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820445054
*포로로 붙잡힌 독일군 병사(16세)가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한 장의 사진이 전쟁의 공포와 비극의 상징이 된다.
이후, 이 사진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알리는 대부분의 문서와 역사책에 소개된다.
사진 속 소년의 이름은 한스-게오르크 헨케, Hans-Georg Henke
한스가 9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뒤이어 15세가 되었을 땐 어머니가 사망했다. 결국, 한스는 자기자신과 남은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나치 소년병이 되어야 했다.
전쟁에서 생존한 한스는 공산당에 입당하고, 동독으로 건너가 평범한 삶을 살았다. (1928 - 1997)
..............그리고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그에 관해 알려진 이야기이다.
사실, 한스는 자신이 사진 속 소년이란 것을 주장한 이후 여러 구설에 오르게 된다.
사진 속 소년에 대한 한스의 주장은 이렇다.
"대공 부대의 중령으로부터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전달받았다. 중령은 미국의 포로가 될지, 소련의 포로가 될지를 결정하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내가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전쟁의 열악함 속에서 군화가 없어 늘 헝겊을 두르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사진은 포로였을 당시 독일 북부의 로스토크에서 찍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박이 있었으니,
정작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미 육군 제 9기갑대 소속, 전쟁 특파원 존 플레아였다. 존은 라이프 매거진 소속이었고, 이후 기고된 사진이 여러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없던 환경에서 사진의 출처를 아는 것은 어려웠다)
존 플레아는 한스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난 사진 속 소년은 '방금 일어난 끔찍한 전투의 충격'으로 울고 있었다. 소년을 촬영한 곳은 독일 중부의 헤센이었다. 당시 한스는 미군의 포로였고, 헝겊로 만들어진 신발이 아닌 가죽 군화를 신고 있었다. 한스의 주장은 자신을 가난하고 굶주린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다."
<"The Face of Defeat" 1945년 4월 30일, 라이프 매거진>
하지만 한스는 언론 인터뷰와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자신이 나치 소년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계기와 미군이 아닌 소련군의 포로였음을 이야기했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 두 독일인 Zewi Deutsche, 1988년
(동독과 서독에서 살아가는 두 소년병의 이야기)
그리고 두 가지 버젼의 이야기는 그저 소년이 가진 기억의 왜곡정도로 치부되는 듯 했다. 혹은 소련군에 의해 찍힌 사진이 있을 수도 있다. 등등 사람들은 한스의 사진 뒤에는 2가지 버젼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다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 헤센의 한 목사는 항상 미디어에서 보던 사진 속 배경이 자신의 집 안뜰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배경 속 벽돌은 균열이 난 모습까지도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들은 3대에 걸쳐 소년병 사진에 대한 진실을 여러 책과 언론에 제보한다. 하지만 그 의견은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그들은 작은 마을에 거주하는 일반인의 주장만으로는 정보가 올바르게 수정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었다.
2013년, 한 독일 기자는 목사의 아들로부터 이러한 제보를 받고 한스의 주장에 대해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한스는 1997년 사망했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는 왜 사진 속의 진실을 부정해야 했을까? 한스에게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1) 한스의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 vs 사진작가의 '참혹한 전투의 충격으로 눈물을 흘리는 아이'라는 메세지 차이
얼핏 두 사람이 주장하는 눈물 흘리는 소년에 대한 묘사는 동일해 보인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한 소년이 감당해야 했던 전쟁의 참혹함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한스가 주장한 눈물의 이유인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히틀러 정권에서의 이데올로기 - 격변 속에서 불가피하게 따라야했던 이념(믿든, 그렇지 않든 간에)과 생활방식이 다시 송두리째 무너지고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에 대한 혼란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사진작가가 설명한 '참혹한 전투의 충격'은 안타까운 어린 소년이 겪은,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외부의 충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는 한스가 자신의 눈물에 여러 메세지를 투영하려 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종전 후 한스가 누렸던 삶과 연결된다.
2) 종전 후, 한스는 공산당에 입당하고 동독으로 갔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당시 동독은 미국과 대척점에 있었고, 소련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렇기에 각종 미디어에 노출된 한스가 미군 포로였을 경우에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사진의 장소는 동독이어야 했고, 한스는 미군의 포로가 아닌 소련군의 포로여야만 했다.
이것은 한스가 요구받은 것인지, 소년병 출신 한스 스스로가 동독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반파시스트적 성향을 가진 동독 국가는 평화와 반전 감정을 촉진하는 내러티브를 지지했다. 그래서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강력한 상징물로서 전 세계적으로 인식된 한스의 사진을 자신들과 연계시키는 것을 유익하게 여겼을 것이다. 한스는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살아남은 영웅 캐릭터였다. 검열이 일상인 곳에서 한스의 미디어 노출이 쉬웠다는 것은 동독의 기득권층이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한다.
그렇기에 한스는 모든 사건을 재구성 해야했고, 가능한 한 역사 속 피해자로 묘사되어야 했다. 이후 한스가 설명하는 자신의 과거들 '나치당에 반대했던 아버지의 죽음, 소년병이 되었던 이유' 등 많은 부분이 공산당과 연결된다.
한스는 종전 후 동독에서 인민경찰이 되었다. 몇 년뒤 일을 그만두고 병원의 행정책임자로 근무하게 된다.
3) 결론
그가 동독의 선전에 활용됨으로써 어떤 특권을 누리고 살았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독일인은 그가 거짓말쟁이이고 특권을 누렸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없다. 다만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짐작할 수 있는 정도이다.
또 누군가는 어쨌든 한스가 나치의 일원으로 사람들을 죽였을 것이라며 그를 비난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했을 모든 것들에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소년 나치병으로 세상에 얼굴이 알려진 한스는 동독이든 서독이든 어떤 곳으로 가더라도 이용될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는 평생동안을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고,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다.
댓펌
독일의 사과 이미지도 사실 저 세대들이 은퇴할 시기부터 빌드업된거지 알고보면 동방영토 포기때도 반발이 없던건 아니다카드라
위에 나오는 다큐멘터리에서 서독에 사는 소년병 출신 남자는
히틀러에게서 받은 훈장도 고이 모셔놓고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와중에 자기 사회적, 정치적 입지 생각해서 이미지 메이킹까지 했어? 난놈이네 진짜...
출처
1) https://www.warhistoryonline.com/world-war-ii/hans-georg-henke.html
2) https://rarehistoricalphotos.com/hans-georg-henke-16-year-old-german-soldier-crying/
3) https://www.bygonely.com/hans-georg-henke/
4) https://www.fr.de/politik/verzweifelte-gesicht-11272190.html
5) https://upgr.bv-opfer-ns-militaerjustiz.de/uploads/Dateien/Presseberichte/GAZBN20130701S5.pdf
6) https://de.wikipedia.org/wiki/Zwei_Deutsche
첫댓글 헐 너무 흥미돋아 지우지말아줘 여샤!!!! 좋은 글 고마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