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현비마마드십니다."
이른 봄의 오후, 늙은 환관의 마르고 가는 목소리에 용상의 청년이 읽던 상소를 접으며 돌아보았다.
비단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앞에 가는 선의 그림자가 허리를 숙였다.
이게 누구야? 1년 반새에 이리 컸나? 인형이 아니라 선녀같군.
"현비마마 폐하께 문후를 여쭈시지요.."
"신첩..황상을 알현하옵니다."
작지만 고운 목소리가 어전의 공중에 울려퍼졌다.
갓 스물을 지난 젊은 황제는 미소지으며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현아 ,이리오너라.."
열다섯의 소녀는 다람쥐처럼 달려가 황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오라버니 ..보고싶었어요."
"마마..폐하께 예를 잃으시면 아니되옵니다."
곁에서 질급한 상궁과 환관이 소리쳤다.
-귀찮군.-.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 물러가라.현비와 둘만 얘기하겠다.."
그는 그의 동공에 비친 모습의 소녀를 팔에 힘주어 안더니 품안에서 이리저리 돌려보고 등을 어루만졌다.
둘만 남게되자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봉관을 좀 벗어야겠어요.너무 무거워 목이 부러질지도 몰라요."
"네 머리가 일년반새에 무척 길었구나."
그가 그녀의 탐스러운 검은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가 투덜거렸다.
"가체위에 봉관을 써보세요.얼마나 무거운지.."
"네 머리칼이 워낙 숱이 많아서 가체를 얹은지 몰랐구나.
가체는 풀지말아라.잠시 뒤 태후께 인사올리려 가야하니.."
황제는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더듬어 옥과 진주를 박은 봉관을 탁자위에 내려놓았다.그가 잠시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목뼈가 부러지지는 않았군.
커갈수록 예뻐지리라고 여겼지.이런 아이를 어떻게 시골구석같은 왕부에 내버려둔단 말이야?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궁으로 부르신거죠?"
"왕부에 혼자 남아 무엇하겠느냐?너는 짐이 그립지 않더냐?"
"항상 그리웠지요.하지만 궁에서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어요."
"나도 궁에서 살기바라지않았다.용상에 앉으면 천하의 고민을 다 짊어져야 하는 법이니.."
순간 총명한 소녀는 황제의 얼굴에 스친 외로움과 고통을 놓치지않고 보았다.
"오라버니..힘드신가요?태후마마가 권력욕이 지나치시다던데..황후와 친정가족들이 고관대작을 독점하고 조정에서도 횡포가..."
황제는 쓸쓸히 웃었다.
"짐이 적통이 아니니 지금은 누를 힘이 없구아.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하니..기다려봐야지.."
그의 백모였던 태후는 첫아들이 삼년전에 황위에 올라 얼마안되어 역병으로 죽고 둘째아들이 황위에 오르자마자 사냥터에서 사고로 죽자 조카였던 그를 양자로 삼아 황위에 올린 것이다.당연히 황후와는 정략결혼인만큼 그가 원하던 혼인이 아니었다.
"왕부에 계실 때는 명랑하셨는데.."
"언제까지 아이같겠느냐..너도 이제 황궁의 비빈이니 법도를 따르고 얌전히 지내야해."
"언제 입궁시켜달라고 졸랐나요?황궁은 숨도 제대로 못쉴만큼 법도에 매인 곳인데 새장같은 데 저를 가두려고요?"
그녀의 따지는 듯한 어조에 황제는 변명하듯 말했다.
"현아도 방계라지만 황실핏줄인데 ..어찌 어린 처녀가 왕부에 혼자 지낼수 있느냐?조모님도 돌아가셨으니..왕부에 웃어른이 아무도 없지않느냐? 어찌 천애고아같이 혼자 빈 집을 지키고 있겠느냐?"
"아버님이 계신데 천애고아라니요?"
"출가하신지 십년이 더 되었잖느냐?가끔 강남의 사찰에서 연통이나 오느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 왕부가 아니라 여기가 네집이야.짐곁에 있으면 일생 걱정은 없을테니.."
"의식이 족한게 다는 아니잖아요."
"그래..하지만 짐은 돌아가신 이모님께 약속했다.평생 현아를 책임지겠다고..이제 평생 짐곁에서 떠나지않는거야.."
"비빈이 저만이 아닌데 .." 젊은 황제에게는 혼인한지 이태도 지나지않은 황후와 후궁들로서 한명의 첩여와 두명의 미인 모두 셋이 있었다.
"세명 모두 태후가 주선한 이들이고 짐은 그들 처소에 들린 적도 없어.마음쓸 것없어."
황제는 변명하듯 말했지만 그녀는 그의 어조에서 황후및 태후와의 불편함을 빤히 느낄수있었다.
태후가 그때문에 자신을 궁으로 부른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국사에 지쳐 외롭고 우울한 황제를 위로하기위해 같이 자란 6촌 누이동생을 비빈으로 봉해 입궁시키라는 제안을 했다지...
"황후마마와는 어떠신가요?"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지만 황제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 고집센 곰보에대해서는 할말없다.출가해서 절에라도 가주면 좋겠는데.."
"쉿.누가 들으면 어쪄시려고.."소녀는 손가락을 그의 입술에 대었다.
"현비마마..태후마마께 문안드리려 가실 시간이 되었나이다."
밖에서 환관이 목소리를 길게 뽑으며 알려왔다.
황제는 급히 그녀의 머리위에 봉관을 씌웠다.
"얌전히 굴어.말대꾸도 일절말고...태후의 눈밖에 나면 궁에서 숨도 못쉰다.쫓겨나는 것도 시간문제야.왕부에서처럼 멋대로 행동하면 안된다.고집도 부리지말고 ...네주장을 세워서도 안된다.황후보다 내명부실세가 태후야.. 태후는 황후의 고모이니 눈밖에 나지않게 조심하거라."
그의 간곡한 타으름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태후마마를 알현하옵니다."
"정말 항아같이 어여쁜 아이로군."
태후는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며 찬탄하듯 말했다.
스물다섯이 넘은 자신의 조카딸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미소녀였다.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다는 말은 이런 아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검은 숱많은 머리칼아래 반듯한 하얀이마,또렷한 활모양의 눈썹 ,긴 속눈썹아래 유난히 큰 반짝이는 눈동자,오똑한 콧날,석류빛의 작은 입술,장및빛 뺨아래 가는 하얀 목덜미..예복에 휩싸인 중키의 호리호리한 갸날픈 몸은 상아를 깎은 듯했다.분홍빛이도는 예복때문인지 그녀의 모습이 복사꽃을 연상시켰다.
"피어나는 꽃같은 소저로군요."
군데군데 남은 얽은 두창자국때문에 궁안에서도 얇은 면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황후도 한마디했다.
"현비,네 어머니가 황족출신인건 알고 있겠지?방계황족출신이라고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저는 너무 일찍 돌아가셔셔 얼굴도 기억이 안나요."
"네 외조부는 내게 시숙뻘이니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비는 황궁법도를 잘 지키고 황후를 잘 섬겨야한다.황상을 잘 모셔야할뿐 아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만 처소로 물러가도 좋다.소관자.현비를 처소로 안내해주거라.늦었으니 황상도 그만 쉬시지요."
"현비가 궁안환경에 낯설으니 짐이 처소에 데려가 황궁법도를 좀 일러주겠습니다."
"현비를 가르칠 상궁들을 몇 가려뽑아놓았소.황상이 아니더라도 잘 가르칠거요.."
순간 그들은 얼굴을 찌푸렸으나 황상과 현비는 예의대로 절을 하고 물러났다.
"겨우 약관의 나이인데 저리 자색이 고우니 황상이 앞으로 미색에 빠질까 걱정입니다.우미인과 박첩여가 용모가 고운 데도 황상은 쳐다도 보지않으시더니..."
질투를 누르고 있던 황후가 마침내 폭발하듯 입을 열었다.
"아직 어린애아니냐?뭘 그리 신경쓰느냐?"
"어릴적부터 현비를 왕부에서 키웠다니 정이 보통 아닐것입니다.입궁전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왕부로 선물을 보내셨나이다.."
"황상의 출신왕부가 황족중 가장 가난한 가문이었잖느냐?막내시동생인 부친이 조정의 논쟁에 휩흘려 유배당하고 죽은 뒤 가세가 기울었으니...명예는 회복했다만 후손도 황상밖에 남기지못했으니..."
"황상이 벌써 입궁전부터 처소부터 수리하고 세간을 공들여 장만하라느니 하신걸보면 ..보통 정성이 아니십니다.우미인이나 박첩여는 입궁하고서도 동침은 고사하고 처소가 어딘지 묻지도 않으셨나이다.."
"제왕이 측실을 여럿두는게 어제오늘 대수로운 일이더냐?돌아가신 태상황제께서는 내명부품계를 받은 후궁만 무려 아홉명이었다.하룻밤 시침든 궁녀는 셀수도 없고...얼굴도 생각이 다 안나는구나 ."
"그런데 왜 후사는 없으셨는지..붕어하신 선선황제와 제 낭군이 되셨을 선황을 빼고는 다른 황자도 없으신게 납득이 안되는군요."
"모두 요절했지.두창과 홍역으로 ...후궁들 소생은 열살을 못넘겼다.."
"선황만 용케 스물을 넘기셨군요..하지만 후사가 없으셨으니..갑자기 승하하지않으셨으면 제가 지금쯤 황자를 낳고 혼자 곤녕궁을 지키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밀화야,어쨌든 지금 너는 황후지않느냐?선황의 정혼녀가 그 사촌과 혼인했으니 천하의 여주인자리는 차지하지않았느냐?"
그녀는 본디 둘째아들의 약혼녀였으나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그가 즉위하고 얼마되지도않아 사냥터에서 낙마사고로 급사했으므로 한동안을 독수공방하던 참에 다시금 사촌의 황후로 입궁한 터였다.
"황후면 뭐합니까? 황상께서는 제 용모때문인지 침전에 들어서도 얼굴한번 쳐다도 안보시는데..후궁들도 개가 닭보듯하시니..."
"그만 하거라..이제 물러가 쉬거라."
순간 태후의 얼굴에 스친 얹잖음을 알아채고 황후는 잠자코 태후의 거실을 물러났다.
태후는 한숨을 쉬었다.
용모가 따라주지못하면 인성이라도 너그러웠으면 좋으련만..툭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도 궁녀들을 매를 때리고 처벌하며 후궁들을 이잡듯이 다룬다.
황후의 시달림에 견디지못한 후궁중 하나가 절로 출가하겠다고 애원할 정도였다.회임을 못하는 황후는 황상이 후궁들의 거처로 갈까 노심초사였다.친척동생들뻘인데도..
황후는 얼굴의 얽은 자국이 아니어도 본래 용모가 아름답지는 못했다.자신이 아니었으면 황후간택은 어림없는일이었다.
첫댓글 황후와 대비 그리고 황제의 권력에대한 다툼이 일것만같은 느낌이드네요 잘보구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