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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사] 1. 고조선의 시작
[고조선사] 2. 지도로 보는 고조선의 시작과 발전
[고조선사] 3. (쉬어가기) 기자조선은 정말로 존재했을까?
[고조선사] 4. 패기가 넘치던 왕국(王國), 고조선(기원전 4세기)
[고조선사] 5. 우리 역사 최초의 전쟁 -고조선의 대몰락- (기원전 3세기 초반)'
[고조선사] 6. 고조선 부활하다(기원전 3세기 후반)
[고조선사] 7. 위만, 고조선의 임금이 되다.
1. 위만왕의 시대가 열리다.
왕실이 바뀌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망명자가 고조선의 왕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의 이름은 '위만'
통상 '위만'이라고 부르지만 저는 이 연재에서 '위만왕'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우리 역사에는 이름에다가 '왕'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앞에서 본 '부'도 '부왕'으로 불리고, '준'도 '준왕'이라고 불립니다.
고구려의 '고보장'도 '보장왕'으로 불리고,
백제의 '부여의자'도 '의자왕'으로 불립니다.
뒷글에서 볼 '우거'도 '우거왕'으로 불립니다.
위만도 고조선의 임금이었으므로 이 연재에서는 '위만왕'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2. 고조선의 대중국 정책
고조선에게 있어서 가장 큰 외세는 아무래도 한 제국입니다.
한 제국과의 갈등은 자칫하면 국가의 존립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위만왕은 한과 분쟁을 만들지 않으려 했습니다.
위만왕이 취한 조치를 <사기>를 통해 살펴보시지요.
<사기> 조선열전
이때는 마침 효혜(孝惠)·고후(高后)의 시대로서
천하(天下)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遼東太守)는 곧 위만(滿)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蠻夷)의 군장(君長)이
[중국(中國)에] 들어와 천자(天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天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위만왕은 기원전 2c 초반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한 제국의 우위를 인정합니다.
준왕이 중국 세력과 대립하여 패수(압록강)까지 영역을 넓힌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입니다.
사견으로는 위만왕은 당장 내부를 단속해야 하는 상황에서
굳이 거대한 외세와의 갈등을 야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외교적 안정'이라는 실속을 챙긴 것으로 보입니다.
위만왕과 한 제국의 약조는 간단했습니다.
'고조선이 그 근방의 군장들과 한의 교류를 막지 않는 것'
'한의 국경에서 노략질이 없게 할 것'
위만왕 입장에서는 이것만 지키고 한 제국의 우위만 인정한다면
대중국 관계에서 '안정'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위만왕은 외교적 안정을 찾았습니다.
3. 안정적인 왕권
대중국 관계를 안정시킨 위만왕은 자신의 왕권도 안정시켜야 했을 겁니다.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된 만큼 왕권의 안정은 필수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당시 고조선 내부 사정을 알리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위만왕이 왕좌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은 추측이 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위만왕의 다음 행보를 보면
위만왕의 왕권이 생각보다 안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만왕은 한 제국이라는 거대 세력과의 제휴를 통해
외교적 안전을 확보하였고,
그 덕에 더 이상 주변에 눈치를 볼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조선은 '확장'을 시도합니다.
이러한 확장이 가능한 것은
왕권이 비교적 안정되었기 때문으로 판단이 됩니다(사견).
그리고 확장의 과정에서 왕권이 다시 안정이 되는 효과를 누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사견).
4. 고조선의 영토 확장
위만왕은 영토 확장을 시도합니다.
관련 기록을 보시지요.
<사기> 조선 열전
이로써 만(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番)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사기>에 따르면 위만왕은 기원전 2세기 초반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복속 시키고, 진번, 임둔까지 복속시켜
고조선의 영역이 수천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조선은 영토를 확장하며 전성기를 누린다)
위만왕 당대에 확장한 곳은 진번과 임둔이라고 합니다.
진번은 지금의 황해도 지역이고
임둔은 지금의 함경도 지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준왕 대에는 평안도 지역에서 머물던 고조선이
황해도 지역과 함경도 지역으로도 영토를 확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가 언제인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또 다른 영토 확장 기록이 있으니 살펴보시지요.
<후한서>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조선(朝鮮)의 지역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 지역입니다.
여기서의 고구려는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건국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후한서>에서 말하는 고구려는 '원고구려 지역'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고구려의 모태는 기원전 3세기부터 압록강 중류(현재의 환인, 집안)를 중심으로 발견이 됩니다.
고구려 특유의 적석총들이 그 무렵부터 발견이 되지요.
물론 이 당시 고구려가 국가를 세웠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학자들은 이 지역이 고구려의 모태라고 해서 '원고구려 지역'이라고 명명합니다.
만일 <후한서>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은 '원고구려 지역'까지도 영토를 확장했다는 것입니다.
예, 옥저, 원고구려 지역을 어느 왕이 얻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준왕 대에 평안도 지역에서 머물던 고조선이
위만왕 이후로 크게 확장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단순한 면적만 계산해보아도
가히 엄청난 영토 확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5. 고조선의 전성기
고조선이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국관계에서 외교적 안정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조선은 원래부터 한반도 내부에서 체급이 가장 큰 국가였는데
중국과의 관계가 안정이 되니 주변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고구려의 장수왕도 중국과의 외교 안전망을 구축하고
백제, 신라를 공격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고조선도 중국과의 외교안전망을 확보하고
주변 세력을 흡수시켜버리니 비슷한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위만왕은 찬탈자라는 비판을 듣고 있지만,
고조선의 전성기를 이끈 중흥 군주이기도 합니다.
중국과의 관계는 평화롭고
주변으로 큰 확장을 하여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한 업적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그 왕위는 후대에도 이어지는데요.
다음화에서 계속..
한울리카 올림.
첫댓글 잘봤어! 고조선도 기록이나 유물등이 많이 있으면 좋은데 ㅜ 고조선 터가 지금 중국이라 쉽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