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그 림 자
네 사람이 밤길을 걷고 있었다. 굴참나무숲 그늘아래 칠흑같은 어둠 속에 반딧불들이 춤을 추었다. 반딧불들은 초서체의 비(秘)문을 쓰며 혼불처럼 춤을 추었다. 밝은 달은 길동무들의 밤길을 비춰 주며 앞장섰다. 핼쓱해진 별들은 소근거림을 멈추었다. 밤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몸이 없었다. 그들은 영혼없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원혼들이었다. 몸이 없으니 구태여 팍팍한 황톳길을 걷지 않아도 좋으련만, 그들은 꼭 걸어내야만 하는 길이 있다는 듯 감자꽃이 환한 밤길을 가고 있었다.
가장 어린 아홉살배기 영혼이 앞장 서 갔다. 사망날짜를 가지고 서열을 매기는 유령들은 그를 선배로써 깍듯이 모셨다. '선감학원' 출신인 아홉살배기는 1964년에 죽었다. (선감학원은 일제 말기인 1942년에 세워져 1982년까지 40년간 유지된 악명높은 소년 강제 노동 수용소였다. 현재 그곳에는 경기 창작센터가 들어서 있다) 1963년 어느 날, 8세 소년은 혼잡한 시장에서 할머니의 손을 놓친 뒤에 순경에게 끌려갔다. 그리하여 경기도의 한 섬에 있는 선감학원에 갇히게 되었다. 그 곳에는 소년 또래의 아이들로 가득했다. 무자비한 폭력과 강제 노역의 지옥같은 일상을 견디지 못한 소년은 이듬해에 죽었다.
탈출하려다가 죽은 아이들도 많았다. 그럴 경우 남은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집단체벌 때문에 원생들은 공포에 떨었다. 죽은 아이들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탈출하다가 죽은 소년들의 유해가 인근의 섬에 주기적으로 떠밀려 왔지만 선감학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선감학원 부원장의 아들이었던 히로미츠씨는 이미 없어졌으리라 믿었던 선감학원이 1982년까지 유지되었던 사실에 경악하였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잔혹하게 다뤘던 만큼이나,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잔혹했던 것이 기가 막혀 선감도의 원혼들은 여직 눈을 감지 못했던 것이다.
그 다음 사람은 실미도 희생자였다. 다까끼 마사오를 잘 아는 김일성은 박정희가 미운 나머지1968년 1월 청와대로 자객을 보냈다. 1.21사태라고 불려진 이 엽기적인 사건에 보복하기 위해, 박정희는 비밀리에 31명의 특수부대원을 모집했다. 실미도 (684부대) 공작원이라고 불리운 그들은, 장교 임관이나 미군 부대 취직 등의 약속에 속은 건장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영종도와 가까운 섬 실미도로 보내져 '인간 병기'로 거듭나기 위한 지옥훈련을 받다가 7명이 숨졌다. 7명 중 4명은 탈영 혹은 '하극상' 등에 대한 처벌로 살해됐다. 지휘관들은 공작원들에게 동료들을 죽이도록 했다.
가혹한 훈련과 인권 유린에 시달리던 실미도 공작원 24명은 1971년 8월 기간병 18명을 살해한 뒤, 무장탈영을 해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향했다. 청와대에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려 했던 그들은 대방동에서 군·경과 교전을 벌인 끝에 버스안에서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했다. 이 교전으로 공작원 20명, 군인 18명, 경찰 2명, 민간인 6명이 숨졌다. 군·경과의 교전에서 살아남은 공작원 4명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 처형됐는데 아직 유해도 찾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은폐에 급급했다. 진상을 폭로했던 이세규 의원에게는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신민당 김한수 의원은 시국 강연회에서 '실미도 사건 부대 이름을 폭로해 반공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기무사에 끌려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징역 3년을 살았다. 무소불휘의 권력에 취한 중앙정보부는 괴물이었다. 틀어막으면 된다고 믿는 이 괴물 덕분에 이 사건은 30여 년간 세상으로부터 잊혀졌다. 그러므로 세월호를 이해하려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이 괴물조직을 이해하여야 한다.
세번째 사람은 형제복지원 희생자였다. 형제복지원(1975 ~1987)은 말하자면 선감학원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 3월 직원들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탈출함으로써 세상을 떠들석하게 하였다. 그러나 언론이 통제된 사회에서 곧 잊혀진 후, 27년이 지난 2012년 5월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한종선이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통해 다시 세상에 알렸다. 한종선은 전규찬과의 공저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통해 형제복지원을 폭로했다. 이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위원회, 생존자모임 등이 결성되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중노동은 물론 구타와 감금, 성폭행까지 자행되었다. 12년 동안 589여명이 죽었으며 시신들은 해부용으로 팔려갔고 그 대금은 원장의 주머니로 흘러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원장 박인근은 횡령죄 등으로 2년 6개월의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뿐, 불법구금, 폭행, 살인 등에 대해서는 아예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복지원이 문제되기 이전의 사람들은 '떨거지들을 다 수용해서 부산 시내가 아주 깨끗해졌다'고 박인근에게 박수를 보냈다. 형제복지원은 1986년 아시언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위해 '부랑자'들을 가두기 위한 수용소로 오용되었다. 박인근은 출소 후 형제복지원 부지를 매각하고 기존의 형제복지원을 재인수한 1000억 대의 재산가로 살고 있다.
네번째 사람은 삼청교육대 희생자였다. 삼청교육대는 1980년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전국의 깡패조직을 없애 민심을 얻으려는 조치였다. 하지만, 해당 조치에 의해 구속된 3분의 1이 무고한 학생과 시민이었다. 처음에 계획된 구속자는 2만여명이었으나 경찰부서들의 충성경쟁이 붙어 희생자들의 숫자는 6만명을 넘었다. 그 결과 100여명이 사망하고 3천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이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고, 국가를 상대로 내건 단체 소송은 '시효가 지났다'고 기각되었다. 최악의 인권유린수용소를 '복지'원이라고 부르거나 학살을 통해 집권한 정권이 '정의사회구현'을 외치는 것은 상식에 대한 모독이었다.. (반디가 은영에게 주고 간 책 '선감도에서는 세월호가 보인다'에서 발췌)
첫댓글 jinmo Kang 페북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