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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문을 들은 남순은 간도로 가지 않은 것을 잘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흔한 살의 광국은 농사일을 마치고 다시 산판일을 나섰다.
1921년1월 1일을 기해 그동안 사용하던 건양, 광무, 융희가 새겨진 동전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건양, 광무, 융희 연호가 새겨진 대한제국 동전들은 수량도 많아서 산골 오지에도 널리 분포된 상태였고, 일부 위조된 건양 동전, 광무 동전, 융희 동전이 대량으로 주조되어 유통된 상태였다.
광국이 해가 바뀌어 돌아올 때에는 남순에게 선물로 광목을 한통 사가지고 왔다.
광목 한통을 콩짚을 태운 재를 삼배 자루에 넣고 물에 담가서 잿물을 만들어서 가마솥에 넣고 한나절을 삶아서 강가에 가지고 나가서 빨아서 강가에 자갈밭에 널어놓았다.
하얗게 표백된 광목은 보기에도 좋았다.
목화를 심을 밭도 없지만 설사 목화를 심었다 해도 목화다래를 따서 시아를 돌려서 씨를 빼고 활로 타서 물레를 돌리며 실을 자아서 베틀에 올려서 몇 달을 짜야 할 것을 사다주었으니 남순은 부자가 된 것 같았다.
한편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 중 일단 밀산에서 독립군을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1. 북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1. 대한독립단 (이청천)
1. 대한독립군 (홍범도)
1. 간도국민회 (구춘선)
1. 대한신민회 (김성배)
1. 의군부 (이범윤)
1. 광복단 (이범윤)
1. 혈성단 (김국초)
1. 도독부 (최명록)
1. 야단 (野團, 김소래)
1. 대한정의군정사 (大韓正義軍政司, 이규)
1. 군비단 (軍備團, (김백일)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었으며,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되었다.
여단장에 이청천(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이 선임되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와 흑룡강일대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 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소련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은 자유시에 집결했다.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어서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붉은 군대와 반 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하얀 군대가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하얀 군대를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하얀 군대를 지원하면서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에 한국 독립군은 적군파에 가담했는데,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신 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붉은 군대가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행동을 같이했다.
이 한인의병대는 일반적으로 이만군대,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인 무력군으로, 이만군대 사령관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 김덕보였고, 다반군대 사령관은 최니콜라이였다. 이들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들은 임시흑룡주정부가 극동공화국으로 강화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자유시로 집결했다.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군정서가 있었으며, 러시아 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와 고명수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중 이만시로 들어간 이청천 부대는 홍범도의 소개로 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인 박일리아 연대장을 알게 되고, 박일리아는 소련 교관을 한국독립군부대에 배치하여 전술법을 교육하는 등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자유대대는 고려공산당 중 이르쿠츠크(노령, 즉 러시아)파는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와 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 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 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월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은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해 계속 반항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갈란다라시윌린에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의용대는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으며,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와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 연해주 지역 조선 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모두 궤멸되었고, 대한독립군은 붉은 군대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이만으로 가지 않고 그냥 만주에 그냥 잠복하고 있었고, 지청천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으며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이 소문을 들은 광국은 허망함을 느꼈다.
7월11일에는 몽골이 중화민국으로 부터 독립을 했다.
신유년 음력 6월 16일 물골안 작은아버지 영훈이 죽어서 광국은 물골안 방골에 갔는데, 사촌동생이 모두 넷이 모두 살림을 나서 둘째 완묵은 같은 방골에서 살고 있고 셋째 흥묵은 물막골 간대말에 살고 있고 막내 양묵이 스물세 살로 꽃재에 살고 있었다.
방골 앞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북향을 하고 있는 산이어서 작은 할아버지의 할머니 산소가 있는 물막골 간대말에 마련한 선산 유가모이터에 묻혔다.
그러다 보니 셋째 흥묵의 집에서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7월29일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11월4일 나치 돌격대가 창설되었다.
그렇게 한해가 갔다.
1월1일 경주시 대덕산에서 대한민굴의 마지막 시베리아 호랑이가 포획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교육방침에 따라서 1921년 1월 임시 교육조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일본 본토의 교육제도에 준거한 학제의 개혁을 심의케 했고, 1922년 2월4일에는 교육령을 전면 개정하여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교육령을 개정하여 표면상 일본학제와 동일하게 함으로써 융화시키려 하였으나 이들의 기본의도가 다른 곳에 있었음은 자명한 일이었고 '2차 교육령'에 담긴 '문화'란 이름의 교육정책 내면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사이토의 문화정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학교 교정에 심어져 있는 무궁화를 뽑고 '사쿠라(벚꽃)'를 심도록 하는 데까지 뻗어나갔다.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는 전대(前代)의 무단정치보다 더 가혹한 통치방법이 되었다.
제2차 조선교육령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 5년, 4년으로 함),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3년에서 4년(또는 5년)으로 연장하였다.
일본어의 수업일수를 증가하면서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새로 사범학교와 대학설치의 길을 마련하였다.
실업교육·전문교육·대학교육은 일본의 제도에 따랐다.
교육정책
동일한 교육제도·교육기간을 확충함으로써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여 한국민족 사상을 말살하려는 데 있었다.
새 교육령의 전체내용은 곧 일본어 습득에 있었다.
대학의 설치를 규정함으로써 한국에 대학교육의 문이 열린 것처럼 가장하였다.
1922년 재해에 따른 흉작이 계속되자 황해도 재령군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인 북률농장에서 이몽서를 주동으로 한 소작인들이 생존위협을 느껴 소작료 감면과 소작권 보장을 요구, 연좌농성에 들어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시적인 타협을 이뤄냈다.
지금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이 된 북률땅은 원래 왕실의 땅으로 조상대대로 농사를 지어왔으나, 나라를 잃게 되자 왕실 땅을 총독부가 빼앗아 동척에 넘겨주면서 이 땅도 동척 땅이 되어 버렸는데 복률면에서만 역둔토 2300정보를 점탈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에게는 이전에는 소작료가 수확량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이던 것이 2분의 1로 크게 높아졌고, 이것저것 합해서는 실제로 7~8할까지 거둬갔다.
또한 동양척식 땅이 되면서 소작 기간을 3년으로 못 박아 자기들 말을 안 들으면 마음대로 소작권을 빼앗아 버렸다.
그러니 이 나라 곳곳에서 그렇게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만주 또는 일본으로 먹고 살기 위하여 떠나야 했다.
10월30일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검은 셔츠단'의 로마 입성.(이른바 '로마 진군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였다.
11월 1일에는 케말 파샤의 술탄제 폐지로 19일에 압둘메지드2세 가 퇴위하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해체되고, 이듬해 7월에는 연합국과 새로운 조약(로잔 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에는 자그만 한 시골 도시에 불과했던 앙카라를 수도로 삼고 공화제를 선포하였으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12월4일에는 일진회장 이용구 한일합방상주문을 제출하였다 그런가 하면 총독부는 같은 날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우리나라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12월30일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수립 되었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가고 왔다.
1923년 3월16일 일본유학생 방정환, 강영호, 손진태, 고한승, 정순철, 조준기, 진장섭, 정병기 등이 참여하였고, 여기에 윤극영과 조재호가 합유하여 윤극영의 제안한 색동회라는 명칭으로 어린이 운동단체 설립준비를 해서 5월1일에 색동회가 창립되었다.
1923년9월1일11시55분32초에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난 간토지방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 건물인 피해 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지바 현, 가나가와 현, 시즈오카 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천 명이 실종되었다.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 되었다.
민심은 흉흉해지고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보도됨으로서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 라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 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이 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아마미 제도 출신과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 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잔악했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내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학살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 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 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 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그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 되었고,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 강과 아라카와 강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그의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적었지만, 그에 비해 당시 일본정부의 추산은 233명이었다.
1923년 11월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의 로마 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베르세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전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1923년 계해년 10 월 13일 마흔 살의 남순이 아들을 낳았다.
이때 광국의 나이 마흔네 살 이었다.
이름은 재덕이라고 지었다.
그에 앞서 남순의 친정 조카며느리 영은이도 삼월에 연학이를 낳았다.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또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20년대 중국 북경에서 조직되었던 조선인 아나키즘 운동단체이자 독립운동단체로 정화암,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유자명 등이 중국 북경에서의 조선 독립운동을 체계화시킬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연맹이 조직되고 활동하자 일본관헌은 이들을 체포하려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은 굳건한 자세로 연맹을 구심점으로 운영해 나갔다.
1924년 11월 2일부터 4일간 동양척식주식회사 사리원지점에서 제 작년에 이어 또다시 농민들이 흉작이 계속되어 먹을 것이 동이 나자 소작료 감면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는데, 이번에는 동척에서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이민자 40여명에게 총을 주어 유혈 사태까지 일어났다.
소작농민들의 투쟁이 계속되자 아예 동척은 소작권을 빼앗고 일본 이주농민에게 땅을 분배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에 농민들이 더욱 격렬히 투쟁해 일시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납 소작료 문제가 다시 불거져 교섭은 결렬되었고, 엽총을 쏘며 강제집행에 들어감으로써 북률 투쟁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대표자 5인은 6~8개월의 실형을 살고,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370여 호의 소작인들은 살 길을 찾아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3월 12일 중국에서는 중국의 국부라는 쑨원이 죽었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시내 식당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김재봉(金在鳳)을 선출했다.
7월 7일 타이완 부근에서 태풍이 생성되어 11일과 12일에 중부지방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로 인해 한강과 금강, 낙동강, 만경강 등의 황해도 이남 지역의 강이 범람하였다.
특히 낙동강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때 한강은 구룡산에서 10.57m의 수위를 나타냈다.
7월 14일 타이완 부근에 다시 태풍이 생성되어 중부 지방을 지나갔는데 7월 15일부터 7월 18일까지 4일 동안 300~500밀리미터의 높은 강우량을 보였다.
연이은 홍수로 인해 한강의 수위는 최대를 기록했고 제방이 무너지고 범람하여 용산 일대가 물에 잠기고 숭례문 앞까지 만수가 되었다.
서울 시내의 교통과 통신 또한 마비되었다.
당시에 익사자만 400여 명에 1만 2천여 호의 가옥이 유실되었다.
당시 한강은 뚝섬에서 13.59m, 한강대교에서 11.66m 그리고 구룡산에서 12.47m의 수위를 나타냈다.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물로 덮어버린 이 홍수로 송파동 일대가 침수되면서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발견되었다.
광국의 간내월 보금자리에서 별안간 물이 불어나 급히 재운과 재덕을 피신시키고 재명과 함께 어머니 연희의 유품인 노구솥과 살림살이 몇 개를 빼 가지고 허벅지를 넘는 물살을 헤치고 나왔는데, 잠시 후 물이 계속불어 처마에 다다르더니 무엇에 걸린 듯 물이 지붕의 용마루를 한번 넘더니 붕 떠서, 나는 가니 잘 있으란 듯이 떠내려갔다.
광국은 허망하게 처다만 보았고 남순은 재덕을 안고 눈물지었다.
반면 철부지 재운은 “우리 집 배 되어 떠내려간다.”
하다가 이내 엄마 남순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닫았다.
다시 친정조카 의상의 행랑에서 살림을 시작해야 했다.
다시 창강에서 발달한 저기압이 우리나라와 중화민국의 국경을 지나 간도로 빠져나가면서 관서지에 호우가 내렸고 이로 인해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범람하였다.
또 다시 마리아나 제도에서 열대성저기압이 발달하여 북상하였고 1925년 9월 6일에는 제주도와 목포·대구를 거쳐서 동해로 빠져나갔는데 남부 지방의 호우로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범람하였다.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라고 이르는 4차례의 홍수로 전국에서 사망자 647명, 2만 여 호의 달하는 가옥이 유실 또는 붕괴되고 4만 6천호의 가옥은 침수되었다.
또한 3만 2천 단보의 논과 6만 7천 단보의 밭이 유실되었다.
홍수로 인한 피해액만 1억 300만원에 달하였는데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복구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군대까지 동원하였고 한강 본류와 안양천, 중랑천, 청계천 등의 지류에 대대적인 제방공사를 벌였다.
11월9일 나치 친위대(Nazi親衛隊) 또는 슈츠스타펠(독일어:Schutzstaffel, SS)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아돌프 히틀러를 호위하는 당 내 조직이 창설되었다.
11월26일에는 전라남도 나주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인 1만여 명이 일본경찰과 충돌을 했다.
그렇게 한해가 가고 새해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황제 장례식이 있던 6월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주동자는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 인쇄직공 민영식, 이민재, 연희전문의 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등으로, 이들은 10만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황제의 인산을 보기위하여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격문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이었다.
그날 황제의 인봉을 보기위해 참가한 학생들은 2만 4000여 명 대부분 시위에 참가하였고, 군중의 호응으로 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 결여와 민족진영의 조직약화, 노동계 사회주의계열의 사전체포 등으로 일본 경찰에 저지당하여 곧 실패하였으나 만세운동은 곧 전국으로 번져, 고창, 원산, 개성, 홍성, 평양, 강경, 대구, 공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광국은 한 달 뒤쯤 물골안 안마산에서 당숙 영달이 돌아가셔서 갔다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많은 신세를 졌는데 참으로 아쉬움이 많았다.
그리고 8월에는 동아일보 사회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서 세간에 관심을 끌었다.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배 이름)이 4일 오전 네 시경에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 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 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情死-연인끼리의 동반 자살)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기사가 났었고
그런가 하면 두 달 뒤 10월 1일에는 나운규 감독 주연의 아리랑이라는 무성영화가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는데, 아리랑이라는 활동사진 보았느냐 나는 보았다고 하면서 본 사람은 으슥해서 영화를 본 이야기를 했고 변사의 인기가 굉장했다.
그해가 저물어 가던 12월28일에는 황해도 재령 출신의 나석주가 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철도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경찰과 대치 중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자결을 시도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심문 중 나석주임을 밝히고 사망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27년이 되었다.
진남포에 살던 나석주의 장남 나응섭은 잠적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다시 진남포로 압송되었다.
2월15일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2월16일에는 경성방송이 개국되어 라디오 방송이 첫 실시되었다.
라디오를 수신하기 위해서는 라디오 수신기를 구입하는 이외에 2원씩을 징수하였으며 허가장을 문 앞에 부착해야 했는데, 당시 라디오 보급 대수는 한국인 949대, 일본인 4,161대 이었다.
4월 12일 장개석이 제1차 국공 합작을 결렬시킨 상하이 쿠데타 이후, 1927년 5월에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결별을 선언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에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은 몇몇 지역에서 국민당 내부의 무력을 일부 접수하는 형태로 무장을 진행시켰다.
그 배경은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죽자 국민당의 권력을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국민당 우파로 기울었고 쑨원의 또 다른 신임을 받고 있던 왕징웨이는 국민당 좌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왕징웨이보다 국민당내의 서열이 낮았지만 황푸학교 출신의 부하들의 지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산함 사건을 일으켜 결국 국민당 권력을 잡았다.
한편 국민당은 1925년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장제스는 그 총사령관이 되어 군벌들로부터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는데 이때 국민당군은 세 개의 파로 나뉘어 북쪽으로 진군했다.
1926년 중국 북부의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대규모 북벌을 개시했다.
이때 우한으로 진군한 왕징웨이 등 국민당 좌파는 우한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과 별개의 우한국민당 정부를 세우고 장제스와 대립하게 되는데 난징과 상하이를 탈환한 후 장제스는 국민당 내 좌파와 공산당을 소탕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국민당 내부에는 꽤 많은 공산당 인사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요직에 붙어 있는 이도 많았다.(국공합작)
이러한 내부 사정으로 당시 북벌군의 주둔하는 도시 중 난창이 비교적 허술하게 방비되고 있었고, 난창의 공안을 주덕이 맡고 있어 조건은 갖추어지고 있었다.
8월 1일 새벽 2시를 기해 허룽(賀龍)과 저우언라이 등이 주도한 공산주의자들과 반란군은 여러 방면에서 무장병력으로 난창을 공격하여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국민당군의 역습을 맞아 불과 5일 만에 도시를 내주고 징강 산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봉기가 벌어진 8월 1일은 국민당에 공산주의 군대가 최초로 맞서 싸운 날로 후에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로 삼아 기념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지금 북한정부의 씨앗이라고 주장하는 반제동맹이 길림에서 결성되었다.
그리고 광국은 작년 일 년 동안 만주로 새 삶을 찾아 떠나가느냐 아니면 여기서 사느냐 많은 고민 을 해야 했지만 경신년 대 참사와 관동대지진 이 떠올라 생각을 접고 지난번 떠내려 보낸 곳 보다 조금 위쪽에 다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을 짓는데 그나마 다행히 지난번 집터에서 구들장을 비롯한 돌덩어리의 일부가 떠내려가지 않고 있어서 조금 일손을 덜 수 있었고, 스무 살의 재명이가 일손을 도와서 수월했다.
간신히 방 하나를 꾸며 놓고 나머지는 재명에게 짬이 나는 대로 하라고 이르고 산판일을 나섰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28년이 되었다.
8월27일에는 미국의 국방장관 프랭크 켈로그 (Frank Billings Kellogg)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 (Aristide Briand)의 발기에 의하여 파리에서 15 개국이 체결한 전쟁 규탄 조약으로서, 서문과 전문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 1 조에 따르면, 조약에 가담 비준한 국가는 자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이나 국제 외교 정치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포기하는 것을 조약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는 켈로그-브리앙 조약 (Kellogg-Briand Pact) 이 체결 되었다.
이와 같은 훌륭한 도덕적 이념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조약 위반의 경우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가입국인 독일과 일본이 1940년대에 세계 대전의 주범으로 등장하였을 때, 이들 국가의 야만적 행위에 대해 다만 서류상 규탄만을 할 뿐이었다.
1939년에 이르기까지 63개국이 이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현재 이 조약은 국제법상 효력을 상실하였다. 조약의 발기자인 켈로그는 국제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192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0월8일에는 장제스가 중국 국민당 주석으로 중화민국 정부총통에 취임했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가고 다시1929년 새해가 되었다
2월11일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바티칸 시국 양국이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비오 11세가 파견한 교황청 대표 피에트로 가스피리와 이탈리아 수상 베니토 무솔리니가 2개의 의정서로 되어 있는 라테라노 조약을 채결 하였다.
제1의정서에는 1870년 이래 과거 60년 동안 이탈리아의 로마 합병으로 인한 국가와 교회의 대립이 생긴 로마 문제의 해결을 도모한 것으로 이 협정에 의해로마 가톨릭교회의 이탈리아 국교화와 교황청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한 바티칸 시의 완전한 독립이 확인되었다.
제2의정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 교육·결혼·자산·과세·주교임명 등의 여러 가지 특권이 인정되었다.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이 조약에 의해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서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라테라노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에 계승되었다.
그리고 10월24일에는 암흑의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는 뉴욕증권시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주가 대폭락 사건으로, 10월 24일 목요일과10월 29일(일명 ‘검은 화요일’)의 대폭락 사건이 일어났다.
9월 3일에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는 당시 신기록이던 381.17이, 10월 24일 장이 마감될 시점에 이 지수는 299.47로, 20% 이상 하락하였다.
이 날 하루 동안 1290만 주가 팔리면서 종전의 400만 주 기록을 깨뜨렸고, 오후 12시 30분에 시카고와 버팔로 거래소가 문을 닫았지만 이미 11명의 투기가가 자살한 뒤였다.
오후 1시에 월 가의 중개인들이 유에스스틸을 비롯한 여러 상장사의 주식을 훨씬 높은 값에 매입하는 데 합의하면서 폭락은 잠시 진정되었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10월 29일에 다우 지수는 230.07을 기록했으며, 하루 동안 무려 1640만 주가 팔렸다.
다우 지수와 함께 경제는 1930년 초에 정상으로 돌아 왔지만, 1930년 말부터 1932년까지 다시 꾸준히 폭락하면서 대공황의 발단이 되었다.
1932년 7월 8일의 다우 지수 41.22는 지수가 발표되기 시작한 1896년부터 2006년까지 가장 낮은 값이며, 20여 년 후인 1954년에야 이전의 지수를 회복했다.
당시의 금융시장은 신용화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실질화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므로 주가폭락은 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하루아침에 종잇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10월30일 오후 광주를 출발한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암성금자 이광춘에게 치근대더니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자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을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학생의 본분은 지키라고 훈계를 하자 감히 조센징이 하면서 멸시하는 말에 하며 둘러싸고 폭력을 행사하자 주의에 있던 한국인 학생 30여명과 일본인 학생 50여명이 집단 패싸움이 벌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인 기업인들이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넓은 평야가 있는 나주의 경우에도 경제적 부를 독점하는 것은 일본인 대지주들이었고, 도심 중심지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정치와 경제적 특혜를 누리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일삼아 식민지의 삶은 고스란히 조선학생들의 생활 속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부유를 누리며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고, 가난한 조선인 학생들은 차별과 멸시 속에서 항일 의식을 키우며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으니 지지 않겠다는 의식이 더해져 싸움은 한국인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 항의하였다.
그리고 11월 3일(일요일)은 일본에게는 메이지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明治節)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음력 10월 3일 즉,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다.
한국인의 시조를 기념하는 날에 일본 천황의 생일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서 축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인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하굣길에 지난 29일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에 몰려가서 항의할 정도로 그들의 반일감정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선인 학생이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테러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장재성 등은 일제에 대항할 자세한 행동방향을 제시한다.
1. 우리의 투쟁 대상은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릴 것.
2. 광주중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을 일제에 대한 증오와 독립투쟁으로 바꿀 것.
3. 광주중학생과 대치중인 광주고보생을 해산시키지 말고 광주고보로 집합시켜 적개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 시위운동으로 돌릴 것.
4. 장재성이 시위운동을 직접 지도할 것.
5. 우리는 앞으로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할 것.
그리하여 장재성의 주도로 학생들은 광주농고 학생들과 함께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히 적(일제)을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는 가두시위를 하였다.
일제는 항일시위에 가담한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을 구속, 검사국으로 송치하는 탄압을 하였고 심지어는 개인의원인 태양의원에서 치료받던 학생들을 도립병원장이 치료할 가치도 없다면서 비하하는 망언을 하여 공분을 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도 일제의 학생운동 탄압과 차별을 비판하는 기사를 보도할 정도였다.
장재성은 광주학생들을 설득하는 유인물을 작성했으며, 인쇄를 맡은 오쾌일에 의해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박기석의 집에서 약 1,000장을 인쇄하였다.
그리고 11월 12일 오전 8시 경 오쾌일은 광주고보와 광주농고의 학생들을 통해서 유인물을 배포한다.
당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여학생들도 교정에서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일제는 25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검거했으며, 사회운동단체 간부들도 검거를 했다.
일단 경찰에 구속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학교당국의 가혹한 처벌이 잇따랐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기정학, 퇴학으로 광주학생운동 가담자들을 탄압함으로써 중등학교 학교 교실이 텅 빌 지경이었다.
그리고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였던 장석천은 11월 16일 서울로 올라와조병옥, 김병로 등 신간회 중앙간부들에게 제2차 시위의 전말을 보고하고, 이어 조선청년동맹 중앙간부 곽양훈, 차재정 등에게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를 전국 항일 시위운동으로 확산할 것을 역설했다.
이 두 모임에서 서울 시내 각 학교에 이미 조직되어 있는 비밀독서회 조직을 통해 시위운동을 서울로 확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장석천은 특별히 휘문고보 5년생이었던 후배 장홍염을 설득하여 장홍염이 서울시내의 주요 조선인학교들의 학생 운동가들을 접촉하였다.
장홍염 자신이 1년 전에 고려공산청년회 사건'에 관련되어 수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처지였다.
11월 20일부터 12월 2일까지의 준비기간을 거쳐 1929년 12월 3일 서울의 각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광주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대한 전말과 독립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이 모두 뿌려졌다.
일본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서울 지역의 조직 주동자들이 잡혀 갔지만, 드디어 12월 9일부터 서울지역 학교들의 항일시위가 시작되었다.
12월 9일에는 경신학교 학생 300여 명, 보성고보 학생 400여 명, 중앙고등보통학교 700여 명,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 협성실업학교 학생 15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12월 9일 하루에만 1,200여 명의 시위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2월 13일까지 서울지역에서만 1만 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 동맹휴학에 참여하였고, 그중 1,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중 서울 지역에서만 45명이 구속되고, 이 가운데 35명이 최종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신간회는 이 광주학생 시위운동을 전국적 항일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2월 10일 권동진(3.1운동 시 33인중 1인), 허헌, 동아일보사장 송진우,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 조병옥, 홍명희, 한용운, 주요한 등이 대책회의를 갖고, 12월 13일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회를 갖고, 곧바로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운동을 갖고, 지방지회에도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지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일본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12월 13일 아침 6시 신간회 주요간부 30여 명을 예비 검속하여 서울의 진상발표회는 열리지 못했지만, 지방지회에 보내는 지시문은 이미 전달되었다.
일제는 12월 28일까지 언론 통제를 단행하여 학생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고,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대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각종 탄압에 대한 소문과 풍문이 더욱 커지면서 그동안 응축 되었던 항일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전개과정은 "약소민족해방만세!, "제국주의타도 만세!,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라는 구호를 사용하여 일제 경찰이 사상운동으로 몰아붙일 만큼 학생운동의 지도부들은 당시 러시아혁명 이후 유행하던 사회주의 이론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학생운동의 원동력은 무엇보다 민족적 차별과 억압에 맞서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분노와 우리 민족의 독립적 삶을 되돌려야 한다는 의기에 바탕을 둔 건강한 청년정신으로부터 발로였다.
1930년 3월초까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시위 만세운동이 계속되었고, 이 학생독립운동은 만주지역의 한인 거주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처음에 참여인원의 학생이 주축이기는 하지만, 각종청년단체, 노동단체, 신간회, 해외 독립운동단체, 해외 피압박민족해방운동관련 옹호 지지운동단체, 반제동맹이나 중국공산당, 중국국민당의 각종 기관들, 해외조선인들이 만든 재만한족연합회와 같은 기성단체들 까지 퍼져 나갔으니 규모나 역할의 성격이 가희 국제적이었다.
그러나 광국은 큰아들 재명이나 작은아들 재운 모두 공부를 시키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무언가 가르쳐야 갰다는 생각 보다 호구지책에 여염이 없어서 그냥 무지렁이로 방치한 상태로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작은 아들 재운은 생각이 있었는지 밤에 동내 서당에 가서 천자문을 떼었는데 그나마 선생이나 그 누구에게도 책거리조차 못해주자 제풀에 주저 않고 말았다.
아이가 배우려 할 때 격려해 주고 배움만이 어려서 지향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심어 주어야 했는데 광국 조차 어려서 철부지 때 홀로 자라다시피해서 아이들을 방치했다.
그러니 아이들이란 그저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은 아니어도 교육에 힘쓸 여력이 전혀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겨우 야학이라는 것을 접하고 한글 정도를 배워서 이야기 책정도만 읽는 게 아이들에게는 배움에 끝이었으니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그저 관에서 내붙이는 공고문 정도였고 그나마 모르면 뭐라고 쓰여 있느냐 하면 그걸 술술 읽어 내면 으슥할 정도로 교육이 되어 있지 않고 천둥벌거숭이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못 배운 사람들은 공부 한답시고 시위나 한다며, 배부른 자들이 하는 밥투정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으나, 1029년부터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운동을 전개하였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호응을 얻고 있었다.
이에 1931년 인촌, 고하, 춘원 등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으로, 이는 농촌에도 소학교와 중등 학교를 세우고, 나이가 많은 고령자와 장년층을 위해 야학을 설치하여 글과 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대학생들과 대학 출신 인텔리들에게 이를 호소했고, 이들의 호소에 심훈, 최용신, 곽상훈, 박순천 등의 대졸 출신 인재들이 각지의 농촌으로 가서 봉사, 계몽활동을 하게 된다. 1931년 7월 동아일보에서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학생들도 동아일보의 후원을 얻어 ‘브나로드’라는 슬로건 아래 농촌계몽에 나섰다.
이 운동은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강연대· 학생기자대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학생계몽대는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하여 한글과 산술을 가르쳤고, 학생강연대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술강연·시국강연·위생강연을 담당했으며, 학생기자대는 고교와 전문대학생으로 구성되며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도록 하였다.
인촌, 고하, 춘원 등은 각종 계몽과 칼럼을 통해 실력 양성이 한국인들의 살 길이고, 실력 양성을 위해서라면 일단 문자와 말과 글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심훈, 나혜석, 허정숙, 최용신, 심대영 등의 청년 지식인들과 수많은 청년 지사들의 동참으로 한국인의 언어, 문자 식자 율은 1910년 10%에서 1936년 무렵에는 65%까지 상승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 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김성수, 송진우와 동아일보 등을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하였지만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해 1930년 3월12일에는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소금 사티아그라하라는 비폭력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일제가 비교적 다른 식민지에 비하여 고분고분 하다고 믿었던 타이완에서 일제군경과 원주민 아타얄족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원인은 원주민 아타얄족을 반징 또는 세이방 등으로 부르면 중국인에 비하여 야만인 취급을 하면서 그들이 살고 있던 땅을 개발의 명목으로 강제이주 및 강제 노동을 강요 하고 있었는데, 1930년 10월 9일, 순찰중이던 일본인 경관 가츠히코 요시무라는 아타얄족의 족장 루다오 바이의 손자결혼식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신랑이 전통잔에 포도주를 따라 경관에게 친절히 권하자, 요시무라는 "금수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따르는 잔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호의를 거절당한 체면 때문에 거듭 잔을 받을 것을 권하던 족장손자에게 요시무라는 곤봉으로 두 차례 구타했고, 이에 모욕감을 느낀 다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경관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훗날 요시무라의 법정증언에 따르면 그것은 "비 위생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그 다음날 족장손자는 경찰서를 찾아가 사죄와 함께 사과의 뜻으로 포도주를 바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일본군경과 원주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10월27일, 족장 루다오 바이는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 우셔 초등학교에서 열린 육상경기에 참석하러 온 일본인들을 습격하였는데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대만인을 살해됐고, 215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경찰서 우체국, 및 다른 식민지 관청 등이 습격당했고, 일부 개인 화기와 탄약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군의 즉각적인 보복이 시작되어 경찰과 군대로 토벌대가 조직 되었다.
또한 일제는 이간질 정책으로 아타얄 부족과 적대관계에 있는 타 부족이나 이탈한 아타얄 족 등을 살려주겠다고 꼬드겨 포섭했다.
11월 중순경에 일본군은 공중에서 무장이 빈약한 아타얄족을 상대로 독가스가 주입된 산탄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이에 12월 1일 족장이 자살했으며, 봉기는 3주 동안 지속되어 총 50일 동안 저항이 계속되었다.
일제의 기록에는, 약 700명의 아타얄족이 죽거나 자살했으며, 500명이 항복해왔으며, 추가로 항복한 200명은 일본군 측에 가담한 반란 아타얄족의 손에 죽었다.
일제는 항복한 아타얄족의 신변보호를 책임져야할 입장에 있으면서 방관을 했으며, 남은 생존자들은 작은 보호구역에 갇혀 엄중한 감시 하에 놓이고 말았다.
항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우서지구는 일본의 식민지배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성공적인 지구로 평가되고 있었던 만큼, 일제는 큰 충격에 빠졌으며, 원주민 정책을 무단 통치에서 일종의 문화 통치로 변환하여, 원주민의 호칭을 노골적인 반징에서 고사족이란 명칭으로 바꾸고 조선인, 만주인 등과 같은 외지인과 동렬로 놓았다.
그렇게 해가 가고 1931년 새해가 되었다.
5월에는 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 민족주의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된 신간회(新幹會)가 해체 되었다.
이 단체는 전국구는 물론 해외 지부까지 두고 있는 단체로 회원 수가 3~4만여 명 사이에 이르렀던 대규모 단체로,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조선민족운동의 대표단체로 발족했다. 사회주의계, 천도교계, 비타협 민족주의계, 기타 종교계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으나, 자치운동을 주장하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창립총회에서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그리고 안재홍, 신석우, 문일평을 비롯한 간사 35명을 선출하고, 조직 확대에 주력, 1928년 말경에는 지회 수 143개, 회원 수 2만에 달하는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다.
한편 1928년 코민테른은 제6차 대회에서 민족주의자와의 단절 및 적색노동조합운동 노선으로의 전환을 결의하고, 이른바 '12월 테제'를 발표했다. 신 집행부의 개량화와 '12월 테제'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계는 각 지회를 중심으로 신간회 해소운동을 전개하자, 1929년 6월 말 간사제를 없애고 집행위원회 체제로 개편, 중앙집행위원장에 허헌이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전국적인 민중대회를 준비하던 중 허헌 이하 주요회원이 대거 검거 당하자, 김병로를 중심으로 하는 신 집행부가 구성되었으나, 결국은 반년도 못가서 1931년 5월 전국대회에서 解消(해소)안이 가결됨으로써 신간회는 해체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좌우익의 갈등은 적잖게 있었으나, 신간회는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 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주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아 전국에 지회와 분회를 조직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31년 신간회 해체 이후 사회주의계는 중요한 합법적 활동무대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후 국내에서는 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지 못했다.
회원 중 농민의 숫자가 가장 많아, 1931년 5월 4만 9천여 회원 중 농민이 2만여 명, 54%를 차지했었을 정도였다.
6월20일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은 배상금 지불로, 당시 배상금은 1,320억 마르크라는 엄청난 금액을 연차적으로 분할지급하고 있었으나, 자금의 대부분은 외국으로부터의 단기차입금으로 충당하던 중, 1930년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 정치의 불안은 가중되고 외국 단기자본의 인상·유출이 격화, 독일은행은 차례로 도산하였고, 환시세의 폭락·화폐금융제도의 대혼란 등 비상사태가 발생, 이에 1931년 세계공황의 심각화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의 대통령 후버가 유럽 제국의 대미전채(對美戰債)에 대하여 1년의 지불유예를 제의 하였다.
7월2일에는 중국 만주 지린 성(吉林省) 창춘 현(長春縣) 싼싱바오(三姓堡) 만보산 지역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한국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일어난 충돌 및 유혈사태(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가 발생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래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만주 등지로 이주하였는데, 일본은 중국 동북지방에 이주한 한국인 농민들을 구실로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만든 사건으로
일본은 중국인 하오융더(郝永德)를 매수하고 자금을 투자하여 만주 창춘시에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고 그를 지배인으로 앉혔다.
1931년 4월 16일 하오융더는 만보산 지방에 있는 소한림(蕭翰林) 등 11인의 소유 토지 가운데 미개간지 약 200ha를 해당 지주와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을 하였다(단, 이 계약에는 현(縣)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4월 중에 하오융더는 현(縣)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지 않고, 이 토지를 한국인 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8인에게 10년간 조차계약을 체결하였고, 이승훈은 이 계약을 근거로 조선인 농민 180여 명을 이 지방에 이주시켜 개척에 착수했다.
개척 작업에서 가장 먼서 시작한 것이 이퉁강(伊通河)을 통하는 관개수로공사였다.
문제는 이 수로 개척과 제방 축조가 타인의 토지인 부근 농지에 미치는 피해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토착 중국 농민들이 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현(縣) 당국에 탄원·진정하여 공사 진행을 강제로 중지시켰다.
계약서상에 분명히 현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일본의 대리인인 하오융더와 중국인 지주 간 계약이 무효가 되고, 한인 농민들의 개척사업 또한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 소속 경관 6명이 이 공사를 강행하고, 일본 경찰 60명이 중국 농민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하여 이 수로공사는 1931년 6월 말에 준공되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중국 농민 약 400여 명이 7월 1일에 봉기하여 이 관개수로 약 2리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써 현장에 있던 조선족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한국인 주민 사이에 일대 충돌이 일어났다.
7월 2일 장춘의 일본 영사관은 무장경찰관 15명을 파견하였고, 중국 측도 300명의 경찰관을 파견하였다.
이에 다시 일본 경찰은 무장경찰관을 증파하였고, 이들의 경계 아래 개간공사를 진행시켜 7월 6일 공사를 완성하였다.
일본 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였으나, 약간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에 중국 국민당정부 측은 일본 측 대응에 강경하게 대항하였으나 일본은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매한 태도만 취하였다.
일본 영사 경찰서는 한국인 다수가 살상되었다는 허위정보를 제공하였으며, 조선 내 신문들은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오보를 하면서, 조선 내에 거류하는 중국인을 적대시하는 운동을 도발시켰다.
조선일보는 7월 2일 호외로 '만보산에서 중국농민과 조선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는 보도를 했다.
이는 조선일보의 장춘지국의 조선인 기자 김이삼이 전한 것으로 그는 이 정보의 진위를 가리지 않고 타전했다.
이 때문에 인천을 필두로 경성·원산·평양·부산·대전·천안 각지에서 수천 명이 하는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며, 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잔인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일제는 조작된 기사를 보도하게 하였고, 부산과 천안에서 불량배를 매수하여 폭력행위를 조장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동아일보》 등이 오보임을 알리고 진정을 호소하는 보도로 7월 10일 이후로 진정되었으며, 이후로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가 급감하였다.
이상하게도 첫 보도를 내었던 조선일보 기자 김이삼은 정정보도와 사죄문을 조선일보에 발표한 다음날 조선인에게 피살되었다. 김이삼이 일본의 특무기관에 의하여 살해당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폭동으로 인해 127명(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만 94명)의 중국인 사망자가 있었으며, 부상자가 400명이었고 손해는 250만 원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본질은 만주에 세력을 형성한 중국 민족운동 세력과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의 반일 공동전선투쟁에 대해 중국인과 한국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려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였으며, 이를 만주 침략과 대륙 침탈의 발판으로 삼고 국제적으로는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경찰은 이 사태를 방관하는 한편, 형식적으로 제지의 태도를 보였으나 극히 소극적이고 냉담하였다.
그러나 일단 이 폭동이 가라앉자 총독부 당국은 단호한 태도로 광범위한 검거를 시작하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조선인 배일운동이, 일본에서는 만주 침략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만주사변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중국에서는 조선인의 폭동은 만몽 침략정책을 가진 일본제국주의가 고의로 선동, 촉발한 것이라고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거센 배일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의 국민당 기관지인 중앙일보와 민국일보 등은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배일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중국과 조선 독립 운동가들은 연합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미국의 독일에 대한 전쟁보상금 일 년 지급 유예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다나트 은행이 문을 닫아서 금융공항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만보산사건까지 일으켜 만주 침략의 구실로 삼으려던 일제는 이전부터 침을 흘리고 침략의 구실을 얻기 위한 몇 번의 시도가 있었다.
1927년 장제스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운동'을 개시하면서 점차 봉천파의 군벌 장쭤린을 압박해왔고 그는 이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조만간 베이징을 점령할 것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그러자 막후에서 그를 지원하던 일본정부는 결국 장쭤린에게 베이징을 국민당에 넘겨주고 퇴각하도록 권고했다.
다나카는 중국 북부에서 만주로 철수하도록 장쭤린에게 압력을 가했다.
만주에서는 일본군이 그를 보호할 수 있기에 장쭤린은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그렇지만 일부 관동군 참모들은 이 조치에 계속 불만이었고, 괴뢰정부에 제공하는 것 이상의 직접 지배권을 만주에 요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일을 벌일 구실을 꾸미기로 결심하였다.
고모토는 장쭤린이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장쭤린을 제거하기로 하고, 고모토의 직속 부하로 하여금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돌아오는 장쭤린의 남만주 철도기차를 폭파하여 그를 암살(1928년 6월 4일, 장쭤린 폭살사건)한다.
이 사건은 사실상 고모토가 의도했던 일본의 만주 개입을 유발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고모토의 상관이나 도쿄의 내각은 그러한 그의 행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모토는 간신히 군법 회의를 면했다.
장쭤린이 관동군의 계략으로 피살됨으로써, 관동군과 봉천파 간의 협조 관계는 종결되었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도 북경을 점령한 뒤 청일통상조약(1896년)을 폐기한다고 일본에 통고하였다.
이는 국민당 정부가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배일공세를 취하기 위한 신호였다.
일본에 반감을 가지게 된,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년)하게 되자 만주에서도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제국주의적 이권을 다시 회수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쉐량 정권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여순·대련의 조차지 및 남만주 철도의 회수, 영사재판권 철회, 일본에 의한 철도부설권 및 탄광개발권 확장에 대한 반대, 일본인·조선인에 대한 가옥임대료 및 소작료 인상 또는 계약갱신 거부 등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일본인의 동북 지역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중국 국민정부에 의한 만주철도포위선 건설계획에 만주철도의 이권을 위협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 투자된 외국 자본 중 70% 이상이 일본의 자본이었을 정도로 일본은 만주 경영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1929년 발생한 세계 경제대공황(1929~39년)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남만주 철도 영업도 부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국권회복운동과 소련의 제1차 5개년계획의 진척 등의 상황으로 인해 일본은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것을 <만·몽의 위기>라고 선전하고,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관동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시데하라 외교(당시 일본 외무대신인 시데하라 기주로의 국제협조노선에 바탕한 경제외교)의 연약함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무력에 의한 동북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아예 점령하는 것만이 일본의 유일한 활로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보면 만주사변은 사실상 관동군의 독자적인 결정인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어 만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우가키 가즈시게의 부하 혼조 시게루 중장은 관동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8월 20일 뤼순의 관동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만주 침략을 위한 작전의 시나리오는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인 이시하라 간지, 관동군 고급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 단 세 명이 모여서 이들을 중심으로 <만몽영유계획>이 모의되었다
세 사람은 죽이 잘 맞았고, 그들은 곧 만주침략 공작의 선봉에 나섰다.
혼조는 부임하자마자 봉천과 장춘 등지를 시찰하고 9월 18일에 돌아왔고, 같은 날 일본제국의 관동군이 중국의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어졌다.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류탸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 지휘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개시하였다.
관동군은 장쉐량의 군영인 북대영과 펑톈 성(奉天省)을 공격(19일 새벽)하였고 이튿날 펑톈시를 비롯하여 만주철도 근처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관동군 입장에서는, 대공황으로 구미열강들의 간섭이 어려운 사정을 이용하고 장쉐량은 베이징에, 또한 봉천 군벌의 주력이 장성선 이남에 집결하고 있어 잔류 수비대가 동삼성에 분산되었던 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도 난징의 국민정부는 사건의 확대를 막기 위해 결코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지했다.
베이징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장쉐량은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방침을 취했다.
관동군은 동대영, 봉천비행장 등을 손에 넣고 며칠 안 가서 지린성까지 수중에 넣었다.
이로써, 관동군은 만주침략 작전을 시작한지 5일 만에 랴오둥, 지린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개의 성을 중국으로 부터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9월21일에는 일본의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에 의한 독단 월경으로 전쟁은 남쪽 만주지방 전체에 확대되었다.
일본 정부는 군사행동의 정당성과 이후 전쟁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사건을 공인하였다.
그러고도 10월에 진저우를 폭격하고 만주 남부를 점령하자 국제연맹은 중국측의 제소에 따라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보고서를 채택, 10월24일 일본군의 만주 철병(撤兵) 권고안을 가결시켰다.
이에 당초 만주 몽고 지방을 영유하려고 계획했던 일본 관동군은 만주 지배방식을 괴뢰국가 수립으로 변경하여, 1931년 10월 <만몽공화국 통치대강안>을 세워 통치방침·정부조직 등을 결정하고 각지의 군벌과 군인에게 지역적인 독립정권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11월에는 톈진에 망명 중이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탈출시켜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로 삼을 준비를 추진하는 한편 계속 확전을 하고 있었다.
첫댓글 그 때 그시절을 직시 하지 않으면 않되겠군요. 아직도 요리조리 틈만 보이면 침략근성을 못버리는 일본정치 지도자들이 문제 인데 올바를 교육이 올바를 역사관을 가지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사가 가르쳐 주는데 아직 먼 인본 지도층이 하는 짓이라고는 역사를 외곡해 다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있으니 역사을 읺은 그들을 그냥 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