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의 주인이었던 어머니 아버지는
가게를 정리하시며
따로 나가 사는 아들을 위해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네신다
검은 봉지 속에는
칫솔 네 개
행주 네 장
때수건 한 장
구운 김 한 봉지
치르려 해도 값을 치를 수 없는 검은 봉지를 들고
흔들흔들 밤길을 걸었다
문 닫힌 가게 때문에 더 어두워진 거리는
이 빠진 자리처럼 검었다
검은 봉지가 무릎께를 스칠 때마다 검은 물이 스몄다
그늘이건 볕이건 허름하게나마 구멍 속에서 비벼진 시절이 가고
내 구멍가게의 주인공들에게서
마지막인 듯
터질 것처럼
구멍의 파편들이 가득 든 검은 봉지를 받았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5.01.19. -
“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를 하셨던 시인의 부모가 가게를 정리하면서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넨다. 검은 봉지 안에는 칫솔, 행주, 때수건, 구운 김이 담겨 있다. 문 닫은 구멍가게는 “이 빠진 자리처럼 검”다. 시인은 검은 봉지를 들고 어두워진 거리를 걷는다. “봉지가 무릎께를 스칠 때마다 검은 물”이 시인의 가슴에 스며들어 깊은 고랑을 만든다. “검은 물”은 가게와 함께 흘러온 축축한 가족의 내력이자 생활의 다른 이름이다. 생활의 구멍은 점점 커졌지만, 시인의 가족은 희망의 빛들을 조금씩 늘려왔다.
구멍가게는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던 일상의 중요한 공간이었다. 전봇대의 전선이나 공중전화의 전화선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었다. 바람도 잠시 쉬었다 가던 구멍가게에서 “구멍의 파편들이 가득 든 검은 봉지”를 들고나오는 시인의 얼굴이 보인다. 동전 하나로도 희망을 주었던 “수고”한 구멍가게의 작은 불빛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