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 인씨 시조 시조는 인서. 아손 태상박사.교동백. 관조는 인빈, 호 초당,익호 문정. 고려 인종조 리부상서.문하시종 교 수부원군에 봉해졌다. "교 동인씨대동보"(1984)에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고려 인종 때 한림 학사 인빈께서 교수부원군이 되어 교수 인씨 득관조라 하였고 교수는 교동의 옛 이름이니 고려 인종(1146년 이후)때부터 선조께서 교동 인씨로 부르게 된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본관을 교동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인빈때부터임을 알 수 있다. 본관 교동은 경기도 속현으로 삼도통어영을 두었는데, 옛이름 은 대운이라 했다. 동계는 강 화이고 북쪽은 연안과 접해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고목근현으로 대현 혹은 운도 또는 고 림.달을신이라 했는데 신라 경 덕왕 이래 교동으로 고려 혁구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명종시대에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에 와서 태조4년 에 만호겸 지현사를 두었다가 그뒤 현감으로 고쳤었다. 항렬표 7 - 범(範) 희(熙) 8 - 준(準) 오(旿) 9 - 동(東) 래(來) 10 - 중(重) 연(連) 11 - 유(猷) 순(醇) 12 - 성(成) 기(璣) 13 - 하(夏) 복(馥) 14 - 교(敎) 돈(敦) 15 - 병(秉) 용(庸) 16 - 연(演) 위(胃) 17 - 경(卿) 영(迎) 18 - 진(震) 신(晨) 파명 파로는 사직공파.통훈공파.예공파.장령공파.승의랑공파. 교위공파.선전 관공파.직장공파.판 관공파.송간공파.참의공파 .직무공파.첨정공파.선 교랑공파.부사공파.정랑공파.대원공 파.참봉공파 등이 있다. 현재 인구는 약 17,556명이다. 인물 인 의 : 고려 시어사 인 양 : 고려 병부시랑 인 빙 : 고려 문하시랑, 부원군 인 당 : 고려 석성부원군, 서북면 병마사, 참지정사 인승당 : 좌정승 , 부원군 인 안 : 전리판서 인 관 : 고려 이부판서 인 저 : 고려 대장군 인중수 : 고려 상장군 인인경 : 조선 부사 개요 교동인씨 인서가 중국 진의 혜재 12년(297년)신라 유례왕때 입조하여 아손 벼슬에,교동백에 봉해짐으로써 터를 잡았다 그 아들 관은 성품이 인자하고 청렴한 선비로 그의 덕 행이 "명심보감"에 실려 조선시대 자 녀교육의 덕목으로 삼았다. 고려 중기 이후 인씨는 당세 명문 호 족을 이루어 30 세손 인의에서 인원보에 이르기까지 12대에 걸쳐 상서 와 대장군.문하시중 등 현관을 지낸 분이 많았다. 특히 인빈은 학문이 뛰어났고 관환도 한림학사에 이르렀 고 문정의 익호를 받 았으며 교수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씨의 세거지가 교동이 본거지였음은 45세 인례의 묘 소가 교동에 있다는 사실 등으로 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인당 장군의 4세손 이다. 인종계의 후계는 전주에 각기 터를 잡았다. 그밖에 고 산 충남 덕산.당 진.보령,경기도 여주.개성,황해도 평산 .면산,평남 용강에도 47세 대의 자손들이 살기 시작했 다. 이후부터 세거지가 여러 곳 으로 확대된 것 같다. 그리고 1930년 당시에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삽교면 ,경북 상주군 이안면,황해도 평산군 상월면 등 에 집성촌 을 이루고 있음이 알려졌다. 후손 인빈이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 문하시사를 지내고 교수(교동, 현재 강화) 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교동으로 하였다. 그러나 인빈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후손 인당을 중시조(1세)로 하였다. 인당은 고려 공민왕때 서북면 병마사로서 압록강 서쪽의 파사부 등 삼참(三站)을 공략하고 개척한 공 으로 참지정사에 올랐다. 인당의 묘소는 개성시에 있다. 遠祖 : 印段(인단)--------中國(중국) [좌씨전(左氏傳)]과 [계고집성(稽古集成)]에 의하면 중국 정(鄭)나라 목(穆)(중국 춘추시대 정나라 목공,여기서 목공은 정나라 임금)의 증손의 7명 중에 자장(子張)의 아들 단(段)이란 사람이 조부의 이름인 자인(子印)의 인(印) 자를 따서 성을 인씨(印氏)로 삼았다고 한다. 단(段)의 후손인 인서(印瑞)가 진나라 풍익의 대부로서 297년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인씨(印氏)의 시조가 되었다. 始祖 : 印瑞(인서)--中國(중국) 晋(진)나라 馮翊(풍익)땅의 大夫(대부)로서 A.D 297(신라 유례왕 14)에 사신으로 왔다가 定着(정착)하여 벼슬이 阿찬(아찬)과 太常博士(태상박사)에 이르고 교동인씨의 시조가 됨) 2세 印觀(인관)---明心寶鑑 廉義篇(명심보감 염의편) 3세 印端(인단) 4세 印厚(인후) 5세 印麗水(인여수) 6세 印東(인동) 7세 印高輝(인고휘) 8세 印銀(인은) 9세 印啓洪(인계홍) 10세 印彦(인언) 11세 印春良(인춘량) 12세 印琴(인금) 13세 印實(인실) 14세 印淳郁(인순욱),印世渾(인세혼) 15세 印只宇(인지우),印碧(인벽) 16세 印尹(인윤) 17세 印延平(인연평) 18세 印好禮(인호례) 19세 印文植(인문식) 20세 印明(인명) 21세 印行(인행) 22세 印吉(인길) 23세 印鎰(인일) 24세 印現龍(인현룡),印興元(인흥원),印道元(인도원) 25세 印義일(인의일),印制일(인제일)--(일:쇠금에 칼도) 26세 印欽(인흠) 27세 印純(인순) 28세 印章(인장) 29세 印俊(인준) 30세 印殷(인은) 31세 印亮(인량) 印儉(인검) 印敏(인민) 32세 印淑(인숙), 印溶(인용) 印洸(인광), 印濤(인도) 33세 印빈(인빈) 한림학사 교수부원군 印郊(인교) 印遠(인원),印逸(인일) 34세 印完(인완) 형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 35세 印珪(인규) 판이부상서 36세 印玄元(인현원) 응양위 대장군을 거쳐 호부상서 37세 印貞(인정) 평장사 38세 印大紳(인대신) 39세 印公秀(인공수) --고려대장군 40세 印做(인주) 41세 印당 (41세손)---중시조(빈의 9세손)서북면 병마사 참지정사 석성부원군 평장사 42세 印安(인안) 전리 판서, 해(海) 이부시랑 43세 印原寶(인원보)서북면 체찰사,印重寶(인중보)상장군,印榮寶(인영보) 대장군 33세 [빈]이 고려 인종때 한림학사로 교수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교동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인씨의 본관은 23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 충렬왕때 제국대장공주(고려 충령왕 비)를 배종하고 들어와 검교정승을 지낸 원나라 사람 후(候)를 시조로 하는 [연안인씨(延安印氏)]와 [교동인시(喬桐印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세거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빈의 아들 완(完)이 형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에 올랐으며 손자 규(珪)가 판이부상서를, 증손 현원(玄元)이 응양위 대장군을 거쳐 호부상서를 그리고 현손 정(貞)은 평장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빈의 9세손 당은 공민왕때 첨의평리를 거쳐 서북면 병마사로서 참지정사에 올랐으며 석성부원군 평장사에 봉해졌다. 또한 그의 아들 안(安)이 전리 판서를, 해(海)가 이부시랑을 지냈고, 손자 원보(原寶)가 서북면 체찰사, 중보(重寶)가 상장군,영보(榮寶)가 대장군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대장군을 지낸 저(著)와 절충장군 철관(鐵寬), 선략장군으로 임진왜란때 정난원종이등공신에 오른 발(潑), 도총부 부총관 이헌(以憲), 그리고 참판을 역임한 명조(明朝),근영(瑾永),석신(錫信),상혁(相赫) 등이 가문을 빛내었다. [출처] 교동 인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