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1일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 운동가들 39명 명의로 만주지린에서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가 발표되었다.
선언서에는 사기와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이어서 일본 도쿄에서는 2·8 독립 선언이 발표되었고 곧이어 전국적인 3·1(음력정월 스무아흐레 날)운동이 일어났다.
광국은 집으로 돌아와 땔나무를 해서 쌓는 일에 열중일 때 삼일운동 소식을 들었으나 오지나 다름없는 간내월에서 기뿐 마음이야 한량없었지만 샘밭이나 나가야 만세를 부를 수 있었으니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을 접하는 것이 전부였다.
3월3일에는 고종황제의 장례식이 있었고 장례식을 보기 위하여 지방에서 올라왔던 사람들이 내려가 소식을 전하면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일제는 3ㆍ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ㆍ천안 아우내ㆍ정주 곽산ㆍ남원 광한루ㆍ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3ㆍ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그보다 앞서 1월18일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인 연합국과 동맹국(전범국) 간의 평화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회의인 파리강화회의가 열려서 신한청년당은 1월에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응답이 없었고. 7월14일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가 끝난 다음에 왔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베트남의 청년 호찌민이 찾아왔다.
그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요구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찌민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
더 한심한 것은 파리 평화 회의에서 연합국의 일원인 중화민국 대표는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제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7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1) 중국에 설치된 세력범위의 포기.
(2) 중국에 주둔하는 각국 군대의 철수.
(3) 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는 우편전보사업의 폐지.
(4) 영사재판권의 철회.
(5) 조차지의 반환.
(6) 조세의 반환.
(7) 관세 자주권의 승인.
그리고 여기에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취한 각종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조목이 부가되어 있었다.
이 요구 조건 속에는 패전국인 독일이 산둥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 앞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강조하여 중화민국의 요구를 찬성, 지지함으로써 중국 국민에게 큰 기대를 주었다.
그런데, 일본은 21개조 요구 가운데 산둥 문제에 관한 것과 돤치루이 정권이 1918년에 일본과 교환한 산둥 문제에 관한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문서상의 증거가 있었던 데다가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이 1918년의 중일협약을 지지해주기로 일본과 약속했었음으로 4월 21일의 회의에서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승인되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와의 비밀협정을 통하여 이에 구독일 권익은 완전히 일본에 양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우드로 윌슨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굴복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다.
산둥 반도 문제에 관한 파리강화회의의 결정을 알리는 전보가 1919년 4월 30일 베이징(北京)에 퍼졌고, 이어 5월 1~3일 베이징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과 그 이유가 보도되었고, 이는 5·4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4월 13일에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독일에서는 8월11일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은 러시아에서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는 연합국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더 나아가 사할린, 연해주, 만주철도 등을 침공했다.
더 나가서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호수 동부까지 점령했고,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다른 연합국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연합국이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주둔을 계속하면서 점령지에 괴뢰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등 같은 연합국들도 일본의 영토 욕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대규모 인 7만3,000의 병력을 파병했으나,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데 급급하여 그 빈 공간에는 붉은 군대와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빨치산)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 혹은 백군과 협동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자국 군이 당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 더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쪽으로 향했고, 1920년 반혁명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붉은 군대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은 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4억 3859만 엔의 거금의 전비를 사용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이 3000~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퇴하고 말았다.
이 파병은 백군(반혁명군)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국 러시아인들이 외세와 외세를 등에 업은 백군에 등을 돌리고 공산정부와 붉은 군대를 지지하여 최종적으로 공산 정부가 승리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해 봄은 공출을 하고나니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임신한 남순의 배는 불러 오는데 먹을 식량은 바닥나고 아침은 열시가 다 되어서 먹고, 열세 살의 재명이 산으로 다니며 무릇 과 둥굴레를 캐오고 그걸 씻어서 삶아서 점심 한 끼를 해결 했다.
그러니 한참 자랄 때의 재명은 낫을 들고 나가서 소나무 가지를 잘라서 겉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낫으로 긁어서 먹었다.
그리고 저녁은 먹을 수 있는 나물이란 나물은 모두 채취해 쌀을 한 주먹 넣고 된장을 풀고 죽을 쑤어 먹는 것으로 연명을 해야 했다.
그나마 안타까운 것은 네 살 먹은 재운이었다.
배고파 우니 조금 살림이 낳은 인상의 집에서 밥을 먹여 키우다 시피 했는데 한 살 더 먹은 조카뻘 되는 연창과 밥그릇을 놓고 다투는데 숟가락으로 맞기까지 하여 남순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까지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른일곱 살의 남순이 아들을 낳았다.
그동안 아끼고 아껴서 먹지 않고 남겨놓은 쌀 한 되와 작년에 조카며느리 정분과 미역 한 뭇을 사서 나누어 다섯 장씩 나누워 집안 식구 생일 때마다 끓여먹고 남은 석장 중 두 장을 다 먹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세상에 나온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의상의 두 살 먹은 딸도 한 달 뒤에 홍역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농사철로 접어들고 보리이삭이 노릇노릇 익어서 보리 바숨을 하면서 보릿고개를 넘어갔지만, 모내기를 하거나 김매기를 하는 날이면 일하는 일꾼보다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객군이 두 배는 더 많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나누어 가며 살아가야 했다.
이 모든 게 전쟁이 피 흘려 싸우는 전장에서만 비참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는 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식민지인 우리나라에서 수탈을 해가 결국은 먹을 것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여 사랑하는 아들 딸 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어머니들의 고통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5월 28일 대한독립군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연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를 조직하고 군무도독부의 병영인 화룡현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국내 진입 전을 계획했다.
봉오동은 최진동이 1900년 초 건너와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로 1908년(융희 2년) 당시 청나라지린성의 지방관청으로부터 이곳의 토지를 사들여 개간하면서부터 점차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한국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한인촌을 구성하였다.
새로 형성된 한인 마을은 최진동이 마을의 행정과 질서를 주름잡았고, 그가 지휘하는 소규모 의병, 독립군의 활동 기반이었다.
1920년 무렵에는 동 만주 지방에서 활동하는 한인 교민 촌으로는 중간급 규모였고, 최진동이 독립군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대한독립군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가 약 550명으로 총 대원 1천 2백여 명, 화력으로는 무기가 기관총 2문, 군총 약 9백 정 이상, 권총 약 2백 정, 폭탄(수류탄) 약 1백 개, 망원경 7개, 탄환 군총 1정 당 150발 등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홍범도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산마루에 진을 치고 주변 마을에 정찰대를 파견,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군이 쉽게 나타나지 않자 이들은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6월4일 새벽에 봉오동을 출발한 독립군 홍범도, 최진동 부대의 1개 소대와 신민단 독립군 예하 1개 소대가 당일 새벽 5시 경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 초소를 선제 습격함으로써 발생하였다.
6월4일 아침, 일제는 이 기습 작전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겠다고 新美 중위가 인솔하는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병력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추격케 했다.
이에 대한북로독군부의 최진동(崔振東)은 독립군을 매복시켜 놓고 유인해 남양수비대 예하 중대를 격멸시켰다.
이것이 바로 삼둔자 전투로서 일본군이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너 만주 영토로 불법 출병해 독립군과 전투를 벌이다 참패를 당한 것이다.
그날 저녁 일본군은 보복을 목적으로 1개 소대 병력을 파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오자, 삼둔자에서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아라요시 지로가 이끄는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를 격퇴하였다.
전투에서 패한 것을 접한 일본군 남양수비대 사령부와 일본군 제19육군보병사단에서는 1920년 6월 6일 오전 6시경 병력을 출병했는데 이를 감지한 독립군 정보원이 전서구를 띠워서 알려 왔다.
이 사실을 접한 홍범도, 최진동 등 독립군 지휘에서는 1개 대대급도 안 되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이로운 꼭대기 고지에 올라가서 시야를 넓히는 것이 덜 불리하리라 판단하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조를 나누어 일부는 산꼭대기로 올려 보내고, 일부는 안산(安山) 촌락 후방고지에 진지를 만드는 한편, 인근 지역에 목책과 허수아비들을 설치하였다.
일본군이 독립군 부대가 잠복해 있는 범진령 앞까지 추격해왔을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경 이었다.
이들 부대는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분풀이로 무고한 양민만 살육했는데, 삼둔자 범진령 고개에 숨어있던 독립군은 100m 안팎의 산악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 병력 60명을 사살하였다.
독립군은 2명이 전사하고, 근처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 9명이 유탄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삼둔자 전투는 독립군이 그동안 통상적으로 수행하던 소규모의 국내 진입작전이 도화선이 됐다.
동시에 일본군 육군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침공한 사건이자 1920년 6월 7일의 봉오동 회전은 그 직전에 있은 화룡현 월신강(月新江) 삼둔자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병력을 출병하여 간도 내의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한편 봉오동 골짜기에 있던 독립군 연합부대는 6월 7일 새벽부터 안산과 고려령에서 있었던 교전소식을 듣고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명령 지휘체계를 재편성했다.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고, 안무는 사령부 부관으로, 이원(李圓)은 연대 부관장교로 정하고, 소규모의 권총과 단총으로 무장한 연대 본부와 1,2,3,4,5,6중대 등 7개로 중대로 재편성, 1중대장은 이천오(李千五), 2중대장은 강상모(姜相模), 3중대장은 강시범(姜時範), 4중대장은 조권식(曺權植)을 임명하고, 나머지 2개 중대는 별도로 편성하였다.
제1중대는 상촌 서북방에, 제2중대는 봉오동 동부 산악고지에, 제3중대는 북부 산악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 남부 나무 숲속에 매복하고, 연대장 홍범도는 별도로 편성된 2개 중대를 서북북단에 매복해 있다가 이들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 선발대 시야에서 보이도록 천천히 움직이면서,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도록 계획을 짰다.
또한 유인책을 잘 썼던 소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다시 약간의 병력을 주어 고려령 북쪽 1200m 고지와 그 북쪽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척하면서 일본군을 각 중대들의 포위망 안으로 유인해 오도록 했다.
그리고 일본군 선발대와 주력부대가 모두 봉오동 골짜기 안에 들어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 안에 들어오면 사방에서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도록 정하였다.
6월7일 새벽, 일본군 제19보병 사단 예하 1개 부대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대대가 봉오동 어귀에 들어섰다.
월강추격대대는 6월 7일 오전 6시 30분 봉오골 골짜기 입구에 도착하여 전위중대를 보냈다.
이화일 소대는 일본군 19사단 월강대대를 유인하기 위한 교전을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적극적으로 교전, 일본군 전위중대가 참패를 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월강대대는 다시 대오를 정렬하여 당일 오전 11시 30분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월강대대 선발대의 척후병이 6월 7일 오후 1시 독립군 포위망 안에 진입하고, 아무도 없음을 알리자 일본군 월강대대 본대는 안심하고 봉오동 골짜기로 진입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골짜기로 왔는데 봉오동 상촌부락에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안에 들어왔다.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인했다.
거짓으로 교전하는 척 하면서 일본군 주력 부대를 봉오동 골짜기 안쪽으로 서서히 유인했다. 곧이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갑자기 날이 흐려지더니 기상 악화로 소나기가 점점 거세지더니 우박이 퍼붓고 천둥 번개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골짜기는 더욱 어둡게 변해갔고, 골짜기와 산기슭에 안개가 자욱이 서려 일본군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2개 중대는 전부 고지를 빠져나갔고, 홍범도는 서둘러 북쪽을 향해 퇴각하되 될 수 있는 대로 높은 산봉우리로 오르라고 명령했다.
동북쪽에서 올라온 일본군 2개 부대가 먼저 산등성에 올라섰다.
안개 속에서 서남쪽 산기슭을 오르던 일본군은 이들을 적으로 오인, 사격을 퍼부었다.
산등성이의 일본군도 맞받아 사격을 가했다.
북쪽 산봉우리에 오른 독립군들은 일본군이 저희들끼리 싸우는 것을 내려다보며 홍범도의 다름 명령을 기다렸다.
오후 3시, 일본군 소좌 야스카와 지로는 자신이 이끄는 부대 중 가미야 중대(神谷中隊)와 나카니시 소대(中西小隊)를 지휘하여 동쪽 산악 고지에 매복한 강상모의 2중대를 발견하고 강상모의 2중대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강상모 중대는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 강상모 중대는 수명이 부상을 당하고, 월강대대 나카니시 소대와 가미야 중대원 100여명을 사살하였다.
강상모의 제2중대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다시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제2중대에 계속 당하던 일본군은 그날 저녁, 봉오동 일대에 갑자기 밀어닥친 시커먼 먹구름과 쏟아지는 폭우를 이용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그날 오후 늦게 날이 갰다.
사령탑에서 지켜보던 홍범도는 늘 메고 다니는 일식 보총을 들어 일본군의 어느 연대 지휘자를 겨누었다.
사냥꾼 출신 홍범도의 사격 솜씨는 백발백중, 이를 신호로 독립군의 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지휘자를 잃은 일본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전투는 독립군의 대승이었다. 일본군은 이 전투로 6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700여 명에 불과한 독립군들이 몇 배가 넘는 일본군을 맞아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만주 심양(瀋陽)의 독자적인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여러 차례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해 독립군을 색출하자’고 제의했다.
일본측의 제의에 장쭤린은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우에다(上田)와 사카모토(坂本)가 주도하는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했지만 길림성장 서정림(徐鼎霖)이 “불령선인이라 하는 자들은 조선의 독립군으로 중국인이나 기타 민간인, 자국 교포들을 함부로 약탈, 방화하거나 강탈해가지 않는 점을 이유로 들어 중국측이 한인 독립군을 토벌하거나 추방해야 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고 중국으로서는 이를 토벌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하는 등 내부 반발도 심했다.
그런데 1920년 7월 11일 봉오동 전투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대한군북로군의 홍범도 소규모 중대의 습격으로 노두구의 일본 영사관 병력이 전멸 당하자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케 하고, 한편으로 일본은 중국 정부에 항의를 했다.
1920년 7월 16일 조선총독부 일본군참모장 오노(大野) 등은 다시 심양에 가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일본군의 요구로 독립군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 관헌들 중에는 조선의 독립군에게 호의적인 인사들도 있어, 일부 관헌들은 단속 대신 독립군단에게 근거지를 다른 곳으로 이동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 비협조적인 중국군 사단도 존재하였다. 중국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孟富德)은 한국인 독립군과 비밀협상을 벌여 한국인 독립군들의 무장해제를 시키지 않는 대신 조용히 움직여 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8월 초의 비밀 협상에서 ‘(한국인)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 상에서 군인 복장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진하지 않는다.
중국군은 토벌에 나서기 전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준다, 는 내용 등을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만주의 독립군들은 기존의 기지를 버리고 험준한 백두산 산록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홍범도의 대한군북로군 부대는 일본군의 간도 침입이 임박해져 중국군과의 타협으로 독립군의 기지 이동이 불가피하게 되자 가장 먼저 자기의 직속 부대인 2,3백명 가량의 대한독립군을 인솔하고 아직 만주에 남아 있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중 북로군정서 부대를 찾아 화룡현(和龍縣) 청산리로 향했다.
홍범도는 ‘일시 백두산 지방에 회피했다가 얼음이 얼 때를 기다려 조선 땅에 들어가 의의 있는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한 달 걸려 9월 20일께 다시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에 도착했다
안무가 인솔한 국민회군 약 2백 명도 봉오동 전투 승전 이후 8월 초부터 서서히 간도로 이동해서 음력 8월 상순 북일류구(北日流溝)거쳐서 동 8월 17일경 구세동(救世洞)으로 이동했었으나, 8월말 대한국민회의 지시에 따라 대한독립군의 뒤를 이어 의란구의 본영을 떠나 9월 하순 이도구 부근에 도착했다.
서일과 김좌진이 이끄는 대종교 계통의 북로군정서도 다른 독립군 부대처럼 중국군과의 약속 때문에 1920년 9월 9일 사관양성소의 사관 298명의 졸업식을 치른 후 옥수수 가루와 콩가루로 만든 떡과 탄띠와 소총으로 무장 하고 야음을 틈타 추위를 견디며 이동 중 천보산(天寶山) 근교에서 일본인 광산을 지키는 광산수비대대를 만났으나 더 큰 적을 섬멸하기 위해 그들을 피해 주로 산길로 이동해 한 달 만에 450리 길을 걸어 10월 12∼13일께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했다.
청산리 안에는 동서로 약 25㎞에 달하는 청산리 계곡이라는 긴 계곡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계곡의 좌우는 인마(人馬)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가파르고, 나무가 울창한 숲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일제는 얕보던 독립군에게 뜻밖에 참패를 당하자, 독립군이 대거 도강해 한반도 내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면 식민통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1920년 8월 '간도지방 불령선인초토계획(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고 대규모 병력을 꾸렸다.
일본군의 대불령선인(對不逞鮮人) 작전에 관한 훈령은 “해외로부터 무력진입을 기도하는 불령선인단에 대하여는 이를 섬멸시킬 타격을 가한다.” 라고 해 도강 목적이 만주의 독립군 섬멸임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대병력이 도강하면 국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으로 본격 출병할 음모로 삼둔자 전투로 중국에 불법으로 침투했다는 중국인들의 불만을 불식시킬 사건을 조작하는데 7월11일 홍범도 소부대의 일본 영사관 습격이 널리 알려진 점을 이용, 일본 측에서는 중국 출병 구실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일본 영사관 약탈 비슷한 훈춘사건을 조작한다.
훈춘사변은 일본군이 장강호라는 중국의 마적 두목과 교통하여 금전을 보내 매수한 후 무기를 대여하고 그들로 하여금 훈춘성과 일본 영사관을 습격시켜 사단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매수한 약4백 명으로 추산되는 장강호의 마적단은 1920년 9월 25일 훈춘 북방의 번자구자(藩子溝子)에 출현하여 10월 2일 상오 5시 야포 3문을 성 밖에다 차려놓고 훈춘성을 공격했다.
이때 훈춘의 일본 영사관 분관에는 영사관 경찰과 조선총독부 파견 경찰대 및 총독부 함북 경찰서 등에 소속된 5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측의 요청에 의해 한 성문을 수비했으나 마적들은 일제 측과 사전 약속한 대로 무난히 성문을 통과하여 상오 9시까지 4시간 동안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결국 이들에게 중국 병사 70여 명과 한인 7명이 살해당하고 미리 피난하여 빈집이 된 일본 영사관은 분탕되었다.
그 밖에 일본 민간인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조선총독부 함북 파견 경찰서의 시부야(澁谷)와 일인 부녀자 9명도 아울러 살해되었고 훈춘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에 투입하여 검문 검속을 강화하고, 한인사회와 독립군을 탄압하였다.
일본은 일본 영사관 약탈 사건을 7월 11일의 홍범도 부대의 일본 영사관 약탈 사건을 예로 들며 조선인 독립군의 짓이라며 출병을 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일제는 중국에 압력을 넣어 일방적으로 약2개월 동안 주둔하겠다고 통고하고는 1만 5천여 명 규모의 일본군대를 두만강 너머에 배치했다. 나남주둔군, 용산주둔군, 시베리아주둔군을 묶어 편성한 부대였다.
주력부대인 동지대(東支隊)는 5천 명으로 편성하여 삼도구로 나가게 하고, 다른 세 지대는 각각 담당구역을 정해 출병시켰다.
그러나 다수의 독립군들은 도주했을 것으로 계산하여, 동지대 37연대 외에 조선주둔 일본군 보병사단 19사단과 20사단의 일부를 따로 편성한, 소규모 대대 급 부대들을 증파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부대는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용정(龍井)·대굴구(大屈溝)·국자가(局子街)·두도구(頭道溝) 지역으로 진군해왔다. .
10월 13일에 청산리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은 인근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의 대한군북로군 부대와 연합,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대한 공동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때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과, 일본군 19사단 예하 여러 연대가 온다는 소문이 있어 소수 병력으로는 상대가 불가함을 들어 일본군과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전론이 맞섰다.
여러 차례 회합 끝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미 10월 18일에 일본군 3개 대대가 함경북도 무산으로부터 습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청산리로 들어가 요지를 차지하고 숲 속에 잠복하였다.
적이 과연 대대 병력으로 뒤쫓아 왔다.
독립군의 기습으로 적은 450여 명이 즉사하고 부상자도 60여 명이나 되었으며, 후속 부대 또한 두려워서 퇴각하였다.
독립군도 비록 승리는 거두었으나 병력의 부족으로 대적하기 어려워 즉각 산골짜기 사이를 통해서 이도구로 향하였다.
그러나 한국 독립군들은 밤중에 길을 잃어 수십 리를 돌아, 곧바로 도착하지 못하였다.
10월 18일 밤중, 일본군은 우리 군이 분명히 이도구로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먼저 그 곳으로 달려가서 길을 나누어 수색하였다.
좌우를 순회하다가 갑자기 자기네끼리 마주치고는 이를 우리 군으로 오인하여 서로 발포하여 사망자가 180 명, 부상자가 70 명이나 되었다. 아군(독립군)의 제복, 제모가 저들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운평에 당도한 김좌진은 지형조건을 이용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첩보원 정보에 의하면 보병, 포병, 기병, 공병, 등을 합친 병력이 1만 명으로 일본 파병군의 선발대라고 하였다.
이범석은 근처 한인 교포와 사냥꾼을 모은 뒤 마을의 부녀자와 노인들에게는 독립군은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총을 가진 병사 수가 적어서 몇 안 되고 굶주려 지쳤다 고 증언하도록 사전에 지시했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김좌진 이범석 등은 우진 이민화(李敏華), 좌진 한근량(韓根凉) 중우 진의 김동(金動), 중좌진의 이교성(李驕成)에게 각각 2백발씩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바로 위쪽의 고갯마루와 계곡 양쪽에 천연적 엄폐물을 이용해 철저히 위장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일부 병력은 주민들을 산악 밖으로 이주, 대피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또 다른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매복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진입했다.
90여명의 일본군 야스가와 부대의 전위대 전 병력이 백운평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에 오전 9시경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일본군은 표적이 보이지 않는 산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댔지만 독립군은 이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여 사격을 가했다. 마침내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장병의 시체를 버리고 도망쳤다.
뒤이어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 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야마다 토벌대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려 했으나, 골짜기 아래에서 일본군의 사격은 불편했고, 한편 높은 고지 위에서 사격하는 한인 독립군은 유리하였다.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일본군은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패주했다.
이후 중무장한 야마다 부대의 주력부대가 몇 차례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은폐사격을 하는 독립군을 찾지 못했다.
고지대에 있는데다가 지형, 지물에 은폐한 독립군을 아래에서 찾아서 쏴야 했던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퇴각하였다.
이범석이 나머지 일본군 퇴각 자들을 추격하였으나,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신호를 보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화룡현 내 갑산촌(甲山村)으로 퇴각시키게 하였다.
김좌진 부대가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군 4백여 명과 교전이 거의 끝나가고 퇴각을 준비할 무렵까지도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교전을 하고 있었다.
10월 21일 오후, 일본군 동지대는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믿고 김좌진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남완루구와 북완루구로 병력을 나누워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포위해 들어왔다. 독립군이 먼저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홍범도가 이끄는 본진은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분견대를 예비로 매복을 시켜 우회해 오던 일본군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분견대의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분견대가 빠져나가자, 반대편에서 홍범도부대 분견대를 공격하던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북완루구의 일본군은 사격을 시작했다.
독립군은 자기들 끼리 총을 쏘아대며 싸우는 것을 지켜보다 조용해질 무렵 뒤돌아서 다시 공격을 가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남완루구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여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 4백여 명을 사살하고 또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0월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 2지대는 그 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천막치고, 숙영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동이 트기 전 김좌진부대의 제1, 2지대는 그 곳으로 이동해 주변 고지에 올라 일본군 기병중대를 포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어랑촌(漁郎村)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東正彦)부대의 일부였다.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은 일본군 아즈마 중대원 120여 명 중 어랑촌(漁郎村)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10월 22일 아침에는 가노(加納) 대좌가 이끄는 기병연대가 천수평으로 들어왔는데 독립군은 역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기다렸다.
또다시 매복 작전에 걸린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사격 개시 20분 만에 일본군은 300여 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고 함경도 이주민들이 개척한 어랑촌에 병력을 증파했다.
10월22일 오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1700여 명과 일본군 동지대의 어랑촌 결전은 오전 9시 300여명의 김좌진 부대와 아즈마 부대의 일부 인 기병대대 사이에 시작된 전투로 그 날 저녁 7시 경까지 계속 되었는데,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고 예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야산 고지로 이동시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 9시부터 일본군이 포위 공격을 해왔다.
이 때 홍범도 부대가 천리봉 서북쪽으로부터 싸움에 가세,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그 틈을 타서 김좌진 부대는 탈출에 성공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촌락의 아낙네들이 입에 넣어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다.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이범석은 후일 자신의 자서전 우둥불에서 “나의 군도는 포탄 파편에 두 동강이가 났다“고 회상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1,700여명의 독립군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1,000여명의 일본군의 교전 중 측면공격에 당황한 일본군은 일단 후퇴하였으며,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야간 습격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북로군정서와 대한군북로독군부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추격하는 일본군 수색대를 따돌리고 신속히 어랑촌을 빠져나갔다.
일본군은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를 포함해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10월23일에는 이범석이 오래된 말 똥 다량을 채취해서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일대에 뿌려 두었다.
이범석 일행이 이끄는 부대가 오래된 말똥을 뿌린 뒤, 이곳을 지나가던 일본군의 척후병이 나타나 말똥을 채취하여 오래전에 지나간 것으로 알고 일본군 주력부대가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와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설을 했다. 평지에서의 교전은 불리하여 10월 23일부터 이틀 간 만록구 고지에서 백병전을 펼쳐 겨우 일본군을 퇴각시켰다.
10월23일부터 독립군 연합부대는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대와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홍범도 부대의 행방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10월 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계곡의 흔적을 발견하고, 인근에서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 일부는 이미 공격을 대비해 고동하 계곡 사방의 산정에 매복 중이었다.
밤중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전열을 수습한 뒤 일본군과 교전, 신속히 대피하였다.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고동하 계곡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하였다.
독립군은 산중으로 올라가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攻守)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다시 퇴각했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0월 24일에는 북로군정서 예하 한 부대가 천보산 부근에 있던 조선주둔 일본군 파견부대를 습격하였다가 퇴각하기도 했다.
10월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일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고등하 등지에서 벌어진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간도 왕청현에서 백두산 산록 사이에서 벌어진 10여 회의 전투에서 한국인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훈춘 사건까지 조작하면서 도강했던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연전연패했다.
6일간에 걸쳐 싸운 끝에 일본군은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
일본 신문에는 청산리 전투에 의한 보도로 '아군 가노 연대장이 전사하고, 대대장 2명, 중대장 5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전사자 9백여 명'이라고 보도하였다.
※임정 요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사학자 백암 박은식에 의하면 일본 측이 잡은 일본군 전사자 수치는 일본 영사관 비밀 보고에 의한 것이라 한다.
박은식은 또한 현지 중국인 공공기관에서 조사한 수치도 자신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해 두었다.
박은식에 의하면 '우리 사령부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적군(일본군)의 사상자가 천6백여 명이었고, 중국관청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군의 사상자는 천 3백여 명이었다.
일본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이도구 전투들에서 카노 연대장,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군병 사망자가 9백여 명이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했다.
당시 목격자들이 박은식에게 들려주기로는 일본군은 전사자들의 시신만 대형 트럭으로 16대를 운구해갔다고 한다.
이 또한 많은 목격자들이 전하는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일본 영사관측의 비밀 보고서는 그대로 일본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후대의 한국인 사학자 심상룡은 일본 영사관이 왜곡한 자료를 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비하여 독립군 연합부대의 전사자는 1백 30명이었다.
그밖에 실종자는 2백여 명 이었고, 부상자는 90여 명 정도였다.
소문으로 소식을 들은 광국은 아버지 영린의 삼년상만 아니었어도 나도 독립군이 되었을 것을 하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작전을 전개하였다. 3~4개월에 걸쳐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의 학교들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였으며, 한국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다.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이 몰살을 당하고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하였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 간 간도일대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현재 확인된 수만 해도 3,469명에 이른다. 그 외의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피해자는 적어도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본은 노령 연해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만행을 자행하였는데 간도학살 사건 또는 경신참변 이다.
첫댓글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면 엄청 피를 흘려야 하는군요 ,
우리 조상님들 정말 힘들게 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