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0년~1800년대🌺 |
✿1456년 조선 세조 2년,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다.
단종
선위 계획은 권남·정인지 등이 극비리에 추진한 것이라 비록 선양의 형식을 택하였다고는 하지만, 계략에 따른 왕위의 강탈이었다. 이러한 처사에, 특히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형조참판 박팽년·직제학(直提學) 이개·예조참판 하위지·사예(司藝) 유성원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및 병마절도사 조숭문·유응부·종사관 박심문 등은 상왕으로서 수강궁(壽康宮)에 있는 단종의 복위와 반역파의 숙청을 꾀하고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사(明使)를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나자 김질(金礩)·정창손(鄭昌孫) 등은 사태의 불리함을 보고 이를 밀고하였다.
세조는 곧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으므로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작형(灼形 : 단근질) 등으로 형살(刑殺)되었다. 하위지도 참살되고,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살하였다.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이에 연루된 자로 권자신(權自愼)·김문기(金文起) 등 70여 명도 모두 처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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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미국의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리다.
미국 제22대 대통령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대통령 재임 : 1885 ~ 1889)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은 22대와 24대 대통령으로, 1885년 3월 4일부터 1889년 3월 4일까지 그리고 1893년 3월 4일부터 1897년 3월 4일까지 두 번에 걸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민주당에서 출마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영부인 프랜시스 백악관에서 클리블랜드와 프랜시스의 결혼식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85 ~ 1889) 뉴저지주 카다웰 출생, 가족으로 부인 Frances Folsom Cleveland, 자녀들
클리블랜드는 뉴욕주에서 로키 산 모국 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는 뉴욕주 버프로의 시장으로서 도시에서의 정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대통령 임기 (1차): 임기 기간, 1885년 3월 4일부터 1889년 3월 4일까지(정당: 민주당, Democratic Party) 주요 사건 및 정책 (1차): 평화적 통합: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남북 전쟁 이후의 재건 시대의 미국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헤인스 콘스티튜션: 대통령이 되기 전에 헤인스 콘스티튜션과 관련된 문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대통령 임기 (2차): 임기 기간, 1893년 3월 4일부터 1897년 3월 4일까지(정당: 민주당, Democratic Party) 주요 사건 및 정책 (2차): 경제 불황 대응: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흑인 1893년 패닉(경제 불황)에 대응하여 금리를 인상하고 금융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인근 중앙화: 그는 인근 중앙화(악덕적인 기업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노력)를 강조하며 금융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1908년 6월 24일에 심장 마비로 사망했습니다. 평가: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그의 두 차례의 임기 동안에 경제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도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통치는 중도 주의적인 접근과 국가의 안정성을 강조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
| 🌱1900년대🌱 | |
🌳09년 대한민보 창간. 🌳23년 김규식을 비롯한 창조파가 임정을 이탈하여 상해에 조선 공화국 선포. 🌳46년 부산에 콜레라 창궐, 전국에 만연(9월까지 1만 1000여명 사망) | |
🌳55년 소련-유고 정상 공동성명(베오그라드 선언)
1955년 5월 26일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베오그라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와 악수를 나누고 레닌의 이름으로 국제 노동자 운동을 위해 화해할 것을 요청했다.
독자노선을 취하고 있는 티토에 대한 소련의 이 같은 태도변화에는 양국의 관계단절 이후 7년이 소요됐다. | |
🌳59년 국제의원연맹(IPU), 한국 가입을 정식 거부 🌳64년 고대생 2천명, 서울대생 3500명 가두 진출, 전남대 동국대 등에서 교내 시위 | |
🌳66년 미국 무인탐사기 `서베이어 1호` 달 착륙 1966년 6월 2일 오전2시17분. 인간의 달 착륙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할 목적으로 쏘아 올린 미국의 무인탐사기 `서베이어(Surveyor) 1호`가 달의 `폭풍의 바다` 연착륙에 성공했다. 서베이어 1호는 레이다, 컴퓨터, 4기의 로켓을 사용해 세 다리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Launch of the Atlas-Centaur rocket carrying the Surveyor 1 space probe
Surveyor model on Earth
서베이어 1호의 달 착륙은 1970년까지 달에 인간을 보내려는 미국 계획에 있어 의미 있는 성과였다. 참고로 서베이어 계획(Surveyor Program)은 미국 항공우주국의 무인 달 탐사선 계획으로,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달 표면의 사진을 찍고 분석하고자, 서베이어 1호에서 7호까지 7대의 탐사선을 쏘아 올렸다. | |
| 🌳69년 전국주요도시및 취약지 지서, 파출소 1000개소 경위 소장으로 승격 | |
🌳70년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국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지구국인 금산 제1위성통신지구국
1970년 6월 2일 충청남도 금산에서 개국됐다. 높이 35m의 콘크리트지주 위에 세운 직경 27m의 원형안테나와 부속시설은 체신부가 1969년 5월 총공사비 18억 4천만원을 들여 착공, 1년 만에 완공한 것이었다. | |
🌳70년 특수층의 부정부패를 풍자한 담시오적 필화사건 필자 김지하 등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70년 미 F-4 팬텀기 2개 대대 군산에 도착 🌳79년 버스 트럭 충돌 추락(삼척군 포리고개 버스와 트럭 충돌 추락, 24명 사망 29명 중경상) | |
🌳80년 컬러TV 국내판매 시작
국내 처음으로 1980년 6월 2일 부터 컬러TV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컬러방송은 여러차례의 시험방송 끝에 12월 1일부터 본방송이 시작됐다. 1972년 9월 상공부가 컬러텔레비전 생산계획을 발표한 후 8년동안 준비해 오다 1980년 6월 체신부가 컬러 텔레비전 방송의 표준방식을 미국식의 NTSC 방식으로 결정함으로 국내 컬러방송이 본격화됐다. 흑백 텔레비전용 브라운관이 최초로 발명된 것은 1897년이며 1932년에는 상품화되어 관측용으로 쓰였다.
1933년 키네스코프가 발명되면서 컬러 텔레비전의 기초가 마련됐다. 컬러텔레비전은 1940년 미국의 베아드가 그 원리를 개발하고, 1953년 미국의 RCA사가 컬러 브라운관을 개발한 후 실용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1960년 7월에 처음 도입돼 9월부터 컬러방송이 시작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일본의 컬러방송 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시킨 계기가 됐다 | |
🌳80년 정부, 일본 공동통신 서울지국폐쇄 특파원출국령 🌳80년 장기신용은행 개점 🌳81년 효창공원, 9년만에 일반 공개 🌳82년 전두환 대통령, 일부개각. 안전기획부장 노신영, 외무장관 이범석 임명 🌳82년 워싱턴포스트, 미국의 방위우선 순위에서 한국 등 태평양권은 3순위 보도 🌳83년 상공부,약품원료 등 282품목, 샴푸 등 75개 품목 수입자유화 한다고 발표 🌳84년 대한올림픽위원회, LA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단 명단을 발표 🌳86년 원전 5,6호기 준공(경남 고리, 각 95만㎾) 🌳86년 서울大 등 23개大교수 265명, 한신大서 정통성 지닌 민간정부 출현요구 시국선언문 발표 🌳87년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표위원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천 🌳88년 전국민의료보험실현ㆍ국민연금대상 확대등 의료보험,국민연금제도 중장기발전방향 발표 🌳88년 일본 후지노키고분서 삼국시대의 것과 같은 금동관 등 발견 🌳88년 에너지 연구소, 방사능폐기물 잘못 보관해 방사능 유출, 토양 오염됨 🌳89년 서총련 산하 34개 대학생 800여명이 고려대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준비위 발족 🌳89년 한국산 신발류 이탈리아에 이어 프랑스 에서도 간접수입 금지 당함 🌳89년 삼성종합기술원은 첨단 반도체 소재로 각광 받는 갈륨비소 단결정과 기판을 국내 처음 개발 🌳89년 김영삼 민주당 총재, 한국정치지도자로는 처음 소련 방문 🌳90년 부산시경소속 전경-건설부 직원 집단항명-부대해체 불만,조직개편 불만 🌳90년 1500 경찰병력, 새벽 세종대학 진입. 농성 학생 116명 연행 🌳90년 베를린에서 범민족대회 실무회담 열림 🌳92년 징코민 메틸알콜 검사의혹-국립보건원 권위에 치명적 🌳92년 덴마크 유럽통합안 부결-반대 50.7%, 찬성 49.3% 🌳92년 한국은행이 91년 매출액 경상이 익률이 1,8%로 82년 0.9%에 이어 9년만에 최저수준기록. 🌳92년 중국 터키 미국 수입 고추 마늘 파 에서 고독성 농약디엘드린 납이 허용 기준치 초과 검출 🌳9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광주 전남지역에서 73명이 정신대 로 끌려갔음이 확인됐다고 발표 🌳92년 일본정부 木村내각 外政심의실 심의관은 한국인 前 종군위안부 5명의 체험담 등 증언 🌳92년 서울형사지법, 민자당 청년외곽조직인 한맥회의 불법 선거운동사건 최승혁 징역 1년 선고. 🌳92년 전 한국과학기술원 시스템공학연구실장과 안영경씨 5년간의 연구 끝에 펜컴퓨터를 개발 | |
🌳93년 잠수함 장보고함 취역
해군은 1993년 6월 2일 진해항 기지에서 국방부장관, 해군참모총장 등 군수뇌부와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해군 최초의 잠수함인 장보고함 취역식을 가졌다. 장보고함은 독일에서 건조된 Type 1200형으로 209급 현대식 잠수함으로 평균속력 22노트로 수중을 항해하면서 대함미사일과 어뢰를 발사할 수 있는 최첨단 지휘통제 및 사격통제 체제를 탑재하고 있다.
우리 해군의 209급 잠수함 1번 함인 장보고함이 파도를 헤치며 수상 항행하고 있다.
독일 HDW사로부터 1천5백억 원을 주고 인수한 장보고함은 전자수행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한번에 최고 7천5백 마일을 항행할 수 있다. 장교 6명을 포함, 모두 33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는 장보고함의 초대 함장에는 안병구 대령이 임명됐다. | |
🌳93년 전국노조대표자회의 출범(전노협등 4개단체 통합) 🌳93년 후지모리 페루대통령 방한,김영삼 대통령과 양국관계발전방안 논의 🌳93년 미-북한 고위급 회담-핵개발 시간벌기 묘한 합의 🌳93년 정부, 슬롯머신업소 를 관계법 개정해 95년까지 모두 폐쇄키로 결정. 🌳94년 러시아,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내부 문서 300여종의 사본을 한국정부에 전달 🌳94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 러-北우호조약이 2년후 기한이 만료되면 자동폐기 방침 밝혀 🌳94년 김영삼 대통령-옐친 러시아대통령, 직통 전화를 설치 대북 무기공급 중단 합의 🌳94년 김영삼 대통령,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방문 🌳95년 정부, 94년말 현재 국채발행으로 인한 국민 1인당 채무는 46만7000원. 🌳96년 증권감독원장 백원구씨 구속 | |
🌳97년 서울지법, 한보비리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 징역 15년,정치인 은행장 징역 7∼3년 선고
1997년 6월 2일..서울지법,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에 15년 선고
한보 특혜대출 비리 사건과 관련,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되는 등 피고인 11명에게 전원 유죄가 선고됐다. | |
🌳97년 일본 정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 🌳97년 여천환경(주), 옥내 인화성 액체 폐기물 운반중 폭발사고 발생, 사망2, 부상1. 🌳98년 김종필 총리서리, 35개 정도의 정당구조로 정계가 정돈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혀 | |
| 🌺2000년대🌺 | |
✿2001년 북한 상선 3척, 제주도 해협 침범
우리측 해군 대잠수함 초계기인 P-3C가 울산 동남쪽 47㎞ 해상에서 찍은 북한 상선 청진2호의 모습.
2001년 6월 2일 북한 상선 3척이 제주도 해협 우리측 영해를 침범, 항해하다 다음날 3일 오후 서-남해 공해상으로 빠져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 선박의 제주도 해협 무단 통과는 이 때가 처음이다. 군당국의 지나치게 유화적인 대응에 북한 상선들은 4일에도 해상 휴전선이나 다름없는 서해안 백령도 인근 NLL(북방한계선)과 제주해협, 심지어 동해안 독도 영해까지 잇달아 침범을 시도했다. 군당국은 독도에 한해 해경정이 진로를 차단, 영해 침범을 저지했으나 나머지 서-남해안에서는 침범 행위를 묵인했다.
정부는 북한 선박이 사전 협의없이 영해를 침범할 경우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3일 밝힌 바 있었으나 연이은 영해침범에도 경고사격이나 나포 등 강경조치를 취하지 않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북한측의 동시다발적인 영해 침범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유례없는 일이며, 남북 해빙무드를 틈탄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단순히 수송비와 시간을 절감하려는 경제적 실리확보 목적이라기보다 김대중 정부와 미국의 부시정권에 대한 간접적인 불만표시가 담겨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국회에서는 군당국의 소극적인 대응자세를 추궁하고 대책강구를 촉구했다. 특히 국회에서 공개된 남북간의 교신내용을 근거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밀약설도 제기돼 2001년 정가를 시끄럽게 달구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