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치를 가하다]
‘린치(lynch)’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미국 독립전쟁은 단순한 ‘자유의 전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을 가려내는 내전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 북미 식민지는 법과 제도가 촘촘히 작동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법원은 멀었고, 치안은 취약했으며,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지역마다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는 스스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독립전쟁 말기, 찰스 린치라는 버지니아주 판사는 영국 국왕에 충성을 유지한다고 의심된 사람들을 정식 재판이 아닌 비공식 절차로 처벌하거나 구금하는 관행에 관여했다. 태형, 감금, 추방, 재산 몰수 같은 처벌이 중심이었다. 논리는 단순했다.
전쟁 중에는 절차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미국에도 ‘왕당파’는 있었다
독립전쟁 당시 식민지 사회의 상당수는 영국 국왕과 제국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이들은 ‘로열리스트(Loyalists)’ 또는 ‘토리(Tories)’라 불렸다.
이들이 모두 왕정을 숭배한 것은 아니다.
영국과의 무역에 생계를 의존한 상공업자
왕실 특허와 연결된 지주층
성공회 성직자
최근 이주한 영국 출신 주민들
이들에게 독립은 자유의 약속이 아니라 재산과 질서가 무너질 위험한 실험으로 보였다. 결과적으로 독립전쟁은 외세와의 전쟁이자, 식민지 내부의 충성 경쟁이었다.
‘Lynch law’의 초기 대상 중 상당수는 바로 이 왕당파로 의심된 내부의 적이었다. 법은 멀었고, 전쟁은 급박했으며, 의심은 곧 처벌로 이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Lynch law’는 점차 특정 인물의 이름을 떠나 재판 없는 처벌이라는 일반 개념으로 굳어졌고, 19세기에는 동사 lynch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 이후, 린치는 인종 테러가 된다
이 흐름이 가장 극단적으로 변질된 시기는 남북전쟁 이후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흑인 시민권이 확대되자, 기존 권력 구조는 강한 반발을 보였다. 법은 존재했지만, 법이 보호해야 할 대상은 선택적으로 배제되었다.
이 시기의 린치는
군중에 의한 공개 살해
특정 인종을 겨냥한 상징적 폭력
공포를 통한 사회 통제
라는 성격을 띠며 사실상의 인종 테러로 굳어졌다.
린치는 더 이상 범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메시지가 되었다.-펌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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