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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과 그 주변을 호위한 어선들이 한산대첩 장면을 재현한다. |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6월2일의 기록이다. 임진왜란 발발 한 달도 안 된 5월2일의 난중일기에 당시 육군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삼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왔는데, 말하기를 “남해 현감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상주포․곡포․평산포 만호 김축 등이 왜적에 대한 소문을 듣더니 갑자기 도망쳐 버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흩어져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정오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칠 약속을 했는데,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밝혔다. 그러나 낙안 군수 신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하니 안타까웠다. 엄연히 군법이 있는데 피하려 한들 될 일인가? (후략)’
지리멸렬하는 육군과 연전연승하는 수군의 대비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 달도 안 된 5월4~10일까지 첫 출전해서 옥포․합포․적진포의 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다. 5월29~6월2일까지 2차 출전에서도 사천․당포․당황포․율포 등 4번의 전투에서 왜적의 선박을 모두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둔다. 2차 출전 사천 전투에서 거북선을 처음 출전시켰다.
이순신이 두 차례에 걸쳐 남해에서 왜의 수군들을 섬멸하고 있을 때, 육지에서는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피난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적을 공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적들은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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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려해상 앞바다에서 재현되고 있는 한산대첩을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찍고 있다. |
하지만 수군이 연전연패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심복인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구키 요시타가(九鬼嘉降)․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단시일 내에 합동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세 장수는 서울에서 급히 남하하여 부산에서 전선을 정비하여 해전에 대비했다. 육지에서의 승리에 들뜬 왜장들은 조선 수군을 우습게 보고 73척을 앞세워 몰아 부쳤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들이 도망갈 수 없도록 먼 바다로 유인한 뒤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적을 포위하고 포와 화살을 퍼부었다. 적은 59척이 침몰하고 9,000여명이 사살되는 등 14척 400여명만이 겨우 도주하는 대참패를 당한다. 역시 이순신 장군의 대승리였다. 이 전투가 해전사에 길이 남을 바로 그 ‘한산대첩’이다. 한산도 앞바다는 아군에겐 승리의 바다였고, 왜군에게 통한의 바다, 피의 바다이자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이후 왜군은 부산포 등 안전한 포구에 주둔하게 하고 조선 수군과는 가급적 해전을 피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은 모두 3차례에 걸친 출전과 10여회의 해전으로 적을 섬멸시키는 동시에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전쟁 기간 중에 모함을 받아 사형될 위기의 아찔한 순간도 있었으나 다행히 백의종군으로 그쳤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명랑해전에 출전하기에 앞서 선조에게 그 유명한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를 남겼다.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신이 죽지 않는 한 적들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12척의 배로 왜적 31척을 격파하는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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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축제 기간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북 노젓기 대회도 펼친다. |
이순신 장군은 명랑해전 출전 전날엔 병사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를 전달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어 몇 달 뒤 본국으로 돌아가는 왜군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출전했으나 왜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나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그리고 7년간에 걸친 왜와의 전쟁도 끝이 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이순신에 의한, 이순신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순신의 역할은 컸다.
이순신 장군의 이 같은 해전에 대해 영국 해군준장 발라드(G. A. Ballard)는 “영국인에게 넬슨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 힘들지만 이순신은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영국의 넬슨은 군신(軍神)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제독은 오직 이순신 장군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다면 나는 일개 하사관도 못 된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또 “당대의 어떤 과학자가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과학 병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인물이 그 누가 있겠는가? 죄인복을 입으면서까지 죽음으로써 조국에 최후까지 봉사하지 않았던가? 나를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엄염한 모독이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