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로 나간 둑길에서
며칠 새 밤 기온은 변화가 와 창문을 닫고 잔다. 일본 열도를 따라 종단하듯 진로를 정한 태풍 산산 영향으로 우리나라 주변 기단에 변화가 왔다. “여름을 건너오는 풋감이 등을 맞대 / 뜨거운 햇살 아래 고물을 채워 가다 / 껍질은 화상 입은 듯 익은 살로 보였다 // 잎사귀 영양분이 과육에 옮겨지면 / 단맛이 스며드는 송이는 토실해져 / 한 조각 입에 베물어 아삭하게 맛보리”
앞 단락 인용절을 ‘풋단감에서’ 전문이다. 새벽에 잠을 깨 어제 주남저수지 둑길을 걸어 신동마을을 지나다 본 단감을 시조로 다듬어 사진을 곁들여 지기들에게 안부로 전했다. 아침밥을 챙겨 먹는 5시면 날이 밝아오는데 해가 점점 늦게 뜨는 경향이라 어둠이 싸여 있었다. 베란다 창밖을 내다 보니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동녘 밤하늘에는 옅은 구름 사이로 스무엿새 조각달이 걸렸다.
아침 식후 어둠 속에 자연학교로 나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정류소에서 월영동으로 가는 102번 버스를 타고 가다 소답동에서 내렸다. 마산에서 오는 동읍을 거쳐 대산 강가 본포로 가는 41번 버스로 갈아타 용강고개를 넘어 주남저수지를 비켜 갔다. 가끔은 1번 마을버스와 노선이 일부만 겹치고 동선이 더 긴 40번대 버스를 타서는 도중 들녘이나 강가 어디쯤에서 내리곤 한다.
동전마을 요양원을 지나자 승객은 모두 내려 혼자서 타고 봉강과 가술을 거쳐 제1 수산교에서 내렸다. 기사는 평소 이른 시각 운행하는 버스에서 거기에 손님이 내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정류소였다. 아마도 기사 양반은 내려준 승객이 다리를 걸어서 건너 밀양 수산으로 가려는 사내일 거로 짐작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실제 그런 경우가 있기도 한데 이번엔 둑으로 나가 서성였다.
자전거 둑길에 세워진 정자에서 건너편 수산과 덕대산을 바라보니 옅은 안개가 걷히는 즈음이었다. 수산대교 방향에서는 구름 사이로 아침 해가 솟으면서 햇살이 비쳤다. 정자에서 둔치로 내려 제1 수산교 상판이 걸쳐진 교각 밑을 지나 다시 둑길로 올라섰다. 길섶에는 덩굴로 무성한 돌동부와 나팔꽃이 보라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주황색인 둥근잎유홍초도 군락을 이뤄 자랐다.
수산대교 방향으로 걸으니 접은 우산을 손에 든 아낙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고 스쳐 지났다. 연이어 두 젊은이가 숙영 장비를 자전거에 매달고 페달을 저어 갔는데 안동댐에서 낙동강 하굿둑으로 향하는 듯했다. 파크골프장까지 가질 않고 60번 지방도 횡단보도를 건너 농로를 따라 걷다가 모산리 앞 들판으로 나갔다. 평소는 농부도 드문 곳인데 산책객은 더 볼 수 없는 들판이다.
벼농사 들녘으로 나가기 전 특용작물을 가꾸는 비닐하우스단지가 나왔는데 철을 늦추어 딸 풋고추가 싱그럽게 자랐다. 아직 어린 모종이었으나 가을 이후 겨울에 수확할 토마토도 보였다. 곧 다가온 추석에 출하시킬 머스크멜론은 덩굴을 지주로 세워 감아올리는 공중 부양 농업으로 키웠다. 덩이가 수박보다는 작아도 일반 멜론보다는 컸는데 과육 표피 그물모양 무늬가 눈길을 끌었다.
모산 들녘에서 이삭이 팬 벼 논을 거쳐 죽동천을 건너 가술에 이르렀다. 방학을 끝내고 개학한 초등학교 앞에는 배움터 지킴이가 교통지도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아이들은 등교가 거의 끝나 볼 수 없었다. 북가술 동구 정자에서 땀을 식히며 쉬다가 정한 시각이 되어 파출소로 나가 동료들과 함께 아침나절 부여된 봉사활동 임무를 수행했다. 자투리 시간은 마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어제 읽다 접어둔 정재찬의 시 평설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펼쳤더니 5장 ‘사랑’편이었다. 작자는 사범대학에서 예비교사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이였다. 갈피에서 작자는 그 장을 소개하기로 ‘혼자 사는 건 외롭고 같이 사는 것 괴롭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토록 뜨겁게 사랑하고, 아이나 의리를 핑계 삼아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지요.’했다. 그 화두는 내게도 난제였다. 24.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