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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6,11-15
11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트라케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폴리스로 갔다.
12 거기에서 또 필리피로 갔는데,
그곳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첫째가는 도시로 로마 식민시였다.
우리는 그 도시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13 안식일에는 유다인들의 기도처가 있다고 생각되는 성문 밖 강가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14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15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일행이 필리피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리디아가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진리의 영을 보호자로 약속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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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는 필리피에서,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와 그의 집안에 세례를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이 당신을 증언하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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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에서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라는 여자와 그의 온 집안에 세례를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께서 당신을 증언하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 주신 갈등과 분열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선교 여정에 관한 의견 차이로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갈라졌습니다(15,39 참조). 이러한 갈등에도 바오로 일행이 선교 여행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호자 성령께서 섭리하셨기 때문입니다(16,7.14 참조).
또한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융성한 로마 식민시(로마시의 특권과 자치권을 보장받은 도시)였던 필리피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세속적인 관습과 맞서는 복음을 적대시할 때도(16,21 참조), 성령께서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유다교 개종자를 뜻함: 13,43 참조) 리디아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이끄셨습니다. 세례를 받고 큰 기쁨 속에 바오로를 집으로 모셔 들이는 리디아의 모습은 하느님을 자신의 천막에 맞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던 성조 아브라함의 정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창세 18,3).
보호자 성령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머무르셨고, 그들이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보호는 그 어떤 갈등도 분열도 고난도 겪지 않게 막아 주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시련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포기하지 않으며 평생토록 그것을 증언할 수 있도록 지켜 주는 것입니다. 까닭 없는 시련과 박해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뜻을 떠올리는 기회입니다. 억울하고 답답할 때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열어 주시고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도록 보호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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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종교적 존재라고들 말합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고, 사람들은 참 다양한 신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신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세상은 늘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데, 실제 모습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류 역사의 책장을 조금만 뒤적여 보아도 신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과 살인을 너무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저마다 또한 종교마다 믿고 따르는 신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믿는 신은 곧바로 적이 됩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종교는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이단이 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서로 죽여 왔고,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오늘 복음의 한 구절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예수님을 죽였고, 누군가는 그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며, 또 누군가는 그리스도를 살해한 사람들이라는 죄명으로 유다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와 신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는 신의 적대자가 됩니다.”
우리 또한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모습이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만들어 낸 하느님과 신앙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참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하루는 내 하느님을, 내 신앙을, 내 교회를 유연한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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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진리의 영’은 보호자, 변호자, 협력자, 인도자, 위로자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클레토스’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진리의 영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도와주시는 ‘보호자’이시며, 억울함을 대변해 주시는 ‘변호자’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도록 필요한 순간에 나를 도와주시는 ‘협력자’이시고, 인생의 길에서 방황할 때 나침반이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시는 ‘인도자’이십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위로자’이십니다.
믿음을 통하여 진리를 품으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기꺼이 “예.”라고 대답하시면서 당신의 신앙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기꺼이 인류의 구세주를 품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기며 살아가신 성모님의 삶은 세례와 견진 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열어 이웃에게 애덕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의 삶이 되도록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끄시고, 진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시며, 성모님과 같은 참된 신앙인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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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읽을 때 간혹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내 편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편으로 갈라서 내 편, 네 편을 갈라서 사고하는 습관입니다. 90년 무렵 회당에서 그리스도인을 쫓아낸 유다 사회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메시아를 포기해서 한 행동이 아닙니다. 유다 사회는 그 누구보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고 따랐으며 찬양하였습니다.
유다 사회가 믿었던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를 거치며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이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유다 사회는 유독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포장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모든 이의 하느님께서 우리만의 문화와 관점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하느님을 따르고 찬미드릴 수 없다는 것을 강변한 것이 유다 사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다 회당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다 사회가 굳건히 간직한 하느님에 대한 유다인들만의 인식의 틀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민족주의의 폐쇄성이 창조주 하느님의 개방성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반대편이라는 폐쇄성이 세상의 다양한 관점과 개방성 속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오늘은 5·18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국립 5·18 민주 묘지에는 저와 같은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하여 저의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타인의 아픔과 불편함, 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곧 자신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모두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모든 사람과 피조물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증언하는 신앙인이니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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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당신을 ‘증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그들에게 ‘박해’도 약속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주님을 ‘증언’하게 되어 세상의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성령을 부를 때 ‘진리의 영’이라고도 하고 ‘증거의 영’이라고도 합니다(1요한 5,6 참조). 성령의 힘으로만 진리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진리로 믿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 사랑을 드러내는 데에는 죽음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이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15,13 참조). 성령께서는 진리를 증언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순교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성령을 받으시어, 당신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진리를 증언하시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말합니다(사도 7,55 참조). 돌에 맞아 죽으면서 스테파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고 기도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듯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이 품고 계신 진리인 사랑의 본성을 드러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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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자,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내다보고 계셨기에 당신 대신에 진리의 영,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였지요.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리다툼이나 하다가, 예수님께서 위험에 처하시자 다들 제 목숨이나 구하려고 도망마저 갔지요. 더욱이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마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처럼 성령께서 오시자 제자들은 완전히 변하고 맙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제자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고, 심지어 죽음마저 당하고 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진정 누구신지, 깨닫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이 이 시대 언어와 문화, 관습을 통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지요. 그런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정성을 다해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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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제자들은 실감할 수 없었겠지만, 그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박해를 맞이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매우 당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정면 돌파를 명하십니다. 모질 정도로 절박한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때가 되면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임을 밝히십니다.
‘기억하는 힘’, 그것은 때로 현실의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이 과거에 누군가 이미 겪었던 일이고, 그 시련을 이겨 낸 오늘의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현실을 견디어 낼 용기를 얻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과거를 기억하여 현재를 받아들일 때 미래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박해를 받게 되면 당신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을 바라십니다. 곧, 보호자이신 진리의 성령께서 당혹해하는 제자들 곁에서 예수님을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회심한 리디아라는 여인도, 말씀에 담긴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했기에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세례 때, 첫영성체 때, 피정이나 교육 등 행복했던 신앙 체험의 기쁨을 ‘기억’하며, 현재의 불행과 슬픔을 이겨 낼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내게 힘이 되는 성경 구절을 외우고, 힘들 때마다 ‘기억’하는 습관을 들여 보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위로의 은총과 용기의 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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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실까?’ 우리 모두 한 번씩 스스로 묻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대답하십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요한 5,12).
예수님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어서 ‘반대받는 표적’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박해자가 되었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의 공동체는 유다인들의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율법 준수를 요구하며 자신들의 전통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올바른 일을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위로자’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의 증오심에 의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때, 그들의 신앙을 지켜 주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그들의 절망과 회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격려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나서며 십자가의 수치를 받아들이는 제자들을 결코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권력자들 앞에서 증언하며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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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필립보 네리 성인은 '기쁨의 성인'으로 불립니다. 성인은 가난한 이들과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살아생전에도 성인처럼 존경받았습니다.
사 람들이 그를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필립보 네리 신부는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친근하게 어울렸습니다. 이러한 그는 고위 성직자들이나 고관대작들에게는 의심이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지만 소박한 시민들과 아이들에게는 더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단순성과 천진무구함, 익살스러움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성품이 고지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잘 헤아려 그들을 깊은 신앙과 영성으로 이끌었습니다. 성인은 완덕이 어렵고 고상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의 인품과 생활로 보여 주었습니다. "기쁨 없는 덕은 참된 덕이 아니다."라는 점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성 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지침을 줍니다. 소탈하게 어울리는 일상의 삶이 완덕의 충분한 토양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작은 일을 통해 큰 덕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헐벗은 어린이처럼 가장 어려운 이웃에 대한 연민과 배려, 사랑의 실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코 제외할 수 없는 주요 부분이라는 점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는 성인의 이러한 삶을 기억하면서 이웃과 만나며 체험하는 작은 기쁨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깨닫습니다. 신앙의 덕은 일상과 떨어진 곳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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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면 누구나 굴레처럼 안고 사는 ‘고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독은 높은 정신 세계를 가진 고등 동물에게만 존재하기에, 인간이면 누구나 숙명적으로 고독합니다. 고독은 우리 인간의 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홀로 있음’의 자리입니다.
고독은 고립과는 다릅니다. 고독은 홀로 있어도 열려 있지만, 고립은 함께 있어도 막혀 있는 것입니다. 고독은 세상 한복판에서도 고요하지만, 고립은 고요 속에서도 혼란스럽습니다. 고독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과 통교하는 장소이지만, 고립은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분열과 단절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자리에서만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늘 고독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 사명을 홀로 감당하시며 사셔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매우 심한 유혹에 시달리실 때도,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난 뒤 군중의 환호를 뒤로하시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실 때도, 그분 삶의 한가운데에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십자가상에서 성부 하느님마저도 침묵하실 때, 예수님의 고독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이런 고독과 친구입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에 시달릴 때도, 사람들에게 얻은 인기와 환호에도,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아 있어도, 고통 중에도, 신앙인의 고독은 삶의 그 모든 순간에 오로지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령께 의탁하며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견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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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공동체는 유다인들의 박해를 먼저 받습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를 자신들의 한 지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 준수를 요구했고, 이방인 교우들에게는 할례를 강요하곤 했습니다. 사도들은 무작정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루살렘에 모여 대책을 논의합니다. 기원후 50년에 열린 ‘사도 회의’입니다.
초대 교회 순교자 스테파노는 유다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는 표현처럼 율법에 따라 처형되었습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순교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화려한 것도 아닙니다. 철저한 고통이며 고독입니다. 혼자 겪는 싸움일 뿐입니다. 신념이 있다고 순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완벽한 은총의 개입이 순교의 본모습입니다.
복자로 시복되려면 기적이 ‘둘 이상’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순교자의 경우에는 순교 자체를 기적의 실현으로 봅니다. ‘하나의 기적’이 채워진 셈입니다. 한편 교황에게는 ‘한 건의 기적’을 생략해 줄 권한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느 나라든 ‘순교 복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듯 순교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것이 ‘큰 순교’라면, 악습을 끊는 것은 ‘작은 순교’입니다. 하늘의 힘을 받으면 결국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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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태보 베드로는 주문모 신부님께 세례를 받고 정약종, 황사영, 강완숙 등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로 피신합니다. 그들은 풍수원에서 함께 살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기록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우촌’입니다.
이후 교우들은 선교사를 청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냅니다. 교황청과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청원서의 서명에는 언제나 ‘신태보’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밀사를 보내는 경비 역시 신태보가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열정적이고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직자 영입은 여러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정해박해’는 1827년 호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해의 여파로 신태보는 경북 상주에서 붙잡혀 전주로 이송됩니다. 가혹한 심문과 형벌을 수없이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주 ‘부윤’은 배교하지 않는 교인은 무한정 옥에 방치해 굶주림과 탈진으로 죽게 했습니다. 신태보 역시 죽음의 고통을 겪으며‘12년’을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1839년, 71세의 나이로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합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너희는 나를 증언할 것이다.’ 복음의 말씀처럼 신태보는 무려 12년을 견디며 예수님의 믿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인내의 순교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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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방인 교회를 돌보며 살았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닌 것이 아니라 아시아 쪽에 살다 보니 로마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동료들의 순교 소식을 듣는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역시 순교 못지않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교우들의 순교 소식도 들었을 겁니다. 어떻게 잡히고, 어떻게 재산을 빼앗겼으며, 어떻게 회당에서 쫓겨나 죽었는지 속속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밀고자들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교우들끼리 서로 고발하고 재산 때문에 배교하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스승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던 것임을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노년의 그는 결코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아름다운 행위지만 현실에서는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끝없는 투쟁이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신념이 강하다고 순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총의 힘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끝까지 견뎌 낼 수 없습니다.요한 사도는 목숨을 바치지는 못했지만 순교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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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을 찾아가서 선교하고, 노동을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며, 그 지역에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그 공동체를 위하여 늘 염려하면서 서간을 통하여 가르치면서 돌보는 선교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필리피를 찾아가 그곳에 공동체를 세웠을 뿐 아니라 유럽에 복음을 전하려고 필리피를 근거지로 삼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증인이 되면 박해가 따르게 될 것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그들을 쫓아내고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요한 복음이 저술될 당시에 교회가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귀담아듣고 특별히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뒤 박해가 사라지고 순교의 기회가 없어지자, 교회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 격랑에 휘말리면서 온갖 위험과 위협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유혹과 위험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인 동시에 십자가입니다. 그 당시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 받게 될 십자가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은 회당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집인 회당에서 추방된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연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분명 고립되고 추방되고 모든 문으로부터 폐쇄당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고독하다는 것은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필요한 요구 조건일 수 있기에 고독과 고립은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1/10은 치매 환자라는 발표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나 희망적인 발표도 있었습니다. 뇌를 활성화하면 그만큼 치매로 기억을 잃는 속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나 악기를 배우거나, 해보지 않던 요리를 하는 것, 낯선 것에 뛰어들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는 것 등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유연해지고 기억력이 활발해진다고 합니다.
문제는 나이가 들어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서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단정 짓습니다. 이런 단정으로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사라지게 만드는데 말이지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것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 필요합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기보다 해야 할 당위성과 함께 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노인들만 가져야 할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노인이 되면 저절로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그런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야, 나이 들어서도 열정을 잃지 않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지금,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해 나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분명히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보호자이신 진리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다가올 박해에서도 꿋꿋하게 이겨낼 힘을 주십니다. 실제로 많은 순교자는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아서 박해의 위협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이렇게 가장 좋은 선물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최악의 순간처럼 보이는 순간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힘센 분이 함께하고 계심에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합니다. 더불어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면서 점점 쇠퇴하는 ‘나’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더 많은 선물을 받은 ‘나’이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나’음을 기억하면서 어떤 순간에서도 열정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걸 말해는 주는 것이다(칼 라르손).
그와 내가 다른 점은(인도 속담 중)
만일 그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를 게으르다 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나는 너무 바쁘고 많은 일에 눌려 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 수다쟁이라 하고, 내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고 하고.
만일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해서라고 하고.
만일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다고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복잡한 다른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나를 친절하게 대하면 나에게 무언가 얻기 위해서 그렇게 친절하다 하고, 내가 그를 친절하게 대하면 그것은 내 유쾌하고 좋은 성격의 한 부분이라 하고.
그와 내가 이렇게도 다르다니 얼마나 딱한가!
사람은 다른 것이 거의 없지요. 단지 내가 스스로 구분하면서 딱한 사람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보호자 성령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큰 수술 받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 있습니다. 보호자의 동의와 서명입니다. 수술대에 오르는 환자 입장에서 누군가가 보호자가 옆에 있다는 것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이겠습니까?
사고뭉치 아이들의 보호자로 사목할 때의 일들이 기억납니다. 제 마음은 언제나 어떻게든 이 아이들 잘 보호해줘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아이들의 든든한 언덕이 되어주고, 어떻게든 아이들을 잘 양육하고,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고, 끝까지 동행해줘야겠다는 책임감도 확고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파출소나 경찰서 참 많이 들락거렸습니다. 죄송하다고, 앞으로는 잘 보살피겠노라고, 이번 한번만 선처해주시라고, 다짐도 하고 각서도 쓰고 그랬습니다. 따지고 보니 ‘보호자’란 말이 참 좋습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혹시 지금 누구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구를 보호해주고 있습니까? 인간 세상에서의 보호자, 노력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가 나를 영원히 보호해줄 것 같지만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때로 그도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점점 노쇠해지고, 오히려 처지가 역전되어 내가 그를 보호해줘야 할 경우도 생깁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큰 행운아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고 흔들리는 보호자로 인한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우리에게는 세례를 통해 더할나위 없이 든든하고 완벽한 보호자를 얻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물론 또 다른 세상에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보호자 성령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진리의 영이십니다. 혼돈과 무질서 속에 살아가는 우리, 늘 흔들리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어느 길이 참된 길, 생명의 길, 영원한 길, 구원의 길인지를 명확히 알려주시는 영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복음 15장 26절)
성령께서 우리 안에 힘차게 활동하실 때 기적 같은 변화를 직접 여러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옥 같은 현실이 살아볼만한 현실로 변화될 것입니다. 미움 덩어리였던 이웃이 사랑 덩어리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선물인 성령의 도움은 아무런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숨 걸고 열심히 기도해야 주어집니다. 충만한 영성생활의 가장 큰 독소들인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분노’ ‘질투심’ ‘완고함’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해야 가능합니다. 성경을 손에 들어야, 영적생활에 맛을 들여야 시작됩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 내면을 가득 채울 때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디서도 얻지 못할 참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 바람이 일어도 바람에 넘어가지 않는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이 끝난 뒤에 시작되는 곳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은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의 결과인 잔잔한 평화와 은은한 기쁨, 진정한 화해와 용서, 일치와 나눔이 이루어지는 내 안에서 시작되는 곳입니다.
끝까지 가려면 내가 나에게 놀라는 삶을 살아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결말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을 통해 오시는 ‘성령’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 즉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버려진 가지처럼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로 살 때 일어나는 일은 ‘세상의 박해’입니다.
박해받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박해와 미움을 받습니다. 빛과 어둠은 물과 기름처럼 합쳐질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는 이유도 역시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 이유 없이 미움을 받을 때 실망하고 절망하여 포기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1)라고 하십니다.
저도 작년과 비교하면 세상적으로 봤을때 인기가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유튜브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인기 때문에 유튜브를 한다, 돈 때문에 한다, 명예욕이 너무 강하다, 업적 주의다,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한다 등 많은 비판이 쏟아집니다.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으니 유튜브를 그만두라는 말까지 합니다. 물론 제가 교만해질까 걱정되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의해 저지당하기 전까지는 이 길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통해 매일 저 자신이 놀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끝까지 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김연아 선수도 그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세례를 받고 묵주반지를 끼며 주님께 의지하였던 이유는 어느 정도 이상에서는 신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고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 과정 안에서 자신이 놀라는 업적을 달성하기 때문에 그것이 즐거워 끝까지 갑니다.
세상 사람들의 의견보다 성령께서 자신 안에서 이뤄내시는 일에 더 놀라기 때문입니다.
산채로 관속에 들어가 땅에 묻혀 일주일을 버틴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높이 24m인 기둥 꼭대기에서 35시간을 안전 장비 없이 서 있기도 했습니다. 또 런던에 가서는 투명상자에 들어가 44일 동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물만 먹고 견디는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끝나고 나니 체중이 25kg이나 줄어있었습니다.
마술사 ‘데이비드 블레인’은 이처럼 의지력이 필요한 묘기를 선보여왔습니다. 고통스럽고 환각이 보이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블레인은 참고 또 참으며 목표를 이뤘습니다. 그는 왜 자기 자신에게 이런 혹독한 고통을 주면서 업적을 이뤄내려는 것일까요?
블레인이 다음으로 도전했던 것은 물속에서 호흡을 참고 버티기였습니다. 세계기록을 세우기 위해 블레인은 1년 동안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물속에서 심장박동 수를 낮추는 법을 배웠습니다. 심신이 완전히 이완되어 심장박동수가 1분에 50회 이하로 떨어졌고 때로는 20회 밑으로도 내려갔습니다. 호흡법을 익혔고 물속에서 ‘명상’하며 움직이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2008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여 만인이 보는 앞에서 세계기록에 도전했습니다. 그때까지의 세계기록은 16분 32초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영장에서 연습했던 것과는 달리 방송국 촬영장은 방해요소가 많았습니다. 촬영을 위해 몸을 바로 세워야 했는데 몸이 고정되지 않아 계속 움직여야 했고 유리 밖으로는 청중이 보고 있었으며 스텝진이 부주의하고 심장박동 모니터를 가까이 두어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긴장이 되자 심장박동 수가 줄지 않고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50회 이하로 내려가야 하는데 시작 2분 후 맥박수가 130까지 증가했습니다. 8분이 지나자 벌써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10분이 지나자 사지에서 피가 돌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습니다. 13분이 지나자 팔에 감각이 없고 가슴에 통증이 왔습니다. 숨을 쉬고 싶은 충동에 블레인은 기절 직전이었습니다.
15분 후, 심장박동이 거칠어졌습니다. 맥박수가 150에서 40으로 다시 100으로 오르내렸습니다. 심장 발작의 징조였습니다. 16분, 블레인의 몸이 살짝 떠올랐지만, 블레인은 기절할 것 같은 느낌 속에서도 몸을 수면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고통과 충동 속에서 사경을 헤매다 청중의 환호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계기록을 깼다는 의미였습니다. 블레인은 시계를 한 번 쳐다본 후 그로부터 1분 후, 세계기록 17분 4초를 달성하고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출처: ‘온갖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법’, 유튜브 채널, ‘책그림’]
데이비드 블레인은 그 지독한 고통과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자기 의심과 최악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버티며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훈련’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절제 훈련을 해 왔습니다.
추운 날에 티셔츠 한 장만 걸친 후 몇 킬로미터씩 걸어 다녔고, 침대 대신에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잤고, 옷장 안에서 꼬박 이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1살 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나흘 동안 물만 마시며 단식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고행을 왜 하는 것일까요? 업적을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을 이기는 힘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에 매번 놀라워합니다. 자기만족이 아니면 타인에게서 오는 만족만으로는 이런 고행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아테네의 위대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리빵을 산해진미보다 더 맛있게 먹었고 시냇가에서 길러온 물을 와인보다 더 달게 들이켰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인간이 욕구에 복종하여 욕망을 통제할 줄 모르는 탓에 마음의 평온을 찾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데이비드 블레인은 말합니다.
“안락함을 부수는 공간이 제겐 항상 성장의 장소로 다가옵니다.”
오프라 윈프리도 자신을 이긴 위대한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어렸을 때는 험한 인생을 살았지만, 책 읽기와 감사일기 등으로 이겨내며 최고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사람들의 작은 비판이나 작은 실패에도 금방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녀를 버티게 만든 것은 자기를 이기는 신기함이었습니다. 그 신기함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고 절대적인 존재에게서 온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신비로운 힘을 우리는 ‘성령’이라 부릅니다. 성령께서 우리 자신을 이기게 하고 우리 힘으로 이뤄낼 수 없는 일을 하시며 우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하십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매일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이들은 세상의 평판과 실패 등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끝까지 가게 만드는 요인이 외부에 있지 않고 바로 자신 안에서 흘러넘치는 성령의 힘에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가려면 성령의 힘으로 내가 나를 십자가를 통해 극복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무는 햇빛을 받아 양분을 만듭니다. 보이지 않는 빛을 보이는 양분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이것을 ‘광합성(光合成)’이라고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서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빛은 어디에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의 빛, 믿음의 빛, 사랑의 빛을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는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였습니다.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사도들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3가지 영양소가 있습니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입니다. 이 영양소가 있어야 우리는 활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3가지 영양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신앙선조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나는 교만과 방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만족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니 좋았다.” 삼라만상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만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고, 만족하셨습니다. 만족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소유함으로 만족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하는 집, 차를 가지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존재함으로 만족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지순례나 여행은 체험과 경험을 가지는 것입니다. 선행과 봉사는 기억을 가지는 것입니다.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을 통해서 만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존재의 삶을 통해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관계의 아름다운 모습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입니다. 복음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은 은사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이 열매 맺도록 이끄십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병자를 치유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언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이웃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가족, 이웃, 자연과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협조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 성령께서 보내 주신 ‘협조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벗이 나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
너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 될 때
오히려
굳건하게
나를 안다고 말해 주렴
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너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 될 때
오히려
오롯하게
내 곁에 있어 주렴
나를
죽이는 것이
너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 될 때
오히려
떳떳하게
나와 함께 죽어 주렴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월요일>(2021. 5. 10. 월)(요한 15,26-16,4ㄱ)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
이 말씀은,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성령을 받게 되면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고 당신을 증언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제자들(신앙인들)을 지켜 주시는 ‘보호자’이시고, 복음 선포와 증언을 도와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여기서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직접 예수님을 증언하신다는 뜻은 아니고, ‘제자들을 통해서’ 증언하신다는 뜻입니다.
‘처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복음의 원천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에게서 ‘직접’ 받았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령의 증언과 사도들의 증언으로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증언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증언과 사도들의 증언은 사실상 하나의 증언이고, 같은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유의지 없는 로봇처럼, 또는 자동응답기처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1-2).”
이 말씀에서 ‘이 말’은, 앞의 15장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세상의 미움에 관한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여기서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사람들, 또는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실 때 복음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회개’도 선포하셨습니다(마태 4,17).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사실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고, 그들은 자기 인생과 생활을 바꾸기를 싫어한 사람들입니다.(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회개와 변화를 거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말씀이 듣기 싫어서 예수님을 박해했고,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박해합니다.
(자기 스스로 ‘죄 없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도 회개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런 사람들도 예수님을 박해했고, 신앙인들을 박해합니다.)
<만일에 회개하라는 말을 하지 않고, 복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그런 식으로 강론이나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인기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회개하라는 강론이나 설교는 인기가 없습니다. 그냥 인기가 없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박해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루카 24,47). 인기가 없어도, 박해를 받아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회개 선포를 계속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신앙인들)이 받게 될 미움과 박해를 미리 예고하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박해를 미리 예고하신 것은 그 일들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뜻이고, 그 일들에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이 작용한다는 뜻이고, 그 일들이 하느님 손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박해자들이 하는 일들이 하느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궁극적인 승리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신앙인들 쪽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심한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또 회당에서(공동체에서) 쫓겨나더라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예고하신 말씀인데, 그들은 ‘하느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박해자 시절의 모습을 보면, 그는 실제로 하느님을 위한 열성으로 교회를 박해했고,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3).”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시절의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서 무엇이 정말로 하느님을 위한 일인지를 깨달았고, 그래서 나중에 그 박해는 모르고 한 일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1티모 1,13).
박해자들이 자신들의 어떤 신념이나 확신 때문에 박해를 하는 경우에, 그 신념이나 확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박해를 받는 입장에서는 그 박해는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런 경우에는 박해자들보다 더 강한 신념과 확신으로 맞서야 합니다.
(맞선다는 말이 맞서 싸운다는 뜻은 아닙니다.) 박해 때에는, 또는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에는, 평소에 가지고 있던 믿음보다 더 강한 신념과 확신이 필요합니다.
자기 신앙에 대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가톨릭교리 핵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삼위일체는 가톨릭교리 핵심이며 예수님이 직접 알려주신 핵심입니다.
사도들이 믿음으로 난관을 이기면서 증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돌아가신 후의 일들을 예언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이었지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모르는 자들이 오판할 것을 예언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처형 앞의 분위기는 지금 이 세상의 현상과 같습니다.
지금도 하느님모르는 권력자들이 국민들의 존엄성을 짓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활동은 지금도 신앙인들께 용기 갖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요한복음 말씀은 전체적으로 영성적 깊이가 있어 알아듣기가 너무 힘들다. 유한한 우리에게 영원한 말씀은 안갯속이다.
영성의 깊이가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매일 말씀묵상을 깊이 있게 하던지, 체험을 통해 말씀을 꿰뚫던지 해야 한다. 그런 기반 없이 범인으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로 시작한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까지 심오함이 와 있다. 어찌 건성만으로 이 심오함을 알아듣겠는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이 있고 고통이 있어야 기쁨이 있다. 이 말씀을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천천히 보여주셨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신앙은 뜬구름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만남은 내 힘만으로 안 된다. 아버지로부터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명오를 열어 주어야 한다. 명오가 열린다함은 성령의 도움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활신앙은 신앙생활의 꽃이며 열매이다. 부활신앙으로 매 미사에서 ‘아멘, 할렐루야’를 스스럼 없이 힘차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를 잃은 제자 외에는 모든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했다. 말씀의 진행이 제자들에게 위험이 닥치더라도 떠나지 않게 해 주시가 위함이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결정적으로 알게 된다.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십자가와 고통에 직면해도 만인 앞에 담대히 주님을 안다고 증언하게 된다. 주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다.
당장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되삭임질 해보라. 신앙생활에서 제일 먼저 해야할 기초작업이다. 그리고 항구히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을 살아 보라. 내가 과정에서 정도에 이르면 진리의 성령께서 꼭 오신다. 신앙생활 하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겨나는 데 말씀이 어려워 시작된다.비록 발바닥 신자라도 발이 달토록 발품은 팔아 보라. 기초가 생겨나고 어느날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고 살아계신 하느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을 향해 외친다. 드디어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고 증언하게 해 주신다.
유한한 생명이라도 심어 보라. 생명의 소중함을 알아간다. 그러다 영원한 생명도 만난다. 진리를 만났으니 증언하게까지 만들어 주신다. 부활신앙 말이다. 성령께서 동하시기 때문이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예전에 뉴스에서 독일 출신의 음악가가 산업 현장에서 온갖 소음들을 모아서 음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컨테이너와 체인 등 산업현장의 물품들을 손이나 막대기로 두드리거나 바닥에 던져서 온갖 소음을 채집하고 그것을 모아 하나의 음악을 만들었고 너무나도 리드미컬한 하모니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와 같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희망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찬미가 됩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진리의 성령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다. 성령을 보호자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참 기쁨이 있다. 이 성령을 주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15,26)이라고 하신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라고 아들은 말씀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이 아들의 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우리는 아들 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라고 한다. 바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바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으로, 아버지의 영이시며, 아들의 영이시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26절)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들에 대해 증언하시며, 아버지에 대해서도 증언하신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것들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도 또한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더 깊이 알아듣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무는 것이다. 성령에 잠기는 삶이 우리를 그분과 더욱 가까운 사이로 만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예기치 않은 환난이나 박해가 닥쳤을 때, 제자들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고, 이 어려움을 통해 더욱 굳세게 주님께 포도나무 가지처럼 결합하여 있으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4절). 이 말씀은 성령에 관한 약속과 그들이 고난받을 때, 주님께서 알려주실 증언에 관한 말씀이다. ‘그들의 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다음 제자들이 홀로 남아있게 되는 때이며, 그들이 적대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때를 말한다. 그러니 우리도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2)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성덕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할까 봐 자신에 대해 긴장하고, 노력하는 삶이다. 인간을 통해서 나오는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유혹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안에, 성령 안에 살게 되면 이러한 삶 속에서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인도해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지혜롭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용기와 힘을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여 주십니다.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사도 16,14)필리피로 간 바오로 일행은 성문 밖 강가에 모인 여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있던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고, 그녀는 바오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청해 세례를 받게 됩니다.
진정한 들음은 주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합니다. 인간이 자기 감각을 활용한다 해도 말씀의 소리만이 아니라 그 의미까지 들리게 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경청은 순종으로 이어지는 덕이지요. 리디아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당시 값비싼 자색 옷감을 취급했다고 하니, 앞으로 사도들과 교회를 위해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호자", "진리의 영"이라 부르십니다. 성령의 역할은 예수님을 증언하시고, 제자들을 담대히 제자직을 수행하도록 보호하시며, 모두가 진리를 깨닫도록 일깨워 주시는 일입니다.
"기억하게 하려는 것"(요한 6,4)성령께서 하시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바로 기억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스승이 떠난 뒤 제자들에게 닥쳐올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이미 스승께서 이 모두를 예견하셨고 준비시켜 주셨음을 기억하게 하시려는 겁니다. 제자들이 육적 생명과 비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요한 16,2) 하시려는 예수님의 섬세한 배려시지요.
사랑하는 벗님! 이렇게 우리는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성령의 오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무디고 게으른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경청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나약하고 겁쟁이인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
아울러 삶의 질곡 속에서 고통과 시련에 맞닥뜨릴 때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말씀에 의지해 다시 일어설 힘을 북돋아 주시기를 빕니다.
성령께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의 영과 함께 한 목소리로 주님을 증언하고, 그분 사랑을 증언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제1독서 속의 리디아처럼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사랑에 응답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진정한 회심자로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선교활동의 본질적 두 요소, - 환대와 보호자 성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자연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대로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어제는 미세먼지 하나 없는 눈부시도록 투명하고 아름다운 하루였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성령을, 환대를 반영하는 듯 했습니다. 충만한 생명으로 빛나는 초목들 그대로 아름다운 성령의 표현이자 환대의 표현입니다.
때되면 어김없이 거기 그 자리에서 줄줄이 피어나는 환대의 꽃들입니다. 사진에 담기 바쁩니다. 주차장에는 요 며칠전부터 피기 시작한 이팝나무꽃이 장관입니다. 또 부처님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불두화佛頭花 탐스런 흰꽃송이들도 곳곳에서 한창 피어납니다. 예전 주차장옆 코스모스꽃들을 보며 써놨던 환대란 시가 생각납니다. ‘코스모스’ 대신 ‘이팝나무꽃’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 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웃는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 주위 이팝나무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없다
눈물겨운 감동이다
볼 때 마다 환해 지는 마음이다”-2000.9.28
환대의 꽃들입니다. 모든 꽃들이 그러합니다. 환대의 기쁨, 환대의 찬미, 환대의 사랑, 환대의 아름다움, 환대의 섬김, 환대의 겸손, 환대의 위로, 환대의 치유, 환대의 평화등 환대의 덕은 끝이 없습니다. 여기 정주서원에 따라 평생 정주의 삶을 사는 수도자들 역시 환대의 꽃같은 수도자들입니다.
정주와 환대는 그대로 하나로 직결됩니다. 그리하여 정주의 수도원은 환대의 집이, 정주의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손님 접대의 환대는 이미 베네딕도 규칙에도 첫 자리에 명문화되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성규53장1절)
참 아름답고 사랑스런 꽃같은 환대의 사람들은 그대로 하느님의 환대를 반영하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흡사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듯 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티아티라시 출신의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아름다운 여인, 리디아가 환대의 모범입니다. 환대 또한 하느님의 은총, 성령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참 아름다운 환대의 장면을 잘 보여줍니다. 마음을 열고 귀기울여 듣는 경청 역시 환대의 표현이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음으로 마음들 활짝 열고 주님을 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소유의 선교사들이 복음 선포에 매진할 수 있었음도 곳곳에 산재한 환대의 신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교회의 선교활동에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겸손의 환대로 물심양면 선교사들을 도왔던 환대의 신자들이었습니다. 선교활동의 필수적 요소가 이런 환대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환대와 더불어 선교활동의 필수적 요소가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보호자 성령입니다. 생명의 물과 같은 생명의 성령입니다. 환대 역시 깊이 들여다 보면 성령의 활동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사랑, 성령의 환대, 성령의 치유, 성령의 위로등 환대의 자리에 성령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예수님 떠난 자리에서 성령께서 그대로 예수님의 일을 하십니다. 제가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순전히 성령의 은총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결국은 성령의 증언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환대 역시 주님 현존에 대한 성령의 증언입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치유의 성령, 일치의 성령, 사랑의 성령, 환대의 성령 등 끝이 없습니다. 교회공동체에서 큰 일을 앞두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성령송가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요!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은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이다.”
이런 위기의 때를 예비하여 제자들에게 성령 충만한 존재로 완전 무장 시켜 주는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무지의 완고함, 어리석음에 대한 유일한 답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에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는 무지보다 더 큰 마음의 병은 없습니다. 또 무지로 인해 얼마나 악행과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인지요. 바로 이런 무지의 병을 치유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비로소 참 사람입니다. 성령께 닫혀 있을 때 괴물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교회의 선교활동은 물론 우리의 전 삶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력을 미치는 성령인지 깨닫습니다.
역시 사랑이 답입니다. 환대의 덕을 사랑하고 추구하십시오. 성령의 은총을 사랑하고 추구하십시오. 사랑의 환대와 사랑의 성령은 선교활동의 핵심요소이자 우리 신자들 삶의 핵심 요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환대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어 세상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하느님의 목소리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편입니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를 사귀고 취미생활에 몰두하고 때론 여행을 떠나고 일에 매진해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친구가 옆에 있는데도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즐겁게 해오던 일을 하는데도 외로웠습니다. 여행지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홀로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것이 아마 제가 수도사제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동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외로움을 흔히 ‘존재론적 외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외로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만약 외로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하느님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이미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외로움이라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돌고 돌아 결국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여정의 끝에 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찾아 헤매며 하느님이 아닌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합니다. 하지만 외로움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외로울 때 더욱더 당신을 찾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 같아서입니다. 저에게 외로움이란 당신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인간 사회에는 당사자가 없거나 여의치 않을 때, 위임과 대리 또는 보호자 등이 대신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로 떠나게 될 것을 예견하시면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제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일러주고, 인도하며, 그 뜻을 실행할 수 있도록 힘을 줄 영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아울러 제자들을 향해, 더 이상 어린이처럼 받아만 먹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는 사도들로 활약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27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에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시면서 각오를 다지도록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16,1-4)
그저 나와 내 가족이 먹고 사는 일을 넘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되새겨 봅시다. 아울러 먹고 사는 일도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다른 이들과 달리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살아가면서 삶 자체가 선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합시다.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15,26)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대학에서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잘 지도하는 최고 교수들의 공통점은 학생들을 좋아하고 존중한다는 사실입니다. 학생들을 좋아하지 않고 잘 가르치기만 해서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학생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하나라도 더 열과 성의를 다해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 열과 성의를 학생들이 압니다.
“인물사진을 찍을 때 가장 중요한 기술은 촬영자가 피사체를 좋아해야만 합니다. 카메라의 눈은 정말 정직합니다. 촬영자가 피사체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무미건조한 감정이 그대로 사진에 반영됩니다.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성공하고 행복하려면 반드시 충족해야 할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그 일을 좋아해야 합니다. 둘째 그 일과 관련된 사람을 좋아해야 합니다.”(표현해야 사랑이다. 이민규)
사진하나 찍는데도 좋아한다는 감정이 마음과 손끝에서 작동하여 피사체를 빛나게 한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복음을 묵상해보면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뒤에도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을 보호하고 사랑해 줄 보호자를 보내 주시기로 약속합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15,26)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 당신의 일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일을 지속할 제자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기로 보호자이신 진리의 영을 보내주십니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도 먼저 상대방을 존중하고 다가가는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멘.
부활 후 영의 나라로 인도 하시는 아버지의 뜻.<요한 15/26-16/4> 5/1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봄에 씻앗을 심으면 계절의 변하를 따라 싹이 나고 꽃을 피고 열매를 맺어 결실을 거두워 들립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농부인 성부께서 땅에 씨앗을 심어 시작은 보잘 것 없이 보여도 꽃이 피듯이 아름다움을 풍기고 열매를 맺으며 그열매는 많은 생명을 살리는 원동력이 됩니다. 부활후 40일은 육과 영의 세계의 연결고리이며 본격적 구원의 작업은 성령강림으로 문이 열리고 성령은 영의 세계에서 육의 세상에 하느님의 일을 증언하고 완성시켜 줍니다.
인류의 문화적 발전도 문명의 발전도 요사이 시간을 줄이며 쉽게 따라가기 힘든 정도로 발전하지만 우리를 그 결과를 누리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하면 성경도 없이 수십 년을 지내고 입으로 주님의 행적을 이야기하고 전해주던 원시적 시대와 온갖 사람들의 연구와 경험을 중심으로 큰 성전도 짖고 깊은 연구기관 이란 교육기관도 있지만 그 당시는 그리스도 교회가 박해 속에 미약 하었지만 교회를 이끄신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요사이 전자 기구가 발전하여 물어서 찾아그든 길은 기계가 알아서 남은 거리가 알마 소요시간이 얼마 까지 알려주고 서로 대화를 하면서 가고자 하는길을 부탁하면 가장 가까운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아런 시대 우리교회는 점점 설자리를 잊고 있지 않은지 걱정되지만 오늘 성령의 인도로 주님 부활 후 골방에서 무서워하면서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의 발현으로 용기를 얻어 밖으로 나가 주님을 증언하고 교회의 발전을 본것같이 오늘도 우리는 성령의 빛을 받아 어려운 시대 장애를 극복하고 새로은 교회 상을 표출해야 합니다.
여의 힘이 아니고는 이 난국을 해쳐 나가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이 일을 당신의 뜻 안에 계획하고 성자 예수를 통해 이세상에 실천하고 성령을 통해 열매을 맺으며 온 세상에 복음이 전달 되도록 이끄십니다. 장애에 쓸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일어날 기화를 찾아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알고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고 결실을 맺으려고 시화현상을 연구 실천하고 공희회 후에일어나는 세상과 교회를 연관시켜 농촌 개발과 농촌청년들의 의식 교육을 하면서 교회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부자가 되어 교회 발전에 힘이 되려고 신용협동조합 일을 지역사회에 발전 시키고 그래서 본당내 신용조함 1호 구미에 구미 신용협동조합을 본당내 만들고 전하기 시작하였고 공의회 정신으로 살자하는 운동인 보다 낳은 세상운동 M B W 운동을 시작부터 하면서 대구교구에는 주말가정 운동을 시작했으며 지금은 전자 기구로 하루에 베이북 홈페이지 카톡으로 문서 전교를 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이에 따르는 일이 있으리라 믿고 성령께 기도를 하면서 우리를 인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하느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 콘로나 균을 없에 주시든지 아니면 걸려도 감기모양 치료할 있는 약을 알려주시든지 기도 하면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분명이 길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걱정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임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골방에서 기도 하는중 일어난 성령강림을 기억하며 전례력으로 성령강림이 다음 다음 주입니다. 성령의 강한 힘이 우리를 안전하고 평화스로운 길로 나가도록 이끄심을 기도합니다. 어둠은 빛을 찾아 나서야 빛을 만납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복음)
윤영민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령을 의미하거나 상징하는 많은 단어들이 존재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보호자’와 ‘진리의 영’. 이 두 개념이 모두 성령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왜 우리의 ‘보호자’이신지 어렴풋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고, 우리가 그분을 증언할 힘을 준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보호해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복음)
그러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즉 성령을 받지 못한 이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 반대편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렇다는 것도 모른 체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복음)
따라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해 주시고 그분의 길을 이해하게 하며(진리의 영), 그로 인해 우리 역시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할 수 있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1독서)
1독서에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말씀’이 믿기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으나, 그가 마음을 열어 ‘말씀’(하느님)을 알아듣게 하고(진리의 영), 그렇게 그를 보호해주십니다(보호자).
우리 역시 인생의 곳곳에서 하느님을 배신하는 일인지도 모르고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밝혀 주실 것이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분을 온전히 맞아들여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 아멘.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주님께서 당신이 비록 제자들 곁을 떠나지만 그들을 이끌어 줄 성령께서 오실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
그리고 스승께서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제자들에게 의미 있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1-2)
주님께서 유다인들이 주님을 박해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듯이 제자들에게도 똑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도 아들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걱정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4) 회당에서 내쫒기고 박해를 겪는 것은 주님 때와 같이 제자들에게도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시작은 유다교의 회당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우는 대부분 유다인 출신으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차차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며 결국 그곳에서 쫒아 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반대를 받으신 것처럼 회당에서 쫓겨나는데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박해하는 그들이 유다교의 열렬한 신봉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의 참 뜻을 모르면서 되레 자기들이 하느님 종교를 옹호한다고 여기며 자부심과 긍지를 갖습니다.
제자들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박해자들의 종교인 유다교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떨어져 나갈 가 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이신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며 일깨워주십니다.
사람은 얼마나 약하고 변하기를 잘 하는지요.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사람을 평하면서 ‘조석(朝夕)으로 변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더 적나라한 표현은 ‘변덕이 죽 끓듯 하다’말 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초대 공동체의 제자들의 선교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로오는 로마의 식민지 마케도니아 지역의 필리피를 찾아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지내며 안식일에 유다 인들의 기도처가 있다고 생각되는 성문 밖 강가로 나갑니다.
거기서 여자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신심이 깊은 옷감 장수 리디아를 만납니다.
그녀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마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온 집안이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야 지금 그리스도 신앙에 살지만, 구약의 율법 세계에서 신약의 그리스도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은 큰 산을 넘는 것과 같이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오랜 시간의 명화가 되었지만 유다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내용을 다룬 ‘벤허’1)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유다인이라는 국수주의, 이스라엘의 율법의 세계에 갇혀 있던 벤허는 그리스도를 만나서 용서와 사랑의 세계를 만납니다. 구약과 신약의 세계를 잘 묘사해주는 명화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의 기록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다인들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고 다시 사도 바오로를 중심으로 소아시아로 향한 이방인의 공동체로 확대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유다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서로 격려하면서 신자숫자가 늘어나면서 여러 공동체들이 세워집니다.
우리는 매일 생활 속에서 자동화 시스템에 익숙해지고 나 자신도 모르게 편한 것에 길 들여 지기 쉽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주님과 제자들이 겪었던 수난과 죽음,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의 박해의 신앙생활을 잊고 편하고 우리 취향에 맞는 생활을 찾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좀 더 수고스럽고 좀 더 인내를 감수할 때 비로소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약속하신 성령께서 청하며 쇄신의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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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 월리스(Lew Wallace)원작, 윌리암 와일러(William Wyler) 감독, 아카데미 11개부분을 석권했던 ‘벤허(Ben Hur)’의 내용은 기원 후 26년 로마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시작되는데 유대인 귀족인 유다 벤허 (Judah Ben-Hur, 찰톤 헤스톤 분)를 중심으로 이어가는 이야기이다. 벤허는 신임 군사령관으로 온 멧살라와 친한 친구 관계이지만 신임 총독 부임 행진 중에 벤허의 여동생의 실수로 기왓장이 총독의 머리에 떨어진다. 이 사고로 어머니 미리암, 여동생 티자는 감옥에 보내졌다가 나병에 걸리는 불행을 겪는다. 벤허는 노예로 끌려가 해양 로마함선의 노를 젓는 지옥과 같은 노예 생활을 하는데 적의 습격을 받아 배는 침몰하고 만다. 함대 사령관 아리우스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벤허의 극적인 도움으로 살아나서 로마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을 구해준 벤허를 양자로 삼는다. 벤허는 로마 시민이 되어 이스라엘을 찾았는데 그의 옛집은 연인 에스터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 멧살라에 대한 복수의 마음을 품게된다. 이 영화를 대단원으로 이끌어 주는 전차경기에서 벤허는 멧살라를 이겨 복수를 한다. 그를 죽이려했던 멧살라는 마차에 깔려 죽고 만다. 그러나 구약을 배경으로 하는 복수는 그의 삶을 공허하게 만든다. 그의 연인 에스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삶의 봄을 맞게 된다. 어느 날 벤허는 자신이 노예로 끌려갈 때 물을 주셨던 예수님을 만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의 앞을 지난다. 그 길에서 벤허가 그분께 물을 마시게 도와준다. 예수님께서 골고타의 언덕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나병에서 치유되는 기적을 맞는다. 이 영화의 주제는 유대인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연인 에스터를 통해, 구원으로 이어진다. 벤허는 구약의 복수라는 굴레에서 자유를 맞는다. 골고타의 언덕과 그 앞을 목자를 따라 양들이 따라가는 마지막 장면이 여운을 남긴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신비이다.
우리의
삶또한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신비이다.
신비는
영적 탄생으로
우리를 이끈다.
성령은
하느님이시다.
참되신
하느님의
인격이시다.
삶을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격려하신다.
우리의
인격에
들어오셔서
인격적인
방법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품어주신다.
성령께서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이끄신다.
모순과 오류
거짓과 혼돈을
참된 진리로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삶을
증언하여 주시며
더욱 풍요롭게
하신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은총과 믿음을
더하여 주신다.
자유롭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보호자이신
성령께
생명의
오늘을
맡겨드린다.
초등학교 때, 발표력이 정말로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질문하면 이 친구가 늘 제일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늘 정답이 아닌 오답만 말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산수 시간에 “누가 앞에 나와서 이 문제를 풀어볼래?”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면, 이 친구가 여지없이 손을 들고 앞에 나와 문제를 풀었습니다. 물론 맞추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께서는 “너는 한 번만 더 생각하고 답을 해보면 어떨까?”라고 이야기하셨고, 우리도 “너는 그만 가만히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이 친구에 대한 기억은 틀려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지만, 공부는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친구가 명문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틀리고 실패했을 때가 뇌가 성장하는 최고의 순간이라고 뇌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문제가 어렵다는 느낌이 들어야 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제 친구 역시 틀리면서 뇌가 성장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어떻습니까? 틀리는 것을 주저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즉, 이를 실패로 여기고 이 실패를 두려워하지요. 그러나 틀리고 실패하는 체험은 자신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제자들을 환난에 대비시키십니다. 그 힘이 바로 보호자이며 진리의 영인 성령에게서 나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며 박해를 비롯한 모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박해하는 자는 자기들이 잘못하는지를 모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당시의 종교자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착각을 인내로 극복하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의 궁극적인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시지요. 실제로 제자들은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를 받는 것이 실패가 아니며, 반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게 될 때 더 큰 선물을, 진정으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틀리고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맞는 것이고 진정한 성공이었습니다. 이를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세상의 실패보다 주님 안에서의 성공을 꿈꿀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이라는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다(존 바스).
우리는 무조건 옳은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께 ‘노인’이라고 말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늙은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노인’은 한자이고, 늙은이는 순우리말입니다. 왜 순우리말이 막말 취급을 받는 것일까요?
계집이라는 말도 순우리말이지만, 여성을 향해 ‘계집’이라고 하면 여성 비하를 한다고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5세기에 출간된 ‘두시언해’를 보면 ‘老妻(노처)’를 늙은 처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순우리말은 과거부터 써왔던 말입니다.
아내를 향해 ‘마누라’라고 지칭하는 것도 아내를 우습게 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한말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향해 마누라라고 호칭했습니다. 며느리인데도 말입니다. 당시 마누라는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에 따라, 또 장소에 따라 옳고 틀림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만 맞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조건 옳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 판단은 오직 하느님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이 돌아올때 마다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지 못한 큰 송구함과 죄책감이 묵직하게 가슴을 내리누릅니다.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의 짊어졌던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나눠지지 못했음에 대한 부끄러움에 크게 가슴을 치게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인정이 많은건지 아니면 심성이 고와서인지 대학살의 주인공들은 아직도 고개 빳빳하게 쳐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총칼로 뺏은 천문학적 비자금으로 세세대대로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군부 독재 세력과 결탁했던 잔당들 역시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망언을 남발하며 버젓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518 민주화 영령들과 유가족들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요 모욕이 아닐수 없습니다.
깨어있는 애국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치인들이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라나는 이 땅의 새싹들을 위해서라도 아직까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합심해야겠습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국민 앞에 사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학살 범죄 행위를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처는 그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적 퇴행은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학살의 주인공들과 동조 세력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끝끝내 ‘잘못했다! 용서를 청합니다!’라고 말한 마디 하지 않는 그들에게 더 이상의 인간적인 대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문학적 액수의 검은 돈을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흥청망청 살고 있는 파렴치한 인간들에게는 제대로 된 인생의 쓴맛을 보여줘야 마땅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그 비참한 인간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진리와 진실 앞에 꽉 막힌 그들의 귀를 열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들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5월을 맞아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그때 학살의 주범들을 사면해줬는가?’하는 분노요 안타까움입니다. ‘기대할 사람에게 기대했어야지’ 하는 회한입니다.
우리 모두 지난 역사를 통해서 온 몸으로 느끼는 바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언제나 또 다른 악순환을 반복한다는 진리입니다. 그토록 큰 관대함으로 눈물을 머금고 사면을 해줬다면, 하루에도 수백번씩 감사하면서, 남은 생애는 언제나 가슴치면서, 쥐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비온 뒤 여기 저기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독버섯과도 같습니다. 불사조(不死鳥) 같다고나 할까요? 진정성있는 반성이나 참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올해는 기적처럼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성찰이나 사죄가 있으려나 기대해보지만, 웬걸 안그래도 쓰라린 유족들과 희생자들의 가슴에 굵은 소금을 왕창 뿌려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만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가르침도 사실은 상식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토대 위해 성립됩니다. 상대방의 인생에 평생 씻지 못할 치명적 과오와 상처를 입혔다면, 그에 합당한 방식과 절차에 따른 진정성 있는 사죄와 다시는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결심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절차가 이루어진 다음에 용서나 화해라는 단어가 사용 가능한 것입니다.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수호해야할 군인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사람들, 채 피어나지도 않은 무수한 꽃봉오리를 무참하게 꺾어버린 대학살의 주범들, 역시 결코 용서와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마땅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518민주화 영령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에게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따뜻한 위로를 베풀어주시길 청합니다.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불행한 역사 역시 조속히 청산되길 또한 기도합니다.
주님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확신은 '마음의 든든함'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난 월요일에 평화방송 녹화 중 사회자의 좋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 대한 질문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왜 떠나신 것일까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입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께서 계속 함께 계시며 당신만을 바라보라고 강요하시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가능할까요?
참사랑은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레나 마리아는 두 팔이 없고 한 다리는 30cm밖에 안 되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물론 장애인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따고 음악과 그림 등에 소질이 있으며 인기도서 작가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레나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를 장애인으로 여기지 않아 일반 학교에 다니게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침울하게 돌아오자 엄마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엄마, 난 친구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친구가 없어. 예수님이 네 안에 계시잖아!”
레나 마리아는 음악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늘은 더는 수업을 할 수가 없겠다. 노래는 마음에서 나오는데, 너는 너무 슬퍼. 그러면서 어떻게 기쁜 노래를 부를 수 있겠니?”라고 말하고 가버렸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엎어져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왔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유일하게 전화기를 잡을 수 있는 다리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레나 마리아시죠?”
“네...”
“예,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레나 마리아를 많은 사람이 응원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려주라고 하셨어요!”
레나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나약한 저의 육신과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제 입술을 당당히 보여주겠습니다.”
TV에서 보았던 어떤 실험에서 아기가 엄마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방 안에 아기가 좋아할 장난감들을 넣어놓고 아기를 놀게 하였습니다. 조금 후 슬며시 엄마가 밖으로 나가봅니다. 한참을 놀다 엄마가 함께 없다는 것을 알게된 아기는 장난감에는 관심이 없고 울며 엄마만 찾았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이젠 엄마에겐 관심이 없고 장난감으로 놀기에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엄마를 눈으로 보는 것이 엄마의 존재에 대한 더 큰 확신일까요, 아니면 엄마가 보이지는 않지만 즐겁게 놀 수 있는 것이 더 큰 확신일까요?
사람은 세 단계로 어떤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눈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속을 확률이 높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다음은 머리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사도들을 박해할 이들은 머리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머리로 알고 믿어서는 아직 구원의 수준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증언할 영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박해받아 죽어가면서도 찬송가를 불렀던 순교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한 순간에도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주님을 확신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주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기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마음의 평화라고도 할 수 있겠고, 든든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성령의 위안이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주님 존재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께 올라가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룡이 지배하던 시대에 포유류는 주로 밤에 활동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공룡이 사라졌습니다. 화산 폭발이 있었다고도 하고, 소행성의 충돌이 있었다고도 하고, 빙하기가 왔다고도 합니다. 공룡이 사라지면서 포유류는 낮에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포유류의 시대입니다. 사람도 포유류입니다. 1920년대 말 대공황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50개가 넘는 자동차 회사가 있었습니다. 공항이 끝나면서 3개의 자동차 회사가 남았고 그 회사들은 지금도 있습니다. 1970년대에 중동의 오일쇼크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많은 전자회사가 있었습니다. 오일쇼크가 끝나면서 3개의 전자회사가 남았고 지금도 있습니다. 2008년 미국을 시작으로 금융위기가 왔습니다. 당시 많은 반도체 회사가 있었습니다. 금융위기가 끝나면서 3개의 반도체 회사가 남았다고 합니다. 이 회사들이 세계의 반도체 시장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시작되었고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에 새로운 변화가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한국은 감염병의 확산 방지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적극적인 검사, 환자의 능동적 격리, 투명한 공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 국경의 폐쇄 없이, 사회의 봉쇄 없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전국단위 선거를 치룰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다른 감염병이 온다면 많은 나라가 한국식 방법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연대와 협력이 이루어지면 경제적인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서로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으면 바이러스는 갈 곳이 없습니다. 총과 칼로는 바이러스를 막아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국방비를 줄이고, 감염병 예방에 대한 연구와 백신 개발에 국가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빛은 입자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파동의 모습을 하기도 합니다. 입자인 경우에는 위치와 시간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모든 물질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파동인 경우에는 위치와 시간에 속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서 자유롭습니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기(氣)’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말씀, 표징,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제자들과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보호자’를 말씀하십니다. 보호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파동과 에너지와 같아서 가시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도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그 보호자를 ‘성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리디아는 세례를 받고 사도들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것이 옷감을 파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 마시오.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하느님께서 다 채워 주실 것입니다.”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하루하루 먹이를 찾고, 쉬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갈매기들에게 하루 배를 채울 수 있는 먹이를 찾는 것만도 큰일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조나단’은 그런 일에 갈증을 느꼈습니다. 좀 더 빨리, 좀 더 높이 날고 싶어 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했던 조나단은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인류의 새벽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명과 역사의 첫 단추를 풀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것들을 찾아서 좀 더 멀리, 좀 더 높이 날개를 폈던 분들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보여 주었던 십자가의 길, 그분이 보여 주셨던 사랑의 길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세상 가운데에서>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월요일>(2020. 5. 18. 월)(요한 15,26-16,4ㄱ.)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1-4ㄱ).”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앞의 15장 18절-25절 에 있는 ‘세상의 미움’에 관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다.’ 라고 말한 이유는”입니다.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는 “믿음이 흔들려서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입니다. 4절의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거든 내가 모든 일을 미리 알고서 예고했음을 기억하여라. 내가 모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리는 항상 하느님 쪽에 있다. 너희는 그것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라는 말씀은, 유대교의 박해 상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하느님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우리 열두 지파는 밤낮으로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며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 사실 나도 한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이름을 반대하여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예루살렘에서 하였습니다.
나는 수석 사제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성도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를 감옥에 가두고, 그들을 처형할 때에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또 자주 회당마다 다니며 그들에게 형벌을 주어 예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너무나 격분하여 나라 밖 여러 고을까지 그들을 쫓아갔습니다(사도 26,7-11).”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박해는 더욱 철저했고 잔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다.’ 라는 말에는, ‘모른다.’ 라는 뜻도 들어 있고, ‘일치되어 있지 않다. 관계가 없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들의 신념은 잘못된 신념이고, 그들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그것을 판단하고서 하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항상 당연히 세상의 미움을 받아야 하는가?)
‘세상의 미움’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보면, 언제나 항상 세상의 미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세상의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2-14).”
호감과 존경은 선교활동의 발판이 되었고, 입교자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만 받는다면 선교활동을 전혀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 이웃이고, 함께 구원받아야 할 형제들입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요한 3,19) 자들은 교회와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지만, 빛을 갈망하는 이들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존경하고 호감을 갖게 되고 감화를 받게 됩니다. 반대로,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비웃고, 싫어하고, 비난합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미움 받을 짓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 받게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신앙에 대한 박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에 대한 ‘주님의 질책’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버지도 예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혹시 신앙을 핑계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살면서, 미움과 박해를 자초하지는 않는가?교회는(또는, 신앙인의 공동체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찾아와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하고, 안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랑’이 ‘밖으로’(온 세상으로) 흘러넘치는 교회가(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이기적인 집단의 모습만 보인다면, 세상 사람들이 미워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꾸짖으실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진리의 영이 나를 위해 증언해 주신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내 편이 되시어 나를 변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간에 자식이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 부모가 걱정할까봐 그 어려운 일을 말씀드리지 못한다고 했을 때 반대로 부모는 자식이 그런 어려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서운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도 어쩌면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쉬운 일이거나 어려운 일이거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함께 풀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모든 일을 나 혼자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과 함께 모든 일을 이루어 갔을 때 우리가 하는 일들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분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신념'에 대해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
예수님께서 뒤에 남겨질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일에 대해 직설적으로 숨김없이 말씀하십니다.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은 공동체로부터 파문되는 고립을 의미합니다.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는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통첩이지요.
게다가 죽임까지 당한다고 하시네요. 파문으로 영혼이 죽은 이에게서 육적 생명마저 앗아간다니 기가 막힙니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 예고에 펄쩍 뛰며 만류하고, 질문조차 못할 만큼 두려워하던 그들이, 이제는 스승의 운명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직면한 겁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런데 앞으로 당하게 될 박해와 죽음이 하느님께 대한 봉사의 미명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갈수록 태산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으로 쫓겨나고 죽어야 한다면, 유다인들이 믿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하느님이 다른 걸까요?
제1독서는 바오로 일행이 마케도니아 지역의 첫째가는 도시인 필리피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사도 16,14).
리디아는 여느 이방인과는 달리 이미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이였지요. 결국 그녀는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아 새로운 길에 들어섭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으로 보면 유다인들이나 리디아나 크게 다를 바 없는데, 한 쪽은 하느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한 쪽은 하느님과 함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하느님께서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어 주신 덕분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도 모르게 단순히 순종하고 따랐을 뿐이지요. 그녀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과 변화, 마음의 움직임 모두를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이였습니다.
반면 유다인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보려 하지 않았지요. 하늘에서 온 이가 아니면 행할 수 없는 무수한 표징과 가르침에 눈과 귀를 닫은 채, 예수님에게서 율법과 배치되는 흠을 찾아내는데 혈안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단단히 구축된 신념, 즉 선민사상과 율법주의가 하느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3).
유다인들은 스스로 하느님을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아버지를 모르기에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율법과 관습을 수호한다면서 오히려 민족적 정체성인 하느님 자녀됨을 거부하는 모습이지요.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잘 하는 줄 알고 있으니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신념 자체는 귀한 것입니다만, 민족과 율법에 대한 유다인들의 신념이 사람을 구분하고 배척하기보다 포용하고 섬기는 데 작용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어느덧 5.18 민주화 운동이 40주기를 맞았습니다. 40이라는 상징적 숫자만큼 그간 항쟁의 의미와 해석에 대해 많은 공방과 부침이 있었지요. 신념이 권력 유지와 자리 보전을 위해 맹목적으로 작동할 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리디아처럼 자신 안에서 고요히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영을 따라 눈과 귀를 열 때 진리와 정의는 제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신념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향할 때 진정 하느님께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귀한 생명을 바친 모든 영혼들, 아직도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유가족들, 그리고 가해자건 피해자건 극심한 트라우마에 갇혀 고통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주님께 봉헌하며 기도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40년간의 험난한 광야 여정을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모두도 이제 5.18의 교훈을 민주화의 원체험으로 삼으며 새로운 대한민국의 길을 함께 열어 가기를 기원합니다.
바오로와 리디아 : 사도직을 위한 관계 복음화의 한 전형
이기우 신부님
'티아디라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로오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사도 16,14)
부활 제6주간 월요일인 오늘은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꼭 4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 겨레가 하루라도 빨리 40년 전의 이 어두운 과거를 깨끗하게 청산해야 하는 이유는 이 항쟁을 유발시킨 못된 학살자들이 저지른 죄악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야 더 이상 우리 사회의 공동선이 훼손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고, 이를 옹호하던 그 부역자들이 더 이상 권력을 탐내지 못하도록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모두가 민족의 공동선과 정의에로 나아갈 수 있으며 또 그래야 70년된 분단의 멍에를 벗고 남북의 온 겨레가 하나된 미래에로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민족들에 비해 사회 통합의 과제가 무려 백년 이상 늦추어지고 있는 처지라서 이 과제는 더욱 절박합니다.
그래서도 오늘 독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오로와 리디아 사이의 관계는 사도직을 위한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한 전형으로서 주목할 만 합니다. 고대 그리스는 데살로니카와 필리피를 중심으로 한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과 아테네와 코린토를 중심으로 한 남부 아카이아 지방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두 번째 선교여행에서 소아시아를 떠나 그리스를 개척하기로 하고 먼저 북부 마케도니아의 관문이었던 필리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리디아라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개인적이고 일시적으로 될 수도 있었던 이 만남이 바오로 선교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리디아가 지닌 캐릭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리디아는 소아시아 티아디라 출신이었습니다. 소아시아 남부에 위치해 있던 티아디라는 지역 특산품이 없어서 인구도 적었기 때문에 당시 이곳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은 유다인들을 불러들여서 상업을 일으키고자 했고, 그 바람에 리디아가 티아디라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취급했다는 자색 옷감은 천연재료로만 염색할 수 있었던 고대의 사정으로는 바닷고동으로만 그 색깔을 낼 수 있었던 까닭에, 자색염료가 워낙 비싸서 왕족이나 그에 버금가는 부자들의 옷으로만 쓰였습니다. 그가 티아디라에서 필리피까지 활동영역을 넓힌 데에는 이 고급 옷감을 국제적으로 교역하려고 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비즈니스 캐리어 우먼으로서 국제적 감각이 탁월했던 인물이 리디아였던 겁니다.
그 감각으로 첫 눈에 바오로의 인품과 됨됨이를 알아본 리디아는 바오로 일행을 자기 집에 모시고 필리피 선교의 거점을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박해를 맞으면 그 일행을 인근 데살로니카나 베레아 등지로 피신시켰다가 아카이아 지방으로 선교하게 하는 기회로 삼았고, 다시 소아시아로 건너가 에페소 선교를 하게 될 때에는 물론 에페소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라도 지속적으로 연대하고 후원해 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오로는 자신이 아끼던 티모테오를 필리피의 봉사자로 추천하여 파견하였고, 필리피 공동체는 에파프로디토스를 사도 바오로의 수행원으로 추천하여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인적 교류까지 가능했던 데에는 당시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망라하던 에게해 연안지역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리디아의 안목과 역량이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는 고스란히, 사도 바오로의 선교활동을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체계적으로 뒷받침하는 뒷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편지들보다 필리피 공동체에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사도 바오로의 마음이 활짝 열려있고 감사하는 마음이 흘러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오로가 필리피 공동체를 동지적 호의와 감사로 표하는 마음에는 그 절반 이상이 리디아의 헌신적 도움과 활동을 염두에 두었을 공산이 큽니다.
그런데 바오로에게는 성모 신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공생활 당시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고 따라서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가 제자로 삼은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고 사도들의 행적까지 기록하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해 다른 어느 복음사가보다도 더 소상하게 언급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후대 그리스도인들의 성모 신심은 루카의 기록 덕분이며, 특히 대표적인 성모찬송인 마니피캇을 소개하는 가운데 파스카 과업을 상기시킴으로써 성모 신심이 개인화되어 버릴 수 있는 위험까지 사전에 예방하였습니다.
이는 1차 선교여행을 수행하던 마르코가 바오로의 가르침에서 영향을 받아 십자가의 그리스도론을 계승하면서도 예수님을 주체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최초의 복음서를 쓴 것처럼, 루카도 바오로가 간직했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과 체험을 바탕으로 삼아 자신의 복음서를 펴내면서도 자신의 스승 바오로가 알지도 못했고 따라서 가르칠 수도 없었던 성모 마리아의 영성을 파스카의 신비에 입각하여 기록함으로써 균형과 보완을 이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셨던 이 위대한 그리스도교 초창기 선교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리디아 또한, 사도 바오로의 인품과 더불어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꿰뚫어 보고 뒤에서 드러나지 않게 도움으로써 국제적으로 뒷받침해낸 사도직의 공로자입니다. 사도직은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신앙을 바탕으로 하되 파스카의 신비를 계승하여 구현해야 하는 역사적 신앙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초창기에 바오로와 리디아의 관계를 통해서 성령께서 이룩하신 인격적 신앙과 역사적 신앙의 균형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영혼을 구하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실 분은 진리의영이며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어떤 모함을 받아도 진리의 영을 모시고 예수님의 역사를 되살립시다.
예수님이 인류에게 알려주신 하느님나라의 아버지 뜻 되살려야합니다.
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무시 무관심 내지 거부 포기합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최고의 동물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살면 됐다 봅니까?
만물 중 뭔가 너무나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느낌 가져본 적 없습니까?
인간들은 동물들과 다르고 어떤 존재 왜 사는지 모르고 사실 겁니까?
하느님을 알고 영혼을 구하라는 예수님의 역사가 가톨릭사상이랍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요한15,26)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님 탄생을 시작하셨다. 마리아의 태에서 한 생명이 완성되어 태어나셨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다. 아들 예수님께서 세례성사 세우실 때,성령으로 말미암은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희생제사를 드리시고 묻히신 후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진리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완성을 본다.
‘부부의 세계’ JTBC 드라마가 방영되고 막을 내렸다. 혼인 초 부부의 모습을 본다. 부부로써의 탄생은 아름답고 행복했다. 그 행복도 잠시뿐, 부부의 관계는 아이 낳고 여유로워지자 외도하고 찟어지고 상처나고 갈라서고 처절한 아픔을 겪는다. 아이는 그 모습지켜보다가 사춘기를 지나며 도벽이 생겨나고 문제아로 전락한다. 부부가 서로를 탓하며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애증관계 사이에 모두가 하나같이 병들어 간다. 단죄하고 단죄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용서란 쉬운 일처럼 보이나 단죄보다 더 어렵다.
인기드라마라 이야기를 둘었고 마지막 회를 보았다. 애증관계, 복수심, 막장으로 부부의 마지막 시간을 그려놓고 있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요 한 아내의 남편이 마지막을 가고 있었다. 달리던 차가 멈춰섰고 부현듯 죽었을 것이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외면한 아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멈춰섰다. 이재 모든 것이 끝장이라 여겼던 안내가 남편이 살아 있길 바랬다. 순간 모두가 단죄에서 깨어났다. 용서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 후의 일은 시청자들이 만들어가길 바라며 드라마는 끝을 맺는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 이는 고통의 클라이막스를 넘고서야 이루어진다. ‘부부의 세계’는 혼인으로 시작하며 예쁜 그림을 그려갈거라 여겼더. 그들이 그린 그림은 사랑하다가 미워하고 그렇게 살다가 아름다움 없이 만신창이 관계를 그렸음을 알게된다. 후회투성이가 된다.
‘부부의 세계’는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살아갈 의미를 찾아야 한다. 행복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만들어진 제품이 아니다. 여기서도 ‘진리의 영’이 필요하다. ‘진리의 성령’이 작용할 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안다. ‘부부의 세계’는 다시 반짝일 것이고 모두가 상처로부터 치유될 것이고 많은 부부에게 감동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서로를 탓하며 용서가 참으로 힘들어 단죄에 갇혀버린 모습이 보는 내내 답답했다. 길게 여운을 남기고 출연자들이 편안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생의 태어남은 계속 된다. 환희, 고통, 빛, 그리고 영광을 이루어야 한다. ‘진리의 영’이 모든 부부에게 내려지길 기도한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성령을 받아라”
<가족 가운데 ‘인간’ 삶의 질이 떨어지고 사회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조현철 신부님(서강대 신학대학원,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
“우리는 [자연] 환경 훼손, 기존의 개발 방식, 버리는 문화가 사람들의 삶에 [특히 사회적 약자의 삶에] 미치는 [악]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찬미받으소서」 43항)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117항).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찬미받으소서」에서 보여 주시는 근본적인 세계의 이해입니다. 이렇게 생태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우리 모두의 “공동의 집”으로 다가옵니다(「찬미받으소서」, 13항).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여기에는 생물과 무생물, 식물과 동물의 단절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존재와 생명 차원의 깊은 유대 덕분에 존재합니다.
세계의 근원적 유대는 그저 단순한 감상적 인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태학의 근본 법칙입니다. 생태학의 지평을 열고 현대적 환경운동을 촉발했던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저술가인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자신의 기념비적 저서 『침묵의 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 우리 “인간이 현실에서 독립된 존재임을 선언하고 절대적 지배자를 자처하면, 인간 삶의 기초 자체가 붕괴됩니다”(「찬미받으소서」, 117항). 인간이 세상의 절대적 지배자로 행세한 결과, 폭력적 개발로 인한 자연환경의 파괴와 감당할 수 없는 소비가 일상화되는 ‘버리는 문화’가 초래되었습니다.
우리가 쓰고 버린 쓰레기가 이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지구에 쌓였습니다. 평균 20분 정도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 자연분해 되려면 500년 정도가 걸립니다. 인류 최초의 플라스틱 컵도 지구상의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육지에 쌓인 쓰레기는 바다로 흘러들어가 거대한 쓰레기 더미를 형성했습니다. 태평양의 한 쓰레기 더미는 한반도 넓이의 6배라고 합니다. “우리의 집인 지구가 점점 더 엄청난 쓰레기 더미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찬미받으소서」, 21항). 버리는 데 익숙해진 우리는 이제 사람도 “사용하다가 그냥 버리는 소모품”처럼 여깁니다(「복음의 기쁨」, 53항).
우리가 세상에서 초래한 파괴적 결과는 결국 우리 자신들에게 돌아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가 먼저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대체로 책임이 작습니다. 그래서 이 피해는 공정하지도 않습니다. 코로나19 감염도 재난의 불평등을 정확하게 재현했습니다. 바이러스의 습격은 야생동물 서식처의 파괴,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 감소와 같은 자연환경의 훼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 소수의 개발자들이 수익을 목표로 무분별한 개발과 채굴을 감행한 결과로 일어납니다. 그 피해는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아갑니다. 환경문제에 따른 재난은 정의와 평등의 문제입니다.
현재와 같은 “강박적 소비주의”와 “집착적 소비주의”는 지속 불가능한 삶의 양식입니다(「찬미받으소서」, 203항).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물질적 성장을 요구하고, 성장은 생산의 증가를 요구합니다. 생산된 것을 소비하자니, 소비가 늘어나야 합니다. 소비주의 사회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산과 소비가 서로를 끝없이 부추기는 악순환이 필요한 경제가 자본주의입니다. 여기서 멈추면 추락합니다. 그래서 계속 더 빨리 달려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이윤이 목적인 ‘미친’ 경제에서 자연도 사람도 온전할 리 없습니다. 여기서도 자연과 가난한 이들이 일차적인 피해자가 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근원적 유대의 세계에 알맞은 행동양식과 생활양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환입니다.
“[디지털 세계를 포함하여] 때로는 매체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 두려움, 기쁨, 복잡한 개인적 체험을 직접 접하지 못하게 합니다”(「찬미받으소서」, 47항).
근원적 유대의 세상에서 우리는 ‘초연결’의 세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로 인터넷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스마트폰에 정복당했습니다. 버스와 지하철은 물론 길에서도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전 세계와 순간 접속이 되지만, 바로 곁의 이웃과는 단절의 순간을 삽니다.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돌릴 수도, 관심을 보일 수도 없고, 필요에 응할 수도 없습니다. 접속은 날로 강화되지만 접촉은 점점 약화됩니다. 그나마 접촉도 대부분 속내가 아니라 표면에서 일어납니다. 정보의 바다를 끝없이 부유하느라 바쁜 우리는, 정보가 알려 주는 대상 속으로 들어갈 침묵과 고요를 누릴 시간이 없습니다. 표면에서 표면으로 이동하기도 벅찹니다. 그렇게 얻는 것은 파편화되고 피상적인 지식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상현실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지만, 서로가 서로를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의 ‘일’은 알아도 그 ‘사람’은 모릅니다. “자기 성찰, 대화, 사람들과 편견 없는 만남의 결실인 참된 지혜는 단순히 자료 축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료의 축적은 결국 과부하와 혼란을 일으켜 일종의 정신적 오염을 낳습니다”(「찬미받으소서」, 47항).
코로나19 감염으로 많은 모임과 행사가 ‘비대면’의 방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미 초연결 사회라 그런지 예상보다는 빠르게 잘 적응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종식 후에 등장할 ‘뉴 노멀(new normal)’ 일순위로도 거론됩니다. 장점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비대면의 일방적인 찬양은 곤란합니다. 이미 초연결 세계가 줄일 대로 줄여 놓은 ‘밖’을 향한 관심과 만남과 참여를 더욱 부추길 가능성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 두려움, 기쁨, 복잡한 개인적 체험을 직접 접하지 못하게” 해서는 곤란합니다(「찬미받으소서」, 47항). 팬데믹 수준의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질수록, 서로의 관심과 연대도 팬데믹이 되어야 합니다. 근원적 유대의 세상은 우리 모두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존중과 배려의 자세가 공동의 집인 이 세계의 근본 질서임을 깨우쳐 줍니다.
<때가 오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절망의 때가 오면
오히려 희망하리라
불신의 때가 오면
오히려 믿으리라
증오의 때가 오면
오히려 사랑하리라
분열의 때가 오면
오히려 품으리라
거짓의 때가 오면
오히려 진실하리라
망각의 때가 오면
오히려 기억하리라
유혹의 때가 오면
오히려 진리를 따르리라
우상의 때가 오면
오히려 하느님을 찾으리라
쫓겨날 때가 오면
오히려 당당하리라
침묵의 때가 오면
오히려 증언하리라
굴종의 때가 오면
오히려 맞서리라
변절의 때가 오면
오히려 충직하리라
억눌릴 때가 오면
오히려 곧추 세우리라
죽임당할 때가 오면
오히려 부활을 꿈꾸리라
그들의 때가 오면
오히려 나이리라
그리스도의 증인
한민택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자신을 ‘증인’으로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사도 5,32) 증인은 무언가를 보고 들은 사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겪은 것, 곧 예수님의 온 생애,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위험을 무릅쓰고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들은 것일까요? 그것은 다만 예수님에게 일어난 외적인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외적으로 일어난 일 때문에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겪은 것은 따뜻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스승의 인격이었고, 자기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분의 인격과 신적인 사랑이 그들의 온 마음을 뒤흔들었고,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켰기에,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분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증인’으로 양성하셨습니다. 오늘도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가 당신의 인격과 사랑을 전할 증인이 되도록 초대하십니다. 제자를 향해 내어주셨던 그분의 모든 것을 오늘 교회의 말씀과 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그 인격과 사랑에 마음을 열고 우리를 차지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리와 하느님의 뜻< 요한,15/26-16/4ㄱ>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진리의 영이 오시면“ 나를 증언하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3년이나 주님을 보고 듣고 체험하였지만 주님의 말씀이나 주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성령이 오신 다음에야 알게 될 것이다. 하십니다. 우리도 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 자리에서 다 알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음에 실질적 체험이나 적응하면서 더깊이 알게 됩니다. 우리는 들었다고 다 진리이고 자신이 보았다고 다 참돤 것아 아니라 실험을 계속하고 난 다음에야 알고 증언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알고 굳히고 깨닫고 확신을 가지고 실천하게 됩니다.
오늘 조님이 아려주고자 하는 진리는 예수그리소도가 사람으로 오시어 당신은 참 하느님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구약으로부터 내려온 계시와 역사 속에 신약에서 주님의 말씀과 업적을 중심으로 아려지고 증명되기 위하여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렇고 우리도 배워서 아는 것만 아니라 성령을 충만이 받은 다음에야 참으로 그렇구나 인정하고 증언하게 됩니다.
신앙의 진리는 아는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의 은사로 체험하고 깨달은 바를 전할 때 증명되고 확신을 가지고 실천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 있서 지리와 뜻은 같은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할까? 나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망설이게 하지만 하느미의 뜻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통하여 다 알려지고 성령을 통해 증명되고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찾고 진 선 미의 근원이신 주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상을 찾으며 이상을 삶의 목표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세상에만 극한 되어 있으면 하느님의 뜻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입니다. 독재자는 내 말이 진이다 내말에는 오류가 없다 내말을 따르라 하지만 그 말과 뜻 안에는 이기적 교만이 가득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법을 아기게 됩니다.
교황님의 무류지권을 공부하면서 교황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다 하지만 야기 절대적 의미가 아니고 교황좌에 낮아서 선포할 때라고 합니다. 교황님도 사석에서 잘못 말할 수있으며 교회의 역사 안에도 잘못 말하는 일이 있어 전에는 교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다가 바티칸 2차 공의회 후 달라졌습니다.
기도문도 태양이 떠오른다 하지만 태양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찾아간다고 해야 합니다. 이같이 교회는 세상에 진리에 대하여 선포 자가 아니라 성실한 응답자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며 길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고 깨닫고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 아멘.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자신이
그 사람입니다.
끝나지 않은
어리석은
짓거리는
안타깝게도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의 한계를
우리의 무능을
아프게 인정하는
힘든 시간입니다.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성찰합니다.
모든 악의 출발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출발합니다.
무지에 묶인 채
한 걸음도
선(善)을 향해
내딛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결단의 때
결심의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잘못된 부분을 찾아
수정하고 고쳐나가는
데 있습니다.
다시금 주님을
향해 길을 내어야
할 우리들입니다.
삶이란
바꾸고 변화되길
애쓰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망가뜨리는
우리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행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망가뜨림과
새로워짐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새로워지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2013년 10월 13일, 미국 뉴욕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공원인 센트럴파크 앞에 한 노인이 노점상을 열어서 그림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림의 크기와 종류에 상관없이 한 점 당 60달러(우리나라 돈으로 7만 원 정도)에 팔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노점상에서 팔고 있는 이 그림에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후에 첫 손님을 맞이할 수 있었고, 그것도 50% 할인을 해서 겨우 두 점을 팔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이 센트럴파크에는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림을 팔고 있는 노인을 찾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이 노인이 팔았던 그림은 세계 최고의 예술가라고 평을 받는 영국의 뱅크시(Banksy)의 진품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의 작품은 한 점 당 10~20억 정도로 거래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60달러에 두 점을 구입한 그 사람은 거의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행운을 얻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의 작품이 놓여 있는 곳이 길거리 노점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길거리의 노점상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대단하지 않은 그림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노점상에 있다는 이유가 뱅크시의 작품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작품 자체를 알아보지 못했던 시각이 문제일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많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인해 쉽게 판단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는 한 자매님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많아서 봉사할 뿐이라는 말, 평소에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서 성당 안에서만 열심한 척 한다는 말, 신부님과 수녀님한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것 등등...
이러한 말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분께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하느님의 일은 보지 못하고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판단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뱅크시의 작품이 노점상에서 팔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처럼, 하느님 일의 가치를 보지 못하고 잘못 판단하는 모습이 더 큰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진리의 영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 진리의 영인 성령이 우리의 보호자라고 하시지요. 왜 보호자라는 호칭을 쓰신 것일까요?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마음으로부터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볼 수 있는, 즉 하느님의 가치를 올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려는 마음이 들 때, 성령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가치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생텍쥐페리).
그 한 가지만으로도
어떤 물건을 구입하려고 인터넷을 살펴보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종류가 있어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종 조건들을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격, 디자인, 실용성, 그리고 이 제품만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능 등을 따져보았지요. 그런데 역시 망설였습니다. 가격이 마음에 들면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가격이 너무나 비쌌습니다. 실용성을 따지자니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용성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디자인이나 가격 등의 조건을 뒤로 하고 제일 실용적인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모든 것을 다 만족시키는 사람이 있을까요? 즉, 단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의 장점 딱 하나만으로도 그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건을 고를 때에도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하면서, 사람에 대해서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길 원합니다.
딱 하나의 조건을 떠올려보십시오. 특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 한 가지에 집중해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구석 구석에서 살아 계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AD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에 철저히 파괴됩니다.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요, 유다 민족의 자부심, 민족의 심장과도 같았던 예루살렘 성전이 허무하게 무너져내리는 상황 앞에서, 유다인들의 가슴 역시무너져 내렸으며, 크게 좌절하고 실망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유다인들의 분노는 자연스레 로마 제국, 그리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했습니다. 그들의 적개심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저주’ 기도문까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오만한 로마 제국을 당장 무너지게 하소서. 또한 나자렛파 사람들과 다른 이교도들도 지금 당장 사라지게 하소서. 바라옵건데 그들의 이름이 생명의 명부에서 지워지게 하소서! 저들을 멸망시키는 주님, 찬미 받으소서!”(랍비 가말리엘 2세 기도문)
요한 복음 사가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조만간 직면하게 될 극도의 고통과 박해를 미리 예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면서 용기를 고취시켜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복음 16장 2절)
그릇된 신념,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 안에서도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근거도, 논리도, 그 무엇도 없는 거짓과 악의 투성이의 신념에 사로잡혀 목숨을 거는 사람들, 참으로 무섭고 동시에 가련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유다인들, 자신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고, 구원에로 이끌기 위해 자신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박해한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을 통해 인류를 향한 당신의 생각, 마음, 의지, 모든 것, 결국 무한한 사랑을 낱낱이 드
러내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올바른 신앙을 내면에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측의 부단한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신지? 떠나가신 예수님을 대신해서 오늘 우리 가운데 늘 현존하시는 성령이란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바라봐야 하는지?
박해의 고통 속에 살아갈 당신 제자들과 공동체를 두고 떠나시는 예수님께서는, 다행히 우리 홀로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진리요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은 보호자이신 동시에 증언자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동시에, 예수님을 우리에게 계속 증언해주심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읽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각자의 그릇된 생각들을 바로잡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죄와 악의 깃발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죄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성찰케하시고 쇄신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현존과 역사하심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 역사 속의 인물로 남아계시지 않고, 오늘 우리 삶의 구석 구석에서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로 늘 새롭게 다가오십니다.
내가 하는 말은 따뜻한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일본 어느 음악학원 광고 내용입니다.
딸이 시집가는 날 아버지가 갑자기 축하곡을 연주하겠다며 피아노 앞으로 나옵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아버지가 피아노를 치실 줄 아느냐고 묻습니다. 신부는 못 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금 창피한 정도의 실력으로 피아노 연주를 시작합니다. 딸은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가 치는 곡은 신부의 죽은 어머니가 어렸을 때 자신에게 자주 쳐 주던 곡이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아버지의 탓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찍 집을 나와 독립해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아내가 치던 곡을 연습해왔던 것입니다.
곡은 중간에서 끊깁니다. 이제 딸은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쳐 줄 것을 기도합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그 곡을 연주합니다. 아버지가 치는 피아노 위에는 아내의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딸은 한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따듯한 언어는 뜨거운 눈물이 솟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언어의 온도’란 책이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만 있다면 스킬과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진정성이 스킬과 내용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진정성이 언어의 온도입니다. 말을 할 때, 그 말이 진실한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그 말이 필요한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두 번째, 그리고 그 말이 따듯해야 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제가 강의를 하다 보니 말을 할 때, 이 세 단계를 거침을 조금은 알겠습니다.
며칠 전에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본당 신부님이 “삼용아, 수고했어. 나도 말 재미있게 하면 좋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성서신학 박사입니다. 강의도 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냥 제가 말을 좀 잘 하는 것 같아서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에야 깨닫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말을 재미있게 하는 것은 강의하는 데 2% 정도밖에 영향을 못 줘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래, 맞아. 내용이 중요하지.”
저는 그냥 웃었습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길어질까 봐 하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엔 말을 재미있게 하는 것이 10이라면 내용은 80이고 나머지는 진정성입니다. 진정성이 나머지 10인 것입니다. 진정성이 있으면 일반적으로 내용도 좋습니다. 진정성이 없으면 아무로 좋은 강의도 A를 맞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진정성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나의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나의 진정성이 실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가 막히게 캐치하여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진정성이 없으면 “어, 내용 좋네!”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진정성이 있는 강의는 뭐라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냥 “강의 좋더라!”라고 말합니다. 뭐가 좋은지 물어보면 잘 모릅니다. 그냥 또 듣고 싶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삼형제와 공주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중병에 걸린 공주를 살리기 위해 전국에 방을 내렸습니다. 어떤 명의도 고치지 못하자 왕은 공주를 낫게 하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대궐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 마을에 각자 하나의 보물을 지닌 삼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큰형이 자신의 보물인 망원경으로 이 포고문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삼형제는 양탄자를 타고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셋째는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신기한 사과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과를 공주에게 먹이니 공주가 나았습니다.
임금은 셋째와 공주를 혼인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첫째와 둘째도 공주의 병을 고치는데 일조를 했지만 셋째와 혼인시키는 이유는 셋째는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소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더 사랑할 때 더 희생하고 더 희생할 때 더 말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기도도 이와 같이 세 단계로 나뉩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보는 망원경과 같은 단계인 소리기도를 바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저 말의 유희로 재미있게만 말하려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머리로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추리기도라 하고 묵상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과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양탄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느님과 합일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다 행하며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 내용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이를 관상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내어바치는 기도입니다. 이 사람이 하느님과 합일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은 비록 재미가 없을지라도 왠지 끌리고 또 듣고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증언하는 것이 당신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증언해야 할 일이 생길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성령께서 다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을 진정성 있게 만듭니다. 성령께서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참조).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는 만큼 알 수 있을까요? 아는 만큼 볼 수 있을까요? 어머니의 허리를 찍은 컴퓨터 사진을 보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설명하시는데 저는 사진을 보면서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허리의 특정한 부분이 문제가 있어서 해결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재활을 열심히 하면 전처럼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시원하게 하시고, 어머니가 걸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의사 선생님께 신뢰가 갔습니다.
길을 걷는데 노란 장미가 있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지나가는데 어떤 분은 장미의 향을 맡으면서 감상했습니다. 잠시 멈춰서 저도 장미의 향을 느껴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장미가 곁 장미라고 하였고, 장미의 이름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장미의 가지를 잘라서 물에 담그면 잔뿌리가 나올 것이고, 그것을 심으면 장미가 뿌리를 내리고 다시금 꽃이 필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 향을 맡아 보는 사람, 장미의 이름과 장미를 접붙일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는 만큼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는 것입니다.
알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갈망’입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이 지하철을 타지만 안전문에 있는 좋은 글을 감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좋은 글을 읽으려는 갈망이 적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삶이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5분만 시간을 내면 좋은 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소개한 글, 스님이 소개한 글,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성서는 갈망과 사랑이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갈망은 예수님의 사랑을 만났고 여인의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갈망은 예수님의 사랑을 만났고 여인의 하혈은 멈추었습니다. 눈먼 소경의 갈망은 예수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 하던 이방인의 갈망은 사도들을 만났고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이 성당에 오시면 그 이유를 질문하곤 합니다. 어떤 분은 시어머니가 열심히 성당을 다니기 때문에 오셨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기 전에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으려고 왔다고 합니다. 남자 친구의 부모님께서 세례를 받도록 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아내와 딸이 세례를 받은 후에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몸이 아팠던 딸과 아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건강하여졌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을 보고 아내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 오셨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종교를 하나 가지려고 했는데 천주교가 그중에서 가장 깨끗한 것 같아서 선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신앙을 선택하신 분들도 주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을 보았고, 방송이나 지면을 통해서 가톨릭교회를 알았기 때문에 성당을 찾았을 것입니다.
성당을 찾아온 분들은 다양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을 성당으로 초대하신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족들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삶의 시련과 아픔을 통해서 그분들을 성당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가족들, 교리교사, 봉사자들께서 예비자들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협조자’인 성령을 이야기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절망 중인 이에게 희망을 주는 분입니다.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온유함과 겸손함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려주는 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았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뜨거운 열정으로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사도들의 신념과 용기를 본 사람들은 사도들을 집으로 모셨고,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전하는 협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믿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요즘은 사실 어떠한 정보든지 인터넷 검색을 하게 되면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인터넷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검색을 하게 되면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듣게 되는 그분의 이야기는 똑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참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지식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하시는 주님의 영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았을 때 우리는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사람의 일을 하게 되지만,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는 주님 안에 참된 의미를 지니는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오소서 성령님!”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세상의 미움
곽승룡 비오 신부님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15,2)
사회로부터 당하는 것은 접근 금지뿐만이 아니라 소외당하는 여러 단계들이 있다.
옛날 로마의 법은 사회에서 위험한 인물로 여겨지는 사람을 유배 보냈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배척은 함께 살지 못하도록 사람에게 처하는 죽음에 대한 형벌이다.
교회의 역사에서도 초기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는 이유로 죽음에 처해진 사람들이 많았다. 교회는 그들을 순교자로 공경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집단에 의해서든 누구에게나 처벌되는 단죄는 사회, 국가, 법적으로 잘못된 이성에 의해 위장되었다는 현실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다양한 분야와 교회 역사의 현실에서도 이런 일들은 이어져 내려온 사실이다.
오늘날도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제거해야 되는 장애, 위험을 사회와 국가 심지어 교회에서도 만들고 있는 듯하다.
주님은 이런 사실들의 근본 원인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을 맺으신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요한15,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4)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에게 다가가는
함께는 해방
나에게 잡아끄는
함께는 억압
너를 위한
함께는 헌신
나를 위한
함께는 탐욕
너를 살리려는
함께는 화해
나를 살리려는
함께는 분열
너 중심의
함께는 이해
나 중심의
함께는 독선
너 먼저의
함께는 공감
나 먼저의
함께는 배척
성령은 세례로써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디무스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Lib. 2,12: PG 39,667-674)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한 하느님이신 성령께서는 세례로써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죄의 미천한 상태에서 본래의 아름다움에로 되돌리시며, 당신의 은총으로 채워 주시어 우리가 합당치 않은 것을 원치 않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또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며 흙과 먼지로 구성되어 있는 지상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키시고, 하느님 영광의 참여자로서 성부의 자녀와 상속자로 만드시며, 성자의 모습대로 형성된 이로서 영광을 받으며 함께 다스리는 형제 곧 당신의 공동 상속자로서 우리에게 이 지상 대신에 천국의 낙원을 기꺼이 주십니다. 그분은 이미 천사들보다 더 큰 영예를 우리에게 주시고 거룩한 세례의 물로 맹렬하고도 끌 수 없는 지옥의 불을 꺼버리십니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납니다. 육신으로 태어나고 또 거룩한 영으로 태어납니다. 복음사가들은 이 두 가지 탄생에 대해서 훌륭하게 썼습니다. 나는 그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의 가르침을 서술해 보겠습니다.
요한이 말합니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의 성령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과 가족 관계를 이루게 되는 특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낳아 주시는 하느님은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성 요한은 그리스도의 다음 말씀을 첨가했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성세대는 사제의 집전에 의해 우리가 볼 수 있는 몸을 외적으로 낳아 주듯이 물 속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께서는 천사의 집전에 의해 당신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시어 우리 몸과 영혼을 다시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세례자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과 성령”이라는 말에 따라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질그릇처럼 부숴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먼저 물로 깨끗이 닦고 그 다음 영적인 불로 철저히 굳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영적인 불로 굳히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새로워지게 하고 완전하게 하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불은 씻을 수도 있고 또 영적인 물은 태워 굳힐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안 떨어지기 위해서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과 안 떨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전 하신 말씀을 우리도 기억합시다.
지금도 세속은 가톨릭신자들을 하느님아버지로부터 떼어내려 합니다.
하느님아버지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사랑계명도 거부한답니다.
세상이나 자기를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고 죽지 않겠다며 버텨댑니다.
안 죽을 사람 세상에 하나 없는데도 그걸 모르다니 정신 나간거지요.
그러니 하늘 영원세상 부정하면 죽어 갈 곳 천당 아닌 것 빤하지요.
세상이 우릴 죽여도 죽어서 갈 천국 보장받자고 알려드리는 선교죠.
앉으나 서나 당신 중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뽑아주신 제자들이 이제 뽑힌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의 믿음의 시작은 예수님과 함께하며 보고 듣고 배웠다. 신앙의 꽃눈이 생겨나고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했다. 수정이 되고 예수님의 사람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는 신앙이었고 스승에 대한 증거하는 삶이다. 신앙은 세상을 초월하여 살게 한다. 참으로 부활하신 분,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분, 참 평화를 선물로 주신 분, 그 분은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우리와 함께 언제나 계신 분, 제자들은 스승을 높이며 증거의 삶으로 나아간디.
“예수님을 믿으십시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서 앉으나 서나 예수님 증거, 당신을 하느님으로 구세주로 증거하고 선포한다. 믿음의 사람에게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온전히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증거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의 증거에 귀를 막는다. 그리고 그를 미워하고 비난한다. 급기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박해한다. 모의하고 작당한다. “예수쟁이”를 없애버리자!” 예수쟁이는 성령을 힘입어 기쁨이 충만하고 죽음으로 나아간다.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하기 때문이라며, 저들을 위해 기도한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제자들의 증거를 보고 그들도 회개한다.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그것도 성격 탓인가? “못해요! 못해요!” 손사래 친다.
자기가 저기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눙력의 한계에 주저 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청하자! “오소소 성령님”
비가, 단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축복의 비, 생명의 비이다. 아침이 싱그럽다. 모내기 철이다. 이앙이 끝나고 단비를 맞으니 더욱 빠르게 뿌리를 내리겠다. 하느님께 감사미사를 드렸다.
요즘 노작을 한다. 고추 30여 포기 심었다. 벌써 고추가 달리기 시작했다. 가지, 오이, 토마토, 호박, 부추, 상추를 심었다. 찔레꽃 필무렵 너무 가물다. 작물들은 목말라 축 늘어졌다. 30도를 웃돌고 수분 증발량이 대단했다. 날마다 물을 길어다 막걸리 한잔 따라주듯 생명수를 주었었다. 그 노고에 생명이 잘 자라났다. 오늘만은 하느님께서 내가 물 주신다고 푹 쉬란다.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아침, 저녁으로 포장에 간다. 작물이 사랑을 먹고 자라나서인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난다. 모든 생명이 그렇다. 사랑이 없는 생명은 얼마나 모질까? 비오는 날, 하느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속지 마십시오'(요한 15장 26~16장 4ㄱ)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하느님을 위한 봉사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 착각을 표출하여 누군가를 해치고 병들게 한다면 죄를 짓는것이며 축복에서 멀어집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사리사욕을 챙기고 약하고 병든 사람들의 가진것을 빼앗으며 더 큰 고통을 안기는 이단이나 거짓 교회들이 있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한알님이 암을 낫게 해준다고 절박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상한 물을 먹게 한다든지, 휴거할 때가 오니 준비하자며 재산 다 빼앗고 결국 죽게 한다든지, 144,000명안에 드는 특은을 주겠다든지 ‥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선을 가장하여 하느님을 팝니다.
하느님을 위한 봉사라며 결과적으로 속여먹고 해를 끼치는 상태가 된다면 자신도 이웃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니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주님만 붙잡고 오늘을 충실히 ~^^
진리는 변함이 없다. <요한 15, 26-16/ 4ㄱ>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참 진리를 말하고 진리대로 이끄는 사람은 누구인가? 참 진리는 어디서 나오며 누가 참 진리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다.”라는 말이 있지만,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서로 나누고 도와주고 함께 할 수 있어도 밤을 낮으로 살 수 없고, 바다에서 사는 사람이 산에서 사는 것처럼 살게 못 합니다. 한 마디로 시간과 공간의 평등은 각자에게 불평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너와 나의 소통이 원활하여 거짓 없고, 사심 없으며,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생각은 “인심은 조석변개라” 말처럼 아침 말 다르고 저녁 말 다르게 나타납니다.
변함없는 참 진리를 찾기 위하여 오랫동안 읽혀 온 역사적 글이나 말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완전한 책은 성경 즉,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중심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주님의 말씀이며 천지 창조 때부터 변함없이 수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념에 집착하는 사람이나 권위나 재력, 지식으로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절대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참 진리의 말이 무수하게 있고 모두가 따라야 하지만 그 말이 말로만 있다면 믿음을 가지고 따를 수 없습니다. 진리는 각 사람에게 체험적이며 깊은 기도 중에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믿음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체험과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이런 말이 있으니 믿으시오” 하면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반대 의견과 깊은 명상이 따라와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다.” 하시지만 아니 계신 데가 있습니다. 하면 어디지 하고 어리둥절하지만 “내가 찾지 않으면 어디나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찾지 않은 신앙생활은 진리를 떠나 살게 합니다.
이같이 진리가 변함없이 우리 곁에 있어도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시는 성령은 체험적 능력으로 진리에 접근하고 연관 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이라 합니다. 진리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사랑으로 끌어안고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즉, 매사를 사랑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싸 안아야 합니다. 아니, 진리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은 기도의 길이며 모두가 기도의 새로운 의미를 알고 기도로써 말씀으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참 진리를 깨닫고 생활화되기를 기도합니다.
“진리의 성령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텅 빈 아름다움이여!
최민석 신부님
오십 후반 넘어 이따금 거울을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 한다. 알 듯 모를 듯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사람의 모습이 내 앞에 서 있다. 어떤 때는 볼수록 호감이 간다. 밝고 맑아 보여 보기 좋을 때도 있다. 가끔은 괜스레 밉기도 하고 안돼 보이기도 하는 홱 밀쳐버리고도 싶은 때도 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16-17)
거울 앞에 나타난 모습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육의 모습에 휘둘릴 때가 많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내게 오시면 자명해진다. 처음부터 계셨고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의 영이 오시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반드시 내게 좋은 것이 아니며, 내 눈에 나빠 보이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내게 ‘감각되는 것’과 ‘사실’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내 마음이 단지 보이는 감각에만 머물지 않고 그 너머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 현존에 머물면 즉시 마음의 평화와 자유 기쁨을 얻는다.
어쩌면 인생은 내가 내게로 가는 길이다. 거울 앞의 나와 거울 속의 나의 만남이다. 내가 나를 볼수록 신비하고 놀랍다. 인연 따라 사람 따라 경계 따라 시시각각 출렁거리고 변하는 나를 보고 만나고 알아간다. 있는 그대로 내가 나를 보듬고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알지만,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사실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마음이 지어낸 내 마음을 허상이요 허구일 뿐이지 결코 사물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누구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이렇듯 나 자신만을 챙겼음을 다시 알았을 때 나는 참 외롭다. 많은 이유로 아프고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곁을 몸으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 비켜가는 나 자신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참 부끄럽다.
나는 드디어 나이 육십이 다 되었다.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아픔과 고통에 온전히 공감하게 될까.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다.
간단하다. 진리의 영이 내게 오시면 모든 것이 자명하다. 주님의 영이 오시어 영원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계신 나를 밝혀 주시어 나는 이미 밝다. ‘남의 비친 나’나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차린다. 이제 나는 지금 이대로 나다. 겉과 속이 같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있는 그대로 나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주님의 영이 오시니 그 모든 방황이 끝이 난다. 알고 보니 나는 이미 주님의 사랑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그 사랑이 한 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 나를 향한 그 분의 사랑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다시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20, 23-24)
그 사랑이 뜻밖에도 지금 여기에 있다. 삶의 답을 얻고서야 마침내 추구가 끝난 것이 아니라 문득 추구를 그칠 때 이미 처음부터 내 안에 답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텅 비어 있음의 아름다움이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자의 가득한 충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텅 비어 있음의 아름다움이다. 그렇다. 그릇과 방이 텅 비어 있을 때 온전히 쓰일 수 있듯이, 나 자신도 그렇게 텅 비어 있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으며 진정으로 가득할 수 있다. 또 그때 비로소 자유 할 수 있다.
고요한 물이라야 고요한 얼굴이 비추인다.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보인다. 굽이치는 물줄기에는 굽이치는 마음이 나타난다. 고요한 가운데 있으면 고요한 얼굴을 만난다. 고요한 가운데 보면 삶의 모든 순간이 온통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는 곧 ‘현제’를 사는 것이며, 머무르는 바 없이 사는 나라다.
교회 선교 활동의 본질적 요소, -환대와 성령-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침 성무일도 아침기도 시 시편 첫 두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하느님이 그리워, 하느님 얼굴을 보고 싶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오늘 왜관 수도원에서는 고 이 미카엘 수사(1914.12.13.-2018.5.26) 선종 1주기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러니까 수사님은 어제 날짜인 작년 5월26일에 선종하셨고 어제 같은 날 우리의 사랑하는 도반 김종혁 에바리스트 신부가 선종하였습니다. 장례미사는 5.28(화) 오후 2시 왜관수도원에서 봉헌될 예정입니다. 마침 아침기도 즈카르야 후렴이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심으로써 우리를 살리시고 생생한 희망과 썩지 않는 유산을 주셨도다.”
어제 미사 직전 원장수사로부터 에바리스트 신부의 선종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듣는 순간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령께 감사했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5월 22일 에바리스트 신부를 문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평소 한 번 꼭 찾아 뵙겠다 생각하다 불현 듯 떠올라 하루 날을 잡아 5월22일 문병을 결행하여 신부님과 간단한 대화와 더불어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으며 마지막 즐거운 친교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제 생각인 듯 하지만 성령께서 제 마음을 일깨우셨던 것입니다.
그날의 감동은 다음 날 5월23일 강론에 사진과 더불어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참 저에겐 길이 잊지 못할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이었고 어제는 하루 종일 성령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성령 청원 성가였습니다.
-오소서 성령이여/우리 맘에 오소서/위로자신 이여
주님 찾는 슬기를 우리에게 주소서/맘의 위로자여-
로 이어지는 성령 칠은을 간청하는 성가입니다. 정말 성령의 도움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달았던 참으로 은혜로운 감사의 체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성령의 선물에 대한 언급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님을 증언하실 뿐 아니라 파견된 우리가 주님을 증언하는 것도 결국은 성령의 증언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있기에 우리가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고 항구히 충실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보이지 않게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겸손하신 성령입니다. 하여 성령은 교회 선교활동의 본질적 요소가 됩니다. 가톨릭 교리서 687항은 성령의 겸손함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하느님을 계시해 주시는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진리의 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 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하느님다운 이러한 숨김은,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요한14,17)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분을 아는 것은 그분께서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참으로 겸손하신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무엇보다 드러나지 않게 숨어서 일하는 겸손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이런 성령은, 성령의 사람은 교회의 선교활동에 절대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과 더불어 교회 선교 활동의 본질적 요소를 이루는 것이 바로 환대입니다. 겸손한 성령처럼 겸손한 환대의 사람들입니다. 곳곳에 산재한 겸손한 환대의 신자들이 있었기에 제자들이나 선교사들이 무소유의 삶중에도 복음 선포 사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과 더불어 이런 겸손한 이들의 환대가 없었다면 선교활동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 수도원 역시 무수한 겸손한 신자들의 환대의 사랑이 있었기에 존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환대 역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환대의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당신 백성인 우리를 좋아하시기에 항구히 충실히 우리를 환대해 주시는 주님이시며 바로 매일 미사가 그 좋은 증거가 됩니다. 바로 겸손한 환대의 모범이 오늘 사도행전의 티아티라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으니 바로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성령의 사람, 환대의 사람이 된 겸손한 리디아는 믿는 이들의 모범입니다. 이어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주님을 환대한 후 바오로 일행을 환대합니다.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기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청하며 강권했다 하니 리디아의 환대의 진정성이 그대로 감지됩니다. 겸손한 사랑의 성령이요 성령의 아름다움입니다. 겸손한 사랑의 환대요 환대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과 겸손을,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성령과 환대입니다.
성령과 환대는 교회 선교 활동의 본질적 필수 요소입니다. 교회가, 믿는 우리들이 이렇게 건재할 수 있음도 성령과 환대 덕분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은 성령과 환대의 원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성령을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환대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저희가 언제나 그 풍요로운 신비를 체험하며 살게 하소서.”
바로 본기도의 풍요로운 신비 체험이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성령과 환대의 체험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멘.
잘못된 신앙
김효석 신부님
최근 몇 년 사이 세계 곳곳에서 종교를 이유로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자주 듣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종교를 이유로, 또 그 종교의 절대자를 위한다는 허울로 다른 신을 믿는 이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종교인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종교라면 늘 보편적으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다른 사람도 모두 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해치려는 사람은 왜곡된 신념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생명을 앗아가는 것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때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무신론자나 타종교인 그리고 타교파 그리스도인을 무시하거나 미워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우리의 하느님도, 그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도 존중받고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어딘가로 멀리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현재의 반복되는 삶의 형태에서 오는 무료함이나 현재 겪고 있는 삶과 일의 긴장감과 치밀함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이 그 원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현실 세계에 대한 허망함과 아쉬움에서도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1-2)
주님께서는 유한한 시공 안에서 살아가며 활동하는 우리의 답답함과 아쉬움 그리고 허망함을 미리 염두에 두시기라 하신 듯 성령을 언급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우리가 그렇게 성령에 휘감기게 되면, 우리 역시 우리의 한계와 끝없이 채위지지 않는 갈증을 채우게 되고, 주님을 체험하게 되면서부터 주님의 사도가 되리라는 것을 일러주십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27절)
주 성령님, 저희에게 오셔서 저희를 사랑으로 휘감아주시고, 성령의 그느르심으로 주 예수님을 뵈옵고 그분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15장에서 16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라서 양쪽의 장이 다 걸쳐 있습니다. 15장 끝부분에서 예수님은 곧 오실 성령께서 당신에 대해 증언하시리라고 하시고, 16장 앞부분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겪게 될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미리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 26-27)
"증언"은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만지고 감동한 내용에 대해 전하고 알리는 것이 "증언"이지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증언을 하는 주체는 분명 사람이지만, 그 사람 입에, 그의 안에 내용을 담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증언"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성령의 증언에 힘입지 않고 인간의 말재주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삼 년을 보고 들었어도 제대로 다 깨닫지 못했다는 걸 복음사가가 이미 우리에게 솔직히 전하고 있으니까요. 제자들이 체험한 것들을 성령께서 "기억하게" 해 주시고 "해석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필리피에서 말씀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 일행의 선교활동을 서술합니다.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사도 16,14)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전해지려면 "증언자"와 증언 "내용"뿐 아니라, 증언을 "듣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귀 기울이게 하시는 분, 즉 선교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존재가 선교의 필수요소인 셈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증언의 "현장"에 성부, 성자, 성령, 즉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증언자"인 제자와 성령의 내면에 담겨 있던 "내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듣는 이"의 귀를 통해 그의 마음과 영혼을 관통해 들어가 자리잡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내용이신 예수님께서 듣는 이를 꿰뚫고 들어가실 수 있게 그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분은 성부 하느님이시고요. 그러니 단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이 전해지는 일은 성삼위 하느님께서 사력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힘을 모으시는, 온 우주와 맞먹는 거대한 과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는 이 총체적인 사랑의 과정이 모두에게 순조로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1-3)
만일 하느님께서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주지 않으시면, 증언자에게서 발설된 증언의 내용이 듣는 이에게 침투되지 못할 겁니다. 마치 딱딱한 갑옷처럼 경직된 그의 존재가 예수님을 튕겨 내어 거부하면 그에게 복음은 스며들지 못합니다. 그는 이 순간 자기를 위해 일하시는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알지 못한 채, 무엇과도 섞일 수 없고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는 돌같은 존재로 남을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어떤 씨앗도 품을 수 없고 싹도 틔울 수 없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돌덩이, 불모지처럼 멈춰버리게 되고 말지요.
예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닥쳐올 고난의 여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요한 16,1) 하시려는 것이고, 또 "그들의 때가 오면 (당신의) 말을 기억하게"(요한 16,4)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두가 다 알아볼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감추어진 보물이기에, 증언자에게 위험 요소들이 반드시 닥쳐올 터이지만, 그래서 복음을 위한 박해와 죽음이 더욱 가치롭고 의미 있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마음 준비를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천 년이라는 시간과, 지구를 빙 도는 거리를 지나, 역사의 길고 험한 과정을 거쳐 기적처럼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복음이,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요. 또 이를 가능하게 하신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작업이 얼마나 송구하고 감사한지요.
선교는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너무 좋고 자랑스러워 타인도 그분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기쁨과 함께 터져 나와 분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우리 입을 통해 그분의 이름이 전해지는 순간, 선교는 우리 일이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일이 되지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의 말을 듣는 상대방 안에서도 성삼위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 현존하시며 협력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두려워 말고, 주님과 나누는 사랑으로 기쁨 가득한 마음을 드러냅시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화답송) 아멘.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바라보지만
거짓은 그리스도를
외면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
참된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어리석은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진리를 알게하며
진리로 이끄십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욱 잘 이해하도록
십자가와 부활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진실된 믿음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에
충실하도록
우리마음을
새롭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안에서 사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진리로
풍요롭게 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충실하고 건전하게
또한 새롭게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이끄십니다.
많은 이들이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 성공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해꾼을 피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 방해꾼들은 내가 향하는 길에서 나를 이탈시켜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유혹자입니다.
그 첫째는 바로 부러움입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만큼 부러워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부러워하는 것일까요? 바로 내가 아닌 남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기준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준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자기도 모르게 남의 기준이 진짜 길인 줄 알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이 소유한 것을 자신도 갖고자 하는 삶,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방해꾼 두 번째는 흉내입니다. 이것 역시 첫째의 부러움과 다를 바는 없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부러움이 정신적 활동이라면, 흉내는 육체적 활동이라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유함을 찾지 못하고 부러움의 대상을 쫓아서 흉내 낼 뿐입니다.
진정한 성공의 길은 이러한 부러움과 흉내를 쫓는 삶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기 고유의 길을 찾아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고유함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과거 예수님을 몰아내기 위해 애를 썼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했던 이유는 예수님께 대한 부러움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자신들이 생각했던 존경과 사랑이 예수님을 향하자 부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했던 예수님을 흉내 내어서 자신들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인 것처럼 포장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고유한 일에 충실했다면 주님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주님 안에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과거 단 한 번의 일일까요? 아닙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에 대한 부러움에서 나오는 시기와 질투로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께서는 진리의 영이 당신을 증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진리의 영이 증언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 뜻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삶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는 성공은 부러움과 흉내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을 따르는 성공은 사랑 안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따르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천사를 악마로 변화시키는 것은 자만이고, 인간을 천사로 만드는 것은 겸손이다(성 아오스딩).
당신의 삶 자체가 중요하다(‘아름다운 동행’ 중에서)
험준한 산을 넘는 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산을 넘으면서 힘이 들고 숨이 차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준비했던 거래를 성공시키고 큰돈을 벌어서 돌아오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날씨가 점점 흐려지면서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눈보라까지 몰아쳤습니다. 삽시간에 눈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남자가 작은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하늘이 도운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눈보라 속에서 온몸이 흠뻑 젖어 그대로 있으면 추위에 동사할 것이 뻔했습니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모은 남자는 불을 붙이려고 노력했지만,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불쏘시개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품속에서 자신이 그동안 고생해서 모은 돈다발을 꺼내 주저 없이 불쏘시개로 사용했습니다. 덕분에 따뜻한 모닥불을 만들 수 있었고, 무사히 아침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밤새 심하게 불었던 눈보라는 그쳤고, 산에서 고립된 사람을 찾던 구조대는 모닥불의 연기를 보고 남자를 구조 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가지고 있던 돈을 불에 태웠지만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생명과 미래를,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었으니 나에게 이보다 더 큰 이득은 없구나.'
그 돈을 지키는 것이 지혜로울까요? 아니면 돈을 태워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하지만 이 세상 안에서 진정한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세상의 기준인 돈이나 명예보다 자신의 고유함을 드러낼 것들을 따르는 삶이 중요합니다.
꼭 필요한 때 꼭 필요한 말씀
전삼용 요셉 신부님
두 젊은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백화점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영학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인지 그 둘은 엘리베이터에서 안내하는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자신들도 당당히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인데 경영진에서 하는 이 대우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 친구는 사표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 친구는 끝까지 엘리베이터 일에 충실했습니다.
직위가 높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작은 일에도 충실한 이 사람을 보고는 그의 직급을 높여주었고 결국 그는 세계에 백화점 체인을 세워 백화점 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J.C. 페니’라고 합니다.
성경엔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 큰 일에도 충실하다.”란 말씀이 있습니다. 만약 그 백화점을 뛰쳐나간 친구가 사표를 내기 전에 이런 그리스도의 말씀을 한 번이라도 되새겼다면 그는 아마도 친구 페니와 함께 승승장구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어떤 선택을 하도록 나에게 미리 말씀해 놓으셔서 길을 잃지 않도록 섭리해 놓지 않으셨을까요?
제가 논문을 끝내고 한 달 동안 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를 차를 운전하며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의 모든 숙소를 미리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한 치의 지체함이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여행이었습니다. 하루가 늦어지면 다른 모든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비게이션과 도로의 표지판만을 의지하며 여러 나라를 여행했는데, 다니면서 느꼈던 것은 그것 두 개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가다가 조금 헛갈린다 싶으면 도로 표지판을 봅니다. 그러면 정확히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게 됩니다.
인간들도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 이렇듯 꼼꼼하게 지도와 이정표를 준비해 놓았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까지 찾아오는 길에 그런 이정표를 세워놓지 않으셨을까요? 더 완벽한 이정표를 세워놓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에게 박해를 받을 것인데 놀라지 말라고 미리 예고하십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리고 그 말을 미리 해 놓으시는 이유는 그 때가 오면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왜 그 말씀을 기억하도록 미리 말씀해 놓으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될 것을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니 놀라지 말고 끝까지 믿고 힘을 내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반드시 이정표가 되어줄 말씀을 미리 해 놓으셨다고 확신합니다.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때가 되면 그것을 기억해 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면 어떻게 기억해 낼 수 있겠습니까?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도로의 표지판이 있어도 읽을 줄을 모른다면 어떤 도움을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삶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도 얼마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힘들다고는 하는데 성경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더 이상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상황이 오면 그 상황에 맞는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러면 자비의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올바른 이정표를 제시해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에 신부님
스마트 폰이 2년이 되니 충전을 해도 쉽게 방전이 되었습니다. 100% 충전을 해도 4시간만 지나면 충전이 필요했습니다. 종로에 있는 서비스센터를 찾았습니다. 재작년에 종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로에 있던 서비스센터는 을지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적은 걸음으로 갈 수 있었는데 아쉬운 마음으로 을지로의 서비스센터로 가서 스마트 폰의 배터리를 새것으로 교체했습니다. 역시 새것은 좋은 것인지 충전을 하면 여유 있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에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가끔씩 업그레이드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능이 저하되기도 하고,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업그레이드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구는 사제들에게 연수와 피정을 하도록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연수를 통해서는 새로운 신학의 동향을 배우기도하고, 기존에 배웠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도 합니다. 저는 연수를 통해서 신흥종교에 대한 것들을 배웠고, 탈출기와 땅에 대한 신학적인 연구를 배웠고, 교황님들의 사회교리에 대한 것도 배웠고, 작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과 권고를 배웠습니다. 올해는 복음화의 사회차원에 대해서 배우려고 합니다. 교구는 다양한 연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사제들은 기쁜 마음으로 연수에 참여해야 합니다.
피정은 사제생활을 업그레이드 하는데 소중한 기회입니다. 예전에는 피정을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도 시간에도, 강의 시간에도 온 마음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피정은 하느님을 만나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입니다. 교회가 사제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특별히 마련해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이런 마음을 먹었다면 사제생활이 더욱 기뻤을 것 같습니다. 연수와 피정은 사제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사제들은 책을 가까이하고, 영적인 지도자에게 고백성사를 보고, 건강을 위해서 규칙적인 운동과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의 기쁨을 신자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박해는 없지만 교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의 중심을 재물에 두고 있으며, 선택의 기준은 ‘이익’에 있습니다. ‘사랑, 보람, 나눔, 희생, 봉사,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는 자본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큰 매력이 없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박해보다 더 크게 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최소한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주일미사 참례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청년, 주일학교 학생은 줄고 있고, 교회도 급속하게 고령화 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재복음화, 새로운 복음화는 지금,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라는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것보다 더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의식의 변화는 삶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이와 같은 의식의 변화는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례, 견진, 특강, 피정, 강론’으로 이루어지는 교육만으로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협조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엠이, 꾸르실료, 레지오, 소공동체 운동’은 성령께서 보내 주신 협조자였습니다. ‘성서 못자리, 청년 성서모임, 햇쌀’또한 성령께서 보내 주신 협조자였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고 있는 ‘복음화 학교’ 역시 성령께서 보내 주신 협조자였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 성령께서 보내 주신 ‘협조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기쁨의 두 원천, -환대와 성령-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신록의/바다위에 떠있는
섬같은/수도원
깊고 고요하다/그렇게 살고 싶다
신록의 섬되어/신록의 바다위를 걷는다-
얼마전 써놓은 글입니다. 깊고 고요한 하느님이십니다. 깊고 고요한 환대의 수도원, 깊은 고요중에 끊임없이 일하시는 성령입니다.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 성모성월입니다. 연초록 숲에 싸인 아름다운 수도원을 찾는 발길도 끊이지 않습니다. 피정자들에게 가끔 강의 서두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나러 가장 아름다운 곳 수도원에 오셨습니다.”
어제 어느 한분도 잠시 지나다가 수도원이 너무 예뻐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세 번째 듣는 수도원이 예쁘다는 말입니다. 수도원은 전통적으로 환대의 집이라 불립니다. 정주定住 분도 수도원 영성의 특징도 환대입니다. 세상에 숨겨져 있으면서 찾는 누구나 반가이 기쁘게 맞이하는 수도원입니다.
환대는 비단 분도 수도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덕목이기도 합니다. 애당초 환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우리 역시 주님을 환대합니다. 환대의 기쁨이 우리 삶에 큰 활력을 줍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리디아가 환대의 모범입니다. 선교사들이 선교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곳곳에 숨겨져 있는 환대의 사람들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겸손한 환대입니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바오로 일행에 강권합니다.
환대에 이어 ‘보호자Paraclete’ 성령이 또 기쁨의 원천입니다. 겸손하고 착한 신자들의 환대와 더불어 주님의 보호자 성령이 또 선교사들에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호자,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하느님답게 숨어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할이 얼마나 큰 지 깨달아야 합니다. 겸손히 숨어 계시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도와 주시는 주님의 성령입니다. 온갖 박해 중에도 제자들이 끝까지 주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도움 덕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 요한복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을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14,16-17).
바로 이런 겸손한 성령을,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을 깨닫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을 향해 활짝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숨결같은, 하느님답게 숨어서 끊임없이 우리를 도우시고 기쁨의 원천이 되는 성령입니다. 바로 이런 성령의 열매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의 덕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선교활동에 본질적인 두 요소가, 기쁨의 두 원천이 신자들의 환대요 주님의 성령이었습니다. 환대와 성령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영어 말마디가 'self-effacement; 겸손하여 표면에 주제넘게 나서지 않기’ 입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환대와 성령인지요.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 겸손하여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환대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해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 모두 겸손한 환대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저희가 언제나 그 풍요로운 신비를 체험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과연 나는 보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15,26-16,4a(부활 6주 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박해가 오면 제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십니다.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증언의 확실성인데, 그 확실성의 근거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증언하면서, ‘직접 보았다’는 것을 증언의 근거로 이렇게 제시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이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직접 본 이들입니다.
<첫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그렇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성령, 곧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직적 목격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분으로서 보내신 분인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
그렇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러기에 직접 목격한 그들의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을 미리 말한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요한 16,1)이요, <또 하나>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요한 16,4)이라고 하십니다. 곧 회당에서 쫓겨나고 죽임을 당하는 박해가 오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준비시키고 단련시키는 것이요, 오히려 그 시련 중에도 당신 말씀을 기억하여 당신을 증언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박해를 예고만 할뿐, 박해를 피할 방도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요한 16,4)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곧 기껏 “기억하라”고만 할 뿐입니다. 참으로 무력해보이기까지 하십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하시지 않으실까?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증거 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피해버리고 내팽개쳐버리고 눈 감아버리고 싶은 고통들을 마주칩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죄와, 끝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도 마주칩니다. 고통과 슬픔, 좌절과 어려움들은 결코 우리의 삶에서 피할 수도 제거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가 증거 됩니다. 곧 세상의 고난과 박해를 통해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증거 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고통 중에 있다하더라도, 그 고통 속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4)
주님!
미움과 박해가 닥치면 피할 방도를 찾기보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안정과 편안을 찾기보다 당신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불가항력으로 닥칠 때,
도저히 용서될 수 없을 것 같은 죄와 끝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를 당할 때,
바로 그때가 당신을 증거 해야 할 때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것이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힘을 빼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하루에 수십번도 더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만, 언제나 알쏭달쏭, 긴가민가, 개념이 잘 포착되지 않는 존재가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는 참 많이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있군요. 매 미사 시작과 끝에, 하루 다섯 차례 성무 일도 시작과 끝에, 삼종 기도 시작과 끝에, 식사전후 기도 때, 운전대를 잡으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며...
존경하는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님께서는 당신께서 반포하신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성령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신 바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처럼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이끌어주는 내적인 힘입니다. 동시에 그 분은 성부의 사랑을 세상 앞에서 증언할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19항)
그로 인해 받은 상처와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용서 못하겠다는 사람을 봤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몇 배로 되갚아주겠노라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활화산처럼 솟구치는 분노를 견디느라 몸과 마음이 점점 망가져만 갔습니다. 저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별의 별 위로의 말을 건네봤지만 일말의 효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다시 만난 그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수시로 솟구치는 화로 인해 울그락불그락하던 얼굴, 불면으로 인해 충혈되고 불안한 눈빛은 사라지고 잔잔한 평화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대체 비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딱 한 마디로 그러시더군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영혼을 물구나무 서기 하듯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내용물들을 샅샅이 털어냈습니다. 성령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고통의 연속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기적처럼 환한 미소 속에 살아가게 하시는 분, 바로 성령이십니다. 두꺼운 콘크리트 바닥처럼 차갑고 냉랭한 한 인간 존재를 한 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분,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불신앙을 흔들리지 않는 깊은 신앙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는 분,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정확히 의식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세례성사 이후 줄곧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보호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아주 더딘 것 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사랑의 길로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야망으로 가득했던 사도들이었습니다. 스승님의 체포후 다들 뿔뿔히 흩어졌던 겁쟁이 사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설명해도 신앙의 진리, 본질, 깨달음에 다가서지 못했던 아둔했던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목숨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인들 앞에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헤로데 왕이나 빌라도 총독,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죽이고 싶으면 한번 죽여봐라고 목을 내밀 정도였습니다. 사도들이 변화된 모습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던지 유다인들은 두려워 떨 지경이었습니다.
진정 변화된 삶을 살고 싶습니까? 이 지루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한번 제대로 바꿔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 성령의 현존을 목숨 걸고 믿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께 100퍼센트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도록 내 힘을 모두 빼는 것입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5. 07 부활 제6주간 월요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을 산 제물로 바쳐
하느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이를 살림으로써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한
자신의 죽음을 기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이를 죽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을 팔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핑계 삼아
누군가 자신에게 덮어씌운
죽음의 올가미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죽이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이심을 알고
삶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선한 뜻과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위선을 뒤집어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고
죽음의 순간에
생명의 위대함을 증언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기쁘고 당당합니다.
믿음의 증거자 <요한 15, 26-16, 4ㄱ>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이 참 하느님이신 것을 증명하려면 진리의 영이 바람 타고 우리에게 오셔야만 합니다. 학문을 배우는 사람도 배울 때는 잘 모르다가 현실에 참여할 때 그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수도자가 무엇인지 아무리 들어도 모릅니다. 실제로 생활을 하면서 분명한 수도 생활의 의미를 알고 일생 살아갑니다.
믿음은 듣고 시작하지만 실제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믿음을 알고 삶을 살아갑니다. 영과 육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영의 능력이 육의 능력을 초월하고 영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과 행동을 보여 주셨지만, 그 말씀의 깊은 뜻과 행동은 현실에서 새로운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끄는 의미에 따라 믿음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하늘의 뭉게구름이 여러 형태의 모습을 보이며 계절의 하늘을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형태를 바꾸는 것은 바람의 조화입니다. 우리의 삶이 믿음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온전히 하느님 영의 힘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유산으로 넘겨주신 믿음의 삶이 참삶이라고 성령을 통해 전해주시며,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우리의 모양을 이리저리 변형시켜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바로 살도록 이끌어주십니다. 믿음이 영의 힘으로 주님 나라에 살도록 기도합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마음에 오소서”
삶은 아무런 노력 없이 변화되는 것도 있고 노력함으로써 변화되는 것도 있습니다. 전자는 주름살이 넘치는 노인으로 사는 것이고, 후자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신을 가꾸고 기도와 묵상 중에 늙음을 멋있고 맛있게 형성해나가는 것입니다. 현실을 비난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웃고 춤추며 새로운 것을 배우며 늙음을 극복하고 꽉 찬 인생을 살아갑시다. 그런 우리를 보고 믿음을 이어갑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순교시대에는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배교를 강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과 멀어지게 하는가 하고 점검해 보면, 가끔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나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26-16,1) 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가 주님을 확연히 깨우쳐 믿고, 주님께 온전히 다가서도록 되살려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해와 몰이해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하느님 구원 역사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 반복되어온 ‘이해와 몰이해’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순명은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 뜻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고, 하느님의 뜻을 넘어서는 자신들의 욕망이나 몰이해에서 비롯한 불순명은 재앙으로 이어졌습니다. 어쩌면 시대를 반복해온 몰이해가 그리스도 육화사건을 이끌어낸 필연적 까닭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주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아들의 순명에 있었고, 그 자비와 사랑은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하느님 권위를 되찾은 것으로 자기위로를 구했습니다. 무참히 살해되신 성자 하느님 앞에서 잠시 숨죽였던 구원역사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 사건을 통해 다시 현재형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뜻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 오늘의 신앙인들 안에서 구원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진리의 영께서는 우리의 힘을 채워주시는 보호자로 함께 계시며 매 순간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내도록 돕고 계십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름답게 피어나는
예쁘고 소중한
오월의 꽃들을 봅니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 무언지를
알게하여주십니다.
예수님 말씀에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당신의 삶 모두를
건네주신 예수님을
더욱 잘 알게하여
주십니다.
세상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를 알게하여
주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굽이굽이 걸어온
모든 길에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예수님 말씀에
의지하게 합니다.
끝까지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진리의 삶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삶또한
성령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진리의
나날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향기로운
진리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