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緣起(십이연기) / 김성철 교수 교리 해설(3)
불교는 연역(演繹)의 종교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연기(緣起)의 법칙’에 근거하여 불교의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은 물론이고 불교적인 인식론과 존재론, 윤리와 실천이 모두 도출되기 때문이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모두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긴 하지만, 그 대상은 물질의 영역에 국한한다. 그러나 ‘연기의 법칙’은 물질의 세계는 물론이고 우리의 감정과 생각, 삶과 죽음, 앎과 행위 등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법칙’이다.
연기는 ‘의존적 발생’이라고 풀이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한다. 서로 의존하여 발생한다. 그런데 연기하는 모든 것 가운데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연기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바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십이연기에서는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의존적 관계를 열두 가지 사건으로 요약한다. 각 사건에 번호를 붙여서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무명(無明)→②행(行)→③식(識)↔④명색(名色)→⑤육입(六入)→⑥촉(觸)→⑦수(受)→⑧애(愛)→⑨취(取)→⑩유(有)→⑪생(生)→⑫노사(老死)”
무명(①)에 의존하여 행(②)이 있고, 행(②)에 의존하여 식(③)이 있으며 … 유(⑩)에 의존하여 생(⑪)이 있고 생(⑪)에 의존하여 노사(⑫)가 있다는 가르침이다.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품고서 출가한 싯다르타 태자는 그 당시 인도종교계에 퍼져 있던 다양한 수행들을 체험한 후 그 모두를 버리고 보리수 아래 마른 풀을 깔고 앉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선(禪) 수행을 시작한 것이었다. “어째서 죽음이 있는가?” “어째서 모든 생명체는 늙어 죽어야 하는가(⑫老死)?” 그러던 중 해답을 찾았다. 살아있기 때문이었다(⑪生). 살아 있는 존재만이 늙어 죽을 수 있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해답이었다.
그러나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도대체 왜 살아 있는 것일까?” 싯다르타 태자는 자신이 태어나 살아온 과정을 회상하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지금 이 몸에서 마음(③識)이 작동하듯이 수정란(④名色)에 마음이 깃들면서 나의 삶은 시작되었다. 마음이 깃들기에 수정란이 자라나고, 수정란이 있기에 마음이 깃들 수 있다. 수정란과 마음은 이렇게 서로 의존한다(③識↔④名色).
그러면 그런 마음은 어째서 있게 된 것일까?” 싯다르타 태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궁 속 수정란에 자신의 마음(③識)이 처음으로 깃들게 된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후대 선가(禪家)의 용어로 표현하면, ‘부모에게서 아직 태어나기 전의 본래 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부모미생전본래진면목)’을 알 수가 없었다. 삶과 죽음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 추궁하던 태자의 생각은 그 이상의 과거로 소급해 들어갈 수 없었다(不能過彼,불능과피)). ‘마음인 식’에 다다른(齊,제) 후 생각은 선회하였던 것이다(齊識而還,제식이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인 식(③識)’에서 죽음(⑫老死)에 이르는 열 단계의 일들뿐이었다. 이렇게 노사에서 소급하다가 식에서 멈춘 연기, 또는 식에서 시작하여 노사에서 끝나는 ‘열 단계의 연기’를 ‘제식연기(齊識緣起)’라고 부른다.
태자는 다시 깊이깊이 생각하였다. 호흡이 잦아질 정도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③識)이 생기게 된 원인에 대해서 추궁하였다. 곰곰이 생각하는 지관쌍운(止觀雙運),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서 호흡조차 멈춘 제4선의 경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숙명통(宿命通)이 열리면서 자신의 전생을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정이 되었을 때 천안통(天眼通)이 열려서 인과응보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마음(③識)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마음(③識)은 전생의 업, 즉 ‘행(②)’으로 인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샛별이 떠오를 때 모든 번뇌가 사라지면서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道)’을 있는 그대로 알고 모든 욕망과 번뇌에서 해방되었다.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투철하게 앎으로써 깨달음이 열렸다. ‘무명(①)’이 완전히 타파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이었다. 누진통이란 ‘번뇌(漏)가 모두 사라진(盡) 신통력’이란 뜻이다. 이렇게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세 가지 신통력(三明)’이 열리면서 십이연기에서 ‘식(③)’ 이전의 두 단계인 ‘무명(①)’과 ‘행(②)’을 모두 발견하였다. 성도(成道)의 순간이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부처님이 되셨다.
인간뿐 아니라 짐승이든, 천신이든, 아귀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십이연기의 방식으로 탄생과 죽음 되풀이 하면서 윤회한다.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인과응보도 모르고, 삼보도 모르고, 사성제도 모르고, 선악도 모르고, 연기도 모르는 어리석음이 ‘무명(①)’이다. 생명과 세계의 실상에 대한 무지다.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탐욕이나 분노와 같은 번뇌를 일으키고 갖가지 업을 짓는다.
십이연기의 두 번째 단계인 ‘행(②)’이다. 행에는 복행(福行), 비복행(非福行), 부동행(不動行)의 세 가지가 있다. 복행은 복을 받게 하는 행동으로 선행을 의미하며 비복행은 그와 반대되는 행동이다. 부동행은 삼계 가운데 색계나 무색계와 같은 ‘선정(禪定)의 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행이다.
무명(①)으로 인해서 이렇게 복, 비복, 부동행을 지으며 살아갈 때(②), 나의 모든 행위들이 낱낱이 씨앗과 같이 변하여 마음인 식(③)에 계속 저장된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다음 생이 시작된다. 그때 전생에 지었던 ‘업의 씨앗들’을 간직한 식(③)은 현생의 부모가 성교하는 순간에 수정란에 깃들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명색(④)으로 자라난다. 그러다가 임신 5주가 되면 태아에 눈, 귀, 코와 같은 감관이 생긴다. 아직 기능은 못한다. 이런 태아의 단계를 육입(⑤)이라고 부른다. 육입의 단계는 출산할 때까지 이어진다. 인간의 경우 열 달이 차면 태아는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귀가 들리고 눈이 보인다. 감관을 통해서 외부대상과 접촉을 시작하는 것이다. 촉(⑥)의 단계다. 외부대상을 감각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낀다. 이를 수(⑦)라고 부른다. 수의 단계는 사춘기 이전까지 이어진다. 어린아이의 삶이다.
그러다가 몸이 성적(性的)으로 성숙하면 2세를 생산하기 위한 음욕이 생긴다. 인간도 그렇지만 소도 그렇고 닭도 그렇다. 개구리에게도 사춘기가 있고 바퀴벌레에게도 사춘기가 있다. 애(⑧)의 단계다. 애에는 세 가지가 있다. 동물적 욕망인 욕애(欲愛), 내생에 또다시 존재하고 싶은 욕망인 유애(有愛) 그리고 ‘상대적 고통’으로 인해서 ‘자살하고 싶은 욕망’인 무유애(無有愛)의 셋이다. 내생에 하늘나라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종교적 욕망’ 역시 유애에 속한다.
그리고 이런 욕망들을 구체화 한 것이 취(⑨)다. 취에는 동물적 욕망을 그대로 발현하고자 하는 욕취(欲取), 잘못된 세계관이나 종교관을 굳건히 신봉하는 견취(見取), 외도의 종교의례나 규범을 준수하고자 하는 계금취(戒禁取), 나와 나에게 속한 것에 집착하는 아어취(我語取)의 네 가지가 있다. 취는 말하자면 세계관이나 종교관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세계관에 근거하여 업을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 유(⑩)다. 유는 생존이라고 번역되며, 삼계 가운데 어느 곳에 태어날 업을 지으며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욕유(欲有), 색유(色有), 무색유(無色有)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먹는 것과 섹스를 즐기면서 명예와 재물을 추구하는 동물적 삶은 욕유의 삶이다.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을 끊어버리고 선정을 닦으면서 삶과 세계에 대해 통찰하며 살아가는 것은 색유의 삶이다. 이성은 물론이고 지적인 통찰도 멈추고 오직 정신적인 삼매의 경지만 추구하면서 사는 것은 무색유의 삶이다. 모든 생명체는 이 가운데 자신이 희구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늙어 죽는다.
그리곤 내생에 다시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났다가(⑪생) 늙어죽는(⑫노사) 삶을 무한히 되풀이 한다. 무명을 타파하지 못한 이상 그렇다는 말이다. 열반하지 못한 이상 그렇다는 말이다. 이를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라고 부른다. 윤회 속에서 ‘흘러가고 굴러가는 과정’이란 뜻이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하늘나라의 천신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아귀든 목숨을 가진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공통된 모습이다.
사성제 가운데 번뇌인 ‘집(集)’으로 인해서 ‘고(苦)’가 발생하는 과정이다.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에서 끝나는 열두 가지 사건들의 ‘발생시점’은 전생과 현생과 내생으로 ‘나뉘어(分)’ 펼쳐져 있지만, 그 모두 지금의 한 찰나에 동시에 작용하기도 한다. 전자와 같은 조망을 ‘분위(分位)연기’, 후자를 ‘찰나연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연기를 자각하여 무명(①)이 타파되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 행(②)이 사라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45년간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고 하셨듯이 말을 해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행동을 해도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업(②行)의 씨앗이 더 이상 마음(③識)에 저장되지 않는다. “무명(①)이 멸하면 행(②)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③)이 멸하며 … 생(⑪)이 멸하면 노사(⑫)와 슬픔과 괴로움과 번민이 모두 사라진다.”는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다. 사성제 가운데 계정혜(戒定慧)의 ‘도(道)’를 통해서 ‘멸(滅)’을 증득하는 과정이다. 공성(空性)의 체득이다. 마음의 평화다. 열반이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교수
월간 <불광> 2012년 3월호 / 불교, 쉽고 명쾌하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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