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2장 이후는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가 제목 그 자체입니다.
로마서1-11장에서 이렇게 되었으므로 살아질 것이고
또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밥을 먹었으니 힘이 나는 대로 일을 해 봐 하는 말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정약용선생의 성리학에 성(性)이 행(行)하면
덕(德)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분은 성리학의 실사구시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궁행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서12장 이후의 행함은 당연한 결과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11장까지는 트랜스 폼과 같습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폼이 형성이 됩니다.
변화가 되어 삶이 된다는 뜻입니다.
원리가 있으면 적용이 되고, 교리가 있으면 교훈대로 살아지는 겁니다.
수학에 공식에 대입을 하면 답이 나오듯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그 존재로부터 행함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기도의 수준은 로마서12장 이후의 말씀과 상통합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하는 내용과 같습니다(롬12:2)
따라서 주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요17장의 주님의 대표기도와
상통합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거룩함으로 영광에 나아가고
영광으로 하나가 되어 온전함을 이루어 사랑하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이 주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는 지금도 유효하므로
우리는 주기도를 반복하므로 주님의 기도와 부합이 되어
거룩한 산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은 행함이 따라야 한다 고로 행함이 곧 구원이다 하고 빠지고 맙니다.
심지어 믿음에 행함을 더하면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따라가는 믿음에 의한 역사가 행함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해 살아지는 겁니다.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NIV 롬1:17)
농사를 지어 키질을 하면 알곡은 구심력이 있어 모아지지만
쭉정이는 원심력으로 달아납니다.
앞으로 교회는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곧 알곡과 쭉정이 교회입니다.
환난을 바람으로 보면 알곡과 쭉정이의 차이는
알곡은 시간이 가면 점점 형통의 길로 접어듭니다.
그러나 쭉정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계속 문제가 발생합니다.
쭉정이들은 속이 비었으니 다른 무엇을 채우려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알곡은 단장을 하지 않습니다.
알곡 자체가 아름다움입니다.
과실은 포장을 안 해도 모양도 있고 향기도 있습니다.
상품의 포장이 화려하면 내용이 부실합니다.
우스운 말로 알곡들은 립스틱도 안 발라도 아름답습니다.
정말 말씀이 체화된 얼굴은 성형도 필요 없습니다.
이목구비가 아름답게 정렬이 되어 하나님의 신성을 뿜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의 사주팔자는 아무도 맞추지 못한다고 말하잖아요?
외국에서 장례를 치르는 걸 여러 번 봤는데
죽은 자들의 화장을 엄청나게 아름답게 하더군요.
생기가 없으니 화려하게 화장을 해서 관에 눕힙니다.
죽은 자의 무덤은 회칠을 해야 합니다.
생명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분가루 값이나 명품 값이 엄청 들걸요.
거기다가 얼굴까지 고치느라고 견적이 만만치가 않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고 다닌다면 그건 산송장들입니다.
로마서1-8장까지의 개인구원이 완성이 되고
로마서9-11장의 전체 구원 속에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와
그 긍휼하심 안에서 말씀이 임하여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호모로게오)할 수 있는데 까지 나아가면 ‘그러므로’ 이후가
되는 몸의 구속이 이루어져 온전한 믿음이 되어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믿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의를 얻고 그 의를 따라
성령이 내주 역사하시므로
성령의 감동에 의한 행함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바로 영적인 예배이며 거룩한 산제사입니다(롬12:1)
로마서 12장 이후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영적원리가 내장 된
사람에게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끝)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