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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mkorea.com/6836815680
1. 동천왕
고위전쟁에 어그로 다 끌린 왕
동천왕은 조위의 장군 관구검한테 털린 비운의 왕으로 인식됨. 그나마 졌잘싸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아무래도 결과적으로 보면 피해가 막심하여 유능하다는 소리는 못듣는 거 같음.
이렇기에 여기서는 개로왕처럼 내정을 조금 더 조명하려고 함. 그래서 동천왕 내용은 내정과 배경만 다루겠음. 개로왕 역시도 한성백제 종말 시키고 도림한테 휘둘린 암군이라고 보고 있지만 실제로 내정에는 능했으며 이는 백제편 참고
동천왕 시기부터 14대 봉상왕까지 부자계승이 일반적이었고 또한 이미 9대 고국천왕 시기부터 나부 체제는 해체되고 있었음. 고구려 나부 체제의 해체 원인으로는 백제처럼 나부 간의 경제적인 격차와 나부들이 국내성으로 모이고 되었음.
고국천왕 때 눈 여겨볼 기록은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킬 때 진압하고 4부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걸 방위부로 보고 있음. 본격적으로 방위부가 나온 것은 동천왕 시기이고 부자계승이 쭉 이어지면 권력이 부자로 이어지면서 왕권이 자연스럽게 강화 될 수 밖에 없음.
1~5대는 부자관계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당연히 개구라이고 후대에 윤색된거임. 영웅적인 왕자관에 입각하였기 때문에 1~5대에서는 태자들도 유달리 잘 교체되거나 신화적인(주몽, 유리명왕, 대무신왕) 면이 부각된다.
또 고위전쟁에서 유달리 동천왕의 친위대격 성격인 방위부가 등장하는데 동부 밀우, 하부 유옥구, 동부인 유유 등이 목숨을 걸고 적장을 살해하고 1000기의 친위군은 끝끝내 동천왕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방위부를 국왕에 충성을 다하는 친위세력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또 방위부는 계루부에만 있었다.
고위전쟁 이후에도 동천왕은 전후복구에 힘 썼는데 기록이 부족해서 알 수 없으나 방위부 역시도 친위적인 느낌이 물씬 든다. 또한 전쟁에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근초고 근구수처럼 부자계승에 성공했다는 점은 동천왕이 적어도 내정 한정으로는 무능하다고 보기는 어려움.
백제 글에서 적었지만 개로왕의 국서 보면 고구려 원정에서 근구수가 강조되는데 이는 근초고가 실제로 근구수한테 군권을 주고 실전에서 캐리하게 만들어서 무난하게 근구수가 이어 받음.
내가 생각하는 동천왕에 대한 평가는 비록 전쟁은 졌지만 나부체제가 해체되는 과도기적인 왕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보는 바임. 무조건 고위전쟁의 승패 여부만 볼 게 아니라 동천왕 시기 고구려의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음.
다만 기록의 부재와 동천왕이 다른 왕들에 비해 유달리 뛰어난 부분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암군 소리 듣기에는 조금 가혹한 처사임.
1. 왕위계승
이걸 첨부하는 이유는 이전에 고구려 왕위 계승에 대해 알면 좋으니깐 올려봄.
삼국의 왕권이 약해서 간혹 뺏기는 경우가 있긴 한데 위 글에서 나온 것처럼 동천왕부터 봉상까지 부자계승의 양상이 확인되는 게 맞음. 여기서 초기왕 1~5대도 부자계승이라고 말하는 거 같은데 좀만 뒤로 넘어가면 1~5대왕의 부자계승을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봄
1~5대는 영웅적 왕자관을 토대로 한 비혈연적인 관계라서 주몽과 유리명왕의 관계를 친자로 보지 않거나 비현실적인 영웅담이 강조되거나 또 1~5대가 무난하게 부자계승했다면 왕권이 강화된 태조대왕부터 왜 다시 형제계승으로 퇴화한건지 납득가게 설명이 불가능함.
이러한 것은 이 책 저자만의 개인적 주장이 아닌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언급한 문제임.
2. 고국양왕
너무 잘난 형과 넘사벽 아들을 둔 왕
고국양왕의 형은 소수림왕, 아들은 광개토왕... 이렇기에 분명 유능한데 인지도가 너무 낮음. 심지어 아빠도 고국원왕으로 안좋은 쪽으로 유명하다.
아니 인지도보다 더 슬픈 건 그나마 있는 업적들도 다 광개토왕의 업적으로 포장되기에 이번 글은 사실은 고국양왕의 것인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거 위주로 적겠음.
첫번째로 신라와의 관계임. 광개토 원정 중에 신라 구원해서 거의 속국화 시킨 건 다 알거임. 고국양왕 시기에 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성이 함락당해서 고국양왕은 우호관계를 맺고 내물왕이 실성을 보냄. 이때문에 광개토왕이 곤란에 빠진 신라는 도와준 이유가 고국양왕 때의 신라와의 우호에서 보는 측면도 있음.
신라 구원은 광개토의 공이지만 신라와의 우호는 고국양왕의 업적임. 이렇기에 광개토의 신라 구원을 생각할 때 고국양왕도 있었다는걸 잊지 말아주삼.
두번째는 요동정벌임. 여기서 눈 여겨봐야하는 부분은 무려 4만의 대군을 동원했는데 아들이 5만의 대군을 동원해서 묻히고 남녀 1만명을 데려온다. 그렇지만 몇 달 뒤 후연의 명장 모용농이 바로 반격 때려서 뺏긴다.
근데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당시 후연 황제가 모용수였는데 모용수가 어떤 인물이냐면 환온, 유뢰지 등 동의 명장들 싹 다 바르고 북위의 수도까지 먹어버리는 당시 괴물 같은 놈이었음. 이렇기에 후연을 파죽지세로 확장 시켜 북방 최강으로 만들고 모용농 역시도 군재 증명 된 베테랑 인사라서 고국양왕이 이길 수 없는 판이었다.
광개토 때가 딱 북위 성장 맞물려서 후연 씹퇴물 시기라 수월했던 것도 있음.
물론 고국양왕이 소수림왕, 광개토보다는 확실히 못하는데 이건 고국양왕이 무능한 게 아니라 소수림왕이 고구려 왕 중에서 정치 ㄱㅆㅅㅌㅊ였고 광개토왕은 한민족 goat라 그런거임.
3. 안장왕
개혁을 통해 전성기를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왕
안장왕은 고구려 22대 왕으로 그 이전에 전성기 포스 보여준 광개토, 장수왕한테 확연히 존재감 밀린다.
안장왕은 북위한테 책봉을 낮게 받았는데 이는 백제보다도 뒤떨어짐. 아래 영류왕 부분에서 설명하겠지만 당시 안장왕은 양나라와 관계 맺어서 이에 대한 북위의 반응이었음.
그리고 안장왕이 이런 다원적인 외교활동을 한 이유는 당시 북위가 선무제 사후 쇠락하였기에 대양외교에 집중하였음. 또 문자명왕(거품 편 때 나올 예정) 때 고구려가 서서히 하락하였는데 이때 요서를 쳐서 유인들을 데려오고 이는 요서진출의 시도로도 볼 수 있지만 문자명왕 때 상실한 요해제족을 견제하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음.
또 한강 유역에 대해 갈리지만 백제본기 문면 그대로 존중하자는 긍정론자들의 주장처럼 백제가 북상하여 무령왕쯤에 다시 한강 유역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있음. 통설은 고구려가 계속 지배했다이지만 신설도 논리적으로 부분긍정론자들도 등장했다.
신설을 미는 긍정론자들도 이러한 백제의 북진이 끊기는 년도가 오곡원 전투에서 대패해서인데 이때 안장왕이 직접 출진하여 백제군을 대파하여 쫓아냄. 이게 사실이라면 이 대업적은 인정 받아야된다,
안장왕 때 로맨스 떡밥인 한씨 미녀 이야기를 한수 하류 유역 애들과 연계하여 민심을 샀다는 견해도 있고 또 한기묘지에 의하면 안장왕은 적극적으로 한인을 고구려로 데려왔음. 그렇지만 안장왕은 살해 당한다. 그 이유는 동성왕과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동성왕은 신진 세력들 등용하면서 왕권 강화하려고 했는데 본인이 컨트롤 딸려서 가림성으로 견제 때리다가 뒤졌다면 안장왕은 한수 세력과 한인 세력을 적극 등용했지만 결국 이게 반발을 낳아 죽었다.
또 안장왕은 고구려 후기를 시작하는 왕이기도 한데 후기를 귀족연립정권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정치는 3가지, 초기 나부 체제, 중기 왕권으로 대표되는 중앙집권화 체제, 후기 귀족연립체제 일케 이해하고 있다.
귀족연립정권을 단기로 볼건지 장기로 볼건지 학계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다투고 있기에 여기서 섣불리 누가 맞다고 말하기 어려움. 그 점 양해하고 이 글을 봐야한다. 결론만 보자면 안장왕은 문자명왕 때부터 약해진 고구려와 왕권을 회복 시키려고 신진 세력을 받아들이고 전쟁에서도 꽤나 괜찮은 성과를 보였지만 결국 시해 당해 엔딩은 못 본 비운의 군주라는 것이고 그 뒤부터는 확실히 고구려는 쇠락한다.
4. 평원왕
고구려의 중흥을 이끈 왕
논란 있는 왕이지만 훌륭한 왕이라는 점은 이견이 없다. 또 평원왕 개인의 논란보다는 귀족연립정권의 논란이다.귀족연립정권 자체에는 동의하나 거기서 고구려 국왕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
평원왕 대 귀족연립식 정치 운영을 견제하고자 근시조직인 중리제를 개편하여 새로운 근시조직인 막리지로 대표되는 중리제를 설치 운영했다고 보고 있다. 이렇기에 왕권강화를 하여 귀족들을 통제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반론으로는 대대로의 성격에 관해 주서와 고려기가 같아서 평원 영류왕 때도 예외가 아니며 귀족연립정권은 단기가 아닌 장기라는 것이다.
고려기에 의하면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국가의 기밀을 관장하고 정사를 도모하고 군사 징발하고 사람을 선발해 관작을 수여했다고 한다. 이렇기에 고구려 후기 국가 운영은 대대로 중심으로 하는 상위 관등 소지자가 좌우했다는 것이다.
대대로 선출 과정에서 만약 무력이 동반 될 때 왕은 중재는 커녕 왕궁을 닫고 스스로 지켜 다툼을 제어할 수 없었다고 함. 그렇지만 귀족들이 적당히 세력 균형되면서 상대적으로 왕권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는 측도 있기에 고구려 후기 정치를 이해할 때 왕이 약한 시기도 있지만 적절히 활용하여 강해졌다고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듯하다.
이렇기에 평원왕 때 귀족들을 적절히 통제했다는 아예 개소리는 아니며 시기에 따라 조금 위상이 달라졌을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여기는 그래도 긍정적으로 적어주고 싶은 곳이기에 장안성과 대외관계, 정치 부분 짤막하게 요약하겠음.
장안성의 본격적인 축조는 평원 시기로 보고 있고 양원왕 말년의 정국 혼란과 달리 안정적인 정국을 운영했다고 보고 있음. 단 기록 자체로 보면 시작 자체는 양원임. 그니깐 귀족연립을 장기로 보는 측도 평원왕이 무능해서 귀족을 제어 못한다고 보는 게 아님. 이거는 그냥 따로 글 쓰고 여기서는 찍먹만하자.
또 동기는 이 당시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고 돌궐의 부상으로 건설했다는 주장이 있다. 특이점은 장안성 축조는 기록에 의하면 영양왕 4년으로 추정하는데 완공되기도 않았는데 이미 평원왕이 이도가 단행된 걸 위진남북조의 종결로 보는 견해 등등 다양해.
장안성에 대한 의미 역시도 다양한데 그 중 흥미로운 내용은 백제사 웅진 사비 천도로 비교되어 검토된다는 것도 흥미로움. 장안성은 평양성 옆에 있기 때문에 고구려 수도를 평양으로 봐도 됨.
주 수 교체기도 문제인데 그 이전의 더 큰 문제는 돌궐이 동진하면서 요해제족들을 압박했고 이는 고구려한테는 중대한 위기였다. 이때 고구려 역시도 거란족을 받아들이고 철을 수출하는 식으로 대응하다가 전투함. 그렇지만 돌궐이 고구려와 말갈한테 대패하고 북제와의 관계 등등으로 하기에 고구려 돌궐 전은 563~577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됨.
또 배산 전투라고 온조가 북주 이긴 거 있는데 이건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고보녕으로 보는 설이 가장 믿을만했음. 고보녕 이야기는 고보녕이 반기를 들자 북주에서 고구려가 북제 부흥군과 작당모의할까봐 공격한 것도 있고 고보녕과 대립 등등 다양하게 있음.
수나라가 들어서자 고구려는 열심히 인재 빼오고 수문제가 직접 조서에서 말갈을 몰아 핍박하고 거란을 가로막고 금한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거란과 말갈에 고구려의 영향이 있고 고구려가 거란과 수랑 가까워지는걸 차단하여 띠껍게 보는 것이다.
평원왕은 외세에도 적극 대응하고 고구려의 영향력을 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음. 내치로도 장안성 천도나 정국은 안정적으로 운영한 건 사실이 맞다.
다만 좋게 적긴 했지만 요서를 비롯해 말갈 거란을 모두 다 완벽히 통솔한 건 아닌데 넷상에서 고구려 영향력을 너무 강하게 강조하기도 하니 주의 깊게 봐야할 것이다.
5. 영류왕
나는 찐따가 아니다
고구려 왕 중에서 가장 왜곡된 이미지를 가진 왕임. 영류왕을 저평가할 수 있음. 그런데 문제는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까는 건 억까이자 왜곡임. 이렇기에 여기 문단은 대중에게 알려진 영류왕 말고 진짜 영류왕의 모습을 보자.
영류왕은 대당외교에서 지나치게 비굴했다고 욕 먹으나 몇가지는 사실과 다름. 일단 분량상 남부 외교, 정치, 기타 등등 다른 건 다루지 않고 오로지 대당외교만 다룸.
첫번째, 영류왕이 경관을 허무는데 방관했다? 심지어 심하게는 영류왕이 경관을 허물었다고 욕함. 경관은 당나라에서 온 장손사가 자기 ㅈ대로 허문거고 영류왕도 이 소식 듣자마자 대당외교 끊고 천리장성 축조라는 군사적인 수로 대응했음. 이정도면 할만큼 한거고 호구처럼 당한 것도 아닌데 영류왕이 마치 당나라 따까리여서 아니 심하게는 영류왕이 아예 주도해서 경관을 허문 것으로 이야기하는 건 어폐가 있다.
두번째, 영류왕은 재위 기간 내내 당나라한테 굴복했다. 틀렸음. 진짜 냉정히 타임라인으로 나누면 단교한 게 더 길다. 19년에 처음 당한테 갔고 이때 이연이 고구려한테 띠껍게 굴지 않았음. 우리가 아는 영류왕의 모습은 26년 당태종 시기이며 이때가 적극적으로 대당외교하던 시기이고 단교가 30~38년까지고 영류왕이 42년에 시해 당해서 의외로 손절한 기간이 더 긴데 재위기간 내내 따까리 짓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
다시 시작한 이유도 당태종 시기에 주변 이민족들 정리되고 고창 정리되자 고구려가 이에 반응하여 당한테 이야기한거지. 갑자기 영류왕이 너무 굴복하고 싶어서 친한 척한게 아니다.
세번째, 당태종한테 무시 당하고 한사군 땅이라고 도발 당함. 이건 진짜 개쌉소리 억까인데 위에 19년에 이연한테 갔고 22년에 이연이 직접 각자 영역을 보전하자고 오히려 공격할 뜻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당시 당이 할거 상태여서 그런거지. 뭔 영류왕이 존나 대단해서가 아님.
마찬가지로 당태종이 한사군 땅이라고 도발한 거. 고구려가 지금 원래 우리 땅인 한사군 땅 먹고 있으니 우리가 정벌해서 다시 되찾자는 정치적인 발언이고 사신 무시하거나 개차반처럼 군 건 당이 할거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런거지. 뭔 영류왕 때문이 아님.
네번째, 봉역도를 줬다는 건데 봉역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별 소용 없다는 주장부터 기밀 자료 담은 주장도 존재하는데 봉역도의 뜻이 흙을 쌓아서 만든 경계라는 뜻이라 세력권을 분명히하려는 목적으로 보고 있다. 세력범위보장 목적이라는 의견(임기환, 이용범, 정원주) 정도가 있음.
다섯번째, 진대덕한테 모든 기밀 정보 다 털렸다? 삼국사기 찬자가 그러한 시각을 강조 시켜 서술해서 그럼. 진대덕이 간 건 중국 기록에도 있고 고구려 이곳 저곳을 둘러본 것도 사실임. 그런데 영류왕이 군대 데리고 와서 진대덕을 만난 건 정상적인 접대가 아니며 당시 고구려 지방에는 여러 장성들이 있었는데 이건 고구려가 아직도 건재함을 자랑하는 것이지. 따까리가 아님
이건 내가 어렸을 때 학습만화 봤을 때 영류왕이 진대덕 옆에 붙어서 마치 개미한테 후장 대주는 진딧물처럼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영류왕이 군사들 끌고 맞이하는 모습이 고증에 맞음.
여섯번째 말갈 통제는 영류왕 업적이며 이는 중국측 기록으로 증명된다. 또 나중에 말갈병은 요긴하게 쓰이는데 여기에 영류왕의 공이 있음. 만약 당나라 따까리였다면 천리장성과 말갈을 적극적으로 통제에 나선 것은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돌궐도 고려해주삼.
1. 전문가들의 견해
https://www.fmkorea.com/6813337205
여기에 원본 그대로 나와있는데 이것도 약간 생략한거임. 나 역시도 학습만화의 영향과 인터넷 때문에 영류왕 개찌질해보여서 싫어했는데 나이 먹으면서 책 읽어보니깐 내가 영류왕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여기서 참고한 책 이름은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고대편), 7세기 국제정세와 고구려 수 당 전쟁, 아주 짧게 참고했지만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를 토대로 작성한 글임.
이렇기에 영류왕 관련 내용은 이 글이 아닌 저 링크 된 글에서 받겠음.
오해하면 안되는 게 영류왕 관련 댓글 자체를 안달면 좋겠다가 아니라 달아도 물론 고마운데 딱히 내가 반응하지는 않을 거고 반응한다고 쳐도 저 링크 글에서 이야기하자고 말할거임.
영류왕 외교 타임라인 관련만 첨부함.
2. 확실히 해야하는 것
역덕들은 재평가를 좋아하며 나 역시도 좋아함. 그런데 유의해야하는 점은 재평가를 할 때 암군 명군 이분법적으로 보면 절대로 안된다는 점임. 나는 개로왕도 내정은 유능하며 그 근거를 들었고 전문가들의 견해도 첨부했다.
그렇지만 결국 무능한쪽이라고 말했고 단지 유능한 면이 있다는거임.
마찬가지로 영류왕도 완벽했다는 게 아니다. 단지 영류왕의 대당외교가 과연 찐따 같았냐이다. 그리고 위에 보면 알겠지만 ㄹㅇ 위키부터 시작하여 오염 된 부분이 많다.
영류왕 저평가하는 거 자유다. 절대로 뭐라 안한다. 다만 실체를 알고 비판하는 게 더 좋다는거다.
나는 영류왕 고수전쟁도 있고 외교도 적당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유능하다고 보긴 보나 결국 연개소문한테 시해 됐으니 이 점에서 마이너스를 받는 것이다. 또 애초에 이 글 자체가 개로왕과 동천왕의 사례처럼 실책만 보지 말고 그래도 잘한 부분도 보자는 취지에서 적은거라 영류왕도 이 조건에 부합한다고 본다.
또한 시해 당한 안장왕이 이런 억까에 시달리지 않는 것처럼 영류왕 역시도 억까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말하지만 영류왕 저평가해도 상관 없으며 존중하겠음.
천리장성 추정 위치나 남부 외교는 위에 링크 된 글에 있음. 그냥 영류왕이 비굴하지 않았다는 거임.
6. 나가면서
또 몇 번 언급했지만 넷상 역사글은 비판적으로 봐야하며 내 글도 마찬가지임. 책 기반으로 적기는 하나 결국 내가 더 끌리는 학설 위주로 설명함. 이건 내가 인간이어서 어쩔 수 없고 전부 다 다루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고 중구난방의 형세임.
댓펌
5명 제한이라 빠졌을지도 모르지만 6명 뽑는다고 하면 미천왕도 넣어도 될거 같음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 겪고 대신들의 추대로 왕이 되고 서안평, 낙랑, 대방 싹 점령하고 모용선비와 각축을 벌일만큼 고구려를 키운 건 미천왕의 공로니까
개인적인 생각인데 서안평 점령하면서 요동반도 남단도 고구려 영향권 내에 들어가지 않았나 싶음 평주자사 최비의 요청으로 우문선비, 단선비와 함께 모용선비의 극성을 포위했는데 신성에서 출발한다 해도 모용선비의 권역을 지나쳐야 하니 고구려군이 극성에 도달하기 어려운데 요동반도 남단으로 돌아 안시성, 건안성 방면으로 요서로 나가면 바로 극성이니까 이 원정을 성공시키려면 안시, 건안 방면은 정복을 했든 투항을 받아줬든 둘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함
개인적으론 소수림왕 더 높게 평가해야한다고 생각함
교과서에선 율령 태학 불교로 지나가지만 자세히 치세 더 살펴보면 멸망해도 이상없을 나라 금방 재건하고 전성기 누리게 세팅까지 다 끝낸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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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 나 고구려 좋아하는데 나중에 버스에서 정독해야지! 고마워!!!!
소수림왕 재평가 필요하지… 나라 기반 다시 재정립하는 건 척추 세우는 거랑 같다구.. 고구려는 초기에 왕위계승이 어마어마하게 살벌해가지고 후반부로 갈 수록 안정성 중시하는데 워낙에 역동적이어서 그 흐름을 다각도로 살피는 게 중요한 것 같아 글 진짜 재밌다 고마워.,
와.. 역사공부 뭔가 뽐뿌오는 글이야.. 고딩때 진짜 좋아했는데!! 흥미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