와서는 자신조차도 본인 스스로에게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를 되묻고 있었던 터였다.
정신이 돌아온 순간에는 자신이 본 것에 확신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경찰관이 CCTV에 찍힌 영상기록을 들먹이는 순간까지도
또한 낯익은 간호사가 와서 자신의 팔에 주사바늘을 꼽아 음주측정을 위한 혈액을 뽑아가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관이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떠올라 자신의 기억상태를 의심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어두운 상태의 늦은 밤, 차안에서의 빠른 움직임, 7시간이나 되었던 긴 수술시간 그에 따른 피로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생각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와 ‘아니다’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터지는 폭죽의 오색발광이 이끈 착시현상의
가능성, 교량 옆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만들어낸 수증기로 인한 흐릿한 가시거리, 이처럼 자신의 눈에 착시현상을 불러올
가능성들을 가져다 붙이자 점차 확신이 무뎌지더니 결국 수연의 인기척이 있기 직전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확신을 의심하는
쪽으로 결론을 모으고 있었다.
동건이 계속 남아있겠다고 하는 수연을 끝끝내 만류하자, 저녁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고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홀로 남게 된 동건은 수백 번 다시 자신의 기억을 놓고 사실이다, 아니다 에 대해 우열을 가렸지만 끝내 실체가 없는 직감으론 확신을 얻어낼 수는 없다는 배타성이 강한 정황만 확인한 채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된다.
회색의 창공위에서 검붉은 태양이 꺼져갈 쯤 동건은 잠에 구멍 속에서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너무 오래 잔 탓일까? 링거주사약 때문인가? 링거주사는 분명 아니다 링거주사는 오른팔이 아닌 왼팔에 꼽혀 있다. 그럼 자세가 문제인 것인가?’
동건은 눈을 뜨기 전 자신의 오른팔이 저려오고 있다는 느낌을 두고 이유를 유추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감은 상태에서는
합당한 이유를 찾을 길이 없자, 서서히 눈을 떠 살핀다.
실체가 완벽히 드러나기도 전에 전류처럼 흐르는 통증, 풋풋한 감촉, 싱그러운 향내 이런 거 일순간에 몰려와 심장을 뒤흔들었다.
동건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팔위에 걸쳐 잠들어 있는 수연을 보고는 짠한 가슴을 쓸어내리고 만다. 부모님을 여의고부터 병원에
오는 것을 죽기보다 실타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자신을 위해 병원에 와있었다.
동건은 어제 있었던 일들을 까맣게 잊게 될 만큼의 행복이 가슴속에서 토닥토닥 채워지고 있었다. 동건은 팔이 몹시 저려왔지만
움직임을 참았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잔잔해진 머릿속과 달리 민활하게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머리를 앞질러 발 빠르게 사랑의 향연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소곤대던 가슴이 대놓고 소란스럽게 떠들자, 혹여 시끄러운 심장소리에 곤히 잠든 수연이 깰까봐 환자들에게 하도록 요구했던
복식호흡을 시작했건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눈 위에 다시 서리가 덮인 격이라 할까. 금방까지 조용히 물러서 있던 본심이
선험적사고 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자, 심장은 가슴을 뚫고 터져 나올 듯 더욱 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링거가 꼽혀 있던 왼손이 어느새 수연의 얼굴 앞에 가 있었다.
동건의 손가락이 수연의 얼굴에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조각난 얼굴을 끼워 맞힌다. 매끄럽고 윤기 있어 볼록해 보이는 이마 끝에 짙은 건 아니지만 촘촘히 그리고 가지런히 자란 눈썹이 보였고, 미간을 타고 흘러 내리 듯 곧게 솟아오른 콧날은 정갈했다.
코끝을 시작으로 오목이 패인 인중 끝에 매달린 홍조 띤 입술까지 다다르자 순간 시선으로 간음하고 있다는 느낌이 그만 멈칫했다.
그러나 아직도 본심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이번엔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새롭게 등장하고 나서자 심장은 한 단계 높은 기어
변속을 실시했다.
그때였다. 동건은 뭐가 불안했는지 반사적으로 시선을 황급히 자신의 머리 위쪽으로 돌린다.
‘없다. 다행이다’ 아까 잠들기 전까지는 분명 그 자리에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없어졌다.
“휴~”
동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만일 아직까지 그 자리에 심전도 기가 있었고 그 심전도기가 자신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면 분명
요동치는 가슴은 분명 심전도기를 깨워 요란한 경고음을 토해냈을 것이 자명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다행히 그 자리에 심전도 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서 나온 안도의 한숨이었다.
동건은 잠시 허공에서 멈추어 섯던 왼손을 다시 조준점을 향해 움직였다. 손은 또 다시 방금 전 머리칼을 쓸어내렸던 이마 위로
가서 멈추어 선다. 이번엔 심장의 진동이 손끝을 떨게 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의예과를 졸업하고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박사 학위를 얻기까지 수많은 환자들과 수술대 위에서 조우해야 했다. 매순간
사삼의 생사를 관장하면서 오는 불안감, 극심한 책임감, 숨 막히는 긴장감 앞에 마주하면서 한 번도 가슴 떨리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처럼 겁쟁이가 되어 손까지 떨어본 적은 없었던 자신의 경험을 순간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토록 혹독하게 심장을 단련시켜 왔다고 믿었건만, 수연의 얼굴위에 손등하나 올리는 것에 이토록 맥없이 자꾸만 넘어지는
용기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결국 용기와 어렵게 타협한 끝에 수연의 이마 위에 살며시 손등을 가져다 대는데 성공하게 된다.
수연의 이마에 손등을 올리는데 성공한 무용담을 가지고 감각기관을 통해 뇌관을 지나 대뇌에 전달하자 대뇌는 소뇌를 시켜 또
다른 점령지를 하달하라 명한다.
이마 위에서 배회하던 손이 이번엔 잘 익은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볼 위로 옮겨간다. 그런데 방금 전 발병됨을 알게 된 파킨스병은
어느새 말기 직전까지 악화돼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대뇌가 심하게 떨고 있는 심장을 조롱하며 손을 거두어들이라 명을 한다.
사실 동건은 수연의 몸을 만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년 전 사고로 병원에 온 수연의 상처 난 이곳저곳을 피부뿐만이
아닌 속살마저도 경험한 바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기껏해야 손등에다 보리쌀을 살짝 터치하는 것뿐인데도 용기내지 못하는 자신의 약하디. 약한 심장에다 대고
한차례 힐난 하고는 넘어진 용기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위로의 말들을 준비하는 동안 동건의 오른손이 수연의 얼굴위에
그대로 떠 있을 때였다.
그때 수연이 동건의 거친 숨소리에 그만 잠에서 깨어나고 만다. 수연이 눈을 떠 허공에 부유하듯 떠있는 동건의 손을 보는 순간
놀라서 그만 두 눈을 동그랗게 홉뜬 상태로 굳어 버렸다.
동건 또한 크게 당황한 나머지 허공에 떠있는 손을 거두어들이지 못한 채 호흡이 갑자기 급정거를 하게 된다. 미처 호흡이 멈춘
것을 예측하지 못한 심장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여기저기 대굴대굴 굴러가 버릴 듯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잠시 뒤 수연의 시선이 손위에서 자신의 눈을 향해 오는 것을 본다. 이미 도망쳐 버린 용기로 인해 그저 망연한 눈빛을 하고
있던 두 눈을 그만 꾹 감아버리는 동건, 눈을 감는 순간 머릿속에선 당황스런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 할지를 놓고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으나, 뜨거운 감정도, 차가운 이성도, 그리고 지덕을 갖춘 지성과 뛰어난 지혜마저도 그 순간엔 아무런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1초가 어마어마하게 길게 느껴졌다. 피 빛 가신 새하얀 얼굴을 한 채 쪼그라든 심장이 만든 가느다란 외줄위에서 사색, 후회,
좌절, 부끄러움들이 불안해하고 있을 그때였다. 기막힌 타이밍에 노크소리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반전을 만들어 낸다.
4. 첫 번째 데이트 1-2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은 식어가는 크리스마스의 감회를 아쉬워해선지 오늘따라 발걸음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점들은
저마다 한명의 손님이라도 더 받을 요량에 화려한 조명과 현란한 네온사인을 밝히는데 오늘만큼은 전기세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집건너 한집에서 들려오는 캐럴 송이 비슷하게 들렸다. 분명 지난해와는 무척이나 다른 분위기 이었다.
“수연씨 이상하게도 캐럴송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들리지 않아요?”
택시를 타고 홍대입구역 앞에서 내린 뒤 두 사람은 홍대주차장 근처까지 오는 동안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처음으로 동건이
수연에게 던진 말이었다.
“네, 얼마 전에 TV에서 보았는데 이젠 길거리에서 트는 음악에도 별도의 요금을 부과 한다고 하더라고요.”
“네~에?”
동건이 어이없어 하는 눈을 한 채 반문한다.
“뭐라더라? 아 그게……. 아 맞다. 저작권법 판례의 여파 때문이라고……. 상업적인 곳에서 음악을 틀게 되면 청취자 수만큼의
요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판례가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음악을 틀어 얼마나 많은 귀로 그것을 듣게 하느냐에 따라 요금이 부과
된다는 것인데 어찌 보면 매우 합당한 논리 일지 모르지만 말이에요.”
그랬다, 음악이란 것이 세상에 생겨나 수십 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 유례없던 일로서 사람들을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게 만든
금세기 TOP 뉴스 중에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네~에?”
이번에도 동건은 수연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한다. 이유는 갑자기 맞은편에서 젊은이들이 무더기로 걸어오는
통에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여성복 매장 앞을 지날 때라, 매장 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순간 수연의 목소리가 희석되었기 때문이었다.
수연이 동건에게 몸을 바짝 붙여 다가오더니 자신의 입을 동건의 위쪽으로 바투대고는 큰소리로 말한다.
“ 걱. 정. 이. 되. 서. 요. ”
동건은 순간 뒤밑 터럭으로 소름이 돋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체 하고 말한다. 그러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 스스로 느껴지자
약간 얼굴이 불 그래 변하고 만다.
“아...네.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오랜만에 잠을 실컷 잔 탓에 컨디션이 좋은데요. 오히려 수연씨가 잠을 못 주무셔서 걱정입니다.
많이 피고하시죠? ”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 목소리로 묻는다.
수연은 대답대신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는 동건의 마음을 풀어 헤치도록 만드는 개화였다. 지난 1년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인 적 없던 수연이 지금 자신을 보며 웃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동건은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의 행복을
만끽하게 된다. 또한 편으론 해묵은 애절함이 만들어낸 가슴속 멍울 하나가 퍽하고 터져 버린 듯 저릿하게 아려왔다.
그렇게 걷던 중에 몇 번을 두 사람은 히끗, 히끗 각자의 생각들을 가지고 제각기 해석한 이야기가 만들어낸 미소를 얼굴에다
그리고 있었다.
또다시 두 사람이 그렇게 말없이 걷던 중 수연이 동건의 팔을 살며시 잡아 한쪽으로 끌었다. 거기에는 일본식 길거리 음식인
다꼬야끼 가판대가 있었다.
수연이 시선으로 답을 구하자 동건이 두 번 고개를 꺽어 보이며 밝게 웃었다. 동건은 처음 접해보는 음식이었다. 미각으로 맛을 확인
하기 전 눈으로 맛을 예상하기를 생긴 모양이 호두과자와 비슷했기에 그런 맛 일 꺼라 생각했는지 다꼬야끼 하나를 입에 넣는 순간
표정이 안 좋게 변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게 된 수연,
“ 왜 맛이 없으세요?”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하는 수연을 향해 두 손을 힘차게 휘 저으며 정색하는 동건
“ 아... 아니요, 그냥 어떤 맛 일 꺼라 생각했는데 전혀 달라서요.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혹여 이런 이유로 수연이 자신을 고리타분하게 책만 파먹고 사는 그런 부류로 오해 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그만 말꼬리가 쓰러지고 만다.
까르르 터져버린 수연의 웃음. 그와 반대로 표정을 잃어버린 동건의 얼굴, 둘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이질감음 수연의 말에 의해 한순간에 사라지게 된다.
“ 저랑 비슷한 분이 여기 또 계셨네요. 저도 이거 처음 먹어보는거 거든요. 보긴 많이 봤었는데...”
수연은 동건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
“아, 그래요. 하하하”
표정이 없었던 동건의 얼굴에 표정이 만들어졌다. 동건이 웃으며 다른 하나의 다꼬야끼를 가져다 입안에다 넣는 모습을 수연은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수연은 알고 있었다. 병원일이 끝나면 항상 자신의 꽃집으로 달려왔던 1년을 그리고 길 건너 작년에 새로 지어진 오피스텔 건물
7층 한 호실에서 가게 문이 닫힐 때 까지 창가를 서성이던 한 남자를.
마지막 남은 다꼬야끼를 서로에게 먹으라고 밀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삐~익’ 하고 마이크 소음이 들려왔다. 동건과 수연은
물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 나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전기기타의 음을 조율하는 소리에 이어서 짧은 기타 반주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스피커를 통해 증폭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 홍대주차장에서 공연이 있나 봐요.”
수연의 손끝을 따라 동건의 시선이 움직이자 도리야기를 굽던 상인의 손놀림이 잠시 멈추고는 두 사람을 향해한 질문으로 수연의
추정이 사실화 된다.
“오늘 공연 때문에 일부러 이쪽으로 내려 오신 것 아니세요?”
“아뇨…….모르고”
수연이 물음에 답을 해주었다. 기껏해야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상인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묻지도 않았는
데 공연에 출연하는 출연진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모자라 출연자 중에 모그룹을 알고 있느냐고 묻고는 안다고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잘 알던 동생이라며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그들의 과거사 이야기를 봇물 터지듯 쏟아내기 시작했다.
막연히 얘기를 듣고 있자니 어색했는지 동건이 1인분을 더 주문하려 하자 수연이 동건의 눈을 찾아 고개를 젓는다. 그리곤 마지막
남은 다꼬야끼를 맨손으로 집어 자신의 입에 쏙 밀어 넣더니
“잘 먹었습니다” 하고 제법 큰소리로 말하며 동건의 팔을 잡아끌었다.
“계속 이야기를 듣다간 밤 세겠어요.”
수연이 노점상과 등진 상태가 되자 동건의 몸에 바투다 가서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동건이 하하하 웃고는 혹시 젊은 상인이
듣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고개를 힐끗 돌려 본다. 그러나 상인이 어느새 다른 손님을 맞이해 정신없는 것을 보고는 괜한 기우
이었구나 하며 동건이 웃었고 수연이 따라 웃는다.
“우리, 공연 보러 갈래요”
“네” 동건이 묻자 수연은 망설임 없이 답을 했다.
무대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무대 바로 앞쪽으로는 출연하는 가수들의 펜클럽회원들로 보이는 무리들이
보였다. 공연이 시작되기 한참 전 부터 무대 앞쪽자리를 차지하기위해 소모된 시간은 이들이 사용하고 남은 쓰레기 양으로
가늠 할 수 있었다.
클럽별로 균일화된 의상은 아니었지만 각기 다른 휘장과 색색이 다른 풍선들로 무리를 갈라놓고 있었다. 길거리 공연치고는 나름
이름 있는 가수들이 제법 나오는 터라 그런지 무대 시설장치가 웬 만큼 규모가 있어 보였다. 무대 정면에는 공연 취지의 목적을
알리는 휘문(麾文)과 함께 지원사 이름과 주최 측 회사명 및 상인연합회 후원 등이 인쇄되어 있었다.
상인들이 크리스마스 대목을 바라는 목적과 함께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의 취지를 알게 하는 내용인 ‘따뜻한 온정을
나누어요. 라는 휘문이 적혀져 있었고 공원 이곳저곳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마련해 놓은 가판대에선 일천 원짜리 상품권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세로로 길게 세워진 배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관내 어느 점포에서 현금대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거나 상품을 구매할 시 소비자는 현금대신 1천원 한도 내에선 상품권으로 대신 지불하고 상품권 판매 대금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비용으로 쓰이게 됨을 자원봉사자가 설명을 하자, 수연이 만 원권 지폐 한 장을 모금함 통에 넣었다. 산타복장을 한 자원
봉사자는 기뻐하며 상품권을 세기 시작하자 수연이 손을 뻗어 산타의 손에서 달랑 한 장의 상품권만을 빼서 들고는 흔들어 보이며
웃자, 산타는 크게 허리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 더 이상 들어가긴 힘들겠는데요.”
동건이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수연에게 말하자 수연이 수긍하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산타가 다가와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을 하자 둘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산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우와 이런 곳이 있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동건이 기쁨이 혼재한 음성으로 감사 표시를 했다.
“천사애인 분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아세요."
산타는 오른 손바닥을 동건의 귓등에다 세워 동건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목소리의 표적은 동건이 아닌 듯
소리가 상당히 크게 들렸다. 수연은 부끄러운지 차가워진 손등으로 양 볼을 번갈아 가며 다독이고 시선을 둘 곳을 찾았다. 동건은
순간적으로 모든 자각이 멈추고 홧홧한 가슴이 내뿜는 온기만을 느낀 채 시선은 수연을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은 더 먼 곳에 가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대신해서 둘 사이에 관계를 주관적인 평일지언정 ‘애인(愛人)’ 사랑하는 사이임을 각인시켜주는 순간 이었다.
두 사람의 생각 속에선 상대가 부인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보다 자신스스로가 부인 못하고 있는 마음이 가슴 밖으로 튀어 나와
상대에게 보일까봐서 그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네세요.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산타의 목소리는 두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단번에 반전을 주었다.
“아..네. 메리크리스 마스~”
수연은 대답대신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산타에게 크리스마스를 선물 받았네요.”
동건이 피씩 웃으며 말하자 수연도 고개를 숙인채로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린 채 웃었다.
산타는 두 사람을 무대 옆에 세워진 운영본부 천막 안으로 데려가 뒤쪽으로 트인 통로를 이용해 무대 바로 앞 한쪽 끄트머리에
있는 공간을 안내해 준 것이었다.
비록 무대 정면은 아니었지만 가수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로열석이 분명했다. 가끔 공연내용을 가시화하기 위해 준비된
카메라맨들의 움직임에 시선이 방해되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들이 동요하며 크게 환호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신인가수들의 무대가 연속으로 이어지자
관객들의 반응이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는가 싶더니 사회자의 입에서 동건과 수연도 알만한 갓의 이름이 호명되자, 무대가 떠나 갈
듯한, 함성이 쏟아졌다.
수연도 어느새 학창시절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환호하는 수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건은 가슴속에서 뜨겁게
뭉쳐진 덩어리하나가 꾸역꾸역 목을 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밝고 맑았던 그녀가 1년이란 긴 시간 동안이나 어둠속에서 슬픈 표정을 달고 살았다는 것이 못내 안쓰러워서 가여워서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렇게 웃는 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동안 한 번도 웃지 않았냐고 차마 물을 수가 없어서…….
“왜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에요…….”
자신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건을 발견하고 수연이 묻자 동건이 재빨리 표정을 고쳐 걸고는 관객들을 따라 주먹을 하늘로 치켜세우며 뛰어오르자 수연은 다시 환상을 쫓는 소녀로 되돌아갔다.
관객들 사이에서 곁눈질로 그런 수연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동건의 모습이 보였다.
솔로가수의 무대가 끝나고 다시 사회자의 입에서 다음무대에 나설 가수들의 그룹명이 호명되자 갑자기 무대 맨 앞줄 중앙에
포진되어 있던 노란풍선 무리들이 자리에서 벌떡일 어나 열광하기 시작하였고, 주변 이곳저곳에서도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5인조 남성 댄스그룹이 무대 위로 나오자 함성은 더욱 커졌고 이에 맞추어 무대 앞쪽에서는 분수처럼 불꽃이 이르며 노래가 시작되
었다. 노래가 최고조에 도달하자 박수소리와 함성소리 또한 절정에 이르렀다. 주변 상점주인들 까지도 장사는 뒷전이고 자신들
점포에서 멀찍이 까지 나와 관 객중 한명이 되었다.
노래가 끝나자 아쉬움이 극에 달한 노란풍선 무리들이 목이 찢어져라하고 ‘앙코르’를 외쳐대자 거의 대부분의 관중들이 이에 합세 하였다.
수연과 동건도 목청껏 앙코르를 외쳐대는 순간 그룹의 리더인 샤이니가 마이크를 잡고 소리쳤다.
“여러분, 아쉬운가요? "
“네~~” 우렁차고 단일화된, 목소리가 무대를 향해 날아갔다.
“그럼 여러분의 사랑에 힘입어 한곡 더 들려 드리겠습니다.”
“와~아...선샤인, 선샤인, 선샤인, ”
관중들은 한 목소리로 그룹명을 외쳐댔다. 그리고 잠시 뒤 무대를 환하게 밝히고 있던 조명들이 한순간에 꺼지자 어둠이 모든
군중의 목소리를 삼켜버린 것처럼 일순간 조용해 졌다.
그리고 또 다시 무대 앞쪽에서 불꽃폭죽이 화려하게 터져 오르자 침묵 했던 것만큼 이나 가감된 힘찬 환호성 소리가 온 세상이 떠나
갈 듯 울려 퍼졌다.
불꽃이 화력을 잃어갈 쯤 무대 위에 빼곡히 걸려있던 조명들이 하나둘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화려한 빛의
향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간주곡이 시작되었다. 또 다시 관중들은 음악에 맞추어 박수 소리를 보태며 흥을 북돋았다.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조명이 일제히 켜지면서 무대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때 무대 중앙 조명탑 위에서 강한 스파크
가 터졌다. 관중들은 열광한 나머지 이 또한 Show일 거라 생각했는지 더욱 크게 환호성을 질러 댔다. 그러나 아주 잠깐 사이
환호성은 비명과 절규의 소리로 누군가에게서 시작된 울음소리가 동건의 귓가에 아스라이 들여오기 시작했다.
축제의 장이 일순간 재앙의 근원지와 다를 바 없는 아비규환의 상황으로 바뀌기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무대 바로 앞쪽에 몰려있던 여학생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는 무대 위 상황을 고스란히 소리로 그려내고 있었다.
방금 전 무대 위 조명탑에서는 몇 번의 불꽃이 번뜩인 후 갑자기 쿵하고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친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드럼통만 한
조명장치 여럿이 무대 위로 떨어져 내렸다.
조명 장치 몇몇은 나무로되 무대 바닥 곳곳을 내리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만들었고 떨어진 곳은 포탄에 요격당한 것 마냥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러나 문제는 몇 개의 조명장치가 비정하게도 바닥이 아닌 가수들의 머리위로 떨어진데 있었다.
또 다른 하나의 조명장치는 팀의 리더인 샤이니의 뒷머리 쪽으로 떨어지면서 둔부일부와 등 쪽 부위를 미끄러지듯 훑고 지나갔다.
지나간 자리는 마치 토끼 가죽을 벗기듯 희붉은 피부 속 깊은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게 만들었다. 너무도 흉물스럽고 끔찍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나마 다행히 다른 3명의 멤버들에게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멤버 두 명에게 벌어진 참혹한 실상에 아연실
색한 모습들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초점을 잃은 눈을 한 채 바닥에 철퍼덕 주저 않아 있었다.
이러한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예능프로 카메라맨과 현장
리포터들 이었다. 무대에서 가능한 멀리 몸을 피하기 위해 내달리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무대 쪽으로 향하고 있는 그들을
멀거니 바라보던 수연을 동건이 두 팔로 어깨를 잡아 자신의 가슴 쪽으로 와락 끌어당겨 안았다. 간발의 차로 묵직한 카메라와의
충돌을 피한 수연의 놀란 눈이 동건의 눈을 보았다.
거기에 놀람대신 안타까움과 다정의 눈빛이 있었다. 무대 주변을 가득 매우고 있던 수많은 관중들이 삽시간 무대 먼 곳으로
흩어지자 인파속에 가려졌던 동건과 수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제야 동건은 팔에 준 힘을 풀어 수연을 놔준다.
‘뒤뚱’ 한차례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수연은 다시 뻗은 동건의 오른손에 의해 바로 선다. 수연의 눈가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동건은 수연의 눈을 힘 있게 바라보면서 말한다.
“수연씨 이곳을 피해 저쪽으로 가있으세요”
동건이 눈빛으로 방향을 가리켰지만 수연의 시선은 동건의 얼굴에 고정한 채 반문한다.
“네?”
자신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수연을 향해 동건이 더 큰소리로 말한다.
“ 저기 노래방 간판이 있는 곳으로 뛰어 가시라고요 ”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수연이 동건을 걱정한다.
“동건 씨는요?”
그 말에 대답대신 동건의 시선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무대 위를 향하자, 수연의 시선이 그 뒤를 따랐다.
무대 위는 말 그대로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참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희생자중 한명은 자신의 한쪽 팔이 어깨에 너덜너덜
하게 걸려 있는 것을 멀쩡한 한손으로 겨우 부여 잡은 채로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고, 또 한명의 희생자는 등가죽에
쇳물을 부은 것처럼 검붉은 형체를 한 채 바닥에 배를 깔로 엎어져 있었다. 흰자위가 반 이상 드러나 두 눈은 9라운드에서 다운돼
전의를 상실한 복서의 눈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 동건과 수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동건이 눈빛으로 허락을 구하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119엔 제가 연락할게요!"
동건이 앙다문 입술을 살짝 벌려 “네” 라고 말하고는 무대를 향해 뛰었다.
수연은 동건의 뒷모습에 머물렀던 시선을 거두고는 인파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며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무대 위에 올라선 동건의 시선이 두 명의 희생자를 빠르게 훑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비교해 경중을 가리기 힘든 상태임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외관상에 위급한 상황을 따져 경부 쪽에서 출혈이 일어나고 있는 준오를 먼저 선택하게 된다.
동건이 준오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는 순간 느닷없이 무대를 비추고 있던 조명들이 일제히 꺼졌다. 누군가가 감전이나
화재의 염려로 전원을 차단해 버린 것이었다. 일순간에 암흑같이 어두워진 상태에서 환자를 살핀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그때
동건의 머리 뒤로 조명하나가 켜졌다. 동건은 짧은 순간 그것이 카메라맨이 들고 있는 램프란 것을 알고는 소리쳐 도움을 요청한
다. 이랬게 생사를 넘나드는 위급하고 참담한 상황에 놓인 희생자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이들에게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동건은 이를 마음속으로 삭히고 도움을 바라는 이의 말투를 써야했다.
“여기 환자의 몸을 좀 비춰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불빛이 순간 흔들리긴 했지만 카메라맨도 인간인지라 그 순간 동건의 말을 거절치 못하고 동건이 말한 곳으로 카메라를 움직였다.
시야가 확보되자 동건의 손이 분주해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이 심장과 뇌가 직렬로 연결된 대동맥과 대정맥의
손상여부였다.
동건의 눈에 들어온 준오의 머리부터 상반신 전체를 벌긋케 물들인 출혈 양으로 봐서는 분명 목을 타고 흐르는 대동맥 또는
대정맥중 하나가 파열 된 것으로 목측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더 이상 출혈이 없는 것이었다. 동건은 출혈이 있던 부위를 조심히 살펴다. 그제야 이유를 알 듯 했다.
목을 타고 머리 쪽으로 오르던 대정맥의 일부가 뼛조각에 의해 파열된 상태였으나, 천만대행이도 쇠골 부분에서 끊기는 정맥 끝
쪽에 파열이었고 부러진 뼈와 뼈가 서러 맞물리면서 빨래집게처럼 천공된 동맥줄기를 막는 지혈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안심하긴 일렀다. 지혈이 되기 전 이미 많은 양의 파가 몸 밖으로 빠져나왔고 극적으로 지혈이 되었다 싶지만 자칫 조그만
움직임에도 또다시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양의 피가 몸 밖으로 빠져 나가고 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 괴성을 질러대며 괴로워하던 준오는 극심한 고통과 불안에서 온 정신적인 쇼크에 의해 혼절한 상태에 있었다. 오히려
그것이 준오의 생명을 지키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만일 계속해서 고통에 발버둥 쳤다면 이처럼 극적으로 출혈이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건은 우선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환자의 경부에 올려 부정맥이 없는지 확인했다. 맥박은 약했으나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다음은 동공을 살폈다. 눈꺼풀이 벌어지자 동공이 축소되는 것을 확인한 동건은 마지막으로 귀를 환자의 고위에 가져가 호흡
상태를 확인했다.
모든 상태로 보아 당장은 위험한 상황은 아닌 듯 보였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상태의 정도가 위급하지 않다가 아니라,
현재 몇 분 내로 생사를 달리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위중하지 않다가 아니었다.
동건은 무릎을 펴고 일어서더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몸을 웅크린 상태에서 흉부를 바닥에 대고 엎드린 채 쌕쌕 쇳소리를 내며
힘겹게 숨을 쉬고 있던 샤이니에게로 다가갔다. 그 뒤를 카메라맨이 뒤 따랐다.
동건은 준오에게 했던 것처럼 맥박과 동공 그리고 호흡 상태를 체크 했다. 샤이니는 준오와 달리 출혈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맥박이 정상인 보다 빨리 뛰고 있었고 호흡상태가 매우 거친 것이 장기에 손상이 있지 않나 염려가 되었다.
또한, 후두 쪽에 살가죽이 벗겨진 것으로 보아 뇌에 충격이 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지금
당장 동건이 아무런 장비 없이 조취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동건은 다시 준오가 있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동건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고 카메라맨은 동건의 고개가 옮겨지는 방향을 찾아 조명을 돌렸다. 동건은 환부를
동여매 고정시키는 것으로 구급차가 오기 전 응급조치를 취하려 했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럴만한 물건이 보이질 않았다.
동건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옷을 이용할 생각으로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외투를 벗고 다음으로 브이넥으로 된 얇은 스웨터를 막
벗으려는 찰라 쓰러져 있는 환자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만들어 지고 있었다.
동건은 그림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조명을 등지고 자신을 향해 검은 봉투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봉투에서
그것을 내민 실체는 시선이 옮겨지는 순간 목소리로 들렸다.
“이것들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수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동건의 손이 빠르게 수연의 손에 들려진 비닐 봉투에 가서 닿는다. 수연이 돌아온 것도 놀랐지만
그보다 환자의 응급조치가 더 중한 나머지 놀람을 뒤로 한 채 봉투를 뒤집어 그 안에 들은 내용물을 바닥에 쏟는다.
바닥에는 대량의 거즈와 붕대 그리고 소독용 에탄올 외에 수술용 장갑이 보였다. 동건은 고개를 들어 수연과 짧게 시선을 마주했다.
그 짧은 순간 눈빛으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어떻게 돌아왔어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여긴 아직 위험해요. 어서 돌아가세요."
“저 보다 환자를 걱정하셔야 할 차례인 것 같은데요.”
“아무튼 고마워요.”
“......”
동건의 시선이 다시 환자에게 돌아가자 수연이 무릎을 꿇고 앉아 동건의 일손을 도울 채비를 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신경질 적이고 화가 난 목소리는 어둠속에서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었을 법한 음성에 동건과 수연은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핏에 물든 것 같은 선홍색 하이힐이 어둠속에서 먼저 빛의 자리에 나타났다. 가늘고 늘씬하게 뻗은 정강이가 그리고
이어서 연분홍색 원피스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뒤 사자 돌기모양을 한 민소매 조끼를 입고 서있는 여성이 보였다.
동건과 수연의 시선이 동시에 여성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한참을 자신을 도와 빛을 비쳐주던 카메라맨의 음성을 동건은
처음으로 듣게 됐다.
“그게... 그러니까. 여기 이분... 환자”
듬성듬성 끊어지는 말을 가로막는 앵커의 앙칼진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그래서, 그게 뭐요.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요...네~?”
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앵커에게 기가 눌린 카메라맨은 황급히 카메라를 움직였다.
구급용품 위를 비추고 있던 조명이 일순가 앵커를 향해 돌아갔다. 앵커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어져 있었다. 마치 중국에
경극마술을 보는 것 같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부지불식간에 연습된 기교가 넘쳐흐르는 그런 얼굴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카메라맨이 서있던 자리에서 붉은 전등이 어둠속에서 깜박이고 있는 것으로 현재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2014년 크리스마스 날 밤을 맞이하여 홍대 젊음의 거리에 마련된 특설 무대…….”
앵커의 절제된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뭐 에요?”
처음 앵커가 나타났을 때 들었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여기 화급을 다투는 환자가 당신 눈엔 안 보이나요?”
어느 틈에 앵커 앞으로 다가가 마이크를 빼앗은 동건이 앵커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뜬 채 비장한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런 동건의 모습이 기가 찬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는 앵커를 향했던 조명이 스르르 흘러내려 카메라
기사의 발아래 쓰러져 있는 준오에게 향했다.
그때 ‘우두둑’ 나무 기둥하나가 꺾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서있던 무대 한쪽이 기울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아아악”
여자 앵커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버렸고 카메라맨도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동건은 빠르게 몸을 날려 한손으로 수연의 허리를 잡고 다른 한손으론 준오의 상반신을 감싸 안았다. 조명장치들이 차례로 떨어져
내리면서 무대를 받치고 있던 기둥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져 균열이 생생긴 상태에서 그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 무게가 실렸던
것이다. 그로인한 하중을 감당치 못한 기둥 하나가 부러지면서 연쇄적으로 몇몇의 기둥마저 옆으로 누워 버리고 만 것이었다.
“수연씨 괜찮아요?”
“네 전 괜찮아요. 엇 그런데…….”
수연은 동건의 가슴부분에서 솟구쳐 오르고 있는 검은 물줄기를 보고 기겁을 하게 된다. 멀리서 날아온 상점들의 불빛들과 각기
쓰이고 남은 네온사인 불빛들이 겨우 어느 정도의 명암만을 구분 짓게 한터라 동건의 가슴 쪽 부분에서 솟구쳐 오르고 있는 핏물은
마치 정제되지 않은 원유처럼 검게 보였다.
“여기 좀 비춰주세요. 어서 빨리요”
동건의 다급한 목소리에 부산스럽게 카메라를 다시 어깨에 들쳐 멘 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동건을 향해 돌렸다. 카메라 조명이
동건과 수연, 그리고 동건의 가슴쪽에 매달려 있는 준오를 비추었다.
마치 연극무대 클라이막스 장면을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받고 있는 배우들을 보고 있단 생각이 들 정도로 회색이 만연한 두
사람의 일관된 표정과 함께 처참하다 못해 흉물스런 모습으로 낭자당한 준오의 모습이 비쳤다.
수연은 조명이 비추자 방금 전 어둠 속에서 보았던 검은 물줄기가 동건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 아님에 가슴을 쓸어 내렸으나 그것도 잠시 준오의 목 쪽에서 물총처럼 쏘아대는 핏물 줄기를 보는 순간 애처롭다 못해 두려움에 소름이 돋아났다. 순간적으로
준오의 얼굴위에 1년 전 차안에서 마지막으로 본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어 보였던 것이었다.
그때 동건의 다급한 목소리가 하나의 화면을 지우고 만다.
“수연씨 거즈 좀 주세요.”
“어서요”
동건은 수연을 잡았던 손을 풀어 준오의 목에 가져가 핏물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막으며 소리쳤다. 수연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발아래 맨땅위로 굴러 떨어진 거즈가 담긴 봉투하나를 주워들어 동건에게 건넨다. 동건이 눈짓으로 봉투를 열어
거즈만을 요하자, 수연이 덜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며 양쪽으로 잡아당겨 벌렸다. 동건이 준오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황급히 가져가 거즈를 낚아채서는 다시 목 위로 가져다 출혈부위를 막는다.
“수연씨, 미안해요. 여기 좀.”
동건이 비스듬히 기운 무대 바닥위에 매달리 듯 안고 있던 준오를 쓸어 내려 평평한 바닥에 내려놓으며 눈짓으로 준오의 목 위에
올려 진 자신의 오른손을 가리킨다.
“제가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수연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동건의 의미심장한 눈빛 앞에 차마 거절치 못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다시 한 번 호통 치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동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자신의
손을 준오의 목 위로 가져다 꾹 눌렀다.
“더 세게 누르고 계세요.”
한결 부드러워진 동건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서운했는지, 아니면 처참한 관경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뒤로 돌렸음에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이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인지, 수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동건은 이런 수연은 안중에도 없고 수연의 어깨에 매달려 있다 떨어진 수연의 가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뒤적이다
찾는 것이 보이지 않았는지 거꾸로 뒤집어 가방 안에 내용물을 바닥에다 쏟아 붓는다. 그래도 찾는 것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위쪽으로 획 돌려 세우고는 비스듬히 누윈 몸이 무대바닥에서 이끌어 내려지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있는 앵커를 향해 소리친다.
“화장품 가지고 왔죠?”
“.....”
“뷰티케이스 어디 있냐고요”
“저...저기 저쪽 막사 안에 있을 거예요.”
앵커는 구멍 난 무대 한쪽을 힘겹게 잡고 있던 손 하나를 추켜세우고는 무대 옆에 세워진 막사 쪽을 가리켰다. 그 곳은 동건이
산타복장을 한 자원봉사자를 따라 통화했던 곳이었다.
동건이 몸을 빠르게 움직여 그 곳을 들어갔다. 나올 때 은색 스테인리스 재질로 만들어진 뷰티케이스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무대로 다시 돌아온 동건은 급히 케이스를 열어 저치고는 맨 상단에 꼽혀 있던 마스카라 하나를 집어 들고는 엄지 손가락길이
만한 뚜껑만 빼서 손에 쥐었다. 그리고 맨 아래바닥을 뒤지더니 눈썹을 다듬을 때 쓰는 접이식 칼을 꺼내든다.
그때 동건이 막사 안으로 뛰어간 사이 바닥으로 내려와 있던 앵커의 손에 수술용 장갑이 꺼내져 들려있었다.
“저 간호대 출신입니다.”
동건이 순간 멈칫하는가 싶더니 두 손을 앵커 앞에다 내밀었다. 동건의 두 손에 수술용 장갑을 끼운 상태로 뷰티케이스 위에
올려두었던 마스카라 펜슬 뚜껑과 고무 밴드 눈썹소지용 칼을 손에 들자, 앵커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소독용 에탄올 병을 들더니
병마개를 분리한다. 동건과 앵커는 오랫동안 수술 방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스텝처럼 서로 죽이 맞아 움직였다.
앵커가 동건의 손위에 소독용 에탄올을 붇자 동건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소독하기 시작했고 소독이 끝나자 수연에게 그만
손을 놓으라 말했다.
정신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던 손이 얼어붙은 듯 마음처럼 움직여지지가 않는지 상당히 더디게 보였다. 손을 때는 순간 심장에서
쏘아대는 압력에 의해 출혈부위를 막고 있던 거즈를 손쉽게 밀쳐내며 수연의 옷 위로 튀자 수연은 한층 더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동건은 왼손에다 밴드와 펜슬뚜껑을 쥐었고 오른손에는 눈썹소지용 칼을 들었다. 칼날을 곧게 세운 동건의 손이 피가 솟구치는
준오의 목 위에서 톱질을 하듯 움직였다. 세로로 한번 다시 가로로 한번 열십자 모양으로 절개된 구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더니
준오의 몸속에서 대동맥류 혈관 끝을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잡아 올렸다. 마치 풍선에 바람구멍을 쥐는 듯 했다.
그리곤 펜슬 뚜껑의 막힌 부분부터 혈관으로 밀어 넣고는 고무 밴드를 이용해 고정 시키자 물 펌프처럼 솟구치던 출혈이 일순간에
멈추었다.
“하~”
그제야 한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동건을 지그시 건네다 보는 수연의 얼굴에 어느새 화색이 돌아와 있었다.
동건이 바닥에 떨어진 마이크를 들어 가슴에다 쓱쓱 문질러 먼지를 털고는 앵커에게 내밀자 앵커는 씩하고 웃어 보이며 마이크를
받아 들였다.
“평생 한번 있을 최고의 로드 시술 장면을 놓치진 않았겠죠?”
앵커의 물음에 대답대신 카메라 불빛 앞에다 손가락을 이용해 ok사인을 보내는 카메라맨을 향해 앵커는 엄지를 치켜 세워보였다.
119구급차는 동건이 샤이니의 등과 후두부에 거즈를 겹겹이 덮어 세균감염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응급조치
가 막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 도착했다
.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이곳에 안 계셨다면 아마도…….”
현장에 도착한 119구급대원 중 연수중인 여의사 한명이 동건이 시행할 응급조치에 감탄해 하며 마치 환자의 보호자라도 되는 냥
고개까지 숙여 보이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환자의 상태는 절대 안심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겨우 위급한 상황 하나를 면했을 뿐입니다. 방금 차에 올린 저환자의 경우
우측 연골골절로 인해 흉부에서 머리 쪽으로 흐르는 경부 대동맥의 손상으로 인해 과다출혈 상태로서 자칫 호송 중에 심장에
쇼크가 올지도 모르니 각별히 지속적인 바이털 체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기 저 환자의 경우…….”
동건이 손을 뻗어 응급대원들의 손에 들려진 들것에 실려 앰뷸런스로 향하고 있는 샤이니를 가리키자 여의사의 시선도 그 쪽을
향해 움직인다.
“심각해 보이는 외상보다는 먼저 둔부 쪽에 가해지 충격으로 인해 뇌 손상이 우려 되는 상황입니다.”
여의사는 동건이 말하는 내내 동그랗게 놀란 눈을 한 채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이 마치 지도 교수에게 교육받고 있는 실습생처럼 보였다.
동건의 절제된 언변에 당황한 나머지 동건의 말을 막을 수도 무어라 끼어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동건의 말이 끊어지자,
여의사는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닥터신가요?”
동건은 대답대신 손에 들고 있던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는 그 안에 있던 명함 한 장을 꺼내 여의사에게 건넸다.
“서둘러 주세요. 어차피 여기선 강북 쪽으로 진입하기에는 교통량이 많아 어려울 겁니다. 거리로는 y대 병원보다 멀겠지만
시간상으론 더 빠를 겁니다.”
사실이었다. 홍대를 시작으로 신촌과 이대 방향으론 차들이 꼼짝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환자들의 상태를 봐서도 자신이 혼자서 두 명의 환자를 캐어하는 것 보다 동건이 동승해 주는 것이 또한 환자에게
응급조치를 취하면서 이미 환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환자들의 생명을 지키는데 이로울 것이라 판단이 섰다.
“그럼 이 교수님께서 함께 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순간 동건의 얼굴이 수연을 향해 돌아갔고, 수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의 얼굴이 다시 여의사에게 돌아오자 여의사는 대원들에게 명령한다.
“강남 성심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해요. 서둘러요, 어서”
동건이 병원으로 향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미리 병원에 전화를 해둔 덕에 응급실 앞에서 이미 동건의 수술 스텝들과 다른 또
하나의 수술 팀이 준비하고 있었다. 동건은 그 수술 팀을 보는 순간 안 좋은 기억하나가 돌연 떠올랐다. 한때는 동건에게 경쟁심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한 사람. 그러나 이제 상대는 동건에게 증오심과 경멸심만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분노의 상대로 전락하고 만 상대가 그 팀에 집도 의로 있었다
병원에서 승승장구 하던 자신을 비열한 방법으로 한데로 추락시켜버린 장본인이었던 차승원이 그쪽 스텝들 맨 앞에 나와 서있었다.
‘저들이 왜?’ 오늘 차승원은 분명한 비번이었다. 그는 분명 오늘 같은 크리스마스 날 자신의 여가 생활을 뒤로하고, 뜻하지 않게
절망을 감당하게 된 환자들을 도우러 의국에 합류할 그럴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동건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승원의 출연에
대한 의구심은 앰뷸런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쉽게 풀리게 된다.
동건은 갑자기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불빛에 그만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어떻게 알고 기자들이 벌써부터 병원 앞에 진을 치고 기다라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득 동건의 머릿속에서 유추해낸 생각으론 이랬다. 자신이 병원에 연락하자, 전화를 받은 당직 레지던트는 병원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승원에게 잘 보일 요량으로 그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라 생각하니 이 역시 쉽게 답이 나왔다.
기자들은 분명 차승원과 그의 장인이 될 부원장의 작품임이 분명할 것이다. 동건은 갑자기 한동안 잠잠했던 마음속의 분노가
다시금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분노에 연연할 때가 아님을 자각한 동건은 차가 세워지자 서둘러 차량 벽면에 걸려
있던 수액을 뽑아 들었다.
먼저 동건이 타고 있던 앰뷸런스 뒷문이 열리면서 응급 이동침대가 ‘찰칵’ 하며 소리를 내며 내려졌다. 일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시선들이 카트위로 모아졌다. 순간 승원과 동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러나 승원의 시선이 빠르게 동건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짧은 조우로 마무리 되고 만다. 승원은 빠르게 몸을 돌려 뒤따라 도착한 또 다른 앰뷸런스를 향해 팀원을 이끌었다. 승원은 이미 당직 레지던트에게 병원에 도착할 두 명의 환자가 있다는 것 까지 보고
받은 상태였고, 거기다 하나의 정보가 추가된 것은 한명은 생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상태임을 고지 받았던 것이다.
유명세 있는 가수를 수술한다는 것은 병원입장에서 또한 의사인 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크게 이슈화 될 것이 분명한 이치였고,
이는 둘도 없는 기회가 맞았다. 그러나 다른 한쪽으로 보면 이것은 끝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는 일, 만일 수술결과 환자가 죽게
된다면 상황은 180도 뒤바뀌고 마는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해서 승원은 이미 자신이 수술해야 할 환자를 정해둔 것이다.
환자의 생명이 우선이 아닌 자신을 이롭게 할 환자를 우선으로 말이다. 동건 또한 기자들을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러한
생각들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몇 주 전에 있었던 문제로 인해 응급의학센터로 좌천된 처지에서 자신이 집도한
수술에서 환자가 사망키라도 한다면 자신의 미래는 암흑 속에 내 던져질게 뻔한 이치였다.
동건이 그런 생각을 속에서 아쉬운 듯 아니면 좋은 기회를 낚아챈 승원이 못마땅해선지 자신의 스태프들이 자신이 타고 있던
차안에서 준오를 내려 응급이동 침대에서 병원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동건의 시선 끝에선 뒤이어 들어온 앰뷸런스 문이 열리며 샤이니를 실은 응급들것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응급들것에 네
바퀴 모두가 땅에 내려지는 순간 동건의 두 눈이 무엇을 보고 놀랐는지 순간적인 동그랗게 커지더니 입까지 쩍 벌어진 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준오를 베드에 옮겨 실은 동건의 스태프들은 이미 동건의 곁을 떠나 응급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승원이 이끄는 스태프들이 동건의 앞을 막지나려는 찰나 동건의 머릿속에선 번쩍하고 섬광이 일었고 이에 현기증을 느낀 동건은
비틀거리고 만다. 때마침 그 순간에 동건의 앞으로 다가온 승원의 왼손이 동건의 어깨를 잡는다. 그리곤 자신의 입술을 동건의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는 속삭인다.
“왜 저자의 운명과 함께할 자신의 운명이 다한걸. 예상되니 기절하는 연기라도 하려는 건가? 하하하”
승원의 비열한 웃음과 교차된 또 다른 얼굴 하나가 동건을 향해 밉살스럽게 웃으며 지나쳐 갔다. 자신에게 수차례 질타를 받던
레지던트 3년차 김경수의 얼굴이 지나가고 있었다.
동건의 날개가 꺾인 그 날이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자신의 팀원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승원의 팀원으로 합류 하게 된 김경수의
그때 그 얼굴이 지금 이 순간 이 얼굴과 많이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문뜩 하게 된 그때 승원이 동건의 어깨에서 힘을 빼자 동건의
몸이 뒤로 쏠리며 한걸음 뒷걸음질 쳐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건의 두 눈은 현기증을 느낀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눈의 초점이 흐려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생기 있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건의 자각에선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는 순간이었다.
기이한 상황하나가 머릿속에서 잔영하나를 만든 뒤 그 잔영이 계속해서 반복 재생을 하고 있었다.
준오를 싣고 움직이던 베드가 동건이 멈춰선 것을 보고 세워지자, 승원이 이끄는 베드가 이들을 비웃으며 지나갔다. 그리고
동건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동건이 상념 속에 빠져나와 발을 때기 시작했다.
다시 멈추었던 여럿의 발소리. 베드의 바퀴 굴러 가는 소리가 앰뷸런스 앞에 서있던 누군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스태프 중 막내 인턴이 환자 이동을 돕는 알바 생들과 함께 X선 검사를 하러 간 사이 먼저 수술실에 도착해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손을 세척한 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수술용 장갑을 착용하고 있는 동건의 표정은 어둡고 무거워 보였다.
평상시 수술 방에 들어와 있을 때 자연스레 생겨나는 긴장감이 만들어 내던 그런 표정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이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뭔가를 억지로 기억해 내려 할 때의 그런 표정에 가까웠다.
동건의 머릿속에선 조금 전 응급실 앞에서 자신이 보았던 순간을 또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동건의 기억의 영상 안에선 샤이니를
실은 바퀴달린 들것이 차에서 내려지는 순간 차안에서 침울하고 음산한 표정을 한 채 동건을 바라보고 앉아 있던 한 여자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낯이 익은 얼굴, 분명 그 여자는 지난밤 다리위에서 강으로 뛰어내리려…….한, 분명 뛰어내렸던 그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필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짧은 섬과, 처음엔 그것이 어느 사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플래시라이트(flashlight)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섬광 속에선 아득하지만 선명히 보였던 숫자 [1]이 보였던 것으로 기억의 필름은
여기서 처음으로 다시 리플레이 된다. 또다시 그렇게 기억을 되짚어 본다.
어둠속에서 더듬더듬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손끝에 감각만으론 실체의 본질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은 그 무엇도 구멍 난 본질을 메워주지 못하자 또 다시 머릿속 그늘진데 숨어 있던 부정들이 스멀스멀 몸을 일으켰다.
‘아니겠지, 잘못 본걸 거야……. 그래 요 며칠 너무 무리 했던 거야, 그래 맞아 그래서 헛것이 보였던 거야, 이건 피로와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판타지 창작물에 불과해 잠깐 동안만 상영되었다가 몸이 나아지면 곧 바로 커튼을 내려버릴 그런 독립영화 같은…….’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빠른 발걸음 소리가 상념 속에 빠져 있던 동건을 또다시 현실 밖으로 끄집어낸다. 동건이 서있는 곳에서
수술실로 들어서기 전 유리로 된 1차 출입문을 통과해 보이는 저만치 복도 끝, 준오를 실은 베드가 보였다. 그런데 동건의 두 눈이
응급실 입구에서처럼 동그랗게 커져 버렸다.
침대 끝에서, 아니 침대에 걸터앉은 듯, 다가오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의 모습이 또 다시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건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눈을 다시 뜨는 순간 또 한 차례의 섬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곤 여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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