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눈으로 영화보기] 매트릭스
운명, 선택의 미학
글 | 조하선 (2004 년 6 월호)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언 지 주의해 보셨나요. 그것은 바로 ‘선택’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존재가 지속되는 한 끊임없이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키에르케고르적인 갈등 상황에 처하게 되지요. 하지만 선택은 현상적이고 실존적인 관점보다 더 깊은 층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트릭스>에서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 본 선택의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매트릭스> 1편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묻습니다. “자네는 운명을 믿나?”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지요. “믿지 않아요. 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요.” 그러나 이렇게 당차게 말하던 네오는 그 후 숱한 우여곡절과 고난을 겪게 되고, 급기야 자기가 자신의 삶을 과연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회의에 빠지게 되지요.
2편에서 예언자 오라클이 네오에게 캔디를 건네자 네오가 이렇게 말하죠. “제가 먹을 걸 알고 계시죠. 이미 모든 게 결정되었다면 왜 제가 선택해야 되죠?” 그러자 오라클이 말합니다. “당신은 선택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당신은 이미 선택을 했으니까. 당신이 여기 온 건 왜 그 선택을 했나 알려고 온 거죠.” 그리고 오라클은 네오에게 또 이렇게 충고합니다. “선택은 이미 한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돼!”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종종 네오와 같은 갈등에 처하곤 합니다. ‘예정된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것인가?’ ‘나는 내 삶을 스스로의 의지대로 꾸려가고 있는 것인가?’ 이런 물음에, 오라클은 매우 이상한 답을 줍니다. 이미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선택했노라고! 그럼 우리 중에는 대뜸 이렇게 핏대 올리며 반박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내가 언제 이런 삶을 선택했단 말이냐?” <매트릭스>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지요. 바로 ‘영의 세계’에서 선택했다고….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현실과 가상, 두 개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숨가쁘게 서로 교차하며 펼쳐지는 이 두 개의 세계를 우리는 물질계와 영의 세계로 비유해 볼 수 있지 않나 합니다. 특히 2편과 3편에서는 영의 세계를 암시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요. 예를 들어 다른 차원으로 가는 통로인, 양옆으로 문들이 죽 늘어선 긴 복도는 임사체험자들이 말하는 영계로 가는 터널을 연상케 합니다. 무엇보다 메로빈지언이 다스리는 세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계의 상징성이 짙게 배어나는 거 같아요. 메로빈지언은 하계의 왕 하데스, 그의 아내는 페르세포네, 세라프는 헤르메스, 트레인 맨은 죽음의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 카론에 각각 빗대어 생각하면 흥미롭습니다. 이런 배경을 감안한다면 트리니티가 경계영역에 갇힌 네오를 데려오는 장면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하계에서 데려오는 모습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지요.
사후의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 영혼의 여정에 대해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심리학 박사이자 최면요법가 마이클 뉴턴의 연구 결과는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최면을 통해 전생을 탐구한 경우는 종종 있어 왔지요. 하지만 뉴턴 박사는 특이하게도 전생 경험보다는 환생 사이의 경험이 우리 인생의 이해에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부분에 집중적으로 파고들게 되지요. 수많은 사례들을 종합하여 그가 발표한 결과물들은 우리에게 놀라운 정보들을 제공합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 인간들은 환생하기 전에 곧 맞이하게 될 새로운 인생의 여러 사항들에 대해 ‘선택’하고 내려온다고 합니다. 환생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는 ‘안내자’들을 만나게 된다고 하지요. 여기서 안내자는 우리의 고급자아나 천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명백히 하나의 개성을 지닌 영혼이라고 해요. 물론 우리보다는 훨씬 진보된 영혼이지요. 이것을 영화에 적용해 보면 네오의 안내자는 모피어스와 오라클이 되겠지요. 뉴턴 박사에 의하면 환생과정에서 우리는 전생에 자신이 살았던 장면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 보게 되고 이 영혼의 인도자들과 의논하여 자신의 부정적 성향이나 부족한 특성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스미스는 네오가 극복해야 할 네오의 그림자 존재라 할 수 있겠죠. 3편에서 네오가 오라클에게 묻습니다. “스미스는 누구죠?”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당신! 당신의 어두운 면이지!”
영화에서 메로빈지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주의 진리가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죠. 거기서 도망칠 방법은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뉴턴 박사에 의하면 영적인 차원에서 카르마의 세부 작용들은 떡 떼어놓듯 확정적인 것은 아니며 생각보다 훨씬 유동적인 거 같다고 해요. 이 생에서 받을 각기 다른 환경, 다른 주변 인물들이 있으며 우리는 그 중에서 하나의 상황을 선택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영적인 성장과 배움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영혼은 매우 열악한 환경이나 불운한 사고, 육체적인 장애조차 기꺼이 선택한다고 하지요. 영의 세계에서 볼 때 지상에서 받는 고통쯤은 일시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발전을 위해 쉬운 길을 버리고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하는 헤라클레스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겠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네오가 경계영역에서 만난 인도인 라마의 말은 정말 그럴 듯 합니다. “카르마는 이런 의미죠. 내가 무언가 하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현생에서 겪는 우리들의 행복이나 불행은 우리 자신이 만들고 선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편에서 스미스는, 계속 두들겨 맞아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며 악착같이 덤비는 네오에게 진저리치며 묻습니다. “왜 계속 고집스럽게 싸우는 거야, 응?” 그러자 네오가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지.” 우리도 네오와 같은 마음으로 이 삶을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삶이 우리를 아무리 지치고 힘들게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를 악물고 가야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외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