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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를 넘어서는 믿음 (막3-27)
2024년 7월 8일 (월요일)
찬양 :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본문 : 막5:35-43절
☞ https://youtu.be/su9czUOCPIA?si=MPmVV7SxsMbPAT0n
주일 사역을 마치고 다시 한 주간을 맞이한다. 장맛비가 예보된 오늘 39번째 작은교회 심방을 다녀온다. 오늘은 어떤 소중한 이야기가 담긴 교회와 사역자를 만나게 될까? 주님은 어떤 일을 하셨을까? 주님은 오늘 어떻게 이 심방 길을 인도하실까? 주님 인도하소서.
금주간 내일 있을 중보기도 세미나 일일 부흥회와 목요일 양육세미나, 그리고 금요세미나로 조재진 목사님을 모시고 전도세미나를 함으로 금년 전반기 사역을 마무리하게 된다. 웨이브리즈 플랫폼은 담당자가 준비한 앞으로의 플랫폼 운영에 관한 발표가 수요일에 있다. 이후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게 된다.
모든 과정에 주님의 은혜가 있고 우리의 순종과 충성이 담겨 작은교회와 다음세대를 향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묵상 본문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던 예수님께서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치료하는 장면에 시간을 지체하면서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다.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회당장으로서 겸손히 그리고 간절히 예수님을 찾았던 가장 핵심적 이유는 그의 딸이 중한 병에 걸려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 이유가 예수님께서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을 만나 그녀를 치료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신 이유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혈루증은 당장 죽는 병이 아니고, 회당장의 딸은 지금 죽어가고 있으므로 먼저가 분명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되어야 상식적이다. 더군다가 먼저 신청한 것도 예수님이 허락하신 것도 야이로의 딸이므로 그래야 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혈루증 여인을 치료하시느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만나지도 못한 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분명 예수님을 향한 불평과 혈루증 여인을 향한 원망이 섞여 그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며, 그러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하신 것일까? 이것이 오늘 묵상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왜 ~
말씀을 따라가 보자.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여기 나오는 <괴롭게>라는 헬라어 단어는 스킬로라는 단어로 고통을 주다, 귀찮게 하다라는 단어로 누군가를 번거롭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실 이유가 없으니 더 번거롭게 모시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이때 회당장 옆에서 이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문득 주님은 어떻게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을까를 생각해 본다. 과연 주님은 어떤 음색으로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을까?
아마도 친절하고 부드럽게 야이로를 붙잡아 주시며 위로와 격려를 담아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이다. 이런 주님의 따스한 위로와 소망과 확신에 야이로는 예수님을 모시고 다시 집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 친절하고 따스한 주님의 손을 묵상한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멈추게 하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고, 또 야이로의 집에서도 비웃는 이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제자 세명과만 아이가 있는 곳에 들어가신다. 39-40절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세상은 죽음 이후에 함께 울어주는 일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유대에서는 전문적으로 울어주는 사람을 고용해서 이 슬픔에 애도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인생이 죽음 앞에 벌일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회당장의 요청을 받는 순간 이 슬픔에 울어주는 사랑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이 가정의 슬픔의 근원을 치료하시고 구원하러 오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의 방식을 다 쫓아내신다. 믿음은 불신과 함께할 수 없다.
그리고는 아이를 향해 외치신다.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야 일어나라>
그 누가 죽은 소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의사가 죽음이 선포된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의 사랑도 그치고, 의사의 능력도 그치고, 이젠 그저 울어줄 수만 있는 자리에 주님은 오셔서 주님은 소녀야 일어나라고 외치신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믿음의 주인이신 주님의 능력이다. 아멘.
그리고 소녀는 일어나 걸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42-43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심지어 주님은 많이 경계하셨다. 도대체 왜 그러신 것일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기적 자체에 초점을 두지 않으시고 그분이 오신 사역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함이시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면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직 기적에 올인하여 기적만을 구한다.
주님은 이것을 명령하셨다. 절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오셨고,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던 그 사역의 본질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는 주님의 열정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왜 야이로의 딸이 죽기까지 주님은 순번을 바꾸시며 기다리셨을까?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은 그렇게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갑자기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등장하여 우리의 순서를 미루게 하며 심지어 딸의 죽음의 소식마저 듣게 하는 것이 세상이다.
그런 변수가 있어 세상은 너무 원통하고 분하고 안타깝다. 이것을 법으로 해결하려고 해도 안되고, 힘으로 해결하려고 해도 더 큰 상처만 남을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변수로 고통하는 이 가정을 더 큰 능력으로 위로하시고 소망으로 바꾸사 더 큰 기쁨을 얻게 하시고 더 큰 믿음의 자리로 옮겨주셨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변수가 축복이다. 주님을 믿음으로 산다면 변수는 아픔과 절망이 아니라 더 큰 기적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된다. 문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는 믿음이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주님은 변수를 넘어서는 믿음을 강조하신다. 삶이란 자리에는 늘 변수가 등장한다. 회당장 야이로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원망하며 살게 하는 것이 사단이 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은 믿음을 통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으로 인해 더 큰 기쁨과 영광을 보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 할렐루야 ~
오늘도 심방을 하며 변수 많은 세상을 만날 것이다. 이런 순간 주님은 내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놓치지 않고 두려움을 넘어 주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주님 오늘도 당신을 신뢰합니다. 어떤 변수에도 당황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이 신뢰하여 소중한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중보기도 제목>
1. <웨이브리즈> 플랫폼이 새로운 도약을 이루며 주님 뜻 이루게 하소서.
2. 목회사관학교를 통해 진짜 목사가 세워지는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3. 100명의 새로운 후원자와 3억의 출자금이 공급되게 하소서.
4. 박정제 목사와 팀원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하소서.
5. 스페이스 알 사역을 통해 젊은 세대 사역자를 일으키게 하소서.
6. 땡스기브가 세운 틴케이스 공간이 소중히 쓰임받게 하소서.
7. 2024년 작은교회 부흥을 이루는 해가 되게 하소서.
8. 충주 라마나욧이 세워지는 과정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