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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사] 1. 고조선의 시작
[고조선사] 2. 지도로 보는 고조선의 시작과 발전
[고조선사] 3. (쉬어가기) 기자조선은 정말로 존재했을까?
[고조선사] 4. 패기가 넘치던 왕국(王國), 고조선(기원전 4세기)
[고조선사] 5. 우리 역사 최초의 전쟁 -고조선의 대몰락- (기원전 3세기 초반)'
[고조선사] 6. 고조선 부활하다(기원전 3세기 후반)
1. 고조선의 난민 유입 정책이 이어지다.
준왕은 진한 교체기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 유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고
나아가 압록강 유역까지 고조선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준왕은 영토를 확장했고, 부여는 잘못 들어갔다)
난민의 유입 정책은 고조선의 성장에 대단히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정책이 문제를 일으킬 줄이야?!
2. 위만의 망명
기원전 195년 한나라 고조 유방으로부터 연나라 왕으로 임명된 노관이 흉노로 망명합니다.
왕이 망명을 해버리니 이 지역에 혼란이 왔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가운데에,,
연 지방에 살던 위만은 고조선으로 망명합니다.
관련 기록을 보시죠.
<사기> 조선열전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였다.
무려 천여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공지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위략>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간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짧은 기록이지만 여러가지를 두루 살펴보아야 하므로 하나씩 보시죠.
첫째는 위만이 천여인을 모아 고조선에 망명했다는 겁니다(사기).
천여명 고조선 망명길에 위만이 우두머리로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위만이 연 지방에 있을 때부터 나름대로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이끄는 통솔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구요.
둘째는 위만이 '패수'를 건너 고조선에 갔다는 겁니다(사기, 위략).
고조선은 기원전 202년 패수(압록강으로 추정)까지 영역을 확대하는데
위만이 망명하는 기원전 195년에도
여전히 한과 고조선을 가르는 국경이었음을 상기시켜 주네요.
셋째는 위만의 망명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기>, <위략> 모두 위만의 망명 목적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은 진한 교체기부터 꾸준히 수십년간 중국 유민을 받아들였습니다.
위만도 중국에서 혼란이 벌어지니 고조선으로 온 것 아닐까 하네요.
특히 연왕 노관의 망명으로 인해 혼란이 벌어진 걸 염두하고요.
넷째는 <위략>이 위만을 연나라 사람이라고 명시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은 위만을 철저하게 중국인으로 봤습니다.
이에 이병도와 같은 한국 학자들은
위만이 고조선의 복장을 입었다는 것을 근거로
위만을 중국에 거주하던 고조선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는데요.
한국 학계 내부에서도 위만이 고조선에 호감을 사려고 고조선의 복장을 입은 것이지
위만을 고조선 사람이라고 볼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반론이 나왔습니다.
사실 저도 위만이 입은 옷만으로 고조선계 주민이라고 단정하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연이 다스리던 요동땅은 원래 고조선의 영역이었는데,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고조선 사람들이었다는 점,
연의 요동 지배는 주요 거점과 교통로를 따라 이루어졌고,
나머지 지역은 고조선의 특색이 잘 남아있다는 점,
패수를 건너 고조선으로 망명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패수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주한 사람이라고 보는 게 타당한 점을 고려하면
위만이 '고조선계 주민'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사견).
<위략> 위만을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재한 것은
오늘날의 관념으로 비유를 하자면 '국적'이 연나라 사람이란 것이지
'혈통'까지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의 관념으로 위만을 '연나라 국적의 고조선 혈통의 사람'으로 봅니다(사견).
3. 위만의 고조선 정착
고조선에 천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망명한 위만은
준왕으로부터 신뢰를 얻는데 성공합니다.
일단 기록을 살펴보죠.
<위략>
위만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어 주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규(圭)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사기> 조선열전
무리 천여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살았다.
<위략>에 의하면 위만은 준왕에게 중국의 망명자들을 모아
고조선의 중국 접경을 방어하겠다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준왕의 정책은 중국 망명자를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는 것인데
위만의 제안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저의 사견이지만 위만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준왕은 위만을 '박사'로 임명하고 백리 땅을 주어 접경을 방어하게 했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위만이 머문 곳은 진의 옛 공지라고 합니다.
즉, 준왕이 기원전 202년에 새로 개척한 패수(압록강)와
기존 국경인 청천강 사이의 지역을 말합니다.
준왕은 패수를 확보하기 전에도 중국 유민을 국경 지역인 청천강에 살게 하였는데,
패수를 확보한 이후에도 중국 유민들을 새로운 국경인 패수에 살게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만을 패수로 보내 국경을 지키게 한 것 같습니다.
사실 기원전 202년에 새로 확보한 땅을
몇년도 채 지나지 않은 기원전 195년 무렵에
이제 막 망명한 위만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한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변경은 충성심이 강한 부하에게 맡기는 법인데
이제 막 망명한 사람을 무슨 수로 충성도를 판단하고 변경으로 보냈을까요?
4. 위만의 즉위
위만은 세력을 불리기 좋은 입지를 가졌다.
패수를 건너오는 중국 유민을 관리하고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왕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또한 자신도 중국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중국 망명자들의 사정에 밝았습니다.
이런 탁월한 환경 속에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사실 준왕은 위만에 대한 적절한 '감시'를 했어야 했습니다.
막연하게 접경 지역에 봉토를 주고 알아서 국경을 지키라고 하니,
신하가 세력을 키워서 '왕'이 될 생각을 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위략>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준왕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사기> 조선열전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연, 제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세력을 키운 위만은 왕이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에 그는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나라가 열군데로 쳐들어온다."
"왕궁에 들어가 숙위를 청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준왕의 왕궁으로 쳐들어가 준왕을 쫓아내 버리고
고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합니다.
비교적 어렵지 않게 왕위 교체에 성공했습니다.
준왕은 여기서 피난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왕을 칭했다고 하는데요.
준왕의 행적은 [삼한사]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어쩄거나 고조선의 임금이 바뀌었습니다.
위만은 임금이 되고 국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조선'이란 국호를 썼는데요.
의아할 것은 없습니다.
신라도 박, 석, 김이 돌아가며 왕위가 바뀌었으나 국호가 그대로였으니까요.
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후세인들은 이때부터의 고조선을 '위만조선'이라고 구분해 부릅니다.
허나, 저는 국호가 바뀌지 않았음을 근거로 계속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위만의 고조선은 어떤 역사를 이어갈까요?
다음화에서 계속..
[고조선사] 8. 고조선, 전성기를 펼치다(기원전 2세기 초중반)
한울리카 올림
첫댓글 재밌다! 어릴 때 위만조선 부분 읽고 원통했던 기억이 있는데(중국인이 왕위찬탈해서) 이 글 쓴 사람은 연나라국적의 고조선계 사람이라고 보는 것도 재미나네!
재밌다!!! 기원전에도 사람 사는거 다 비슷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흥미롭더라.. 글 올려줘서 고마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