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생명 말씀(2017.2.26.) 말씀/ 마가 3:1- 6
율법의 근본 정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지난 주 수요일 날 재중집사님, 형빈 공장장과 함께 롯데시네마에서 ‘헥소 고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본래 점심 때 청계 와서 식사하고 산장에 올라가서 거기서 말씀 공부를 하려했는데 비가 와서 제가 하당으로 가서 함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바닷가 카페에서 말씀을 나누고, 오후에 영화를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 설명을 보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 후에 가장 리얼하고 감동적인 영화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보니 괜찮았습니다. 줄거리는 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이야기로 주인공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아마 제 7안식교도)인데... 태평양전쟁 중에 가장 치열했던 헥소 고지라는 곳에 투입되어서 무기 없이 혼자 힘으로 부상자 75명을 구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병과 위생병으로 군에 지원한 도스라는 청년입니다. 안식교라는 것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본래 양심 병역 거부자로 군 입대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젊은 이들이 다 나가서 싸우는데 자신만 안일하게 방위병으로 있을 수 없다고 의무병으로 입영 신청을 한 것입니다. 그냥 순수하게 보면 시작 스토리도 로멘스 있고 괜찮은 영화입니다. 처음에는 총을 들 수 없다는 이유로 필수 훈련 중 하나인 집총훈련마저 거부하다 동료 병사들과 군 전체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구타도 당합니다. 감옥에도 들어갑니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집총을 거부함으로 상관 명령 불복종으로 군사재판까지 받게 되는데 마지막 순간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찾아와 군 상부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집총 거부 법적 하자가 없고 오키나와 전투에 총기 없이 의무병으로 참전할 것을 허락한다는 판결을 받습니다. 나중에는 그의 목숨 건 행동에 모두 감동을 받고 또 자기를 괴롭히던 상사도 용서를 빕니다. 또 좋았던 것은 이 도스라는 청년이 변화된 과정입니다. 전쟁 참전 용사였던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 아버지에게 총을 겨누게 되고, 공포탄까지 쏘게 되는데 이미 마음으로 살인을 했던 그가 그 때 이후로 총을 잡지 않겠다고 결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살리는 일을 하겠다는 일념을 갖고 살아갑니다. 참 훌륭한 청년 이지요. 위험한 전쟁터에 자원도 하고. 군대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로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군대는 왜 왔는가 물으면 총은 잡지 않지만 살리는 일을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총 잡는 것은 죽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군인이 총을 잡지 않으면 죽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결국 의무병으로 입대해서 치열한 전투에 참여하고 죽어가는 전우들을 살립니다. 모든 부대가 후퇴했지만 본인은 끝까지 남아서 부상병들을 치료하여 달아내립니다. 총알이 날아오는 위기의 순간에 그는 하나님께 한 사람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구하고 나면 한 사람 더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 더... 그것이 75명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기적 이었습니다. 실화를 엮은 영화로 나중에 그 때 참전 용사들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들이 나오고 실제 인물 도스라는 사병과 그 애인 도 나와서 얼굴을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개인적으로 감동이 되었던 것은 그 전투가 끝나고 다음에 토요일에 다시 남은 부대원들이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상관이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내일 다시 전투에 투입 된다. 토요일이다. 토요일은 안식교도들의 주일입니다. 너는 가지 않겠지만 부대원들도 네가 없으면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도스에게는 강요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념의 안식교도 인데 자신에게 시험이 안 되겠습니까? 대신 10분 동안 기도 시간을 갖고 부대 출동이 지체 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도스는 철모를 눌러 씁니다. 자신도 출격하겠다는 표시였습니다. 안식법을 지키기 위해서 동료들이 죽음의 전쟁으로 떠나는데 홀로 남을 수 없던 것 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영화를 통해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집총 거부에 대해서 도스가 가졌던 신념은 자신에게는 하나의 믿음 이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일 총을 잡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서 하지 않고 오직 살리는 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과 박해가 와서 그것을 견디고 자신의 신념을 실현시켰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배우는 것은 최고한 법은 사랑이며 생명을 살리는 일 이라는 것입니다. 그 장면이 저에게는 참 감동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안식법을 어겼다고 지적 당하시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한 손 바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주시를 했습니다. 사랑이 많은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실 것이 뻔한 일인데 그 날은 안식 일 이었습니다. 만일에 병을 고치면 예수님은 안식법을 어기는 것이 됨으로 도리어 죽임을 당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지체 하지 않고 한편 손 마르는 사람보고 중간에 일어서라고 하셔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이 잠잠 하자 완악함을 탄식사히고 노하시며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즉시 손이 펴지고 일생동안 운명적인 요소였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결과 유대인들은 나가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안식일에도 위기 상황을 띄어 넘어 불쌍한 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또 한번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라먹은 사건입니다. 배가 고파서 비벼 먹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제자들이 안식법을 어겼다고 고소했습니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이 때도 예수님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예로 들어주시고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주시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하시며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법의 의미를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안식 일의 주인 이라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밀 이삭을 흩고 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주님 안에 있는 배고픈 제자들이 오히려 안식일을 더 잘 키고 있다고 보호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겨우 구걸 하면서 먹고 살아가는 비참한 운명의 사람 이었습니다. 얼마나 안 됬고 불쌍한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사람의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기 죄입니까 부모의 죄 입니까? 예수님은 아무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시고는 진흙을 침으로 이겨 눈에 발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결과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소경거지는 오랜 운명에서 벗어나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날이 우연찮게 안식일 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냥 둘리가 없었습니다. 소경을 신문해서 누가 눈을 뜨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안식을 어긴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출교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안식일 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 법을 어기면서까지 이렇게 목숨 걸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사람들로 율법을 일자 일획이라고 어기지 말고 철저히 지키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모든 율법을 보는 근본 법칙을 보게 됩니다. 외형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어기는 문제를 넘어서 최고한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법의 의미를 모르면 법을 잘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법의 정신은 사랑 이며 살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 하였지만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근본정신을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를 모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살려야 할 법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고 심지어 예수님마저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만일에 영화에서 도스라는 청년이 마지막 토요일 참여하는 전투에서 안식일 날이라서 함께 출전할 수 없다고 하였다면 그도 율법주의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안식을 어기면서 그는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전투에 참여함으로 감동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몰랐지만 도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더 큰 사람의 법을 지킨 것입니다. 법의 껍데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법의 정신을 진자로 지키는 것이 진짜 지키는 것임을 보았으니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감동이 되었지만 저에게는 마지막 출격 전 고민하며 기도를 마치고 철모를 눌러쓰는 장면이 압권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고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실 때 마태복음 11장에서는 이런 말씀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소중한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일이 바로 안식일에 해야 할 선한 일 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서론에서 이끌어 가는 로맨스나 도스라는 청년의 가정사, 왜 그가 전쟁터에 자원하여 나가게 되었는지 동기 설정이 좋다가 안식교라는 것이 나오자 좀 실망을 했습니다. 내 안에도 이렇게 율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편견의 율법입니다. 순수하게 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계속 보는 중 나에게도 편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고 영화 제자작자들도 실화를 바탕으로 순수하게 제작했을 텐데 그냥 순수하게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 고쳐먹고 순수하게 보니 감동이 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신 일들이 얼마나 감동스럽고 은혜였습니까? 그러나 장로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의 카테고리에 갇혀서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의 본질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편견의 시각에 사로잡히면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저 도스라는 청년이 안식교도로서 저런 신념을 가지고 구타를 당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면서 그 종교적 신념을 부인하지 않았는데...그리고 단지 전쟁에 가지 않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죽이는 일은 하지 않고 살리는 일만 위해서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하여 실제로 큰 일을 하였는데 ...저 청년만큼 그런 신념을 갖고 있는가? 나는 저 청년보다 더 바른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저 청년보다 더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 합니까? 바른 믿음 바른 행동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사실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고 살리는 것입니다. 모든 법은 그것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사랑하고 살리기 위해서 법이 존재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살리고 치료하고 잃은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갓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성경 말씀을 몰라도 여기에 최고의 가치를 둔 신앙이라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율법적인 지식을 가지고 서로 다르다고 논쟁을 하고 따지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한 영혼을 사랑하며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옳고 그른 지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식적인 율법의 논쟁이 아닌 단순하게 영혼 사랑의 실천을 확고한 신념으로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실존 용사 도스가 나와서 한 간증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을 구하고 나서 한 영혼 더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고, 또 한 사람 구하고 나서 한 영혼 더, ... 그리고 한 사람 구하고 나서 영혼 더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는 보습입니다. 그런데 토요일에는 산장 텐트에서 재중 집사님 한 영혼을 사랑하게 해달라고기도 하면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함께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기도 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 신앙의 삶의 목표가 되기를 기도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게 도와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