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25-26.34-35.44-48
25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26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44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1-16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베드로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서로 사랑하자며,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이르신다(복음).
☆☆☆☆☆☆☆☆☆☆☆☆☆☆☆☆☆☆☆☆☆☆☆☆☆☆☆☆☆☆☆☆☆☆☆☆
베드로 사도는 자발적으로 이방인들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알려 주시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그는 환시를 보고는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마 사람 코르넬리우스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내리는 것을 보고 그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다(제1독서).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내어 주심으로써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안다(제2독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킨다면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복음).
☆☆☆☆☆☆☆☆☆☆☆☆☆☆☆☆☆☆☆☆☆☆☆☆☆☆☆☆☆☆☆☆☆☆☆☆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배신자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자고 말하고 두 사람의 후보를 세운다. 그들을 앞에 두고 함께 기도한 뒤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새로운 사도로 뽑힌다(제1독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 예수님의 계명은 그분께서 그러하셨듯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사랑을 실천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복음).
오늘의 묵상
사랑은 너무나 막연하고 다양하며 개별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라시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한 것처럼’이라는 예를 들어 알려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랑은 ‘아버지께서 하신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제2독서는 그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이고, 이를 위하여 당신의 소중한 존재를 ‘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랑은 ‘무상성’이라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를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래서 이 사랑의 수혜자인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불리게 됩니다. 친구라고 해서 언제나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내주는 사랑이 아니면 사랑은 늘 의심스럽거나 불충분하고, 타인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사랑은 언제나 외롭고 두렵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묻지 마 범죄’가 일어나고, 사회적 고립과 소외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요즘의 현실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오늘 복음이 보여 주는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에 급급하기보다, 거저 내주고 상대를 살리려는 진심에 충실할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의 사랑이 가식이나 위선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사랑은 말이나 혀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1요한 3,18 참조)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은 하느님을 알게 하고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랑은 수동적이지 않고, 매우 역동적이며 능동적입니다. 어떤 이가 사랑을 얻기 위한 기도만을 부지런히 하며 정작 실천이 없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탁상공론일 따름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충분하다 해도 남을 돕는 데 인색하고 더 가지려고만 하는 탐욕스러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참생명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당신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되고,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참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려면 우리는 ‘혀’와 ‘배’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곧 혀로 교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소유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탐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혀를 잘못 사용하여 애덕을 거스르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며, 또한 애덕의 실천을 부풀려 자랑함으로써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채우려는 탐욕은 마치 배가 부른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음식을 먹어 치우며, 남의 것마저 가로채서 배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은 우리에게 교만과 탐욕과의 전쟁을 끊임없이 치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치르는 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해 줄 것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려 해도 그가 한 일이 떠올라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행실을 고치고, 더불어 그가 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을 풀어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또한, 용서하고 싶어도, 기회를 놓치고 그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나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합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나에게 깊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면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내 안에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 위함이지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정성을 다해 오랜 시간 공들여 작지 않은 선물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면 왠지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겠지요. 또한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값진 선물을 하게 되면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하게 되면, 그 선물에 자기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리도록 고맙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실 때 펄쩍 뛰던 베드로를 왜 사탄이라고까지 꾸짖으셨는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을 뜻하는 그리스 말 ‘둘로스’는, 사실 성경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이 주님의 종으로 불린 것처럼 오히려 종은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칭호이기도 합니다. 동방이나 로마 제국에서도 종은 사적 공간인 임금의 침전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로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보다도 더 가까운 당신의 벗,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친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친구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에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간이나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한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자녀가 자기 장기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다고 할 때, 부모님이 자녀의 애틋한 사랑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듯이, 예수님의 친구, 벗인 우리는 친구인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우리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
어거스트 투랙이라는 경영인은 17년 동안 미국의 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자주 방문하여 그곳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남다른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수도원의 생활 방식과 인생에 대한 관점을 점차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능률과 영리, 양적 측정과 인물 본위 등 현대 경영에서 당연시되는 기본 전제들이 얼마나 위험하며 많은 중요한 가치를 희생시키는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수도원에서 얻은 귀한 경험을 나누고, 수도원 생활의 중심 가치가 세상 사람들이 직업 세계의 삶을 행복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에도 매우 의미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책을 냈습니다. 『수도원에 간 CEO』입니다.
이 책에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삶의 변화'라는 과제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탈바꿈시키려는 열망이 있었으나, 수사들의 삶에서 체득한 사실은 그 변화의 갈망이 존재 깊은 곳과 닿아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수사들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서원의 과정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는' 수준의 존재의 탈바꿈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반면 많은 사람은 다른 차원의 변화가 이러한 존재의 변화를 대신할 수 있다며 착각한다고 지적합니다.
"모든 인간의 동기는 탈바꿈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지만, 탈바꿈에는 세 가지 다른 유형이 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실 때, 그는 자신의 '상태'를 탈바꿈시킨다. 가난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면, 그는 자신의 환경을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크리스마스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는 존재의 탈바꿈을 경험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유형의 탈바꿈이 모두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가 한 유형의 탈바꿈을 다른 유형의 탈바꿈으로 대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생긴다."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가리켜 임금이나 주인이 아니라 ‘친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져 줄 임금이거나 주인이라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시고, 말을 잘 안 들으면 당신 힘으로라도 제 갈 길을 제대로 가도록 해 주시면 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로 다가오십니다. 우리 삶의 어떤 것도 강제할 수 없는 그저 인생길을 함께 걷는 친구라고 하십니다. 마치 엠마오의 길에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 길동무이셨듯이, 우리 인생길에서도 삶을 충고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친구이십니다. 우리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시고, 우리가 슬퍼하면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그런 친구이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도 우리가 떠나온 그 자리에서 마음 아파 하시며 그저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친구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임금이나 주인으로만 바라볼 때 우리 기도는 늘 거래 관계처럼 되고 맙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두려워서 피하고, 잘하면 손을 내미는 그야말로 유아적인 관계에만 머물게 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는 주님과 깊은 인격적 만남도 우정도 생기기 어렵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함께 인생길을 가자고 하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보다 더 멋진 만남이 어디 있겠습니까?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말을 바꾼다면, ‘내가 너희에게 관심을 가지듯이 너희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관심은 돌보는 행위입니다. 꽃나무를 가꾸듯 서로에게 ‘생명력’을 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창조주의 관심이 있기에 세상 만물은 생기를 띠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미의 향기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안다.’고 답하자, 말로 표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시원하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표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그분의 따듯한 마음입니다. 그분을 닮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물들어 가는’ 것이지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감동시켰듯이 너희도 서로 감동을 주며 살아라. 내가 너희를 용서하였듯이 너희도 용서하며 살아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동입니다. 사랑은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랑’을 제자들에게 남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명하고 계십니다.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동과 용서를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청해야겠습니다.
☆☆☆☆☆☆☆☆☆☆☆☆☆☆☆☆☆☆☆☆☆☆☆☆☆☆☆☆☆☆☆☆☆☆☆☆.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마티아 사도는 기술자의 수호성인으로서, 열두 사도 가운데 유다의 배반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려고 선발된 예수님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도에 대한 기록이 열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 선출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에 후대에 남겨진 전설로써 그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마티아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셨던 일흔두 명의 제자(루카 10,1-12) 가운데 한 분이라 하기도 하고, 자캐오 또는 바르나바와 동일 인물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 다른 어떤 곳에서도 마티아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티아 사도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처럼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숫자를 채워 오순절에 내려오실 성령을 준비하는 데 그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성경에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마티아 사도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열두 지파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을 대표하는 열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한 사도입니다.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건네는 인사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였습니다. 어렸을 때 이미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하긴 지금도 건강에 좋다는 음식이 있으면 얼른 챙겨 먹으려는 우리입니다. 건강 보조제품도 얼마나 많이 판매되고 있습니까? 그런데 요즘 들어 더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몸이 튼튼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관계가 깨어져서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건강에 관한 많은 논문과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 건강한 노년을 위해 챙겨야 할 것은 ‘사회적 관계’라고 합니다.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 활성화되는 호르몬 중 대표적인 옥시토신이 신경세포 생성을 촉진할 뿐 아니라 통증을 줄이고, 뼈의 성장을 도와 골다공증을 예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을 때, 장수할 확률의 90% 이상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 사회적 관계에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 곁에는 늘 사람이 가득합니다.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표현하는 사람 곁에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사랑이 보이는 사람 곁에는 늘 같이 있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은 곧 우리의 바람인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비결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그렇게 주님께 머물러 있기에 저절로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이 세상은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지옥과 같은 곳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랑의 관계를 통해 건강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모두 건강하게 잘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면서 기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종종 사랑을 실천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좋은 약은 쓰다’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좋은 약이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데 아픔과 상처를 겪는 경우도 자주 생기는 것입니다.
약이 너무 쓰다고 약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약이 자신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너무 쓰다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겠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 사랑이 나를 살리고, 나를 잘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기적이에요.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혼자서는 결코 그 어던 꽃도 피울 수 없다는 것도 황홀입니다(이병률).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보러 대형 마트에 갑니다. 올해부터 식복사 자매 없이 살게 되어서, 저도 먹고살려면 이렇게 마트에 가야 합니다.
성지 근처에는 마트가 몇 군데 있는데, 모든 계산원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계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돈과 관계되는 일을 하는 것이라 집중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밝은 분위기를 보여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언젠가 성지에서 제일 먼 마트를 간 적이 있었는데, 이곳 계산원은 달랐습니다. “어서 오세요!”라며 인사를 하고는 계산해줍니다. 그리고 지갑을 찾느라 당황해도 웃으며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 뒤 저는 어떤 마트를 찾아가게 되었을까요?
이 마트만 갑니다. 문제는 그때의 직원을 다시 만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다른 직원들은 역시 무표정이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다시 만나지 않을까 싶어서 그 마트만 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반성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과 사랑이 아닌 일로만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아주고 너를 도와주리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약 성경 안에서 하느님께서 한 인간 존재에게 친구라고 말씀하신 적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단 한번 하느님께서 성조(聖祖) 아브라함에게 벗이라고 칭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내가 너를 땅 끝에서 데려오고 그 가장자리에서 불러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내치지 않았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아주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야서 41장 8~10절)
또 다른 구절을 애써 찾아보자면 하느님께서 모세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기 33장 11절)
그만큼 구약 시대 배경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여, 감히 친구라는 개념을 적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하겠다는 것은 엄청난 가치관의 대변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15장 15절)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 정도 되야 겨우 하느님과 친구 맺기를 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우리를 직접 찾아와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친구를 맺자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이 또 다시 있을까 싶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 크신 하느님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와 인류 구원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친구란 말처럼 듣기 좋고 편안한 단어가 다시 또 있을까요? 인디언들은 친구에 대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로 유명합니다. ‘친구는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여러 유명인사들 역시 각자 나름대로 친구에 대한 멋진 정의를 내렸습니다. ‘친구란 내 기쁨을 두 배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하나 사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친구란 존재, 정말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때로 가족에게 하지 못할 말들도 친구이기에 속 시원히 털어놓습니다. 매일의 삶이 지옥같을지라도 친구가 있기에 그래도 견디며 살아갑니다. 이 냉혹한 세상 친구마저 없다면 과연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하도 팍팍해지다보니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어집니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보다 더 나를 챙겨주는 친구,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갈 친구를 찾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는 게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구나!’하면서 홀로 쓸쓸히 돌아서서 눈물 흘립니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사랑 때문에 죽어도 되는 이유 : 사랑은 사랑이 죽는 것을 보지 못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나무와 가지’ 의 비유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포도나무는 가지에 생명을 줍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을뿐더러 말라버리고 불에 태워집니다. 하지만 포도나무인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의 수액을 받으면 그 사랑의 열매 때문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사랑하면 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과 ‘생명’은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40일을 굶어도 살지만 4일만 사랑을 받지 못해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살고 싶고, 사랑하지 않으면 살 의욕을 잃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무에서 가지로 사랑의 성령께서 저절로 흘러들어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라면 더는 성령의 수액이 공급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만 사랑, 즉 생명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의 본성입니다. 사랑은 생명이지만 또한 죽음입니다. 사랑하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면 먹고 살 수 있도록 자신이 힘들게 번 돈을 다 내어주어야 합니다. 또 아내도 남편과 아이를 사랑한다면 자신의 생존보다는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녀를 낳고 키웁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부모를 사랑하게 되면서 부모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자신을 죽여갑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 저절로 생명이 흘러들어옴을, 그래서 부활할 수 있음을 믿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적은 사람들도 죽어가는 것에 연민을 느껴 살리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사랑 자체이신 분에게서 사랑하는 이에게 부활이 꼭 올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67년 오리건주립대학교의 찰스 괴칭거 교수는 ‘설득의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첫날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강의실 맨 앞줄에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뒤집어쓴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가방 아래 두 구멍으로는 맨발이 비죽 나와 있었습니다.
괴칭거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이 학생이 검은 가방을 뒤집어쓰고 강의를 들을 것이며,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한다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날 이후 학생들은 얼굴도 모르는 그 친구를 ‘블랙 백’(Black Bag)이라 불렀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블랙 백은 강의 시간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설득을 주제로 3분 발표를 하는 시간에 블랙 백은 학생들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그냥 들어갔습니다.
그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처음에 블랙 백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어떤 학생은 우산으로 그를 찔러보기도 했고, 다른 학생은 ‘걷어차세요.’라고 쓴 종이를 등에 붙여주기도 했으며, 다른 학생은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언론들이 블랙 백의 괴이한 행동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 전역의 기자들이 괴칭거의 강의실로 몰려들었고, CBS의 전설적 인물인 월터 크롱카이트까지 가방 속 학생과 인터뷰를 하고자 했습니다. ‘라이프’(Life)는 블랙 백에 대한 기사를 여러 면에 걸쳐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업 시작 후 몇 주가 지나자 블랙 백이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우산으로 찔러댄 학생들의 공격적인 태도가 서서히 공감과 애정으로 바뀌어갔습니다. 따돌림이 인정으로 변화하면서 학생들은 이름도 모르는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고, 함께 어울리면서 그의 정체성을 지켜주고자 노력했습니다. 괴칭거가 블랙 백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지를 놓고 투표를 제안했을 때,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갈 무렵, 강의실 밖에는 수많은 카메라들이 블랙 백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안했지만 인간 벽을 만들어 블랙 백이 몰려든 기자들을 뚫고 안전하게 강의실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보호했습니다. 친구들의 선의에 고마워하며 블랙 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가방 속에 든 한 사람일 뿐입니다.”
언론과 대중은 괴칭거의 학생들이 얼굴도 모르는 친구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심리학자들의 설명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에 대해 누구도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2. 최고의 사랑을 위한 심리학의 조언, 리처드 와이즈먼, 웅진 지식하우스]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블랙 백을 왜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랑을 지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면 죽어가는 것에게 연민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뉴스에서 사람이 박스에 넣고 밀봉을 해 죽어가고있는 새끼 고양이들을 어떤 개가 모두 물어와 살리려고 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낳은 새끼도 아닌 고양이를 살리기 위한 본능이 개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분명 살아있는 것은 죽어가는 것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줍니다.
덴젤 워싱턴 주연의 ‘존 큐’란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아들이 심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곧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직장에 다니는 아버지의 보험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병원을 점거하고 자신의 심장으로 아이를 살리려고 합니다. 아들은 아무 생산능력도 없는 어린아이입니다. 다만 자신이 창조한 생명이기에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고라도 아이를 살리려는 노력이 공감될 수 있습니다. 짐승도 그렇고 사람도 이러할진데 하느님께서 어찌 그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은 받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절대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존재들, 즉 동물들이나 인간들이 생기기 이전에 이 생명들에게 사랑할 수 있게 만들 사랑이 먼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 사랑이 생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죽어가는 것에 연민을 느낍니다. 히틀러나 빈 라덴과 같이 남을 해치려는 열매가 아닌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죽어가는 것에게 반드시 다시 사랑과 생명을 넣어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다 죽은 이들의 부활의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행복하십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한 점도 팔리지 않는 그림을 하루에도 몇 점씩 멈추지 않고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 창조에서 느끼는 행복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이 고통스러워도 또 낳는 것은 창조의 기쁨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이십니다. 우리 가지에서 사랑의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그렇다면 농부는 그 가지가 손상되지 않게 잘 가꾸며 생명을 유지시켜 줍니다. 이것이 창조자의 기쁨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살리시며 기쁘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 위해 죽읍시다. 마음껏 죽어도 됩니다. 사랑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사랑하여 죽을 수 있다면 그분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자는 사랑 자체이시므로 창조하고 살리고 부활시키는 행복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게리 채프만의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읽었습니다. 책에서는 ‘감정의 탱크’를 이야기합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차일지라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휘발유 차는 기름을 채우면 움직일 수 있지만 경유 차는 엔진을 점검해야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경유 차에는 경유를 넣어야 합니다. 휘발유 차에는 휘발유를 넣어야 합니다. 기름을 바꾸어 넣으면 차가 고장 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감정의 탱크가 있습니다. 서로 채워주지 않으면 사랑이 메마르게 됩니다. 같이 있어도 외롭고, 같이 있어서 괴롭고, 같이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감정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선택이며,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합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리가 가려운 사람에게 등을 긁어 주면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회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기를 사주면 감동이 덜하기 마련입니다. 게리 채프만은 사람에게는 5가지 사랑의 언어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인정하는 언어, 함께하는 언어, 봉사하는 언어, 선물하는 언어, 몸으로 하는 언어’입니다. 저는 인정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칭찬은 돼지도 나무에 오르게 한다고 합니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누가 제게 칭찬하는 말을 하면, 격려의 말을 하면, 용기를 주는 말을 하면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어떤 분은 함께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대화하고, 여행가고, 식사하고, 영화를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분은 봉사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원을 정리해 주고, 서재를 정리해 주고, 청소를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분은 선물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성껏 쓴 카드를 주고, 장미꽃을 한 다발 주면 좋습니다. 선물을 준비하는 동안 상대방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몸으로 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어깨를 만져 주는 것도 좋습니다. 산보하면서 손을 잡아 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감정 탱크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언어는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정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갈릴래아의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여러분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강한 백인대장에게는 ‘참으로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정한 여인에게는 ‘나도 당신을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라도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하는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안드레아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을 하시지 않고 ‘와서 보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안드레아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세례자 요한이 말한 ‘그리스도’가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은 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보았습니다. 자캐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회개한 자캐오에게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체성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봉사의 언어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언제나 봉사를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물의 언어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종은 주인이 아는 일을 모르지만 친구는 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는 권한, 병자를 고치는 권한과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협조자인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거저 받았으니, 여러분도 거저 주십시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예수님께서는 몸으로 하는 언어를 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물위를 걸어서 배에 올랐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준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귀가 먼 사람의 귀를 만지시면서 ‘에파타’라고 하셨습니다. 귀가 먼 사람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죽은 소녀를 어루만지시면서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소녀는 죽음에서 일어났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세상 속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우리와 함께 머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의 언어를 통해서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애정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벗답게 사랑해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뽑으신
주님의 벗답게
늘 기쁘게 사랑해요
주님께서 뽑으신
주님의 벗답게
늘 올곧게 사랑해요
주님께서 뽑으신
주님의 벗답게
늘 앞서 사랑해요
주님께서 뽑으신
주님의 벗답게
늘 아낌없이 사랑해요
주님께서 뽑으신
주님의 벗답게
늘 주님처럼 사랑해요
가정은 문제가 아니라 기회입니다(「사랑의 기쁨」 7항)
이정재 베드로 신부님
안부를 묻는 인사에 “바쁘다.”라는 대답을 듣는 것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많은 활동이 제한되었어도 “하는 일 없이 바쁘네.”라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서 나옵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여유 있게 식사를 하며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바쁜 현대인들의 사치라고 표현해도 크게 놀랍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바쁘다.”라는 말은 열심히 사는 부지런한 모습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소중한 것을 놓치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위기의 모습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의 시작이며, 그 생명을 받아주고 지켜준 가정은 어떤 이유로도 놓치거나 잃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가정 안에서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힘은 더욱 크게 자라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6-17).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는 사랑은 가정 안에서 특별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표현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사랑이 담긴 이 표현들이 가정 안에서 서로에게 더욱 잘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세 가지 말이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입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강압적이지 않게 ‘해도 될까요?’라고 청해야 하며, 이기적이지 않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자기 잘못을 깨닫고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사랑의 기쁨」 133항).
바쁘다는 이유로 만남과 대화의 시간이 줄어들면 가정에서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문제가 발견된 위기의 가정이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문제해결에 필요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면,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힘을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찾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 가정은 이제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생명을 지켜낼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심어준 꽃씨
김민정 스텔라(방송 작가)
지금의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코로나19’라는 명칭 자체가 없었을 때인 2019년 봄에, 저는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해외 성지순례가 불가능해서 너무 속상한데요, 그래서인지 그때의 기억은 더 깊이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 성장하시고, 공생활을 하셨으며, 돌아가신 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곳이죠. 그런데 너무 멀잖아요. 3년 전만 해도 ‘언젠가 가겠지만, 나에게 기회가 빨리 올까?’ 이런 막연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청년성서모임에서 모집을 해서 용기 내어 신청했고, 그렇게 이스라엘 텔아비브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함께 간 순례단과 8박 9일 동안 매일 미사를 드렸는데, 성모님방문성당에서의 첫 미사부터 눈물이 나더니, 나자렛 주님탄생예고성당에선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를 갔는데, 거기는 왜 그렇게 좋을까요? 지구상에 이런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며 사랑해주신 기적의 장소 갈릴래아! 이른 아침 그 호숫가에 혼자 조용히 서 있는데, 그때 갑자기 ‘어? 내가 여기 어떻게 왔지?’라는 생각이 들며, 세례를 받은 후부터 나에게 일어난 일들, 이사를 하고, 성서모임을 하는 등의 상황들이 쭉 스쳐 갔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죠. ‘예수님께서 내 일상 곳곳에 함께하셔서 내가 여기 있구나, 나를 불러주셨구나!’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저희 순례의 주제 성구였습니다. 잊을만 하면 ‘머물러라.’라는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님!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때의 공기와 바람에 또 머무릅니다.
이스라엘을 아니, 성지순례를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요? 코로나19 시대를 통과하는 마음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2년 전 제 마음에 심긴 깨달음의 겨자 꽃씨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삶의 어려움 속에서, 이제는 모든 걸 마련해 두신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며 조금 더 힘을 내게 되었지요.
하루하루 소중하게 살다보면, 이스라엘로, 이탈리아로, 프랑스로 다시 성지순례 갈 수 있는 날이 오겠죠? 그날이 오면 지금을 웃으며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온 손님 맞이하기
이윤정 요안나(비폭력대화 국제공인 트레이너)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여인숙’이라는 시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아서 기쁨, 절망, 슬픔,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으로 도착한다.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 슬픔의 군중이거나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더라도 각각의 손님들을 존중하고 감사하게 여기라.’라고 말하며 나의 감정을 손님, 안내자에 비유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방문한 손님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인가요? 기쁨인가요? 설렘인가요? 절망인가요? 안타까움인가요?
여인숙은 손님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나쁜 손님이나 불필요한 손님은 없으니까요. 그저 손님을 잘 맞이하고 온전히 쉬게 해서, 그들이 가고자 할 때 돌려보내는 것이 여인숙이 할 일입니다. 이유 없이 오는 손님은 없습니다. “화”라는 손님은 이해받고 싶어서 찾아오고, “억울함”이라는 손님은 공평함이 중요해서 찾아옵니다. “기쁨”이라는 손님은 나누고 싶어서 찾아오고, “서운함”이라는 손님은 소통하고 싶어서 찾아옵니다. 가끔 찾아오는 “분노”라는 손님은 무서울 정도로 난폭하지만, 그 덕에 대청소를 하게 되어 깨끗하게 정돈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손님처럼 불현듯 찾아오는 느낌은 영적인 안내자가 맞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게 함으로써 삶을 통합하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돌봄을 잘하기 위해서는 손님이 되어 찾아오는 느낌을 잘 알아차리고, 평가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폭력대화에서는 느낌을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다만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로 구분하는데, 느낌의 원인은 존중, 사랑, 이해, 소통, 자유, 안전과 같이 인간이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한 보편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표를 보시면서 매일, ‘나’라는 여인숙에 찾아오는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차려 보세요. 그리고 그 손님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맞이하고 품으면서 자기 돌봄을 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커피 한 잔으로 사랑 실천하기
이원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LAB2050 대표)
아침마다 커피를 내립니다. 잘 볶아진 콩을 갈고 물을 끓여 부으면, 기분 좋은 거품과 은은한 향이 피어오릅니다. 그 모습과 향기를 음미하다 보면, 물이 내려와 커피가 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그 모습을 보고 향기를 맡을 때마다, 언젠가 저를 찾아왔던 르완다 커피 재배자들을 떠올립니다. 자신들이 생산한 커피가 ‘공정무역 커피’라며 자부심을 보였던 그 여성들의 눈빛은 강렬했습니다.
공정무역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자립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무역입니다. 이 르완다 커피는 ‘여성들이 자립해 만든 커피’입니다. 이들의 자립을 도우려는 사회적기업이 제값을 주고 수입한 커피입니다.
르완다의 여성들은 오랜 시간 힘든 노동과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어 내야 했습니다. 내전과 집단학살의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많은 이가 남편을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잔인한 성폭행 범죄의 대상이 되어 미혼모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탓에 억압적인 가정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살아야 했습니다. 자녀들도 돌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경제적 자립을 꿈꾸었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르완다의 커피는 품질이 좋습니다. 커피 농장에서는 일할 기회도 제공했습니다. 문제는 커피가 잘 팔려도 커피 재배를 위해 노동하는 이들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는 데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노동해 커피를 수확해도,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돈을 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커피를 사가는 나라의 대기업들은 돈을 벌었습니다. 싸게 사서 자기 나라 소비자들에게는 비싸게 팔 수 있었으니까요. 고용주들도 어느 정도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커피를 직접 재배하는 이들은 하루 몇 달러 벌기도 어려웠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힘들게 일하면서도 낮은 처우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힘을 합치기로 했습니다. 여성의 커피 협동조합을 만들어 같이 경영하기로 했습니다. 경영자도 자신들 중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공정무역만을 하는 사회적기업과 거래를 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구매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이제는 그 맛과 향에 반해 계속 주문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이,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공정무역 커피 한 잔을 통해서도 지구 반대편에 가 닿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제6주일>(2021. 5. 9.)(요한 15,9-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1)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이 말씀은 앞의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여기서 ‘친구’ 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형제’를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13절의 ‘친구’는 사랑 실천의 대상으로서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는 사도들을 ‘형제’ 라고 부르셨습니다(요한 20,17).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 쪽에서 생각하면,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즉 ‘모든 사람’이 전부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방법이고, 예수님의 형제로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 나의 형제로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여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 7장에 있는 다음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2)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는 더 이상 종으로서 살지 말고 자녀로서 살아라.”입니다.
“더 이상 ... 부르지 않는다.” 라는 표현은, 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신앙인들을) 종이라고 불렀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거나 의식하지 않고서 종처럼 살았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아버지는 큰아들을 아들로서 사랑했지만, 큰아들은 자기 자신을 종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원망과 미움만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말은, 마치 종이 주인의 뜻에 복종하듯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겸손한 응답의 말입니다.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종이라고 의식하고서 한 말도 아니고,자신을 종으로 전락시킨 말도 아닙니다.>
3)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녀’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요한 6,39-40). 여기서 ‘종’은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욕망대로 살면서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는 예수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요한 8,34-35).”
<‘주인의 종’과 ‘죄의 종’은 다릅니다. 자녀인데도 종처럼 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스스로 ‘죄의 종’이 되어서 살고 있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먼 고장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모든 것을 탕진하는 모습은(루카 15,13-14),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죄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8-19)”
이 말에서 죄를 지었다는 말과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인데,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달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모르고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4)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너희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그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자녀로서 살아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형제라고) 부르신다면, 우리 쪽에서는 그렇게 불릴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는다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셨고, 또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로마 8,1-2).”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4-15).”
<그런데 성령의 힘이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충실한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여러분은 요즘 성당에 오시기에 어떠세요? 성당에 오고 싶고, 또 오면 편안하세요? 아니면, 성당에 와서 혹시 코로나19라도 걸려서 고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되지는 않으세요? 그런 마음이 전혀 안 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위험도 무릅쓰고 오늘 미사를 봉헌하며 예수님을 모시고 싶어서 성당에 옵니다.
가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다소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한없이 기쁘고 행복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랑스럽고 권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굳이 드러내 놓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성당에 올 때, 제단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 기도할 때, 우리 마음속에 불안과 불편함이 스멀거린다면 우리는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먼저, 무엇보다도 먼저 성당에 오고 싶고, 하루라도 걸러서 미사를 빼먹지 않고 봉헌하고 싶으며, 주님 대전 앞에서 머물고 싶다면 우리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주님과의 기쁜 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당의 형제자매들과 만나고 싶고, 함께 복음 활동을 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실현하고 형제자매들에게 흘러넘치고 있다면,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으로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아울러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내가 만나서 편한 친지들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들과 복음적으로 함께 잘 지내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사람과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도 함께한다면, 우리는 진정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하고 따르는 사도들의 일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일러주시고, 함께하시면서 힘을 실어주시고, 하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일러주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그 방법 그 모습대로, 예수님도 제자들을 사랑해 주셨다고 알려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ㄱ)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바로 주 하느님을 향한 십계명을 잘 지키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그 말씀에 따라 서로 사랑하는 계명임을 일러 주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예수님께서 우리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이유는 우리를 붙잡아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기쁘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르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그러므로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기뻐야 할 것이고,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행복이란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기쁨과 행복과는 다소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잘 풀리고,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얻게 되면 기뻐합니다.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 승진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집을 새로 장만하고, 재산이 늘어나고, 먹고 사는 형편이 좋아지면 기뻐합니다. 그것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오늘의 기쁨이 내일의 불행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취직은 되었지만, 월급은 못 받는다든지, 취직은 되었는데 일하는 기쁨은 없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등쳐먹는 직업이어서 하면 할수록 마음이 괴로워지고, 결국 범죄자가 되고 만다는지 하면 결코 좋은 일도 아니고 기뻐할 일이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오늘의 기쁨이 내일도 계속 기쁠 수 있으려면, 진정 참 기쁨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하신 것을 믿기에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생명을 바쳐서 구하는 예수님의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되새겨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목숨을 바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구하시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주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대로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예수님은 우리를 그저 본성상 그리고 의무상 사랑해야 하는 대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를 세상에 내셨으니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시며 명령을 내리실 종이 아니라 거듭 친구라고 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15절)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진정 친구로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고 보여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죽을 운명과 처지에서 살려 달라고 청해서 우리를 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오셨고 또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6절)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구하셔서 우리가 세상 끝까지 사랑을 실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이렇게 놓고 보면, 예수님의 기쁨은 예수님이 잘 되거나 사회에서 입신양명하거나 예수님의 세력이 넓혀지는 등, 가진 것이 많아지고, 누리는 것이 많아지는 등의 그런 기쁨이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예수님의 기쁨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우리가 잘 되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이 잘돼서 기쁜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좋은 사람이 되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다른 사람,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면 기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어려운 사람들이 기뻐하게 되면 그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기뻐하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행복해하십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얻어서 생기는 기쁨이 아니라 주는 기쁨이며, 내 잘못을 용서받아서만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줌으로써 생기는 기쁨이며, 다른 사람은 망하고 나만 잘돼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서 기쁜 그런 기쁨입니다. 그렇게 기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겠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헌신하시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생명을 바쳐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집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누릴 영광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주 하느님께서 펼쳐주시고 예수님을 통해 열어주신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를 바라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하신 그 희생적인 사랑이 우리들 안에 열매를 맺어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온전히 서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한 주 예수님의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합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난하고 이를 갈며 부담스러워하는 형제자매를 용서하고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는 그 마음으로 사랑하는 주님 사랑의 사도가 됩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5,12)
재물병 걸려 앞 위 속 모르는 환자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무엇에 기분이 들뜨고 매력과 기쁨 느끼며 좋아하는 지가 중요합니다.
사랑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 하는 데 사람은 그 외에도 훨씬 더 많습니다.
사랑 느끼려면 잘 생기고 돈 많고 머리 좋고 내게 호감을 줘야하겠죠?
사람이 사랑 느끼기에는 좌우간 그 첫째가 재력이라고들 하니 문제죠!
세속재물에 눈병 걸려 앞 못 보고 위 못 보고 속 못 보니 한심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재물 눈을 감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눈떠야합니다.
참사랑은 일시적 아니고 영원하고 고차원적인 하늘사랑이기에 말예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리조트에서의 머문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다. 멋진 분이 더 많았어요. 떠나며 머문 자리에 휴지통 분리수거며, 싱크대의 그릇 정리, 내가 처음 대했을 때처럼 깨끗한 방정리, 세면대와 화장실 청소, 그가 떠난 자리는 종업원들이 더 이상 손댈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하고 떠났다고 말한다.
회원들의 머문 자리가 언제 어디서나 똑 같다면 참 좋겠다. 그런 분들은 아름다운 사람이고 새로운 산들바람에 실려 향기가 넘쳐 날 것이다. 리조트 주인의 말은 매우 역설적으로 나에게 들려왔다. 무심코 넘기던 터에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간다.
‘청소부가 된 신부님’ 이야기를 대했다. 27년 사제생활, 그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청소부로 안식년을 살며 경험한 한 사제의 이야기이다. 체험 플러스 자신의 진솔한 사제생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이 누리기만 했던 사제 자신이 대한 부끄러움과 새로운 발견이었다. 또한 묵주반지를 낀 신자 분의 청소부에 대한 무시와 횡포를 보며, 신앙과 현실의 괴리를 체험하며 사랑은 악세사리 지식일 뿐 이해와 응용과는 거리가 먼 신자들을 보며 체험한 이야기를 담았다. 읽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나도 아파트에서 지낸다. 아파트 관리인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관리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좋은 부분, 부족한 부분이 공존한다. 오늘 복음 말씀, “너희도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15,9) 항상 내가 머물다가 떠난 자리를 떠올려 본다. “나의 계명, 서로 사랑하여라.” 를 넉넉히 살다가 떠난 자리가 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듯이 말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요한15,12) 순간을 즐겁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며 머문자리에 충실한 열매가 있어 후회없이 기뻐하도록 사랑해야 한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청소부가 된 신부님’ 휴게소에서 1년을 머물고 떠난 자리는 인성이 바뀌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넘쳐나 향기나고 기쁨 가득한 자 되어 우리에게도 기쁨을 주고있다. 나는 무엇으로 ‘~~,~된 신부님’이 되어 봐야 하지 않겠나? 체험은 경험이 되고 인성을 바꾼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부활 제4주일 강론 중에 최근 지중해에서 일어난 이주민들이 탄 배가 구조요청을 외면당하고 침몰되어 130여 명이 사망한 비극적 사건에 대해 ‘매우 슬프고 부끄럽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외면하고 지나친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합니다. 지금은 큰 고통과 부끄러움의 순간입니다. 저의 마음속에는 130여 명의 상처 입은 삶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틀 동안 간청했지만 결코 오지 않았던 도움을 헛되이 요청한 얼굴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130여 명의 이주자가 바다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입니다. 그들의 이주는 인간의 삶입니다. 도와줄 수 있었지만 외면한 사람들 회개를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에게 ‘이 엄청난 비극’에 대해 스스로 물어볼 것을 요청합니다. 정말 수치의 시간입니다. 이 형제자매들과 이러한 여정에서 계속 죽어 가는 많은 사람을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는 또한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며 외면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조용히 기도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작년 10월 새 회칙 ‘모든 형제들에게(FRATELLI TUTTI)’를 반포하시면 코로나로 인한 전 세계의 펜데믹 상황 속에서 더욱 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형제애, 곧 형제적 사랑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형제들에게 회칙에 나오는 성경의 비유 말씀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죽어가는 이를 외면하지 않고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살려낸 진정한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 착한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며,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가야 할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친구는 단순히 나랑 친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이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형제들이며, 그 중에서도 진정 도움이 필요한 우리의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이에게 친구가 되어주시며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그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도 역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줄 수 있는 그 사랑을 함께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했으면 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요한 복음은 스승과 제자 사이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일치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이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 모두가 하나의 일치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생명에는 희생과 사랑이 따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의 손은 약손이다.’라는 말이 통하여 어머니의 손은 신기하게도 만병통치 약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자식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5월은 성모님이 달이면서 오늘은 또한 어머니의 날입니다.
어머니는 강한 모성애를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모습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치루며 자식들이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지난 몇 주 동안 사제관 뜨락에 어떻게 들어 왔는지 들 오리 한 마리가 들어와서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몇 주 동안 때로 가 와도 해가 비쳐도 꼼짝하지 않고 물한모금, 먹이 하나 먹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어린 생명을 지켰습니다.
처음에는 저렇게 꼼짝하지 않고 괜찮을까하는 걱정이 슬슬 들기 시작했습니다. 신경을 건들지 않으며 물을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았습니다.
아침에 가보았지만 전혀 마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던 며칠 전에 어미도 새끼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니 그래도 인사는 하고 떠날 줄 알았는데, 뭐 그렇게 나쁜 오리가 있어요?
한 가지 그특한 것은 깃털도 알 껍데기도 있을 법한데 아주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생명들을 모성애를 통해서 지키게 하십니다.
참 세상 자연의 신비이지요. 모생애가 아름다운 것은 자기 생명까지도 마다않는 희생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제사의 희생을 기꺼이 바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포도 농사는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가지치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해에 남겼던 가지가 자라는데 그 줄기에서 새 열매를 맺기 때문에, 농부는 실한 가지와 시원치 않은 것을 가려서 남기고 또 잘라냅니다.
줄기에 남아 있는 가지에서 새로운 포도 열매가 자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포도나무의 비유 말씀을 통하여 스승과 제자와의 일치관계를 설명하시고 이어서 사랑의 계명을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의 비유 말씀은 사람들이 대할 수 있는 자연에서 그 대상을 들어서 설명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쉬었습니다.
당시 소수의 사람들만이 스승으로부터 토라인 율법서를 배울 수 있었고 수업료도 비쌌기 때문에 군중 대부분에게는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군중에게 아주 자연스럽고 쉽게 성경의 말씀을 가르치시기 때문에 기존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는 달랐습니다.
당시 스승들은 지켜야 할 율법에 대해서 가르쳤는데 그 내용이 암기 위주이고 또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번에는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어 스승과 제자와의 일치를 설명하시면서 아울러 서로간의 충실성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슬프면서도 지극한 사랑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그리고 이제는 제자와 스승이 엄격한 주종의 관계가 아니고 절친한 친구사이임을 알려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곧이어 스승을 잃고 슬픔과 고통을 겪겠지만 부활의 기쁨을 나누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당신 뿐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시켜 일치와 사랑에로 이끌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스승이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아 아버지와 사람들 앞에 세우십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들도 선택하시어 당신 부활의 기쁨으로 나아가게 하시며 아버지 하느님 구원의 초대에 응하게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타민족으로부터 배타적으로 여기던 구원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는 열려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 34-35)
이 열려있는 구원관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 서간의 저자도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주님의 사랑은 일치를 이루는 힘과 치유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한 부부가 심한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 문제로 다투다가 나중에는 심한 자존심까지 건드리며 마치 이제는 마지막인 것처럼 싸웠습니다.
이제까지 부부싸움을 했지만 서로 심한 욕도 섞어가며 싸웠습니다. 부부싸움 끝이 그렇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모릅니다.
자신도 상처를 받았지만 자기가 한 심한 말 때문에 배우자가 받은 상처가 더 컸을 것을 생각하며 후회도 됬지만 어디에서 풀어야 할 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함께 타고 가다가 남편이 마침 동네 성당 앞을 지나가다가 ‘성당에 들어갔다 갈까?’하며 조그맣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감정이 상해 있어서 ‘당신이나 실컷 들어가!’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뭐’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쪽에 한 사람은 저쪽에 앉아 있었는데, ‘이제 뭐하는 짓이지?’ ‘병주고 약주는 것 아니야?’ 별별 생각을 하다가 밖으로 나왔는데 조금 있다가 배우자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차를 탔는데, 먼저 배우자가 ‘여보 미안해’라고 말하더랍니다. 여기서는 뭐라고 하겠어요? ‘나도 미안해!’
그 부부의 고백은 별다른 기도도 아닌데 주님 앞에서 서면 주님은 치유해 주시고 해결해주시는 힘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고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상처 뿐 아니라 미움까지도 엉클어진 일들도 해결해 주시는 사랑의 묘약을 갖고 계시지요.
저는 저의 학생시절, 로마에서 지내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대답한 분이시다.’ 라는 감탄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떻게 한 기숙사에 몇 백명 되는 사제들이 한 마음으로 서로 믿고 서로 위하면, 그것도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도 잘 모르는, 파키스탄, 스리랑카, 카나, 잠비아... 수도 셀 수 없는 별별 나라에서 온 사제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생명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실 대단하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우리에게도 그 사랑의 계명을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지만 용기를 내어 주님의 열려 있는 사랑에 참여하며 내 이웃을 주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끼리 사랑은 안 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의 편지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아주 중요한 언표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처럼 중요한 언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로 말하면 이 언표 덕분에 제 인생의 새로운 좌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언표를 알기 전과 안 뒤의 제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이런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전혀 몰라도 안 되지만 사랑의 하느님이 아닌 다른 하느님으로 알아도 안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심판자요 벌주시는 하느님으로만 알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을 제대로 모르고 인간적으로 하느님을 믿었을 때는 사랑의 하느님을 모르고 정의의 하느님으로만 알았고,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고 미워하거나 단죄하였으며, 나를 미워하고 단죄하는 것이 너무 아프고 괴로우면 그 화살을 이웃에게 돌려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사랑 안에 있듯이 정의도 사랑 안에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정의는 종종 사랑 없는 정의가 되었기에 나와 너를 혹독하게 심판하고 단죄하고 미워하고 마는 것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안다면 나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것인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끼리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함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끼리 사랑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하나이고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사랑하고 그외 사람은 배제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랑에 실패하는 것은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 사랑을 떠나서 사랑하기 때문인데 실패하는 것만큼 자주 우린 하느님 없이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려고 서로의 얼굴을 봤지만 보면 볼수록 미워지는 건데 내가 사랑하는 만큼 너도 사랑하기를 바라기 때문에도 그렇고 내가 바라는 만큼 아름답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기에 그렇고, 아무튼, 서로 사랑하다가는 이내 바닥이 나고 미움으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의 사랑에서 사랑을 배우고, 부모의 사랑에서 힘을 얻어 내 자녀를 내리사랑하듯 하느님 사랑에서 사랑을 배우고 힘을 얻어 사랑해야 고갈되지 않고 이웃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누구를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끼리 사랑도 안 되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보편적인 하느님 사랑을 믿는 사람의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의 유대 신자들은 이방인인 고르넬리오 가정에도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깜짝 놀랄 일입니까?
자기들한테만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내릴 거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착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그리고 사랑한다고 거창하게 말하면서 누구를 배제하거나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침받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이 어디서 온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사랑과 다르지 않지요. 사랑은 하나입니다. 모든 사랑은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옵니다.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얼마나 사랑하셨을지 관상합니다. 어줍잖은 말이나 설익은 글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 쉽게 표현할 수 있다면 아직 그 사랑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부으셨습니다. 사랑 앞에서 그분에게는 죽음도 깃털처럼 가벼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다 알 수 없지만 굳이 머무르려 한다면, 그저 우리가 살면서 받은 모든 사랑의 총합보다 크고, 가장 기억나는 감사한 사랑보다 더 진할 거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고작 그 정도에 머무를 뿐인데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이 솟아납니다. 사랑이 사랑을 기억하고 머무르는 우리를 휘감아 점령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사랑은 아버지에게 예수님에게로 전달되어 멈춰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지요. 제자들이 받은 사랑은 스승 예수님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딘가에 멈추어 고인 채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본성상 흐르고 흘러 분출의 근원이신 아버지께 되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우리가 주님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랑을 나눌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신분이나 지위, 재산이나 학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증명되는 실체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연결된 존재는 본성상 이미 존재 자체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에게서 흘러나와 세상을 물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의 근원이신 아버지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으로 물들입니다. 사랑의 존재 안에는 이미 자기 자신이 따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자아가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사랑이 되어 가는 까닭입니다.
제1독서는 인간의 관습과 관념을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35)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사상이 베드로 사도의 입을 통해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됩니다. 이방인과의 만남은 물론 세례와 구원 가능성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엄청난 파격이 될 이야기지요.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10,47)인간이 사랑에 주저하니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이지요. 편견과 아집에 차 기존 전통과 관습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내딛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께서 친히 원하시고 허락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인간에게는 순종만이 남습니다. 더 이상 "감히" 하느님의 사랑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별로 좋은 기억 없다고 씁쓸해하는 이라도 아직 의식하지 못할 뿐, 분명 삶의 구비구비마다 숨겨진 사랑의 보석들이 감춰져 있을 겁니다.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사랑을 받았건 그 사랑의 근원은 아버지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나를 사랑해준 모든 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을 내게 전해준, 아버지의 선물이었다니 말입니다.
그러니 가정과 공동체과 세상 안에서 사랑을 하는 우리도 아버지의 사랑의 메신저임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모자란 죄인이어도 그렇습니다. 불결하고 미소한 겁쟁이여도 우리 눈길과 말과 손길, 그리고 기도는 아버지 사랑의 연장선입니다. 그 사랑을 받는 이도 우리처럼 하느님 사랑에 닿아 생명을 얻고 풍요로워지니, 온 세상은 그렇게 사랑으로 연결된 유기체입니다. 사랑이 우리모두를 엮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5월은 사랑의 계절이고 사랑하기 딱 좋은 달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감사하고 행복한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활 주일이 깊어갈수록 우리 안의 사랑도 더 깊어지고 맑아질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 덕에 하나로 이어진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어떻게 잘 사랑할 수 있을까요? - 정주, 공부, 실천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좋은 글은 늘 봐도 좋고 새롭습니다. 좋은 사람은 늘 봐도 좋고 새롭습니다. 글과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산도 하늘도 나무도 풀도 꽃도 그러합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습니다(ever old, ever new). 밤 1시에 일어나 수도원 정원 잔디에 누워 밤하늘을 보니 엊그제와 어제 미세 먼지로 뿌여 잘 안보이던 별들이 북두칠성과 더불어 선명하게 무수히 보입니다. 마음 깨끗한 영혼들에 반짝이는 하늘 은총을 상징합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풀꽃)
그대로 사랑의 눈길, 관상의 눈길입니다. 풀꽃만 아니라 좋은 분들이나 좋은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여기 늘 한결같은 하늘 배경의 불암산이 그러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상징하는 ‘하늘과 산’이라는 자작시는 24년이 지난 지금 봐도 늘 좋고 새롭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이 주님이라면 산은 저입니다. 주님과 저의 한결같은 사랑의 관계가 바로 이러합니다. 날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우정 관계입니다. 한밤중 일어나 보니 44년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의 단톡방에 소개된 메시지들을 모아 재치才致 넘치는 제자가 보내 줬습니다.
당시 1977년, 13세 6학년 제자들은 지금 모두 57세, 저와 함께 늙어가고 있지만 영원한 소년들 같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제 사랑 전부이지만 당시 29세 청년교사인 저에게는 아이들이 제 사랑 전부였습니다. 제자 자랑도 팔불출에 속하는지는 모르지만 소개합니다.
-“선생님, 우리 6반 단톡방 재밌어서 몇 개 보내드려요.ㅋㅋ. 다들 선생님 뵐 생각에 들떠 있어요. 우리의 재롱 보실 각오하세요. ㅋㅋ”
“저두 갑니다.”
“회장님, 기타 가지고 오소. 봄소풍 기분 내보자.”
“그럼, 모두 1인1악기 지참하는 걸로. 각자 스승의 은혜 연습해서 와. 악기없는 가람은 젓가락!! 그날 선생님 앞에서 합주를 하겠소.”
“그람 더 재밌겠다. 대현 가수의 음악.”
"건우는 그날 소풍 장면을 크로키할 준비해올 것!!!"
“넵. 회장님”
“명가수 진이 있자나. 강추!”
“난 선생님을 위해 곱사춤을 추겠소.”
“재미지겠어. 아주!”-
여전히 초등학교 시절 동심의 순수한 사랑으로 반짝이는 모습들이 흡사 하늘의 별들처럼 영롱하고 아름답습니다. 사랑의 별들 같은 제자들입니다. 아, 그럼 ‘어떻게 잘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첫째, 정주定住 입니다.
사랑의 평생 정주입니다. 평생 정주를 위해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의 관상은 필수입니다. ‘정주하라’, 바꿔말해 ‘기도하라’입니다. 늘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정주입니다. 멀리 밖에서 방황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주님 만나지 못하면, 머물지 못하면 다른 어디서도 주님 못 만나고 머물지도 못합니다.
각자 삶의 자리는 다 달라도 주님 안에 머물러 정주하면 서로 연결되어 주님 안에 하나됩니다. 사실 떨어져 있어도 예수님과 한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각자 고유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면서 주님과 우정의 사랑과 신뢰를 날로 깊이해 가는 것입니다. 저절로 텅 빈 충만의 기쁨이요 행복이 될 것입니다. 주님 사랑만이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으로 바꿀수 있고 무지의 어둠을 빛으로 바꿀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깊이 머물렀던 베드로 사도의 성령의 열매, 관상의 열매같은 깨달음이 반갑고 고맙습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당신을 찾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구원의 하늘문, 하늘길 예수님입니다. 수도원 개원이래 34년 매일 밤낮 열려 있는 여기 수도원 정문과 수도원길이 늘 열려있는 예수님의 하늘문과 하늘길을 상징합니다.
둘째, 공부工夫 입니다.
사랑의 평생 공부입니다. 늘 공부하는 것입니다. 사랑 공부 예수님 공부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성서공부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라’에 이어 ‘공부하라’입니다. 예수님을 배워 깨달아 알아 갈수록 하느님을 알게 되고 나를 알아 비로소 예수님을 닮아 무지에서 해방되어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의 관상독서와 더불어 함께 가는 자연성서와 내 삶의 성서입니다. 참으로 자연사랑이 절실해 지는 작금의 위기시대입니다. 공동집인 지구와 그 안의 사람들이 코로나로 기후재난으로 너무 큰 곤경중에 있습니다. 자연을 함부로 대한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서와 같은 자연만물입니다.
이어 내 삶의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바로 이 세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 공부가 평생공부입니다. 참 나를 발견해 가는 점차 예수님을 닮아가는 공부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공부하면 하느님의 피조물인 사람을,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생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님을 공부하며 알아갈 때 우리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랑, 우리 생명, 우리 기쁨, 우리 행복임을,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자 의미는, 방향이자 목표는 예수님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수님 사랑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셋째, 실천實踐 입니다.
사랑의 평생 실천입니다. 사랑은 믿음처럼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멀리서가 아닌 밖에서가 아닌 여기 내 몸담고 있는 예수님의 한 몸 공동체에서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순수하고 무사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사랑과 존경이 잘 안 된다는 수녀님에게 드린 충고가 생각납니다.
“존경과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냥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연민의 아가페 사랑으로 충분합니다. 나름대로 한계와 부족함으로 힘겹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에서 오는 사랑이 바로 무조건적인 존중과 배려, 연민의 사랑입니다.”
복음의 예수님 역시 사랑의 실천을 신신당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서로 사랑할수록 더불어 예수님과 깊어지는 친구로서의 우정관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뽑으시어 사랑의 아마추어가 아닌 사랑의 프로가 되어 살게 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마지막으로 점검하실 것은 사랑의 열매와 더불어 당신과의 우정관계일 것입니다.
주목할 바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하셨지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라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과 형제들간의 서로 사랑은 구별될지언정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형제들을 사랑할수록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우정도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늘 감동케하는, 우리 사랑에 선행하는 이런 하느님 사랑이, 예수님 사랑이, 형제적 서로 사랑에 샘솟는 사랑의 원천이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 은총이 우리 모두 지칠줄 모르는 형제애를 실천하게 합니다.
1.주님 안에 머물러 평생 정주하십시오. 정주를 사랑하세요.
2.평생 날마다 주님 사랑을 공부하십시오. 공부를 사랑하세요.
3.평생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형제 사랑, 하느님 사랑, 예수님 사랑, 자연 사랑입니다. 실천을 사랑하세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아멘.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큰 부자가 됩니다. 그에게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낸 조카 롯이 항상 곁에 있었는데, 그들의 재산이 많아졌다는 기록 이후 바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창세 13:6).
가진 것이 적을 때는 함께 다닐 수 있었지만, 가진 것이 많아지니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행복해지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지만, 더 많이 가진 사람에게 반드시 행복이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가진 것에 대한 근심에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삶에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난 주 주일 복음에서 오늘 복음까지 이어지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머무르다"(μένω)라는 동사는 10번 이상 나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등등..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재물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활용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순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활용해야 할 것들에 마음을 주고 거기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닙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못 하고, 예수님도 우리 안에 머무실 곳을 찾지 못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신 위대하신 분이 제 안에 쉬러 오셔도 가진 것이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의 영혼에는 그분이 머무실 곳이 없을 것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마태 8:20).
예수님께 머무실 곳을 드리고 싶다면 그분께 자신의 "시간"을 드리십시오.
그분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 안에 머무르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는 예수님의 참된 친구입니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사랑을 할 때 하느님을 알게되고 사랑을 할 때 하느님의 친구가 됨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을 사랑한다 하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독서에서 보듯 베드로의 성령체험은 곧 주님의 사랑체험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으로써 하느님과 사랑의 대화 안에 살면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 자체에로 접근해 갑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지 않으십니다. 처음에는 그냥 말씀으로 하시고 다음에는 호소로 하시고 마침내 행동으로 계시함으로 인간의 점차적으로 당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사랑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사랑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심을 스스로 나타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무 공도 없는 죄인인 인간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아들을 무조건 거거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 안에 여실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만민에게 미치며 사회적 내지 인종적 차별의 벽을 모두 타파하고 어느 누구도 경멸하지 않습니다. 이를 넘어서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사랑은 한없이 용서하고 자신과 반대되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화해하며 모든 것을 참고 악을 선으로 보답합니다. 이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이유는 그 사랑이 먼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는 믿음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종류의 안락함을 포기합니다. 그의 집과 모든 안전한 기반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외아들에 대한 애착마저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포기와 떠남은 순수하고 꾸밈없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을 깊이 체득하게 됩니다.
성서를 통하여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일치되는 데서 나옵니다. 감정과 감성에 좌우되는 기분에 따라 보여주는 그런 사랑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소유하고자 함입니다. 그러한 사랑에는 어떻게든 그를 정복하려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렇한사랑은 상대방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는 자기 보상일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지속적으로 사랑안에 함께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힘을 얻을 때에만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사랑은 높은 곳을 향한 삶이며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며 세상을 뛰어 넘는 삶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고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종류 또는 일의 분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만큼 사랑을 지니고 일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즐거울 때 사랑하기는 쉬우며 이런 즐거움은 우리 사랑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기적인 것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더욱 순수하고 확고부동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사랑의 자리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님
사제 서품이나 종신서원을 앞둔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생각은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 앞에서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며 자격 없음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도 예전 첫 서원을 앞두고 수련장 신부님께 서원을 보류하고 싶다는 청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지금은 사제가 되어 있는 저 자신을 보면서 그때 지녔던 첫 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수도회 입회 초기에는노력하면 자격을 갖출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삶이니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약함을 인식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가 착각 속에 살아왔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자격이 있거나 그럴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저를 사랑하시기에 불러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성소는 사랑의 자리입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불러주셨고, 당신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불러주신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격 요건은 단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사랑하는 것. 그 외에는 모두 부차적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사랑만이 부르심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셨고, 또 화해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의 ‘고린토 후서 주해’에서 (Cap. 5,5-6,2: PG 74,942-943)
성령의 보증과 부활의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는 것이 이미 실현된 듯 그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 육체를 따라 이해하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사람들이고 육체의 부패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어 우리는 모든 것을 살게 해주시는 그 말씀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살 적에 우리는 모든 것을 살게 해주시는 그 말씀으로 이제 그리스도의 정의가 우리를 차지하게 된 후에 우리는 옛 부패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아무도 육체 안에 곧 육체의 연약함 속에 갇혀 부패의 종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즉, 그분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위해 육신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고 있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죽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지금 알고 있는 그분의 모습은 죽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아직 육신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의 아버지와 함께 계시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육신과 완전히 다른 육신을 지니고 계십니다. “한 번 죽은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 살고 계십니다.”
우리의 선구자이신 그분이 이런 위치에 계시다면, 그분을 따라야 하는 우리들도 육신이 아닌 육신을 넘어서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 바오로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인간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화되어 저주의 세력이 소멸되었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짓밟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참된 하느님의 본성을 알고 있으며 아버지께서부터 천상 축복을 세상에 내려주시는 아들의 중재로 하느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립니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는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신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라고 적절히 말했습니다. 성자께서 육신을 입어 사람이 되신 그 신비와 그 신비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구원의 은총은 성부의 뜻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부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 것도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무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성부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오늘 하루 행복하길 / 언제나 아침에 눈 뜨면 기도를 하게 돼
달아날까 두려운 행복 앞에
널 만난 건 행운이야 / 휴일에 해야 할 일들이 내게도 생겼어
약속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조금씩 집 앞에서 널 들여보내기가 / 힘겨워지는 나를 어떡해
처음이야 내가 드디어 내가 / 사랑에 난 빠져버렸어
혼자인 게 좋아 나를 사랑했던 나에게 / 또 다른 내가 온 거야
아름다운 구속인걸 / 사랑은 얼마나 사람을 변하게 하는지
살아 있는 오늘이 아름다워]
가수 김종서가 부른 <아름다운 구속>이라는 노래 가사 중 일부입니다. 자유가 좋아서 혼자 고독하게 살던 남자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누군가의 연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생깁니다. 그것은 그의 자유를 제한하는 ‘구속’이지만 그는 그 구속마저도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그녀를 ‘또 다른 나’, 즉 ‘자기 자신’처럼 여길 정도로 깊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자기 삶에 일으킨 긍정적 변화들을 통해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따르듯, 주님과 우리 사이에도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그분의 ‘백성’이자 ‘자녀’가 된만큼, 주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모시는 사람으로서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이 ‘사랑’ 안에서, ‘사랑’ 때문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시면서,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제물을 충실히 봉헌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며, 그분은 사람을 버리지도, 벌주지도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때도, 예수님은 그 죽음마저 하느님의 사랑이라 믿고,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으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의 사랑에 당신 자신을 의탁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이들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의무’가 주어집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것처럼’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양’만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임금에게 ‘일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제 능력으로는 절대 그 부채를 다 갚을 수 없듯, 부족하고 약한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양’만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렇기에 ‘것처럼’이란 말은 사랑의 ‘근원’과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애초에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왔고, 예수님은 그분의 사랑을 굳게 믿으며 그 안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랬기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며 그 안에 머무른다면,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게 됩니다. 내 가장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는, 사랑의 '극치'(極致)를 실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랑은 위에서 시키니까 생각없이 따르는 피동의 차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와 세상을 위한 그분의 계획은 무엇이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하고자 하시는지 그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협조자’이자 ‘친구’로서 내 의지로 기꺼이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만만하게 막 대하라고 우리를 ‘친구’로 부르신 게 아닙니다. 친구간의 우정은 참된 사랑을 그 근본으로 하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맺은 참된 우정 안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당신 뜻을 따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근본 목적은 주님을 ‘숭배’하는게 아니라, 그분의 뜻을 ‘따르는’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 안정적이고 신실한 사랑의 쇄신이 필요하십니까?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행복 충만한 은총을 원하십니까?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열정적이고 안정적이며 신실하게 누군가를 영원토록 사랑하고 싶으십니까?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해온 연인, 약혼자 그리고 부부간에 겪는 이별의 고통을 봅니다. 이같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까지 이르지 않을 해결 방안이 있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우리 사랑의 기원]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9 절)라고 말씀하시며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종합하면, 예수님께서는 완전무결한 사랑의 원천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소개하시며, 하늘에 계셨던 그 원천이 예수님을 통해 이제 지상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참조, 1요한 4,7.16). 그분은 인성과 신성의 모든 사랑의 원천으로서 끊임없이 당신의 풋풋한 사랑으로 양육하시어, 모든 인간의 사랑을 열정적이고, 아름답고, 영원에 이르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 사랑의 폭포가 모든 인류에 쏟아져 내려 흩뿌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인성과 신성의 보증된 사랑이 필요하다면 이 원천으로 다가와 일생 동안 무료로 샘물을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언제나 당신 가까이 계십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 절).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견고하고, 변함이 없으며, 확고하고 신실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도 그분에게서 벗어나지 말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충실하라는 요청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이룰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당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10 절)라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예수님 사랑의 특징들]
이제, 그분 사랑의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 절)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완전하고 절대적인 자기 주도적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 절)라고 분명히 밝히시며 우리를 친구로 택하셨습니다.
# 그분은 우리를 가장 신임하는 친한 친구로 삼으셨으므로, 당신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비밀을 우리와 나누셨습니다. (참조, 15 절) .
# 마지막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극치의 표현으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 절) 하시며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풍요로운 열매의 정체성과 목적]
그럼 이제, 너무나 과분한 그분의 이런 사랑이 광기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무엇 때문일까요?
1. 사랑하기 위한,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구원인 열매를 풍요롭게 지속적으로 맺도록(참조, 16 절)’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예수님 사랑과 같은 참된 사랑만이 그분처럼 사랑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인간을 영원히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아버지께 당신의 이름으로 간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참조, 16 절). 우리가 간구하는 것만으로도 그분은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 우리 안에서, 우리들 가운데 머무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이 주시는 풍성한 열매로 말미암아 기쁨이 충만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참조, 11 절).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친구들, 부모님, 가족,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열정적이고, 아름답고, 기쁨으로 영원토록 사랑하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신실한 친구 예수님께서 당신과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주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아멘.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복음(요한 15,9-17)은 예수님 안에 머무름의 목적을 사랑과 증거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 안에 머무름(친교: 요한 15,1-8)이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 바뀝니다(요한 15,9-13).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며(요한 8,31),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 안에 머무른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확실하고, 기쁨으로 표현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또한 사랑이 행동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기가 머무르는 이의 뜻을 따르는(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르고, 당신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버지의 일을 다 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요한 10,37; 14,31)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완수하면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신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듯이(요한 14,10) 우리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내놓는다면 “예수님의 사람들”(요한 13,1) 곧 예수님의 친구들이 됩니다. 친구라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것을 기뻐할 것이며(요한 14,28), 당신이 아버지께 가심으로써 친구(제자: 믿는 이)들이 예수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요한 17,13).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 예수님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커다란 기쁨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이들에게도 그 기쁨(구원)을 충만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은 신랑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요한 3,29), 생명의 물을 받아 마셔서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기(요한 7,38)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와 예언자로 만들고(지혜 7,27),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과 사귀시고 당신 계약을 그들에게 알려 주십니다.”(시편 25,14) 이렇게 깨끗해진(요한 13,10; 15,3) 예수님의 친구들은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기(탈출 33,11) 때문에 죄를 짓지 않으므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요한 8,34)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사랑하신 친구들(요한 13,1)을 손수 뽑아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셨고, 부활하신 뒤에도 알려주실 것인데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친구들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도 친구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기”(1테살 5,9) 때문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하셨듯이 당신의 죽음으로 얻게 된 기쁨(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셔서 뽑으신(신명 7,8) 이들(가지; 친구)이 당신(포도나무) 안에 머무르면서 사람들에게 당신을 증거함으로써 사랑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고(요한 4,36; 15,2), 파견된 이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도(요한 17,20) 언제나 그 기쁨이 남아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에 젖은 이들이 많은 열매를 맺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요한 15,7-8)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청하는 것을 아버지께서 주시도록 하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24)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1독서(사도 10,25-26.34-35.44-48)는 이방인에게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증언합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카이사리아 지방에 주둔하던 로마군대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가 친구들을 불러놓고 있다가 자기 집에 들어오는 베드로 사도 앞에 무릎을 꿇자, 사도는 최상의 예우를 거절하면서 예수님께서 위임해주신 권위를 가지고 그를 일으켜줍니다. 사도들을 포함해서 유다인이었다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똑같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도 유다인들(박힌 돌)과 이방인들(굴러온 돌)은 서로 경멸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자 그들에게도 자기들이 받았던 똑같은 성령의 선물이 주어져서 이방인들이 복음의 내용을 입에 담고, 하느님을 찬송한다는 사실이 유다인이었다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에게는 그저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초기교회)는 유다인도 그리스도를 믿고, 이방인도 그리스도를 믿듯이 아무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인 코르넬리우스의 집에 머무르면서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것입니다.
제2독서(1요한 4,7-10)는 체험을 통하여 깨달은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가르칩니다.
요한 사도는 추상적인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참 인간으로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당신을 사랑으로 드러내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과 역사를 통하여 계속해서 보여주신 일을 “직접 듣고, 알게 된 것”(요한 4,42)을 “사랑”이라는 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1요한 4,14) 만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깊이 되새기면서 인간을 위해 이루신 하느님의 업적(요한 3,35; 10,17-18)을 안다면 “사랑”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기”(1요한 3,16)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물론 그분을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는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분이시며, 오직 사랑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분이심을 요한 사도는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우리 역시 사랑이신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고, 그분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사랑으로만 우리의 삶이 수월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싶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거룩한 사랑의 세 가지 특징을 꼭 알아야 합니다.
첫째,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의 몸과 마음이 늘 함께 있게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함께 있어도 기껏해야 7-80년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임마누엘: 마태 1,23)이신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마태 28,20).
둘째,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닮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닮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많은 열매를 맺어 세상 사람들이 그 열매를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단지 닮는 것에서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당신을 닮은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끝없는 사랑이 넘치시기에 닮음으로 만족하지 못하시고, 아예 인간이 되셨습니다.
셋째,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가난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주도록 독촉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가난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을 위한 사랑 때문에 택하신 가난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친구를 위한 한없는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으시는 가난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옹졸함과 탐욕이 있다면 그것을 모두 예수님께 드려서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으시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사랑은 마무리가 아름다워야 한다. <15, 9-17> 5월 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5월은 가정의 달이지만 본질은 사랑의 달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구원의 길이지만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말처럼 흔하면서도 말하기 쉽지만, 사랑만큼 모르는 말도 없습니다. 사랑하려면 코린토 13장을 보라고 하지만, 그 모든 내용을 보통 사람으로 모두를 실천하기란 너무나 어렵고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어” 하고 사랑의 짐만 지고 인생을 헛 살다가 후회하며 마지막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하는 시간은 가장 늦은 시간입니다. “있을 때 잘해”라는 간단한 말은 지금이란 말입니다. 흔히 “잘 살아야 잘 죽는다.”라는 말처럼 사랑은 현재형이지 과거나 미래형이 아닙니다. 줘야 할 때 줘야지 지나면 시간, 공간을 모두 잃어버립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열심한 신자도 희생, 봉사, 나눔, 친교로 보지만, 아닙니다. 사랑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위에서 증명됩니다. 사랑은 오늘 복음에 올바른 정의가 있습니다. 15, 13“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하셨듯이 모든 사람 위해 내가 죽고, 너를 살리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는 숨을 거두며 저 남아있는 아이들 걱정하며 숨을 거둡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다 해주고 떠나면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고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고 떠나는 아름다운 말을 합니다. 참사랑은 내가 죽고, 너를 살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참사랑을 실천하신 주님은 온갖 고난을 통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 죽음은 많은 이를 위한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주님은 늘“ 내가 높이 달린 다음에야 나를 알아본다.” 하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 힘든 길을 행하라고 하시지 않고 순서를 정해주셨습니다.
1) 이웃을 너를 사랑하듯 사랑하라.
2) 이웃을 나를 사랑하듯 사랑하라.
3) 이웃을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사랑하라.
4) 이웃을 하느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듯 사랑하라.
1) 사람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2) 사람이 <나를>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3) 하느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4) 하느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므로 셋이 하나가 되는 완성된 삼위일체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알고 깨우치고 실천하는 사람이 참 하느님의 벗이며 친구입니다.
3) 단계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마무리 말 4) 단계를 깊이 보아야 사랑의 마무리를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은 성호경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의 마무리는 성호경으로 믿음을 증명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사랑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사랑하는 것같이 내가 하느님 되어 하느님이신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상담자가 아무리 정신적 불안증세 아니면, 자기 고민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다고 해도 병자나 낙오자로 보지 않고, 주님이 제 앞에 오신 것처럼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대합니다. 성호경을 이마와 가슴과 양어깨에 놓으면서 내가 하느님이 되고, 너는 하느님으로 알고,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라는 명을 함께 해야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은 삼위로 하나인 것을 믿고 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조용국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미 예수님
1.황사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5월의 하늘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합니다. 중국에 코로나가 극성을 부릴때는 하늘이 그 파란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는데, 뿌연 하늘을 보노라면 마음속에서 짜증이 확 올라 옵니다..
2.위정자들이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같은 가치관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들의 입지나 권력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오늘 하루 하고 만다 하더라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면 우리나라는 훨씬 더 좋아질것입니다.. 우리 나라 국민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어떤 악조건속에서도 버티어 내고, 성과를 이루어냅니다.. 위정자들만 조금 더 정신을 차린다면 이 위대한 국민과 함께 정말 위대한 나라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3.사람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정신적인 가치는 바로 가치관일 것입니다.. 사람은 바로 그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4.어느날 당뇨전문의인 친구의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왜 당뇨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당뇨증세가 있는 사람이 정상적인 수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완전히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한다면서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대로 살지.. 웬만해서는 그 생활습관을 바꾸기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을 정도의 노력을 해야 그 생활습관이 간신히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0명중에 한두명만이 생활습관을 바꾸는데 성공한다고 합니다...
5.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이 바뀐다는 것,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지만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6.사람은 살던대로 사는 것입니다.. 살던대로 사는 것이 제일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는 방식이 건강에 위험이 되더라도 웬만해서는 그 사는 방식이 바뀌거나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7.인간은 참으로 변화되기 힘든 존재입니다.. 때로 교통사고나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결심을 하지만 그 어려운 상황이 해결되면 또 다시 너무 쉽게 옛날 방식의 삶으로 돌아가기 일쑤입니다...
예컨대 술을 너무 먹어서 간에 문제가 생겨 중대한 수술을 받게 되었다 하더라도 간이 다시 회복되면 그 술먹던 시절로 또 다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뻔 하다 다시 살아난 사람도 다시 건강이 회복되면 예전의 그 방탕한 생활로 다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도박을 좋아해서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들과도 헤어지는 삶을 산다하더라도 또 노숙자와 같은 거지같은 삶을 살면서도 그 생활에서 변화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빌붙어서 자존심도 버리고, 온갖 체면도 버리는 비참한 삶을 살면서도 거기서 떠나지 못합니다...
8.그러나 간혹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변화된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의 위협도 아니고, 병의 고통도 아니고, 어떤 누구의 권유때문도 아닙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9.가치관이란 쉽게 말하여 옳은 것, 바람직한 것, 해야 할 것 또는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에 대한 생각을 말합니다.. 즉 인간은 정신이 변해야 비로소 삶의 습관도, 성격도, 마음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삶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10.저는 요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친구가 보다 더 분명해집니다.. 흔히들 오래된 술과 오래된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라고 통념적으로 이야기 하는데 저는 그 생각에는 조금 반대입니다.. 오래된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가 아니라 가치관이 같은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 할지라도 가치관이 다르면, 즉 생각이 다르면, 즉 인생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헛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가치관이 다르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저 피곤할 뿐입니다.. 나하고는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하게 느껴져서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같은 친구, 즉 가치관이 비숫한 친구를 만나면 아무리 긴시간의 여행도, 긴시간의 식사시간도, 너무 너무 재미있습니다..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고, 인생의 새로운 비젼을 얻기도 하고, 삶의 또다른 재미와 활력을 얻기도 합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파고들기도 합니다...
11.친구라는 단어를 한자로 풀이하면 나무들이 서서 한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친자이며, 구는 오래될 구자입니다.. 즉 오랫동안 한방향을 함께 보아온 사람들이 바로 친구라는 뜻입니다.. 참 뜻이 기가막힙니다.. 한방향을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바로 가치관이 같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본다는 것, 그것은 바로 정면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또한 걸어가는 방향, 걸어갈 방향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친구란 같은 방향을 보며 같이 걸어가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가 어떤 친구를 갖고 있느냐는 우리 인생에 있어 참으로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내면의 길과 같은 길을 가는 친구 한사람만 얻어도 그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모든이가 진정한 친구는 될 수 없는 것이고,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 나와 가치관이 같은 사람, 나와 함께 같은 방향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것입니다..
12.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각,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갖고 예수님과 같은 인생길을 걸으면 우리가 감히 예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가르침인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예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엄청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구끼리는 비밀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일도 다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친구는 신의와 우정을 지킵니다.. 그리고 친구가 더 좋은 인생길을 갈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인생길에 그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분의 신의와 우정은 벗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놓는 그런 진정한 신의와 우정이고, 그것은 깊은 사랑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다만 조건은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즉 그분과 같은 생각을 하고, 그분과 같은 가치관을 지니며, 그분과 함께 생활하며, 그분과 함께 나의 인생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못나고, 부족하기 이를데 없지만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끌어주실 것이고,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친구이니까 우리도 마음을 터놓고 그분께 우리의 모든 삶의 사정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고, 우리안에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치유와 은총이 흘러넘칠 것이고, 새로운 세상이라는 너무나 아름다운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13.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치관만 같아도, 아니 비숫해도 우리는 마음이 편해지고, 친밀감이 느껴지고, 우정이 샘솟는데 하물며 신앙의 세계에서 그것도 예수님과 가치관이 같은 친구가 된다면 우리가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가치관이 같은 친구 하나만 만나도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 하는데 하물며 가치관이 같은 예수님을 만난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천상의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갖고 계신 온갖 좋은 것을 우리에게 당연히 나누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친구인 너희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라고 하십니다.. 친구인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14.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우리의 속사정을 다 들어주십니다.. 결코 우리를 비난하거나 헐띁거나 다른 데 가서 우리의 부끄러움을 노출하지 않으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편이 되어 주시고, 나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시고,나를 변호해주십니다.. 언제나 내 마음속의 이야기를 깊이있게, 정성스럽게 들어주시며, 내 인생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시고, 보다 더 깊은 가치관을 갖게 해주십니다.. 내 삶의 고민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며, 때로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기꺼이 치유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내 인생의 길을 걸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진정한 친구가 될 때 우리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아멘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우리의
참된 희망이다.
참된 희망이
참된 사랑이며
우리가 찾는
참된 생명이다.
하느님
사랑을
깨닫는 삶의
소중한
시간들이다.
함께
살기위해
하느님께서
이곳에 사는
우리들에게
오셨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당신 삶으로
친히
보여주셨다.
참된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가장
행복한
사랑이다.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거기가
하느님 나라
참된 모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이다.
실천이
참된
행복이다.
행복은
행복으로
이어진다.
행복은
십자가처럼
목숨을 내놓는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다.
영원한 생명은
이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생명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시는
참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비울 때
채워지고
내놓을 때
얻게되는
사랑의 신비
생명의 완성이다.
무엇하나
내놓는 것이
없는 사랑의
아픈 사람들이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으로
생명을
치유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사랑의
하느님께
우리의 비겁함과
우리의 이기심을
정직하게
맡겨드린다.
사랑은
목숨을 내놓는
가장 큰 행복이다.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린다.
참사랑이
참생명이다.
다시 사랑이
시작되었다.
돈보스코, 보시는 것처럼 저는 지금 행복이 가득한 곳에 서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즉위 5주년을 맞이하신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세번째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를 반포하셨습니다. 복음의 기쁨, 사랑의 기쁨에 이어 세번째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고객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살아있는 성인입니다.
1855년 6월 24일 돈보스코가 마흔살 되던 해 영명축일 때의 입니다. 오라토리오 아이들은 성극이나 성가, 합창이나 시낭송 등, 정성껏 축제를 준비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아이들의 지극한 사랑에 크게 감동을 받은 돈보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자 받고 싶은 선물을 쪽지에 적어 내게 주세요. 뭐가 됐든 여러분의 기대에 실망을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이 대목에서 돈보스코의 양떼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명 축일에 이것 저것 선물이나 금일봉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오라토리오의 수많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선물을 해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크게 돌아보게 하는군요.
수많은 종이 쪽지들을 들고 당신 사무실로 돌아온 돈보스코는 하나 하나 쪽지를 열어봤습니다. 어떤 아이는 작은 성모상을 신청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운동화를 적었습니다. 짓꿋은 한 아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초콜릿 100킬로 그램’
수많은 쪽지들 가운데 유난히 돈보스코의 눈길을 끄는 쪽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1842~1857)가 쓴 것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깜짝 놀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크게 감동받은 돈보스코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비오! 성인이 되는 비결을 네게 선물하고 싶구나. 자, 여기 있다. 첫째 명랑하게 지내는 것이다. 둘째, 네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 공부와 기도의 의무에 충실한 것이다. 셋째, 친구들에게 선을 베풀거라. 설령 네게 희생이 따르더라도 항상 네 친구들을 도우렴. 이 세가지만 잘 지켜도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천사표였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가 선물로 주신 세가지 성화의 비결을 마음 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오라토리오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매일 매일 충실히,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그 결과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래 지나지 않아 꿈에 그리던 성인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15세 되던 1857년 3월 9일 병사(病死)한 그는, 1954년 6월 12일 비오 1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한번은 세상을 떠난 도미니코 사비오가 돈보스코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보스코, 보시는 것처럼 저는 지금 행복이 가득한 곳에 서 있습니다.”
이어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 장미, 바이올렛, 백합, 용담꽃, 밀이삭이 어우러진 풍성한 꽃다발을 한 아름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꽃다발을 신부님의 아들들에게 보여주세요. 장미는 사랑을, 바이올렛은 겸손을, 용담꽃은 회개를, 백합은 순결을, 밀이삭은 성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답니다. 돈보스코, 그럼 안녕히!"(양승국 스테파노 SDB)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5. 06 부활 제6주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너와 함께 하고파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나보다 너를 사랑하기에
나를 죽여 너를 살리려고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아낌없이 사랑하라고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리라 너를 믿기에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너에 대한 내 믿음에
너의 믿음으로 화답하라고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너를 통해 나의 모든 것이
풍성한 열매 맺기를 바라기에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내가 너에게 단 하나의
샘솟는 희망이 되도록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너와 함께 하고파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함께 하는 벗으로 삼고자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목숨 내놓는 사랑의 기쁨을
늘 그렇게 맘껏 누리라고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서로를 탐하는 억압의 굴레 걷어내
벗을 위해 기꺼이 죽는 자유 주고자
내가 너를 뽑아 세웠단다
네 삶의 첫날 그리고 오늘 그러하듯
네 삶의 마지막 날 그리고 그 너머까지
내가 너를 뽑아 세울 것이란다
형제애를 통한 일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하는 형제적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서의 가장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그 근거를 요한에 의한 서간에서 제시하고 있다.
제1독서: 사도 10,25-26.34-35.44-48: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성령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데 있어서 어떤 차별을 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해 주신다(44-46절).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게선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34-35절).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비록 살인자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제2독서: 1요한 4,7-10: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으므로 사랑의 모상이다. 이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우리가 사랑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적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나게 된다(7절).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사랑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다. 이 사랑의 계명은 주님의 "명령"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지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생활을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신(8절)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15,9-17: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오늘의 복음은 지난 주일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 대한 결속과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당신의 깊은 뜻을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비록 떠나시지만 사랑으로 가지와 포도나무처럼 그들과 함께 계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란 우리가 그분의 기쁨이라는 것이고 그 기쁨이 충만해 진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가 그분과 친교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기쁨은 은총이며, 그것이 또한 우리의 기쁨이기도 하다. 이 기쁨은 우리 신앙인들 모두가 언제나 간직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 안에서만 가질 수 있다. 그 기쁨을 갖기 위해서는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사랑을 하면서 가질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를 이길 때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이라고 하였다. 악마는 믿지만(야고 2,19 참조)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계명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1티모 1,5)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원칙을 말씀하셨다. 이 원칙에 따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서로를 위하여 죽어야 하겠는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주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당신의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로마 5,10)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들이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라고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교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친구만이 친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되는 것도, 원수가 되는 것도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종에서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아름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5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율법 때문에 종이 되었지만, 당신의 말씀으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랐던 ‘말씀’이며, 그가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던 것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종이 아니라 자녀로 만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ㄱ절) 이 말씀은 우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은총을 받도록 정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기꺼이 나아가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우리는 선하게 되도록 사악했던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의 친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런 친교가 그 이유이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열매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남아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지가 온 세상에 뻗어 나가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나아가야 한다. 어떤 것을 행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열매로 잘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에 지극히 바람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지명하셨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맺을 수 없는 열매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우리의 열매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새 계명을 지키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자.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부활시기의 정점에 와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6주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할 제1주일의 주제는 ‘갈망’입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돌아가신 그분의 몸이라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자매님이 서울에서 적성성당으로 미사참례를 하러 오셨습니다. 새벽에 집을 나와서 버스를 3번 갈아타고 오셨습니다. 저의 강론을 듣고 싶어 하셨지만, 자매님은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갈망은 의무감보다 강합니다. 갈망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들을 구원하고자하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제2주일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났습니다. 곧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만남의 중심에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치유의 기적을 보여 주실 때 ‘믿음’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제3주일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저는 서품성구로 시편 126장 5절의 말씀을 정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 사제생활 27년을 하면서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려고 합니다. 중용 23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 제4주일이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아듣고,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성직자, 수도자들은 착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합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착한목자는 진실해야 합니다. 교회가 활력을 잃어간다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착한목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착한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착한목자인 부모는 자녀들에게 기도의 모범, 신앙의 모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포도나무와 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야만 성장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인 삶의 장소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없으면 잘려나간 가지처럼 말라버리고, 버려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살기 편한 집은 있지만 따뜻한 정이 흐르는 가정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편리한 시설과 아름다운 성당 건물은 있지만 기도와 사랑이 넘치는 성당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 하느님과의 친교는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과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질서와 자유의 조화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부활 제6주일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열정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어쩌면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잠시 인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외국에 나가게 되면 답답한 것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터넷입니다. 인터넷 속도가 왜 이렇게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웹 페이지 한 면을 열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지난번에 유럽으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호텔 로비에서 외국인 한 분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느린 속도였지요. 저 같으면 지루하고 답답하다면서 화를 낼 것 같은데 전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습니다. 여유 있게 차 한 잔을 마시고, 또 옆의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소를 잃지 않으며 천천히 인터넷을 하고 계셨습니다.
지난 평창 동계 올림픽 때에 외국인들이 인터넷 속도에 깜짝 놀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에 길들여 있어서 일까요? 조금만 인터넷 속도가 느리면 짜증과 화를 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느리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빠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할 것 같지만, 그렇게 많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 없는 것까지 보게 되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주변의 작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를 타고 가면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천천히 걸어야 볼 수 있는 경관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느림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한 기쁨을 통해서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담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빠른 것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빠르게 얻을 수 있을까요? 한 눈에 반한 사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랑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천천히 다가가는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화를 내고, 그 사람의 마음이 좁다면서 상대방에 대한 섣부른 판단까지 합니다. 사랑은 절대로 빠르게 얻을 수 없습니다.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나의 일방적인 집착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부터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겠다.’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의 노력을 통해서만이 그분의 큰 사랑 안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그 노력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을 하는 사람만이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요한 사도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참조).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신은 할 만큼 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사랑하지 않는 이유만을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 사도도 오늘 제1독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사도 10,34 참조).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하지 않는 모습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빠르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히 사랑은 아주 천천히 다가가야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기쁜 소식과 함께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끔찍한 죽음까지도 선택하면서 끝까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배반한 제자들을 혼내기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주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사랑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요한 15,11 참조).
오늘의 명언: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라(벤자민 프랭클린).
함께 할 수 있는 삶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운 장미가 자신을 이렇게 자랑합니다.
“내 가시는 아주 뾰족하고 날카롭지. 그래서 초식동물들이 내 잎을 갉아 먹을 염려가 없어. 나의 이 촘촘하고 날카로운 가시들을 봐라. 아마 새들도 내 가지에는 앉지 못할 걸?”
그러면서 주변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를 보면서 말합니다.
“너는 덩치는 그렇게 크면서도 자기 몸을 지킬 무기가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하니? 딱따구리는 네 몸에 구멍을 파고 있고, 다른 동물들이 잎을 마구 뽑고 가지를 함부로 부러뜨려도 가만히 참고만 있어야 하잖아.”
어느 날 아이들의 숲속으로 소풍을 왔습니다. 그 중에 한 소녀가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었지요. 이 소녀는 활짝 핀 장미를 보고 다가서다가 그만 장미의 가시에 찔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떡갈나무를 끌어안으면서 말합니다.
“너는 장미처럼 예쁜 꽃은 없지만, 가시가 없어서 이렇게 내가 껴안아 줄 수 있구나.”
화려하지만 가시와 같은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편한 사람은 쉽게 다가서고 그래서 편하게 안아주기도 하지요.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일까요? 화려하지만 외로운 삶? 아니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함께 하는 삶일까요?
하느님 사랑
이수현 라우렌시오 신부님
오늘 말씀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큰 사 랑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하느님의 큰 사랑 을 3가지로 나누어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느님의 사랑은 차별 없는 사랑입니다.
독서에 코르넬리우스라는 사람이 등장 하고 있는데, 그는 백인대장으로서 로마의 장교 입니다. 이러한 그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만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일 뿐 여타 다른 모든 민족들은 그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죽어 마땅한 죄인까지도 하느님께서는 차별 없이 사랑하셨으며(요한 8,3이하), 당신을 모함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루카 23,34). 그러니 비록 이방인이지만 코르넬리우스가 세례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두를, 아니 원수까지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잘못하면 벌을 주시고, 잘하면 상을 주시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하느님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은 주시되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상선벌악의 하느님으로 알고 믿는다면,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내 인간적인 잣대로 한정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1요한 4,16) give and take(주고받는)의 사랑실천은, 우리 인간들의 사랑방식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쩨쩨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그분의 본성상,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조건 없는 하느님의 큰 사랑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의 사랑은 목숨을 거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은,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으며,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나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목숨을 걸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분에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1-12)
당신 방식의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당신이 누리고 있는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며, 우리를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두에 대해 차별 없고,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 그리고 목숨 거는 하느님 방식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신앙인들이 되도록 합시다.
가장 좋은 선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입니까?
첫 돌을 앞둔 귀여운 아기에게 유아세례를 집전했습니다.
천진난만한 아기의 얼굴을 마주하니 천사가 따로 없었습니다.
방긋방긋 웃는 아기의 맑고 순수한 눈망울을 바라보며,한 인간 존재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한 살이지만 인간으로서 갖출 것은 이미 다 갖췄더군요.
앙증맞은 손발이며, 보송보송한 피부, 바라보고 있으면 힐링이 되는 얼굴이며…….
뿐만 아니라 나름 사는 방법도 벌써 터득한 듯 했습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긴장된 얼굴로 보호막을 쳤습니다.
얼른 엄마 품에 깊숙이 안겼습니다.
유아세례를 집전하면서 진심으로 아기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부디 극진한 부모 사랑 듬뿍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하기를, 가족구성원들의 한결같은 지지와 격려 속에 꽃길만을 걸어가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도움 아래 자신에게 주어진 성소 여정, 신앙 여정을 기쁘고 충만하게 살아내길…….
어린이날을 맞아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들이 어린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부모와 가족들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조금 성장이 더디더라도, 조금 장애를 지니고 있더라고, 조금 남과 다르더라도, 조금 성적이 뒤쳐지더라도, 구박받거나, 차별대우 받거나, 학대받는 일없이, 존재 자체로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축복으로 받아들여지길 기도합니다.
어린이들은 아직 개념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며,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도 한 인격체로서 스스로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진리,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진리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어린이들을 지극정성으로 양육하고 계시는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께 한 가지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출산율 저하로 인해 나라의 근간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이 시대, 여러분들은 정말이지 대단한 애국자들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측면에서 양육에 대한 부담이 크실 것입니다.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한 가지 고민거리를 던져드립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시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열심히 일하고 모아서, 빌딩 하나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 될까요?
아니면 평생 쓰고도 남을 정도의 현찰을 남겨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물일까요?
물론 우리 자녀들이 평생 물질적 결핍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도록 넉넉한 유산을 물려주는 것, 아주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라는 것, 재산이라는 것, 부동산이라는 것, 사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어찌어찌 하다보면 손에 쥔 물처럼 순식간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재산이라는 것, 그렇게 유한한 것이며, 허무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신앙은 정말 좋은 유산입니다.
신앙, 특히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돈이 다가 아닙니다.
지식이 다가 아닙니다.
자리가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지나가면 유일하게 남는 존재가 있습니다.
사랑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선물로 주실 영원한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
돈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4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있었던 일반 알현에서 유아 세례와 관련해서 이런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한 살짜리 아기들에게 왜 세례를 주는가?
아기가 성장해서 스스로 세례를 이해할 때 세례를 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따지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살짜리 아기에게 세례를 주면, 성령께서 그 아기 안에 들어가, 그 아기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덕을 자라나게 하고 번성하게 합니다.
한 살짜리 아기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지 않는 것은 성령을 믿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아기들에게 반드시 세례를 베푸십시오!”
사랑이 계명인가?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한 주간 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셨나요?
요즘 날씨가 봄-여름을 널 뛰기 하고 있어서 잘 지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5일 토요일)은 날씨가 좋아서 저는 산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이쁜이들과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오늘 메일의 액자 사진도 오늘 만난 이쁜이들 중의 하나인 노랑무늬붓꽃입니다. ^^*
형제 자매님,
이번 주일 미사에서 듣게 되는 복음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형제 자매님,
잠깐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내 목숨을 기꺼이 내어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를 위해서 기꺼이 죽을 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두 질문 중 하나라도“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형제 자매님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두 질문 모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형제 자매님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두 질문 모두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한다면 형제 자매님은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님은 아직 형제 자매님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요즘 제 강론을 듣는 분들이 “왜 신부님은 강론 시간에 사랑타령만 하십니까?”라고 물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또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목숨을 내어줄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계명이란 뜻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위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은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참 행복에로 이끌어주는 계명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살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음을 또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과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께서 서로 사랑하셨던 것과 똑같은 사랑의 척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지위를 마다하시고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어 오셨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성삼위의 친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새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똑같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멀리서가 아니라 먼저 우리 가정 안에서 그러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가정을 이루지만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는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들 안에서도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당신 생명을 다 내어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그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닮게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서로간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그 곳에 항상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교회 곧 그리스도의 신비체라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합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 모두는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찾아오는 행복을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함께 생활하고 있는 가족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나는 너를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라고 말해보십시오.
만일 하루에 한 번이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형제 자매님의 가정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의 이웃들이 참으로 부러워하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여정旅程, -서로 사랑하여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부활 제6주일이자 5월 첫 주일은 생명주일입니다.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세상에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오늘 한국교회는 생명주일을 지냅니다.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사랑과 직결되는 생명입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과 더불어 생명충만한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유롭고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와 의무,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사랑의 여정-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말씀도 온통 사랑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생명주일에도 잘 어울리는 주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문제는 사랑결핍에서 시작됩니다. 만병의 근원은 사랑결핍이요 만병통치약도 사랑뿐입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랑 없어 허무한 삶이요, 사랑 있어 충만한 삶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았음이 바로 사랑의 사람의 본질임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엔 영원한 초보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평생 사랑을 공부해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 참 내가 되어가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인간 성장과 성숙도 결국은 사랑의 성장, 사랑의 성숙을 뜻합니다.
올해로 요셉수도원에 정주한지 만30년이 됩니다. 30년전이 지나니 요즘 수도원은 완전히 신록의 숲이 되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내적성장을 상징하는 숲 같습니다.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 영적 사랑의 성장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과연 내적으로 이처럼 성장해가는 우리의 사랑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오늘 저는 ‘사랑의 여정’ 인생에서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는 가르침을 네 측면에 걸쳐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주님 사랑안에 머무르십시오.
주님은 ‘내 안에 머물러라.’ 말씀하시고 이어 더 분명히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 말씀하십니다. 세상 안에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머무를중 모르는 것이 병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영육을 충전하는 관상시간이 정말 필요한 세상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시편말씀도 생각납니다.
정주의 핵심 역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자신을 찾는 머무름의 시간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충만한 기쁨입니다. 삶의 허무를 사랑의 충만으로 바꿔주는 마무름의 관상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름의 관상과 활동은 우리 삶의 리듬입니다. 예수님도 낮의 활동후에는 반드시 밤에는 외딴곳에서 머무름의 관상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역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영육을 충전시키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으니 관상가와 신비가는 우리 모두의 성소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관상에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다음 4.29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부활 삼종 기도 중 봉헌한 교황님의 ‘한반도 평화를 비는기도’가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주님/남북정상회담이 긍정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핵무기가 없는 한반도를 위해/진정한 대화의 길에 나선 두 정상에게 용기를 주소서/한반도에 평화로운 미래와/남북간 돈독한 형제적 우애를 주시어/남북한이 계속 협력해/사랑하는 한국 국민과 전 세계를 위해/선의하는 열매가 맺게 하소서.”
둘째, 주님 사랑을 배우십시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을뿐 아니라 주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교를 나누면서 주님 사랑을 공부하는 시간이 머무름의 시간입니다.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란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도 보고 배웁니다, 바로 예수님도 아버지의 사랑을 평생 보고 배워 실천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끝이 없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집착함이 없는 사랑, 끊임없이 선사되는 무조건적 일방적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안에 태어나 사랑 안에 살다가 사랑안에 떠나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우리 인생입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깨달은 바처럼 차별함이 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을 다 받아 주십니다.” 고백하는 베드로입니다.
이어 하느님은 무상의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신록의 사랑 가득한 5월의 자연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책, 교과서 같습니다. 도대체 하느님 선물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감동과 감격이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하느님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자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바로 요한 사도가 예수님이 최고의 선물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나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공부가 하느님 사랑 공부입니다. 이래야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주님 사랑안에 머물러 사랑을 배웠으면 자연스럽게, 당연히 따라야 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관상의 머무름은 추상이 아니 구체적 사랑 실천의 결과임을 다음 주님 말씀에서 깨닫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관상과 활동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임을 봅니다. 관상의 열매가 사랑의 실천임과 동시에 사랑실천의 열매가 관상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참 쉬운 듯 하나 어렵고 중요한 것이 서로 사랑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나를 사랑하라고도, 아버지를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바라시는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분들이 원하시는 바 형제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서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개방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여 사랑도, 개방도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개방하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 두려움 때문에 개방하지 못하는 약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요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사랑이 정말 하느님 다운 관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할 때 두려움의 벽은 활짝 열린 문이 됩니다. 두려움에 대한 답은 사랑뿐입니다.
넷째, 주님 친구답게 사십시오.
참 좋은 자랑스런 명칭이 주님의 친구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할 때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겠다 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친구 예수님과의 우정 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순교성인들입니다. 과연 사랑의 여정과 더불어 친구 예수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가는지요.
주님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친구인 우리들입니다. 주종관계가 아니라 친구관계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지만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들에게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줍니다. 그러니 예수님 친구와의 우정이 깊어져 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공부도 깊어질 수뿐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제자로 뽑아 주셨고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만 충족시키면 제자답게, 친구답게 살 수 있으니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애의 실천입니다.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가 친구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구인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도 기꺼이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친구답게 살고 싶습니까? 평생 예수님 친구와의 우정을 계속하고 싶습니까? 인생의 성패가 달린 영원한 친구 예수님과의 우정입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길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인생 허무와 죽음에 대한 유일한 답도 예수님과의 우정, 이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신자가, 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 사랑은 규칙들이나 계명들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내적자세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내 삶의 모두는 내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여정중에 끊임없이 예수님 친구를 닮아 우리의 전존재가 사랑으로 변모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우 총명해지는 것도, 성공적이 되는 것도, 부유하게 되는 것도, 유명해지는 것도 아닌, 참으로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사랑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의 모두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친구 예수님의 간곡한 명령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서로 사랑 실천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15,9-17(부활 6주일)
부활 6주일입니다. 그리고 생명주일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계속해서 예수님의 마지막 담화, 곧 유언에 해당하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 당신과 그 제자들의 관계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는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 간에, 그리고 아들과 제자들 간의 사랑이, 제자들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을 선포하시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이는 놀라운 사랑의 선포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받았다는 선포임과 동시에, 당신의 그 사랑의 원천이 아버지의 사랑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랑을 받아먹은 존재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거룩한 사랑에 머무름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됨에 동참하기를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뿐만 아니라,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도 미리 제시해 주십니다.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밝히시는 이유도 말씀해주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그러고 나서, 비로소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당신께서는 십자가에서 본보기로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3-14)
그런데, 왜 친구를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곧 우리가 적이 아니라, 서로 친구가 되라는 말씀이 아닐까?
그래서 그레고리오 교종은 이렇게 해설합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때,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도 우리의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가 되는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한분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알게 된 까닭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또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친구가 됩니다. 그것은 당신과의 신의와 친교를 뜻하는 것으로, 당신께서 알려주신 아버지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우리는 그 신의를 몸으로 드러내면서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당신이 하신 것처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면서 친구가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불러 뽑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5-16)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우리를 천사로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더 존귀한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친교와 우정을 나누는 하느님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친구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들어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주시고, 친구로 선택하시고,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입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알려주셨으니, 우리는 친구로 초대받았음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분을 알려주신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진정 예수님의 친구일까? 또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일까?
예, 그렇습니다. 설혹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친구로 뽑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바로 그 “가장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분명, 예수님의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친구로서, 우리도 역시 바로 이 사랑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라’는 바로 이 “가장 큰 사랑”에 초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 <요한 15, 9-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디에 단순히 머무는 것과 머무르며 무엇을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디에 머물다 왔다고 그곳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이해하고,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문 곳에 깊은 관심과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리고 그곳 형상을 사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현실을 글로 써서 담아야 그곳에 머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 안에 머무는 것으로가 아니고 사랑하면서 머물러야 합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신 말씀은 포도나무에 가지가 단순히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으로 태양의 에너지를 가지와 나무뿌리까지 전달해야 땅의 양분을 공급받아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같이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라 양방향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그저 아무 열정 없이 기도만 하는 것으로가 아니고, 그 기도 안에는 진실과 사랑과 실천이 따라야 올바른 기도이며 기도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오늘 아침 아침 기도에 시편 117장이 나오는데 시작에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이 한 구절이 나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영원하신 그 사랑” 세상의 사랑은 감사하고 좋아하지만, 그 시간이 오래 가지 못하고 이해관계가 없어지면 “사랑은 인제 그만” 끝이 납니다.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말을 주고받아도 영원한 사랑이 아니고 편리한 대로, 가능한 대로, 유익한 대로 머물러 있으면 행복은 없고 불행이며 지옥에 사는 것 같습니다.
목숨 바쳐 사랑하라고 하시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사랑의 정의를 생명이라 하시며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꾸며진 집과 부족한 것이 없이 준비된 곳이라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 곳에 머무는 것은 공허하고 기쁨이 없어 사는 것보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호경을 정성껏 몸에 놓으며 성부, 성자, 성령이 영원히 사랑하듯이 우리도 서로 영원한 사랑을 하도록 기도합니다.
시간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시간을 다스리는 사람은 늙음이 없지만, 가는 세월에 자신을 머물게 하면 늙고 병들고 힘없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랑하면서 살면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님
어떤 분들이 가끔 오셔서 한탄 섞인 하소연을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작게 태어났는지?”
“왜 나는 둘째로 태어났는지?”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났는지?”
“왜 나는 심장이 허약하게 태어났는지?”
“어찌 보면 나만의 특징일 수도 있는 인생이 지금 살기엔 왜 그리 버거운지 모르겠습니다.”
“뻔히 남들도 다 힘들게 사는 것을 알면서도 나만 더 어려운 것 같아 더욱 힘겹습니다.”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나에게 정말 차고 넘치게 주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부족하고 모자란 것 같아 섭섭하고 허전하기만 합니다.”
“남들과 비교되니 더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이해나 협조는커녕 내 삶을 입방아와 술 안줏감으로 씹어대니 더 힘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6,9)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것에 대한 표양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보여주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과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기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그 기쁨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주님의 계명은 바로 사랑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실천적인 면에서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음 속에 담긴 섭섭함과 응어리진 마음을 풀기 위해서는 주님께 기도드리십시오. 단순히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일 규칙적으로 성전에 와서 한 시간 가량 기도하십시오. 성체조배를 하면서 주님께 하소연과 불평과 불만 그리고 원망과 맺힌 한들을 풀어주시기를 간청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털어 놓으면 그저 마음만 편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하소연을 들어주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해소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다 풀어지고 주님 사랑으로 녹아날 때까지 매일 성체조배를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아픔이 가시고 주님 사랑으로 새로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사랑 안에서 평안하고 기쁘게 새로 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정한 제8회 생명 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이신 이용훈 주교님께서는 담화문을 발표해주셨습니다. 이를 요약하여 전해드리겠습니다.
1. 하느님께서 선사해 주신 생명의 복음이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현장을 풍성하게 비추어 주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복자 바오로 6세 교황께서 회칙 ‘인간 생명’(Humanae Vitae)을 반포하신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인간 생명을 전달하는 지극히 중대한 부부의 임무를 강조하였던 이 회칙은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내세우고, 생명을 환대할 책임이 있는 부모의 소명을 드높여 주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먼저 앞장서 새 생명을 환대하고, 이웃에게도 생명의 복음을 널리 선포하기를 바랍니다.
2. 자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생명의 복음이 선포되려면 무엇보다 사랑하는 부부를 중심으로 모인 가정이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로 환대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166항 참조). 그러나 오히려 우리 현실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이 낳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마저 듣게 됩니다. 그렇지만, “많은 아이들이 삶의 첫 순간부터 거부당하고 …… 아이가 이 세상에 나오도록 한 것이 실수였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사랑의 기쁨’, 166항 참조).
3. 생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특히 첫 순간부터 존중되어야 합니다. “생명권은 방금 태어난 유아에게도 성인 못지않게 똑같이 존중되어야” 합니다(교황청 신앙교리성 ‘인공유산 반대 선언문’, 11항 참조). 교회는, 인간 생명을 임신의 첫 순간부터 존중하는 것이 인류 공동의 책임이고, 국가 차원에서 낙태 방지와 생명 보호를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인간 생명’, 14항 참조). 태아의 생명은 그 어떤 이해관계보다 우선하고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생명의 복음」, 55항 참조).
4. ‘낙태죄 폐지와 자연 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 청원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 한쪽에서는 태어나야 할 아이와 이미 태어난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비교하면서, 국가에서 피임 대책과 자연 유산 유도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태아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다른 모든 인간과 아이들의 권리를 다룰 수 있다는 말입니까?(‘사랑의 기쁨’, 166항 참조)
5. 우리 주변에는 낙태를 경험한 많은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들이 어떤 압박을 받았는지, 그러한 결정이 현실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쉽지 않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는 미혼모와 미혼부를 비롯하여 홀로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제 교회 공동체가 그들과 상처를 함께 나누고자 나서야 합니다.
6.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시작부터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알고,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믿으며, 이를 세상에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특히 생명의 돌봄이 시작되는 혼인과 가정은 ‘생명’에 대한 신앙이 드러나고 선포되는 특별한 자리입니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이 환대받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나서는 일이야말로, 주님께서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요한 10,10)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신 복음 선포의 중대한 사명입니다.
다음의 ‘실천 사항’을 다 함께 큰소리로 읽으며 다짐해 봅시다.
● 혼인과 가정의 자리가 생명을 환대하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생명의 문화 운동에 적극 동참하겠습니다.
● 낙태를 경험한 여성과 미혼모, 미혼부를 비롯하여 홀로 자녀를 돌보는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 일상과 직장에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전하고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2018년 5월 6일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스카 와일드의 ‘저만 알던 거인’은 사랑과 행복, 사랑과 구원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비유적으로 표현한 우화입니다.
한 동네에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풀과 나무와 새들이 많은 정원에서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정원엔 주인이 없었기에 아이들은 복숭아열매까지 따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7년 만에 먼 친구와 머물던 그 집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 주인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정원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을 쫓아내고 아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장을 쳐 놓았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거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담장을 친 정원만 봄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겨울인 것입니다. 눈과 찬바람과 우박이 내렸고 눈 쌓인 복숭아나무는 꽃을 피울 수 없었습니다. 새들도 찾아오지 않아 조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행복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종달새 한 마리가 거인의 침실 창문에 앉아 노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인은 오랜만에 좋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창문을 내다보니 아이들이 개구멍으로 들어와 놀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엔 봄이 와 있었습니다. 기분이 좋아 아이들을 보러 내려갔는데 아이들은 거인이 다가오자 무서워 모두 달아나버렸습니다. 하지만 한 작은 아이만 복숭아나무에 올라가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거인은 아이를 나무에 올려주었습니다. 아이는 거인에게 입맞춤을 해 주었습니다. 거인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이들은 모두 다시 돌아와 이 정원에서 놀기 시작하였고 거인은 담장을 허물어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났을 때 거인은 그 키 작은 아이를 찾았지만 아이들 무리 속에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도 그런 아이는 자기들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30년이 흘러 기력이 세하였을 때 마지막으로 그 아이가 정원에 나타났습니다. 거인은 그 아이에게 다가갔고 아이는 거인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이젠 자신의 정원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 손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거인은 그 복숭아나무 밑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결국 그 사랑하는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멀리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은 내가 상대의 정원에 방문하는 것이고 상대를 내 정원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러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 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정원에 처음으로 하느님을 초대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로 초대받아 올라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사랑이 내가 하느님이 되게 만들고 참 기쁨을 느끼게 해 주는데도 여전히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왜일까요? 그 이유는 사랑의 행복은 사랑을 해봐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위해 모험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지금의 행복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은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걷고 언어를 사용하는 행복을 느껴보지도 못했으면서 늑대로 사는 것을 갈망하다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이 아이들을 설득시키지 못한 이유는 이 아이들에게 믿음이 생길만한 큰 사랑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사랑을 하도록 초대받게 되는 이유는 사랑이 행복을 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면 하느님의 정원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사랑으로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는 존재를 따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행위를 하시지 않아도 본성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태양은 행위를 하지 않아도 태양입니다. 본성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의 본성을 지니면 두 발로 걷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은 두 발로 걷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늑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본성은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본성이 늑대고 그러면 늑대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개가 두 발로 걷는 것처럼 사람의 흉내를 낼 수는 있더라도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행동은 흉내 낼 수 있어도 본성은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이라고 믿지 못하고 여전히 사람이라고 믿으면 하느님의 자녀인 척 흉내만 내다가 결국 심판 때는 염소의 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양과 염소는 똑 같은 행동을 하지만 그 본성상 구분됩니다.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둡니다. 두 사람이 맷돌질을 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둡니다. 심판은 행위로 결정되지 않고 그 사람은 사람으로 맷돌질을 했는지 하느님의 자녀로 맷돌질을 했는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행위로 심판해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자녀의 본성을 갖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는 마치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을 만나게 되는 것과 같고,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부모를 만나게 되는 순간과 같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재정립되고 그 정체성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이 자신들이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면 두 발로 서고 언어를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아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부모는 두 발로 걷는데 자신들만 네 발로 걷고 있는 것을 참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언젠가는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을 믿기에 수천 번을 넘어져도 지치지 않고 도전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본성과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교만을 좋아하여 사람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 앞에서 당신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관으로 누구 앞에 서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다행인지 심판은 인간 스스로 선택한 본성에 의해 양과 염소로 이미 구분되어 있어서 일부러 심판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녀인데 하느님의 아드님인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이전의 본성과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상태로 죽으면 적어도 연옥은 가지만 바로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예 자신 안에서 죄와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의 본성이 아주 조금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내 이전 본성이 어둠이라면 하느님은 빛이십니다. 빛이 들어오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사순절을 살고 있다면 적어도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에 그런 상태에서 죽는다면 지옥엔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지만 동물도 사랑을 합니다. 개도 자기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처럼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느님처럼 사랑해야합니다.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수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5-36)
누가 나에게 잘해주든 못해주든 분별하지 말고 모두를 하느님처럼 사랑한다면 하느님처럼 된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을 복음을 전하라는 말과 바꿀 수도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분별없이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돌아올 마음만 있으면 하느님은 기쁘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본성상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회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데 지옥에 간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자유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실 때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 합하여있지 않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부모를 만나면 수천 번을 넘어져도 두 발로 걸으려고 하듯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사랑의 열매가 맺히게 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일어서려고 하지 않는 아기와 같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지 못하는 것은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네 발로 걷는 행복에 머물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뭇잎을 계속 좋아하고 싶다면 나비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비가 돼 보면 그 꿀맛에 비해 그동안 먹던 나뭇잎의 쓰디쓴 맛에 왜 집착하며 살아왔는지 한탄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할 것입니다. 기도가 아니면 용서도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운 마음이 생겨나는데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청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은 사랑의 길 외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길만이 진리이고 생명이고 그 길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오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이어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자기만 알았던 거인이 예수님을 자신 안에 초대하였을 때 자신도 그분의 동산에 초대받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싶다면 그분의 유일한 계명인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려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정원에 아기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은
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중한
목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목숨입니다.
소중한 목숨이
다욱 아름다운 것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생명으로
가는 길은
목숨을 내놓는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숨을 목숨답게
사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친히
우리를 위해
바치십니다.
사랑에 대해
생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숨은 열매를
생명은 나눔을
향합니다.
바치고 내놓는 것이
사랑의 신비임을
깨닫게됩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에서
복음이 시작되길
기도드립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내놓는다는 것이며
내놓는다는 것은
살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이란
사랑이기에
사랑하지 않고서는
예수님 곁에
나란히 머물 수 없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사랑의
나날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저는 올해 1월 12일부터 1년 동안의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발령을 받은 뒤, 사제 생활 16년 만에 처음 맞이하는 안식년에 얼마나 큰 기대를 했는지 모릅니다. 하고 싶은 것이 정말로 많았지요. 전문코치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 국내외 많은 여행을 통한 휴식, 그동안 보지 못했던 책 읽기, 2010년 이후 책을 출판하지 못했기에 이 시간을 통해 책도 몇 권 낼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님께도 효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했지요.
안식년 발령을 받은 뒤 벌써 4개월이 지난 지금, 적지 않은 것들을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계획대로 착착 들어맞지 않더군요. 하긴 마음먹은 대로 다 이뤄진다면 아마 세계 정복도 가능했겠지만, 계획대로 이루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내일도 있으니까.’라는 안일하고 게으른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했던 제 모습을 보니, 앞으로 남은 8개월도 후회의 시간으로 지낼 수 있다는 긴장감이 생깁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그래, 이 정도도 충분하지.’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하면서 안식년을 마무리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지금까지 지내왔던 시간 전체가 이런 후회를 늘 간직하며 살게 했던 것 같습니다. ‘내일이 있다’는 게으른 마음, ‘이 정도도 충분해’라는 안일하고 포기하는 마음이 ‘지금’이라는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과거에 연연해서도, 또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지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지금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분명, 후회하지 않는 미래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됩니다. “나의 계명이다.”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하십니다.
내일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 계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일까요? 또한 지금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지금 당장, 바로 이 순간에 실천해야 할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미래의 어떤 보상을 원해서 행하는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정도의 무한한 사랑을 지금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의 체험 안에 있음을 기억할 때, 사랑의 실천은 결국 내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해서 참 진리의 계명을 이야기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미루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버려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실천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사랑,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딘가에 ‘좋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일을 좋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구로네코 야마토).
스트레스 없애기.
얼마 전에 인터넷을 통해 재미있는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보이스 피싱에 관한 것이었는데, 우선 상대방이 서울 중앙지검에 오수사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화 받는 사람은 웃기만 합니다. 그 오수사관이라는 사람은 “왜 웃으시냐?”고 묻지요. 이에 “자꾸만 검찰직원이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와서요.”라고 답변하면서 계속 웃으며, “이번에는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데요?”라고 말합니다. 보이스 피싱 전화를 건사람 역시 겸연쩍었는지 결국은 서로 웃으면서 통화를 마치더군요.
저는 이 전화 받는 사람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이스 피싱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웃으면서 상대방이 오히려 미안해하며 전화를 끊게 만드니까요.
저 역시 그런 전화를 종종 받습니다. 부동산이라고 하면서 좋은 땅이 나왔는데 보지 않겠냐는 전화, 은행대출이 좋은 조건이라면서 권유하는 전화, 보험에 가입하라는 전화 등등... 그때마다 “지금 바쁩니다.”라고 화를 내면서 얼른 전화를 끊기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웃으면서 충분히 상황을 마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전화가 많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남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즉,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스트레스가 생기기도 또 안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스트레스 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행복의 삶을 사시길 응원합니다.
파이팅~~~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함께 알고 만나고 일치하고 공감을 해야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대로만 하고 타인과 공감형성이 안 되는 사람은 친구가 없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돈만 있으면 무조건 사랑하고 결혼까지 하잔다잖아요.
친구와 노선 지키기, 이웃과 공감하고 유대하기가 세상 제대로 살게 하지요. 이런 노선을 철칙으로 알고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면 삶이 커지는 거지요. 예수님의 노선이 곧 사랑하라는 계명이지요. 목숨까지 내놓는 그런 사랑.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2~13)”
나란 존재에 대한 가치와 의미부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눈만 뜨면 외치는 말이면서도 가장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많이 사용하신 단어 중에 하나가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복음 15장 9~10절)
어떤 사랑을 해야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랑이며, 그분께서 기뻐하실 사랑일까 묵상해봅니다. 그 사랑은 아무래도 균형 잡히고 성숙한 사랑, 이성과 감정이 잘 조화를 이루는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사랑, 즉 3중 사랑이 서로 잘 교류되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일이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극진한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 또한 중요하겠지요.
그럼 하느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다 끝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랑을 놓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불행해하고 허전해합니다. 그 사랑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한 사랑입니다. 나란 존재에 대한 가치 부여, 내 인생에 대한 의미 추구, 내게 다가온 고통에 대한 진지한 탐구, 나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존엄성에 대한 인정이 중요합니다.
물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머리칼보다 많은 죄로 인해 가슴 칩니다. 돌아본 나날들 안에 벌어졌던 크고 작은 사건들 안에 수치스런 일들로 인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란 존재의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이 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지난 삶, 인생에 대한 가치와 의미 부여에 인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끄러운 인생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투박한 질그릇 같은 우리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강렬한 빛이 빛나고 있으니 우리는 존엄하고 거룩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긍심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거기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노력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때로 구차스러워 보이고 때로 폭풍 속의 돛단배 같은 우리네 인생이지만 우리 삶을 좀 더 고상하고 우아하게 꾸며나가기 위해 매사에 대한 가치와 의미 추구는 필수적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매일 되풀이 되는 일상 가운데서도 따분해하지 않고 충만하고 흥미진진하게 살아갈 능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계속되는 좌절과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견디고 극복할 에너지의 소유자이기 때문에...그 이유는 바로 삶과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부여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높고 깊게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남편이 뛰면 아내도 같이 뛰어야 합니다. 아내가 뛰면 남편도 같이 뛰어야 합니다. 한쪽은 뛰는데 한쪽이 뛰지 않으면 뛰지 않는 쪽은 뛰는 쪽을 잡아당기는 고삐가 됩니다”(이규경). 따라서 뛸 때는 같이 뛰고, 쉴 때는 같이 쉬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새로 산 와이셔츠보다 빨아 입은 와이셔츠가 더 눈부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옷에는 옷을 빤 사람의 정성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일상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시로 표현 했는데 “이년, 저년, 못된 년,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년” 하고 썼습니다. 여자분들이 기분 나쁘다고요? 그럼 ‘이놈, 저놈, 못된 놈,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놈’ 이라고 하지요. 여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함께해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놓는 진정한 사랑은 순교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그 사랑을 살 수 있는 힘을 바로 예수님에게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얻어야 합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오늘의 내가 있음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받은 사랑을 기억하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에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주시며 사랑을 보여주셨고 제자들을 당신의 벗으로서, 친구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몽땅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산다는 것, 친구를 위해 목숨 내 놓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나온 희생은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끼고 혹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마음을 느낀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부족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성 아우구스띠노는 말합니다.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곤란에 처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은 “작은 희생을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조차 놓치지 마십시오. 여기서는 미소로, 저기서는 친절한 말 한마디로 항상 작고 바른 일을 행하면서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희생을 먼 곳에서 찾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작은 배려와 희생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꽃동네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노인 요양원에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앞을 못 보시니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가 없으셔서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께서 그 방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 방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산보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통해 혼자서 휠체어를 굴리기 힘들어하는 불편을 이겨내게 되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작은 관심이 큰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성인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결코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산다는 것은 어떤 요구나 생색내기 없이 그저 베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았듯이 나도 나의 모든 것을 이웃을 위해 내 놓을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보상입니다.
한 연세 많은 신부님께서 임종직전에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3번 놀랄 것이다. 첫 번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게 될 때이고 두 번째는 내가 마땅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드러내지 않고 사랑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산 사람일 것입니다. 겉은 화려하였지만 속을 채우진 못한 탓일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과 희생, 하느님의 자비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일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을 다져가야겠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힘을 빌어서 많이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사랑의 속성은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요, 또한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은 언제나 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미사 전례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제가 전부 헤아려 보았더니 33번이나 나왔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이 도령과 춘향이의 사랑이 아닙니다. 로미오와 쥴리엣의 사랑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요? 자 이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사랑의 원조, 사랑의 모범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사랑의 특징은 크게 다섯 가지 입니다.
첫째, 죄인들을 품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루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넘치도록 말씀하십니다. 제가 세검정 본당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의도 차량 질주 사고로 손자를 잃어버린 할머니께서는 감옥으로 찾아가 범인을 용서하였습니다. 가족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범인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둘째, 겸손하고 무상으로 행해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조건을 달지 않고,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제가 열병에 걸렸을 때, 어머니의 사랑은 지극 정성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힘 때문에 제가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수난과 고통 중에 행해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음의 강을 건너셨습니다. 예전에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자매님들을 모두 구하고, 숨을 거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죽어가는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신장을 나누어 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형제가 나중에야 알았을 때, 그분이 바로 신부님이셨다고 합니다.
넷째, 사람들을 무조건 믿고 끝까지 신뢰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어도, 끝까지 믿고 사랑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갔어도,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도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어렵지만,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심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의심하기 때문에 내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다섯째, 하느님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죽기까지 아프리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명동에는 길거리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음식을 팔기 위해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우리의 열정이 그분들 보다 못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런 사랑은 어쩌면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 맛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사랑, 하느님 찬미, 하느님 자랑 저에겐 다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아름다움, 행복과 자유, 기쁨과 평화의 원천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은 영원한 물음만 있을뿐, 결국 방황과 혼란이요 허무의 심연에 함몰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자비롭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기쁘고 평화로운 삶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이렇게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살 권리와 의무가, 책임이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이런 삶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은 이 모두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5월 성모성월, 산하(山河)의 아름다움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온누리에 가득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닮아 갈수록 비로소 자비롭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기쁘고 평화로운 삶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하느님 사랑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일'보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일에 충실할 때 그 어렵다는 '함께 사는 일'도 수월해지고, '소임상 맡은 일'도 잘 하게 됩니다. 세가지 예화를 나눕니다.
-어제 예전 34년전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제자들 셋이 선물을 무겁게 가득 들고 저를 찾았습니다. 13세 때 아이들이 이미 47세의 중년이 되어 어버이날 다음날 사랑하고 존경했던 옛 스승을 찾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시공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영원을 체험했습니다. 34년전 동심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을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었습니다.-
다음은 주간경향에서 읽은 '김성근 리더십의 비밀'과 '정신분석학자 정도언 교수와의 대담' 기사입니다.
-"김 감독(73세)의 리더십의 비밀은 첫째, 매경기를 한국시리즈 7차전처럼 올인하는 것입니다. 오직 오늘 이 순간, 볼 하나에 승리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붓습니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김 감독의 좌우명 '일구이무(一球二無)'(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그대로입니다. 공 하나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거는 장인의 혼이 느껴집니다.
두 번째는 선수를 쓸 줄 안다는 것입니다. 10을 가진 선수는 많지 않습니다. 5밖에 안되는 선수도 많습니다. 김 감독은 5밖에 안된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김 감독은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능력이 5밖에 안되지만 그 5만이라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김성근의 용병술입니다.
셋째, 동기부여입니다. 김 감독은 선수들이 하나의 팀으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게 하는 데 남다른 노하우가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 감독이 한계를 너무도 쉽게 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리더십을 닮은 김 감독입니다. 매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할 때, 모두를 사랑하여 아무도 버리지 않을 때, 늘 하느님의 사랑이 동기가 될 때 저절로 형성되는 참 리더십입니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정작 인생에는 단맛이 별로 없습니다. 그게 삶의 실체예요. 맛은 철학의 대상입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음식이나 맛에 대한 표현이 많습니다. 단맛은 화려하지만 오래가기 어렵고 금방 질립니다. 쓴맛이 나는 관계는 세월이 흘러야 가치를 알 수 있지만, 쓴맛 나는 음식을 뱉어내면 관계마저 해소됩니다. 짠맛나는 관계는 오래가지만 장아찌처럼 많이 접할 수 없죠. 신맛나는 관계는 잠시 상큼할 수 있지만 시어버린 음식처럼 정리해야 할 관계일 수 있습니다. 매운 맛은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을 알려 줍니다. 모든 사람마다 각자의 맛이 있고, 모든 관계마다 교훈이 있습니다. 진리는 이처럼 단순하고 평범합니다.“
다 공감이 가는데 결정적인 한 맛이 빠졌습니다. 바로 '하느님 맛'입니다. 진정 수도승처럼 하느님(을 찬미하는) 맛으로 살아갈 때 분별과 이해도 깊어질 것이며 참으로 맛있는 삶도 가능합니다.
하느님 맛들이는 비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세상 최고의 맛이 예수님 맛입니다. 말씀 맛, 성체 맛, 기도 맛입니다. 늘 먹어도 질리지 않는 늘 새로운 맛이 하느님 맛, 예수님 맛입니다. 하느님 맛은 사랑 맛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그 외아드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참으로 맛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둘째,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늘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관상의 행복, 관상의 기쁨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의 표현인 부단한 계명 준수와 수행이 있을 때 비로소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이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롤모델은 하느님이요 예수님입니다. 주님 사랑안에 머물러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것이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준수에 항구함으로 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충만한 기쁨입니다. 주님 맛은 바로 기쁨의 맛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친구가 되십시오.
구약의 하느님의 친구인 모세와 아브라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친구' 최상의 영예로운 호칭입니다. 마찬가지 우리 믿는 이들 역시 예수님의 친구요 이보다 자랑스러운 칭호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준수에 충실할 때 우리는 주님의 친구가 됩니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갈 때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삶의 맛과 향기도 날로 깊어져 갑니다.
넷째, 예수님을 가리지 마십시오.
늘 예수님 뒤에서 배경으로 사십시오. 오직 예수님 사랑만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비우고 버리는 사랑 있을 때 주님 배경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배경이 되어 살 때 주님 또한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십니다. 하늘과 산을 가린 괴물같은 무수한 고층 건물들은 바로 하느님을 가린 에고의 상징입니다.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성 요셉상 배경의 꽃과 나무, 산과 하늘을 보며 써놓은 글입니다.
-꽃들처럼/나무들처럼
산처럼/하늘처럼
늘 당신의 배경이 되고 싶다-
다섯째,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구별, 분별은 좋고 필요합니다만 차별은 하지 마십시오. 차별과 편애보다 고약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감동입니다.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차별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닮아 차별도 편애도 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사랑은 편애라기 보다는 분별의 사랑에 속합니다. 어제 방문했던 초등학교 한 제자로부터 들은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학창시절, 늘 위축되어 지냈는데 선생님 밑에 있을 때만 가슴 활짝 펴고 마음 편히 지낼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도 차별하지도, 편애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 모두에게 생일 선물을 주셨습니다."
여섯째, 예수님께 뽑힌 자임을 명심하십시오.
좋은 의미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은 건강한 자부심의 원천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바로 이 말씀이 성소의 신비를 말해 줍니다. 주님은 세상 기준이 아닌 당신 고유의 기준에 따라 우리를 뽑으셨습니다. 목적은 둘입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뽑아 주셨기에 비로서 사랑의 열매 풍성한 삶이요,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원할 수 있습니다. 정말 주님께 뽑힌 우리 수도형제들은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때 마다 하느님 백성을 위해 얼마나 많이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치는지 모릅니다.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위의 예수님 대신 하느님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세상 맛이 아닌 하느님 맛, 예수님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 하십니다. 아멘.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 15,1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나요?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
임금님
스승
......
그런가요?
다 맞지요.
그런데 그것이 다 맞을려면 예수님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느껴져야 한다네요.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친구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어때요?
비슷한 느낌인가요?
아니면 달라도 너무 다른가요?
오늘은 내가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고 내 속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그 친구에게 참으로 고맙다고 인사합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참으로 고맙다고...
친구야 고맙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제 친한 친구가 되어주셔서...~~^^
관계 속에 꽃피는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왔다. 사랑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사랑을. 사람은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사랑은 그렇게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요 존재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이기적인 동기로 이용함으로써 불행과 고통을 자초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
오늘 복음말씀에서는 앞에서 나왔던 “머물다”(15,9-10)라는 말과 “열매를 맺다”(15,16)라는 주제가 되풀이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5,9-10)라고 말씀하신다. 이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임을 가르치신다(15,12).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야말로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구속을 위한 명령이 아니라 해방의 메시지요, 참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구약성경에서 알 수 있듯이 ‘계명’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창조와 사랑과 자유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삶 안에서 늘 메아리쳤으며, 그 말씀은 마침내 사람의 몸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다. 사람이 되신 그 말씀이 곧 우리 구원과 행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 곧 ‘계명’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15,11)
우리도 예수님처럼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해야 하겠다. 사랑은 자기를 떠나 자신을 잊고, 자기 소유를 포기하고 조건 없이 다른 이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다. 사랑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리라! 이 흘러가는 사랑은 삼위일체의 친교에서 나온다. 참을 수 없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 그 사랑이 흘러 말씀이 사람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서로를 일치와 사랑으로 이끄시는 성령, 이 세 위격의 긴밀한 친교와 역동적인 사랑의 주고받음에서 사랑은 샘솟는다. 나에게서가 아니라...
사랑은 익숙한 존재에 고정되거나 정체되지 않고 흘러야 한다. 나와는 신분이 다르고, 더 못살고, 생각이 다르고, 심지어 밉고 싫은 이들을 향하여 흘러가는 그 사랑은 그래서 늘 어색하며 낯설고, 거북하며 새로울 수밖에 없다. 계명을 지키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어색함과 불편함과 낯선 것에 길들여지는 여정이다. 그래서 사랑은 쉽지 않은 죽음의 길이요, 갈등 속에 맞추어가는 길이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사랑은 타자(他者)에 대한 사랑의 흐름을 멈추지 않기 위해 나를 비워내는 작업이다. 서로 사랑하는 계명 실천은 ‘관계 넓히기’요, 관계를 발생시키는 출발점이다. 사랑은 상호작용이며 관계 안에서 드러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런 상호간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서 만나든지 상호간에 한 식구임을 서로서로 보여줄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수도규칙 6,7-8)
‘타자’를 잃어버리고 외면하는 사랑은 방향을 상실한 폐쇄적이며 이기적인 사랑이요, 관계 속에 드러나지 않는 사랑이란 허구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사랑도 생명도 서로를 향한 무조건적이며 끊임없는 건넴의 순례이지 않는가! 고통 없는 사랑, 십자가 없는 생명은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와 갈등, 가난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삶의 자리로 걸어가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배광하 신부님
내가 십자가의 길을 걸었듯이 너희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격이 다르고 감정이 다른 인간입니다. 삶의 자세가 틀리고 자라난 배경 역시 다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는지요? 어떻게 평생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실망과 좌절은 당연한 과정입니다. 억울함의 고통을 참지 않으면 사랑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단서를 다셨습니다. 그분께서도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답답함을 이해하셨고, 세상의 불공평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세상은 앞만 보게 만듭니다. 우리 역시 앞만 보며 살고 있습니다. 눈뜨면 당연한 듯 새날을 맞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지냅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와 ‘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는지요? 사랑뿐입니다. 더불어 사는 이와 주고받는 애정이 없으면 세상은 금세 사막이 됩니다. 부활의 삶 역시 까마득한 것이 되고 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생명력을 주듯이 너희도 그렇게 ‘힘을 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이라도 실천한다면 그만큼 삶이 달라지는 말씀입니다.
지금, 서로 사랑 하십시오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름다운 구속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본당에 있을 때 한 비신자 부모님이 고등학생인 아들 둘을 데리고 상담을 하자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이 워낙 속을 썩여서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고 2짜리 형이었는데, 그 아이는 학교에 안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로는 학교 간다고 하고는 밖에서 놀다 들어오고 또 직접 학교까지 데려다 주어도 2교시를 못 버티고 나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공부를 안 해도 좋으니 학교 마치는 시간까지만 붙어있어 달라고 애원해도 머리는 끄덕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학교 안 가고 PC방에서 놀다가 주인의 돈까지 훔치려 하여서 부모님이 불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 부모님을 화나게 하는 것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아무리 물어보아도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랬다는 것입니다. 보고 있던 저도 답답했습니다.
그럴 바에야 자퇴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면 또 자퇴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아이가 사귀는 여자 친구도 자퇴한 아이인데 그 아이에게 자퇴만은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어떤 누구의 말은 안 들어도 여자 친구의 말은 듣고 따르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모든지 할 수 있어.’라고 하는 노래가사처럼 사랑을 얻기 위해서 그 친구의 말은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안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도 알게 됩니다. 내가 의사인지 알면 의사의 일을 하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기가 어머니와 떨어질 때 불안해 우는 이유는 어머니가 사라지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앞에서 자신이 자녀임을 알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젖을 빨 수 있고 웃어줄 수 있고 말썽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구속되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불안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들까지 하게 됩니다.
위의 친구들은 부모님이 있어도 또 학생으로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들도 답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춘기란 더 이상 사람의 애정으로는 자신이 충족될 수 없음을 아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부모님의 애정이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마치 아이 때는 우리가 조국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태어났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도 어른이 되어서는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처럼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진정 의미 있는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다행한 일인지는 몰라도 그 아이는 누군가의 말을 따라 줄 대상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 여자아이의 애인으로서 무언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인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그 여자의 말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래야 지금 죽더라도 적어도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 받던 ‘무언가’로 죽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엔가 어떤 의미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잘 나타낸 시가 김춘수의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하더라도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누군가가 없다면 꽃은 그저 의미 없는 식물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어진다면, 누군가의 관심을 받게 된다면 그 꽃은 비로소 ‘존재의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바로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참으로 자신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안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마치 자신이 꽃인지 모르는 식물에게 “너는 꽃이야!”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너는 마리아야!”라고 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하던 아담의 직무였습니다. 아담의 역할은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 존재이유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이름을 불러주시며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분을 만나야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자캐오는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즉,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당연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명령하시는 것을 구속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이 아름다운 구속이 참 자유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쾌락과 돈과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캐오도 돈의 노예로 살았지만 이제 돈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무엇’으로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Nothing)은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 것에 집착하지만, 이제 무엇(Something)이 되어버렸다면 더 이상 세상 것으로 자신을 들어 높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아직도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친구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자유롭게 가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자유이고 해방이고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어쩌시겠습니까? 그분께 구속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랑의 계명, 그리고 어머니
박재식 신부님
요한복음 15장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8절인 지난 주일(3일) 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매에 관한 말씀입니다. 9-17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지켜야 할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18-27절은 제자들과 세상과의 단절을 말씀하십니다. 그 단절 역시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주어지는 결과임을 설명하시면서 협조자가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사랑이 새로운 계명임을 강조합니다. 이 계명의 실천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complete, 완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로운 계명이며, 이는 하느님과 당신의 아들이 일치를 이룬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가 기쁨의 완성임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그리고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요한 14,21)이라는 말씀에서 형제 사랑이 바로 하느님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주변에서 가끔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이들을 봅니다. 여기저기 피정도 열심히 다니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교우ㆍ성직자ㆍ수도자들이 과연 주변의 형제 가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요? 무슬림이나 북녘 동포들, 그리고 자신과의 생각이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요?
바오로 사도는 “육의 행실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분열, 분파, 질투, 흥청대는 술판”(갈라 5,19-21)이며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라며 이웃 관계가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임을 설명합니다.
두 번째로 ‘완성된 기쁨’을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은 언제 기쁘신가요? 자녀들이 성공했을 때, 가족들이 건강을 되찾았을 때, 목표를 이뤘을 때 등일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차원의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성령의 열매가 점점 성장할 때의 기쁨, 원수 같은 이와 온전히 관계를 회복했을 때의 기쁨, 하느님 말씀에 대해 조금씩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그것이 삶의 현장에 구체적으로 실현됐을 때의 기쁨입니다.
어버이날 행사는 부모님과 함께 잘하셨는지요? 저는 그저 미사 봉헌으로 대신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며 지진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조건 없이 순수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길 말입니다.
지진이 얼마 무서운지, 사람에게 얼마나 공포를 주는지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페루에서 선교사로 있을 때입니다. 2007년 8월 15일 오후 7시,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성당에 있었습니다. 진도 8.0의 지진이 리마(페루 수도)에서 150km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5분여 정도 계속된 걸로 기억합니다. 정말 종말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땅은 위아래로 움직이고 성당 종탑은 좌우로 흔들렸습니다. 사방에서 전등과 유리잔들이 떨어져 깨졌습니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 5분 동안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시면 열심히 하는 사제로 살겠습니다’ 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늘 그날을 기억하고, 반성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생명을 주신 하느님과 부모님이 계십니다. 사랑과 생명을 나누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저서 「에세」(Les Essais) 중 ‘이름’이라는 주제의 글에서 포아티에(Poitiers)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기원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방탕한 청년이 말괄량이 아가씨에게 흑심을 품고 수작을 걸었습니다. 이름을 물어봤고, ‘마리아’라는 답을 들은 젊은이는 성모님의 이름을 기억해 잃었던 신앙을 회복하고 속죄의 생활을 했으며 그의 집에 노트르담 성당을 건축했다”고 말합니다.
단지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가능합니다. 성모님과 함께하면서 새로운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권순도 신부님
불의의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모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직도 제대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를 보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세상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게 닥쳐온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 모습이셨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게 하고 하느님을 쳐다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은‘사랑’을 선포합니다.“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 9)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는‘신앙은 윤리적인 결단이나 거대한 사상이 아님’을 밝힙니다.‘우리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게 하는 만남,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만남’임을 선포합니다. 우리는‘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체험하고 알며 또 믿는’(1요한 4, 16 참조) 사람들인 것입니다.‘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이 세상도 사랑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근원이 돈과 명예, 권력 그리고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임을 믿고 선포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비극과 조우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물질문명이 판을 치는 일상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희망과 사랑이기보다는 사람이 사람에게 늑대라는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 현실입니다.‘사랑은 믿기’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세상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난 전 칠흑 같은 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증언하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 마지막 순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하신 일입니다.
부활 제6주일을 보내면서,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고백합시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사랑임을 고백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듯이 우리 삶도 그리고 이 세상도 부활의 신앙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친구가 됨은 사랑의 정점’이라고도 합니다. 지위와 신분을 떠나 우리가 정말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썸?
김화석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그 사랑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구약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 몸담으면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은 ‘사랑’이 어찌 새로운 계명이며 당신의 지상명령이란말입니까?
사실 이 복음말씀을 접하면 답답함이 먼저 가슴을 짓누릅니다.
우리네 교회 안에서조차 사랑하기는커녕 미워하고 질투하고 헐뜯고 비난하며 도저히 사랑이란 녀석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새삼 무슨 사랑타령이란 말입니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라틴어 속담처럼 신자는 신자에게, 신자는 사제에게, 사제는 사제에게 늑대인 이 현실 안에서 몰라도 너무모르는 예수님이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제나 신자는 교회로부터 축출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리떼가 만연한 작금의 현실 속에서‘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차라리 “너희는 결코 서로 미워하지 마라. 이것이 나의 유언이며 계명이다!”라고 하셨다면 그런 노력 정도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자신들을 반대하는 그 누구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까만 궁리하는 이 참담한 교회 안의 모습을 직시하면 ‘사랑살이’는 그저 세상살이를 오래 경험하지 못하신 우리 예수님의 이상에 지나지 않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아주 뒤늦게 미련한 내 머리와 마음속에서 꿈틀댑니다. 새로운 듯, 새롭지 않은, 새로운 것 같은 그 사랑이 이 서글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수 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하긴 우리 교회가, 세상이 보이지 않게 자신을 온전히 던져 사랑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 그 몇몇의 고귀한 사랑살이 때문에 굴러 올 수 있었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조차도 세상사는 법에만 의지하여 당신의 그 ‘사랑놀음’을 비난하고 있었네요. 변명하자면 작금의 사랑 없는 이 세상에는 바로 당신처럼 어리석게 사랑만이 해답임을 알고 사는 이들이 더욱 요구되고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여야한다는 사실을 당신께서 유일한 계명을 통해서 알려주고자 하셨음을 마음으로 보지 못한 탓입니다.
주님, 이 못 나고 부족한 인간, 사랑보다는 미움이 앞서고, 칭찬보다는 비난을 먼저 입에 올리며, 속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며 의심을 일삼은 거짓 신앙인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다시 왜 ‘사랑’이어야만 하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가슴으로살 수 있는 용기도 허락해 주소서. 아멘!
서공석 신부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지난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생명이 사랑이고, 예수님으로부터 삶을 배우는 그리스도신앙인 안에 흐르는 생명도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으로부터 가지인 우리에게로 흐르는 생명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또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제2독서, 요한 제1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4,10) 말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에게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이해타산을 하지 않고 헌신적인 사랑에 우리는 매우 인색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교정되고 구원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 준해서 상상합니다. 인류는 불안할 때, 하느님을 생각하였습니다. 대자연은 광활하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운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대자연은 갖가지 천재지변을 일으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높고 강한 사람은 고마운 때도 있지만, 두려운 때가 더 많습니다. 크고 강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혜택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위협과 두려움이기도 하였습니다.
원시 시대부터 인류는 대자연을 지배하는 위대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천둥과 번개, 지진과 홍수 등은 하느님의 분노로 인식되었습니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은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함께 계심은 축복이라는 믿음입니다. 모세는 그 믿음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압제의 나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율법과 제사에 대한 노예적 자세로 표현되었습니다. 지켜야 하는 율법, 바쳐야 하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이신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거나,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하여서 하느님이 내린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랑이고, 그분은 사람을 버리지도, 벌주지도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그분을 죽일 때도,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이라 믿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그 계명을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스도 신앙인은 성서가 전하는 말씀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 지를 알아듣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사랑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신뢰로써 인류역사로부터 받은 유산(遺産)인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자비하고, 축복하시기에 자기도 그 자비와 축복을 실천하며 삽니다. 그것이 이웃과의 유대를 만들어 줍니다. 그 유대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내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성서 안에도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생각하게 하는 표현들이 없지 않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진다.” “지옥에 던져진다.”(마르 10,43.45) 등의 표현들입니다. 그 표현들은 불행하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 그 사회 안에 통용되던 언어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그 언어를 사용하였고, 그것이 복음서들 안에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고 강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전능하거나 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사람들을 제압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상대를 제압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듯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함께 있습니다.
사랑 안에 크게 돋보이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처신하는 종은 겸손하지 않고 비굴합니다. 높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서 더 큰 혜택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 소신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스스로를 애완동물로 비하하는 일입니다. 겸손은 스스로를 낮출 이유가 없는 곳에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마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랑은 일방적이고, 상대를 지배합니다. 그것은 횡포일 수는 있어도 사랑은 아닙니다. 생명에 숨결이 있듯이, 사랑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어떤 겸손이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세리, 죄인 등과 예수님은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상대방에 맞추어서 스스로를 낮춘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겸손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처지를 외면하고, 우리 자신을 긍정하며 과시하기를 좋아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초라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듯이, 우리 이웃이 우리 앞에 초라하게 보여도, 그 이웃과 함께 있고,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머무는 길입니다.
전신마비 환자를 일으켜 세운 중3 여학생
박영식 신부님
아빠가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을 자동차에 태우고 주유소로 들어갔다. 아빠는 주유가 끝나자 다시 자동차를 도로로 몰고 나와 집으로 가고 있었다. 딸이
“아빠, 차 돌려요.”
“왜 그래? 어디로 가려고?”
“주유소로 다시 가요. 주유소 아저씨가 안면이 있는 것 같아요.”
차를 돌려 주유소로 다시 오자 딸은
“아저씨, 3년 전에 교통사고로 온 몸이 마비되어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으시죠?”
“그렇단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그 병원에 자원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병실에서 누워계신 아저씨를 간호해드린 적이 있었어요. 아저씨는 전신 마비 상태라서 저를 기억하지 못 하실 거예요.”
“아니다. 마비상태였으나 목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단다. 학생이 나의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아저씨, 꼭 살아나셔야 해요. 댁에는 아내와 자녀들이 빨리 완쾌되어 돌아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가정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우고 길고 긴 한숨과 눈물밖에 흐르지 않는답니다.’라고 하며 나의 쾌유를 빌어주었던 그 여학생에게 대답은 하지 못했어도 마음속으로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주셨다고 여겼단다. 그 학생의 헌신적인 봉사와 너무나 자상한 마음에 감격하여 나는 살아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었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완쾌되어 이 주유소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바로 그 학생이니?”
그 아저씨는 여학생의 손을 꼭 잡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영국 과학 잡지 ‘네이처’nature 최신호를 인용하여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나 연인의 포옹 등, 신체적 접촉을 통해 사랑의 감정이 뇌에 전달되는 신경조직이 인체에 있음을 알아냈다고 보도했다. 연구팀은 “어린 시기 부모와 신체접촉은 아이들의 정서 안정은 물론 신체의 정상적인 발육도 촉진시킨다.”고 강조했다. 학자들은 이 같은 신체 접촉이 피부의 신경 세포를 따라 천천히 뇌 조직에 전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체에는 외부의 자극을 뇌신경에 전달하는 ‘굵은 신경세포’가 있다. 손바닥처럼 외부 자극을 많이 받는 신체부위는 상대적으로 굵은 신경세포가 발달한 데 비해 팔과 다리 같이 털이 많은 부위는 여린 세포가 발달한 부위다. 연구팀의 발표에 따르면 굵은 신경조직은 출생 후 서서히 발달하는 데 비해 부드러운 신체접촉을 전달하는 여린 신경세포는 태아기 때부터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팀은 지난 20년간 목 아래 전신마비 증세를 보이는 한 캐나다 여성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다른 외부자극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은 반면, 오랜 시간 팔뚝을 부드럽게 만져주고 부드러운 솔로 쓰다듬자 ‘무엇인가 피부에 닿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신체접촉이 심리적인 거리를 좁혀줄 뿐만 아니라 언어보다 더 감동적이고 심금을 울리고 심는 효력이 있다. 더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비된 신체부위를 지속적으로 만져주면 치료효과가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안아주고 애무하면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란다. 이처럼 어른들도 삶의 중요한 순간에 이웃에게서 사랑을 받아야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입맞춤은 불필요한 말을 멈추기 위한 사랑스런 기술이다.”(잉그리드 버그만).
사랑은 모든 삶과 운동의 원동력이다. 베푸는 사람은 건강하고 수명도 연장된다. 90살까지 장수한 아프리카의 성자 알버트 쉬바이처, 평생을 베푼 덕에 1년 이내로 죽는다는 질병을 이기고 98살까지 장수한 록펠러, 84살에 죽을 때까지 자선사업을 멈추지 않은 엔드류 카네기가 좋은 사례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이기심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다. 예수님의 사랑(아가패)은 우리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이고 한없는 것이다. 우리가 당신을 배신해도 우리를 향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를 더욱더 가련히 보고 더 많은 사랑을 베푸신다. 이웃에게 이처럼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라고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 이러한 사랑이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아오르듯, 나의 마음속에서 식지 않으면 이미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사 랑은 순종에서 나오고, 순종은 사랑에서 나온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순종하는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벗하며 살고 날마다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묵상하면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지킬 수 있다. 지속적인 자기희생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관심과 배려와 노력으로 사랑의 영원성을 보존할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각오로 사랑을 보존하고 더욱더 크게 만들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랑은 타성이 되고 죽어버리고 만다.
“사랑은 쉽게 변하기에 더욱 사랑해야 한다.”(W.S. 모옴)
“사랑은 바위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빵처럼 늘 새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어슬러 K. 르귄)
“사랑이란 매 15분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존 레논)
부부, 부모와 자녀들, 친구들도 서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더 자주 해야 사랑이 날로 새로워진다. 사랑은 난을 키우는 것과 같다. 바람과 적당한 햇빛과 물을 줘야 하고 물을 준 다음 빨리 마르도록 통풍이 좋은 곳으로 옮겨야 하고 분갈이도 하고 거름을 주듯,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그의 손을 잡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전투이며 전쟁이고 성장하는 것이다.”(제임스 볼드윈)
지성이면 감천이라 한다. 그 고등학교 2학년 딸아이가 지극정성으로 마비환자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처럼, 우리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이들을 조건 없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과거를 반성하면 내가 누구를 제일 사랑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인생을 돌아보면 제대로 살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순간뿐이다.”(헨리 드루먼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 신부님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 들어 와
빈 무덤에 모습을 감추고 있어도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선사된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숭고한 기쁨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그것을
사랑이라 가르쳐 주십니다.
목숨을 내놓아야
목숨이 열리듯
사랑또한
사랑을 내놓아야
사람을 살리는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차원을
바꾸어 놓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진실된 사랑뿐입니다.
목숨은 땅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느님께
바쳐지는 생명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또한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되며
하나뿐인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머무르는
기쁨을 통해
다시 살게되는
생명의 축제가
됩니다.
사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에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나를 내놓는 것이
주님께 머무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무엇보다 제자리를
찾기위해서는
자아를 내놓는
머무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은
서로를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머무름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목숨을 내놓는
사랑으로
다시 완성됩니다.
내놓아아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놓음과
머무름은 이렇듯
가장 좋은 사랑안에서
이미 하나입니다.
내놓기에
가장 좋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