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재즈 들으면… 누구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울보다, 청중마저 울린다
아주 작은 일에도 금방 감동, 수도꼭지 틀 듯이 눈물이…
천재적 감성과 리듬감… 유럽 관객들 마음을 적시다
가장 노래하고 싶은 도시? 평양
할아버지는 만주서 나시고, 아버진 함경북도 회령 태생…
통일, 말만 들어도 가슴 뛰어… 평양 무대 꼭 서고 싶어요
"유럽 최고 무대 다 서봤지만… 한국 오면 엄마에게 창법 배워요"
"노래 실력은 유전이 80%"
음악가 부모 DNA 받아 "엄마 노래가 세계 최고
마리아 칼라스보다 훨씬 잘하시는 것 같아요"
佛 '재즈 사전'에도 등재
"19년전 佛 유학갔을 때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었는데… 제 이름이 올라올 줄이야"
재즈 본고장에 갑니다 "뉴욕 유명 재즈클럽인
블루노트서 15~16일 공연… 美선 걸음마 시작하는 셈"
- 나윤선의 라이브는 오싹한 경험이다. 겨울밤 호롱불 같던 목소리가 진군하는 캐터필러로, 다시 교교한 달빛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하는 진귀한 체험이다. 그녀는“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무대에서 정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라며“오랫동안 함께 일한 프랑스 매니저도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모르고 그저 컨디션이 좋은 줄로 안다”고 말했다. 자신의 밴드와 함께 연주하는 나윤선의 모습. / 사진작가 나승열 제공
―왜 그렇게 울어요?
"저는 굉장히 잘 울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울어요. 조금 기쁘거나 슬프거나, 아주 조금 감동해도 0.00001초 만에 신호가 와요. 눈물이 솟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수도꼭지예요. 순간적인 감정이입이 비정상적으로 빠른 것 같아요. 누가 옆에서 아프면 저도 막 아파요. 가자 지구에 뭐가 터져서 몇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봐도 가슴이 뻐근해요."
―2012년 프랑스 막시악 재즈 페스티벌에서는 엉엉 울었다던데요.
"제가 2002년 막시악에 처음 섰을 때는 길거리 무료 공연을 했거든요. 그런데 10년 만에 메인 스테이지 7000석을 매진시킨 거예요. 마지막 곡이 끝나고 기립박수를 세 번 받았어요. 눈물이 줄줄 흘렀죠. 공연 끝나고 관객들을 만났는데 옛날 제 공연을 봤던 분들이 다시 왔더라고요. 그래서 또 엉엉 울었어요."
―지난 8월 독일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열린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 대장정'에서 공연한 뒤엔 왜 울었습니까.
"그때 자전거 행렬이 줄지어 나가는데, 정말 곧 통일이 될 것 같은 거예요. 저희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나시고 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 태생이셔서 제가 통일에 좀 민감한 편이거든요. 외국에서 인터뷰하면 꼭 물어보는 게 '어느 도시에서 공연해보고 싶으냐'는 거예요. 항상 '평양'이라고 답하죠. 자전거들 뒷모습을 보니까 북한이 갑자기 길을 터줘서 육로로 서울에 갈 것 같고…."
―평양에서 공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20년간 쉼 없이 달려온 나윤선은 내년 한 해 쉬면서 국악을 공부하며 재충전을 해볼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 성형주 기자
나윤선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외신의 평가는 이렇다. "오늘날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재즈 싱어는 한국인이며, 그 이름은 나윤선이다."(프랑스 주간지 레 제코) "나윤선을 만나는 모든 것은 다 재즈가 된다. 그녀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재즈 가수이다."(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1995년 프랑스 파리로 재즈 유학을 떠난 나윤선은 재즈와 성악, 샹송, 앙상블을 공부했다. 2000년엔 유럽 최초 재즈 학교인 심(CIM)의 동양인 최초 교수가 됐으며, 이후 유럽 각국의 재즈 페스티벌 헤드라이너(가장 중요한 출연자)를 섭렵했다. 2009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았고, 2013년엔 스위스 몽트뢰 재즈페스티벌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7월 프랑스 비엔 재즈페스티벌에서는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돼 사흘간 공연했다. 이 축제에는 스티비 원더, 퀸시 존스, 바비 맥퍼린 같이 쟁쟁한 뮤지션들이 섰다. 그녀는 오는 15~16일 미국 뉴욕의 유명 재즈클럽 블루노트 공연을 앞두고 있다. 그녀는 블루노트 데뷔를 언론에 일절 알리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세계적인 가수가 될 수 있습니까.
"저는 제가 노래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하. 그리고 '세계적인'이란 표현은 너무 부담스러워요."
―과공(過恭)은 예(禮)가 아니죠.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뭐. 이제 걸음마부터 시작하는 셈이죠."
―블루노트가 걸음마라니 시쳇말로 '망언'이네요.
"아이고…. 그냥 저는 한 걸음씩 가고 있을 뿐이에요. 솔직히 말해 노래는 목소리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고 색깔과 리듬감을 타고나야 해요. 유전적인 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죠."
―유전적인 것이 몇%라고 봅니까.
"한 80%쯤 될까요? 소리를 쭉쭉 빼고 높이 올라가는 게 노래 잘하는 건 아니죠. 아스트루드 질베르투(브라질 가수)가 가창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는 않지만, 어쩜 저렇게 잘할까 하는 생각이 들죠. 타고난 감성과 리듬감이 있어요. 그런데 유전자만으로는 안 돼요. 노래는 하면 할수록 늘거든요. 연세 드신 분 중에 아직도 비브라토(목소리 떨림) 없이 잘하시는 분들은 꾸준히 연습한 거죠. 성대 근육도 악기처럼 계속 연습해야 하거든요."
- 연 80~100회가량 열리는 나윤선의 공연 중 절반 이상은 프랑스 무대다. 마지막 곡이 끝나면 바로 차를 타고 공연장을 떠나는 유명 가수들과 달리, 나윤선은 모든 공연 끝에 사인회를 열어 관객을 만난다. 작년 7월 프랑스 비엔 재즈페스티벌 공연(왼쪽 사진)이 끝나고 나윤선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 사진작가 나승열 제공
나윤선은 음악가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의 부친 나영수(76)씨는 국립합창단을 창단한 지휘자, 모친은 한국 최초 뮤지컬 악단인 예그린 배우 출신 김미정(73)씨다. 부친 나씨는 서울대 성악과 재학 당시 "1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바리톤"이란 말을 들었다.
―요즘도 어머니한테 레슨을 받습니까.
"한국 들어올 때마다요. 피아노 앞에서 엄마가 먼저 시범을 보이시고 호흡하는 법, 발음하는 법, 소리 울리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엄마는 항상 노래를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라고 가르치세요. 저희 엄마는, 세상에서 노래를 가장 잘하세요. 마리아 칼라스보다 훨씬 노래를 잘하시는 것 같아요."
그의 모친은 고교 때 성악을 하고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했다가 다시 소프라노 김자경을 사사(師事)했다.
―그런 집안에서 자랐으면서 왜 불문과(건국대)에 진학했나요.
"샹송이 좋았어요. 고교 때 불문과 교생 선생님이 에디트 피아프나 자크 브렐의 샹송을 매일 들려주셨는데 아주 특이했어요. 노래 같지 않고 얘기하는 것 같았죠. 짧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았어요."
1990년 나윤선은 프랑스문화원에서 주최한 샹송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 부상(副賞)으로 프랑스 아비뇽 1개월 연수를 가게 됐고, 체재 기간을 늘려 8개월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샹송 대회에 나갔다는 건 노래 실력을 발휘하고 싶었다는 뜻인데요.
"등 떠밀려서 나간 거예요. 김정렬(재즈밴드 '버드' 리더)이란 학과 동기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제 노래를 듣더니 '너는 노래를 해야 한다'고 계속 우기는 거예요. 불어연구반이란 동아리에서 샹송을 부르기도 했지만, 샹송 대회는 걔가 하도 나가라고 해서 나갔어요."
'샹송 대회 1등'은 나윤선을 음악으로 이끌지 못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당시 대학생들이 선망하던 의류회사 홍보실에 취직했다.
"그때 그 회사가 저를 왜 뽑았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프랑스에서 살다 온 걸 눈여겨봤는지 모르죠. 하여튼 회사 선배로부터 광고 카피와 보도자료 쓰는 법을 배웠는데, 그 선배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원형탈모증에 걸렸더라고요. 저는 결국 1년도 안 돼 그만뒀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뭐가 돼도 되겠지 하는 생각만" 있던 나윤선은 1994년 김민기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초연에 옌볜에서 온 처녀로 캐스팅된다. 김정렬의 역할이 컸다. '지하철 1호선' 음악을 맡았던 그는 김민기에게 나윤선의 캐스팅을 권했다.
"저를 주인공 시킬 줄은 몰랐어요. 시선 처리도 안 되고 동선도 불안정해서 사람들이 '쟤 정말 옌볜에서 데려왔느냐'고 할 정도였죠. 그때 설경구, 방은진 같은 배우도 함께 공연했었죠."
1994년 초연 뒤 꾸준히 사랑받은 '지하철 1호선'에서 나윤선은 두 달 만에 하차했다. "이것도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배우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고 했다. 이후 나윤선은 김민기가 연출한 음악극 '오션월드'와 어머니 김씨와 함께 출연한 창작극 '번데기'까지 두 작품을 더 하고 뮤지컬에서 완전히 떠났다.
―'번데기'가 서울연극제 대상을 받아 뉴욕 브로드웨이 견학도 갔었죠.
"브로드웨이는 정말 멋있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뮤지컬을 하고 싶을 만큼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죠. 그나마 든 생각은 '내가 노래를 좋아하는 건가, 앞으로 노래를 해야 되나' 하는 정도였어요."
―파리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됐나요.
"어느 날 정렬이(또!)를 만나 '난 뭘 해야 하나'라고 상의했더니 걔가 '재즈를 하라'는 거예요. '재즈가 뭔데?' 했더니 '모든 대중음악의 원조'라고 했어요. 그래서 95년에 프랑스 재즈 학교에 들어갔죠. 그 학교에서 저만 재즈를 몰랐어요. 다른 학생 중엔 마일스 데이비스(1926~91· 트럼페터)나 엘라 피츠제럴드(1917~96· 가수)의 공연을 어렸을 때 본 사람도 있었죠. 심지어 존 콜트레인(1926~67·색소포니스트)을 본 사람도 있었어요. 저는 재즈 뮤지션을 하나도 몰라서 그들의 이름을 받아 적기도 바빴어요."
―왜 학교를 네 군데나 다녔나요.
―파도 치는 대로 휩쓸리다가 유럽을 제패했군요.
"하하하. 정말 저는 '이것 아니면 안 된다' '무엇이 돼야겠다' '다음엔 이걸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저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노래를 어떻게 잘한다고 하던가요.
"다르대요. 음색과 창법이 다 다르대요. 저는 스윙을 하는 게 어색해서 그저 발라드 부르듯이, 클래식 창법을 섞어서 불렀어요. 그랬더니 재즈 평론가들이 '한국에서 온 애가 재즈를 제 맘대로 부르는데 잘한다'고 했어요."
그녀가 결정적으로 유럽에 알려진 것은 2005년 프랑스 앙티브의 재즈 페스티벌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면서다. 피아노트리오, 앙상블, 보컬 3개 부문 1위들이 벌이는 결선에서 나윤선은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올해 54주년을 맞은 이 페스티벌에서 한국인이 대상을 받은 것은 전무후무하다.
"그때 심사위원장이 유명한 재즈 평론가였는데, 제 공연 끝나고 와서 눈물을 흘렸어요. '내가 공연 보고 눈물 흘리는 건 엘라 피츠제럴드 이후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날 작은 소동도 있었어요. 콩쿠르 참가자와 심사위원들이 모두 모여 차를 마시는데 심사위원 몇몇이 '저게 무슨 재즈야, 이건 스캔들이야!' 하고 소리를 지른 거예요. 아마 심사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나 봐요. 그런데 올해 제가 그 페스티벌 메인 무대에 섰거든요. 그때 소리 질렀던 분들이 저한테 와서 '역시 우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라고 칭찬을 하더라고요."
―K팝 덕을 볼 때도 있습니까.
"저한테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죠. 특히 동유럽에 가면 소녀 관객들이 와요. 'K팝의 나라'에서 왔다는 거죠. 그런데 딱 그 정도예요. 10~12세 정도? 그때 좋아하고 마는 거죠. 그걸 '문화 콘텐츠'라고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걸 보면 좀 안타까워요. 순전히 서양 작곡 방식과 코드에 맞춰 만든 노래를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로 삼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거든요. 프랑스 뮤지션들에게 한국 아이돌 음악을 들려주면 깜짝 놀라요. '정말 이렇게 오래되고 흔한 음악을 듣느냐'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한국에서도 많이들 알아보죠?
"아뇨. 지하철 타고 다녀도 아무도 몰라봐요. 저희 집이 경기 가평이고 제가 농협 하나로마트 회원이에요. 하루는 남편(인재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총감독)이 제 카드로 물건을 사고 계산하니까 계산대 모니터에 제 이름이 떴어요. 계산원이 '아, 나윤선씨세요? 신문에서 봤어요. 남자분이셨군요' 하더래요. 하하하."
나윤선은 자기 자랑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스스로도 "허세 부리는 것, 마치 내가 뭐가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얼마나 열심히 했고 잘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는지 알아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딱한 노릇이었다.
―지나치게 겸손하군요.
"겸손한 게 아니에요. 제가 음악 하는 이유는 제가 사랑하는 관객들을 위해서예요. 만약 누가 '넌 꿈이 뭐니, 어디까지 가고 싶니' 하면 할 말이 없어요. 지금 막 기타로 Dm 코드를 배운 아이와 팻 메시니(재즈 기타리스트)와 행복의 양(量) 차이는 없어요. 팻 메시니가 더 행복하지 않다는 거죠. 유럽 시장에 진출하고 미국 뮤지션과 같이 연주하는 것도 좋지만 그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는 거죠. 울프(울프 바케니우스·나윤선과 7년째 협연 중인 기타리스트) 아저씨는 엘라 피츠제럴드와도 연주했고 오스카 피터슨(재즈 피아니스트)과는 10년간 일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공항에 가고 기타를 안 실어주면 얼굴 시뻘게져서 싸우고, 계속 졸다가 내려서 공연하고 또 새벽 3시에 일어나고…. 그게 음악이라는 거죠. 우리가 TV에 나오는 연예인들한테 너무 익숙해져서, 유명해져야 성공한 뮤지션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전혀 유명하지 않아도 행복한 뮤지션들은 많아요. 노르웨이 산골에도 기타를 기막히게 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불행할까요? 음악이 일상이 돼야 진짜 뮤지션이 되는 것 같아요."
나윤선의 음악관에서 최근 읽은 책 '행복의 기원'이 떠올랐다. 저자인 연세대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becoming(~이 되는 것)'과 'being(~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재벌집 며느리가 되는 것(becoming)과 그 집안 며느리가 되어 하루하루를 사는 것(being)은 아주 다른 얘기다. 고교생은 오직 대학을 가기 위해, 대학생은 직장을 얻기 위해, 중년은 노후 준비와 자식의 성공을 위해 산다. 많은 사람이 미래에 무엇이 되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이렇게 becoming에 눈을 두고 살지만, 정작 행복이 담겨 있는 곳은 being이다. 프랑스 사상가 라 루시프코가 400년 전에 지적한 대로 우리는 '상상하는 만큼 행복해지지도 불행해지지도 않는다'."
―관객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6000~7000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 거대한 이불이 나를 확 덮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숨이 막힐 만큼 압도되죠. 제 관객 중엔 눈물 흘리는 분이 많아요. 특히 제가 샹송을 부르면 그래요. 그런 압도적인 에너지에 중독이 돼요. 그건 아이돌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는 늘 '음악이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고 생각하지만, 관객과 사랑에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사랑에 빠진다는 건 레토릭이겠죠.
"아니에요. 남녀가 사랑하듯이 사랑에 빠져요. 만지고 싶고 안아보고 싶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공연이 끝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꼭 관객을 만나요. 너무나 그분들을 보고 싶거든요."
프랑스 관객들 사이에선 "나윤선 공연 티켓은 의료보험을 적용해줘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그만큼 나윤선의 노래에서 정신적 치유를 받는다는 뜻이다.
나윤선은 프랑스로 유학 간 첫해에 '재즈 사전(Le Nouveau Dictionnaire du Jazz)' 두 권을 사서 하나는 방에, 나머지는 화장실에 놓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2011년, 이 사전에는 'NAH Youn Sun'이란 인명이 등재됐다. 사전은 그녀를 "한국 여가수. 예상을 뛰어넘는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꽃 같은 목소리와 가사의 감동, 유연하고 젊은 스윙, 독특하고 완벽한 스캣으로 기존의 재즈를 탁월하게 뛰어넘고 있다"고 서술했다.
두 차례 인터뷰는 녹음으로 6시간 넘는 분량이었다. 녹음을 재생하다 보니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자리를 잠시 비운 적이 있었다. 짧은 침묵에 이어 나윤선이 혼자 소프라노 창법으로 흥얼거리는 소리가 녹음돼 흘러나왔다. 소름이 성에처럼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