푯대를 향하여 달라가노라
빌립보서 3:12-16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를 많이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사가 진정한 인사라기보다는 입에 발린 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말은 복이 찾아오면 받으라는 말입니다. 나는 변하지 않고 복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긴 인사말입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복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변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망상일 뿐입니다. 내가 변화하지 않고 복을 받으려는 생각은 잘못된 축복관입니다. 문제는 내가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져야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기 보다는 ‘새해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라고 해야 진정한 축복이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새해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본문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입니다. 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옥에 갇힌 바울은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새해가 시작되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동성교회 성도 여러분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고 말했습니다. 미완성 그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다 잡혀 죄수가 된 바울은 현재를 만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옥에 갇혔으니 ‘이젠 끝이다’라고 낙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끝이라’고 낙심하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자포자기 입니다. 옥에 갇혔기 때문에 ‘이젠 끝이다’라고 낙심할 수 있지만 바울은 오히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돌이켜 보니까 이미 얻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온전히 이룬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완성된 자신의 모습을 알았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고 하였습니다. ‘달려가노라’는 말은 마치 사냥개가 잡으려고 하던 토끼를 발견하고 잡으려고 달려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잡힌바 된 것’은 내 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붙잡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3) 달려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사도로서의 사명자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자기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잡아주신 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란 말은 ‘잡힌바 된’ 그 목적을 아직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말씀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은 것을 잡으려고’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날 했던 모든 일들은 다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잘살았고, 성공했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실패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낙담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잊어버리는 것을 은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더 큰 괴로움입니다.
간혹 쓸데없는 옛날 일을 기억하면서 교만해지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우등생이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등학생일 때 우등생이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과거의 잘한 것, 잘못한 것 가리지 말고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과거에 사는 사람이지 오늘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송아지를 잡고 반지를 끼워주고 옷을 입혀줍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책망 한 마디 하지 않고 극진한 대접을 할 때 돌아온 아들은 거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다 용서했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셨기에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기에 나도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가 어찌되었건 오늘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뼈아픈 자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했습니다. 자기실패의 악순환을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마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은혜 안에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자기됨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더 효율적인 세계, 더 능력있게 사는 세계를 내다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닌 미완성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4:34). 예수님은 잠시 후에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생각하시며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깨어 기도하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어 간절히 기도 하시고 돌아와 보니 베드로는 자고 있었습니다.
자고 있는 베드로를 보시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4:38). 이 말씀이 성도들에게 종종 자기변명 할 때 쓰여지기도 합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간절하지만 돈이 없어서라고 변명합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봅시다. 정말 마음에는 원이였습니까? 마음에 원이였다면 잠이 옵니까?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죽게 되었다고 하는데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가 잠을 잘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좀 더 예수님에게 진실했다면 졸음쯤은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이미 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게 되었다고 해도 마음에 감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게 되셨다고 해도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정말 뜻이 있고 목적이 뚜렷하면 잠이 올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가 믿음의 목적이 뚜렷하다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고 분명히 목적이 뚜렷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부르시고 잡아 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겠다는 결심입니다.
바울의 푯대는 ‘앞에 있는 것’(13)은 ‘부르심의 상’(14)입니다. 주께서 부르심의 상을 푯대로 삼고 달려가노라고 말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푯대는 천국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푯대는 천국이어야 합니다. 부르심의 상은 면류관입니다. 성도는 오직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나를 불러주신 주님만을 생각하고 주님만을 향하여 열심히 살며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목표를 새롭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나를 부르신 상을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금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금년에는 왜 내가 있어야 하는지, 생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다짐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천국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목적은 예비 된 상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부름의 상’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성도가 장차 받을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푯대’와 ‘상’은 실제적으로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푯대’는 현재 달려가고 있는 자의 주의를 집중시켜 주는 것이며, ‘상’은 달려간 뒤에 있을 영광에 마음을 고정시켜 주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상을 바라보고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는 것을 봅니다. 달려가는 선수의 마음은 오직 결승선에 꼴인 하는 것뿐 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푯대를 향하여 열심히 달립니다. 달리는 선수가 목표가 분명하고 바라는 상을 바라보고 달릴 때 뒤를 돌아보거나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것입니다. 목표가 내게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내가 목표를 향하여 뛰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내가 뛰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희생해주고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내가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선수와 같습니다. 성도는 오로지 푯대를 향하여 상을 바라보고 달리는 신앙의 마라톤 선수들입니다. 뒤를 돌아보아서도 안 됩니다. 주변에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오로지 천국에 면류관만을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려야 합니다. 지쳐 쓰려지려고 해도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기다려서도 안 됩니다. 오로지 천국을 향하여 달리는 선수는 오로지 나 혼자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세계적인 코치를 데려다가 훈련을 받는 다고 합니다. 마라톤은 열심히 뛰기만 하면 될 일이지 무슨 코치가 필요하냐고 하겠지만 마라톤이야 말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운동이라고 합니다. 마라톤의 기술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알맞게 안배하여 결승전까지 달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처음에 1등으로 달리다가 절반쯤 가서 쓰러지고 뒤처집니다.
마라톤 코스 42.195km를 자신의 에너지를 적당하게 분배하여 달려 종점에 도달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인하고도 힘이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골인한 다음에 쓰러질 정도로 기진해야 한답니다. 출발부터 골인지점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적절히 쏟아 부어 최대의 효과를 거두어야 하는 것이 마라톤의 기술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리는 마라톤 선수입니다. 지금까지 달려 여기까지 왔으면 앞으로 남을 코스도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믿다가 낙심하는 자들을 봅니다. 낙심하는 자들이 왜 낙심을 합니까? 자신의 부름의 상을 푯대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푯대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천국의 영생복락과 생명의 면류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의 상을 푯대로 삼은 자들은 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1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온전히 이룬 자’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를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일수록 자신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 푯대를 향하여 부지런히 달려야 합니다.
‘너희가 만일 달리 생각하면’이란 말은 달리던 선수가 힘이 들든지 아니면 주변에 아름다운 경치에 눈을 돌려서 달리던 것을 잠깐 머뭇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심으로 올바른 진리를 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새해가 되면 성도들은 새로운 각오를 합니다. 그동안 자신의 믿음이 약해지고 게으르고 열심을 다하지 못했던 것들을 되돌아보고 새해부터는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며칠 못가서 다짐했던 것도 잊어버리고 또 다시 옛날처럼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올바른 진리를 행하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가르쳐 주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마라톤에서 완주하지 못하고 중간에 탈락된 자와 같은 낙오자가 될 것입니다. 중간에 낙오자는 부끄러운 수치를 당할 뿐 아니라 상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권면하십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맞추어 신실하게 행해야 함을 지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십시오. 뒤를 돌아보지도 말고 푯대를 향하여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열심히 달리십시오. 끝까지 달려서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고 영생복락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