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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州茶(조주차) -逍遙太能(소요태능)
三 等 茶 구 換 眼 晴 (삼 등 다 구 환 안 청 )
幾 人 言 下 入 門 庭 (기 인 언 하 입 문 정 )
應 機 隨 手 用 無 盡 (응 기 수 수 용 무 진 )
後 代 兒 孫 直 使 明 (후 대 아 손 직 사 명 )
雷 例 逢 人 喫 茶 去 (뢰 예 봉 인 끽 다 거 )
淸 平 一 曲 少 知 音 (청 평 일 곡 소 지 음 )
叢 林 待 客 只 如 此 (총 림 대 객 지 여 차 )
劫 外 家 風 直 至 今 (겸 외 가 풍 직 지 금 )
보잘것 없는 차사발이 눈을 밝게 하는 데
뜰에 들어 서자 마자 몇 사람에게 말하였던고
임기응변 대접하는 양식 끝이 없어
후대 자손에게 그대로 밝히셨네
만나는 사람마다 위엄있는 법식으로서 차나 마시고 가라하니
청평의 한 곡조를 아는 이 드물다네
스님들의 손님 대접이 오직 이와 같았으니
겁을 벗어난 가풍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네
(칠언율시 측기식 ‘경’운→정 명 ‘침’운→음 금)
(七言律詩 仄起式 ‘庚’韻→庭 明. ‘侵’韻→音 今)
仄 기울측, 기울리다.
三等 ; 보잘 것없는 삼등 차구 ; 차도구
換 ; 바꿀 환
幾 ; 몇 기. 얼마나 기
下入 ; 들어 서자마자
入;들 입 庭 ;뜰 정
應; 응대할 응
機 ;기틀 기
隨 ;따를 수
應機隨手 ; 경우에 따라 신속하게 처리함.
無盡 ; 끝이 없다.
兒孫 ; 후손. 자기를 낮추는 표현 .
使 ; 시킬 사
明 ; 밝힐 명
雷 ; 위엄 있는 뢰
例 ; 법식 .본보기 례.
逢 ; 만날 봉
喫 ; 마실 끽
去 ; 갈 거
淸平一曲 ;이 태백의 청평조(淸平調;를 말함인데 이는 당나라의 양귀 비와 침향정(沈香亭)에서 작약꽃을 완상하면서 그로 하여금 짓게 한 詩이다.
知音; 거문고의 명인인 종자기(鍾子期)가 제나라의 백아(伯牙)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빈틈없이 알아 맞추었다는 고사를 말함. 총림(叢林);스님들이 모여 있는 곳
待;기다릴 대 .갖출 대
只;다만.뿐 지 此;이것 차
劫;불교에서 하늘과 땅이 한번 개벽할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
外;밖. 벗어날 외
당나라 조주선사께서 ‘차나 마시라’(喫茶去)는 고사에 유래된 말이다. 차의 현묘함은 후대의 자손들에게까지 마음을 밝히는 동시에 차의 효능을 전한다는 것을 읊조리고 있다. 그리고 ‘청평의 한곡조을’하는 구절은 당나라의 현종이 양귀비와 침향전에서 이 태백으로 하여금 짓게한 청평조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처럼 차의 심신에 미치는 영향 또한 현묘하다는 것을 비유한 구절이다.
逍遙太能(1562~1649)은 서산대사의 제자로서 조선후기의 불가시인이다. 호남 담양인으로, 소요는 호이고 태능은 법휘이다. 13세에 출가하여 眞大師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浮休에게서 교학을, 西山에게서 禪을 배웠으며 서산의 법맥을 이어 一家를 이루었다.서산대사 의발 대흥사에전하고 대흥사 조실, 대흥사 다풍,강진 백련사 8대사중에 첫번째,조선후기 소요태능 문손들이 강진 백련사와 대흥사,그리고 미황사에서 주석하며 조선후기 불교중흥에 기여하였다.조선후기 강진 백련사는 소요태능을 포함한 문손들이 8대사를 배출한다.
대흥사는 조선중기이후 중국 당,송시대 이후 다선일여을 계승발전시키며 약500년의 다선일여 사상을 계승발전시키고 대흥사 특유의 다풍을 유지하고 있다.지금도 다선일여 전통은 계승하고 있다.대흥사는 다선의 조정이요 다선의 종가이다.중국은 공산화되면서 다선의 맥이 단절되었으나 해남 대흥사가 그맥을 이어가고 있다.
대흥사의 다선의 종장은 서산휴정대사,소요태능,편양언기,정관일선,풍담의심,취여삼우,월저도안,백곡처능,설암추봉,환성지안,벽하대우,설봉회정,상월새봉,호암체정,함월해원,연담유일,아암혜장,초의의순,철선혜즙,범해각안,금명보정.응송 박영희,용운스님(일지암 1대암주 10년주석), 여연스님(일지암 2대암주 18년주석),보선스님(대흥사회주,종회의장).
대흥사는 서산휴정대사의 문손들이 조선후기 주석하며 조선 대표적인 선교통합 사찰로서 성장한다.서산휴정대사는 당대의 끽다거와 송대의 다선일여 선차를 계승발전시켜 대흥사를 다선의 산실로 다선의 종가로서 500여년의 다선의 역사 기틀을 놓는다.대흥사 500년 다선은 전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다.대흥사 다승들은 문집에 다시와 茶話를 남겨서 대흥사가 다선일여를 꽃피운 곳이라고 이야기 한다. 지금도 다선일여가 살아있는 곳이다.서산대사로부터 시작된 대흥사 다사는 지금도 대흥사 회주 보선스님에 의하여 계승발전시키고 있다.보선스님은 도갑사로 출가하여 대흥사 주지를 역임하며 대흥사를 다선의 산실로 가꾸워 왔다.초의문화제를 여연스님과 보선스님이 함께 힘을 모아 창립하였다.종회의장으로서 종단발전에도 힘을 모으고 있다.
서산대사는 풍수지리 대가답게 대흥사에 주석하며 삼재가 들지않는 곳이라며 사후 의발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겨 제자들이 대흥사에 의발을 모시고 조선후기 문손들이 불교 중흥을 실천한 곳이다.대흥사 다맥은 전하지 않으나 다선의 맥은 500여년간 계승발전 시켜왔다.
서산대사는 다시12편과 다화15편을 통하여 다도관을 이야기하고 있다.서산대사는 당대 조주종심선사의 끽다거와 송대 원오극근선사의다선일여를 계승발전시켜 조선후기 대흥사 500년 다사의 종장으로서 후손들에게 대흥사에 머물며 다선일여의 실천도량으로 가꾸라고 당신사후 유발을 대흥사에 보관하게 한다.대흥사 성보박물관에 전하는 서산대사의 유물이 이를 증명한다.서산대사는 한때 대흥사에 주석한 기록은 나오나 어느시기에 얼마동안 대흥사에 주석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대흥사 다선의 주인공은 초의선사가 아니라 서산휴정대사이다.서산대사는 대흥사 다선의 기틀을 세워 전했다.스님의 문집에는 다시 12편과 茶話 15편이 이를 증명한다.
대흥사는 조선후기 편양언기 문손들과 소요태능 문손들이 주축이되어 13대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하는 사찰로서 성장한다.대흥사 13대종사는
1.조선 중기의 스님. 호는 풍담(楓潭), 성은 문화 유(柳). 통진(通津) 출신이다. 아버지는 유화춘 (柳華春),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1607년(선조 40) 16세에 성순(性淳)에게 출가하여 원철(圓徹)에 게 계를 받고 공부했으며, 뒤에 편양 언기(鞭羊 彦機)에게서 법을 받았다.
청허 휴정(淸虛 休靜)의 문하인 기암 법견(奇巖 法堅)과 소요 태능(逍遙 太能) 등을 찾아 보고, 금강산과 보개산 등에서 언기의 부탁으로 <화엄경>, <원각경> 등 대승경전을 연구하여 그 틀린 점을 교정해서 음석(音釋)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쳤다.
1665년(현종 6) 3월 8일 금강산의 정양사(正陽寺)에서 나이 74세, 법랍 58년으로 입적했다.
해남 대흥사에 비석과 부도가 있다.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상봉 정원(霜峰 淨源), 월담 설제(月潭 雪霽), 월저 도안(月渚 道安), 보당 준기(寶幢俊機) 등이 뛰어났다.
2.스님의 법명은 삼우(三愚), 법호는 취여(醉如)이다. 속성은 정(鄭)씨로서 전남 강진군 보암방(寶岩坊) 구정자(九亭子) 마을 사람이다.
유년시절에 출가, 만덕산 백련사에서 머리를 깎은 이래 전국의 선지식을 두루 참알하고 널리 불교경전(經典)들을 섭렵했다. 해운경열(海運敬悅)에게서 법을 이어받으니, 경열은 소요태능(逍遙太能)의 제자이다.
취여는 얼굴빛이 붉고 윤택하였으므로 해운이 우스개 삼아 '술취해 있는 사람'[醉如子]이란 뜻으로 취여라는 별호를 내렸다. 취여는 담론을 잘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는 마력를 지니고 있었다.
언젠가 해남 대흥사(대둔사) 상원루(上院樓)에서 화엄(華嚴)의 종지(宗旨)를 부연 설명하는 법회를 열자 이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수백 명이 운집하였다.
이때 한 스님이 밭갈이를 멈추고 농기구를 멘 채 상원루 아래에서 쉬며 취여의 강론중 한두 구절을 엿듣고는 그 자리에서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닫는다.
그는 즉시 메고 있던 농기구를 내려놓고 당(堂)으로 올라가 비오듯 흐르는 눈물을 닦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의 죄과(罪過)를 참회하며 불법의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취여는 조선 광해군 14년(天啓2, 壬戌, 1622)에 태어나 숙종 10년(康熙23, 甲子, 1684) 6월 5일 입적하였으니 누려온 나이 63세였다. 영정(影幀) 두 폭이 전하는데 하나는 백련사에, 또 하나는 대흥사에 있다.
3.월저 대종사는 속성이 유씨(劉氏)요, 기도(箕都 : 지금의 평양) 사람이다. 인조(仁祖) 15년(1638)에 아버지 유보인(劉輔仁)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출가하여 도안(道安)이라는 법명을 얻었으며 월저는 법호이다. 어렸을 때 천신장로(天信長老)를 은사로 수계하였고 이후 풍담 종사 밑에서 수학하면서 서산대사의 밀전(密傳)을 연구하였다.
27세 때 묘향산에 들어가서 『화엄경』의 대의를 강의하였는데 사람들은 스님을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렀다. 스님은 특히 불교 뿐 아니라 백가(百家)의 모든 책에 통하지 못하는 바가없었으며 법회 때마다 큰 원력으로 대승의 여러 경전들을 간행 배포하는 등 교화의 일선에서도 활약하였다.
한때 스님의 명성을 시기한 소인배들의 모략으로 감옥에 갇혔으나 곧 억울함이 밝혀져 어명으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이후 스님은 일정한 거처를 두지 않고 은둔하여 여생을 마쳤다.
숙종 41년(1715) 입적할 때 상서로운 빛이 뻗쳐서 수백 리 밖의 사람까지도 스님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세수는 78세, 법랍은 69세였다. 문도는 수백이었으나 특히 법명(法明)과 추붕(秋鵬)의 두 제자가 뛰어났다고 한다.
4.조사의 법명은 문신(文信), 법호는 화악이며 성은 김씨로 전남 해남의 화산 사람이다.
대흥사(대둔사)에서 출가하여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으나 바탕이 영민하지 못해 글을 몰랐다. 취여선사와의 인연으로 불법의 오묘한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글공부에 정진, 고난 3년만에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게 된다.
화악은 대흥사(대둔사)를 떠나 제방 선지식들을 찾아 구름처럼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며 미완성의 지식을 탁마한다. 그후 취여선사로 부터 청허→소요→해운 으로 전해지는 법맥을 이어 받았다.
화악은 국내 제일의 화엄강사로서 스승 취여의강석을 물려받는다. 화악이 <화엄경>법회를 열때면 모여드는 대중들이 수 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화악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태어나 숙종39년(1707) 6월 26일,나이 79세로 입적했다. 스님의 진영은 대흥사 상원의 영각에 모셔져 있다.
5스님은 효종 2년(順治 8, 1651) 8월 27일에 태어났다. 스님의 법명은 추붕(秋鵬), 법호는 설암(雪岩)이며 성은 김(金)씨로 평안남도 강동(江東) 사람이다.
강동은 대동강의 중류평야에 임하여 있는 지역으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설암이 지은 이 과문의 원이름은《선원제전집도서과평(禪源諸詮集都序科評)》으로 2권이 모두 현존하며 다른 하나는《법집별행록절요사기(法集別行錄節要私記)》로 1권인데 일실되었다.
제자 법종(法宗) 등이 경종 2년(1722)에 편집한《설암잡저(雪岩雜著)》3권 3책과《설암난고(雪岩亂藁)》2권 1책이 전해온다. 대흥사(대둔사) 백설당(白雪堂)에서 법회를 열었던 때의 기록인《화엄강회록(華嚴講會錄)》이 대흥사(대둔사)에 전한다. 홍문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스님의 비석글을 지었다. 문인은 34명에 이른다.
6.환성지안은 조선조 숙종때 활약한 고승으로, 통도사뿐만 아니라 범어사(1990년 도난분실)와 동국대 박물관에도 진영이 남아 있다.
이 진영은 우팔분면(右八分面)의 의자상으로, 왼손은 불자(拂子)를 잡고 오른손은 불자를 만지고 있다. 홍색가사와 군청의 장삼, 그리고 녹색의 등받이 천이 주도하는 색채대비가 눈부시다. 군청의 장삼에는 명암을 처리하였으나 홍색가사는 유려한 필선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진영은 뒷면에 씌어진 묵서의 화기에 의하면 정조 23년(1799) 화사 옥인(畵師 玉仁)에 의해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인비구는 통도사 명부전 지장보살탱(1788년), 용화전 후불탱(1798년), 추파당대명진영(秋波堂大明眞影-1801)을 조성한 뛰어난 화사이다.
7.스님의 법명은 대우(大愚),법호는 벽하 이며 성씨는 박씨로 전라남도 영암 사람이다.
잉태될 때 부터 이상한 조짐을 보였던 스님은 뒷날 새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출가를 결심, 마침내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스님은 조연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화악 대사에게서 경교를 배웠으며 환성대사 에게서 선을 이어 받고 고압 선사에게서 계율을 전해 받았다. 경교 공부에 시간을 보냈으며 만년에는 선송에 심취했다.
스님은 조선조 숙종 2년(1676)에 태어나 영조 39년(1763) 6월에 생애를 마치니 누려 온 나이 88세였다.
8.스님의 법명은 회정(懷淨),자는 윤중(允中)이며 법호는 설봉,성씨는 조(曹)씨로서 낭주(영암)사람이다.
날 때부터 우아한 골격을 지닌 이 아이는 아홉살이 되자 달마사의 조명(照明)장로를 찾아가 수행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
16세 되던해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마침내 도예를 떨치던 화악문신 대사를 찾아가 대사로 부터 법통을 전해받았다. 스님은 그후 홀로 참구를 거듭, 높은 경지에 다달았으며 또한 외딴섬에 들어가 토굴에서 철저히 정진하기도 했다.
영조 14년(1738)은 스님께서 회갑을 맞는 해인데 이해 9월 8일 입적했다.
9.스님의 법명은 새봉(璽封), 법호는 상월이며 자는 혼원,성씨는 손씨로서 순천 사람이다.
조선조 숙종 13년(1687)에 태어나 11세 되던 해 조계산 선암사로 들어가 극준(極俊)장로를 의지하여 출가, 15세에 머리깎고 이듬해 세진당의 문신(文信)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8세 때 설암에게 참학,도가 통하여 의발을 전해 받고 제산의 노장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지식을 넓혔다.
27세 되던해 조계산으로 돌아왔다.
영조 43년(1766) 10월, 상월 스님은 몸에 가벼운 질병 증세를 느껴 게송 한수를 읊조리기를 "물은 흘러 바다로 돌아 가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하고는 담담하게 입적하니 누려온 나이 81세였다.
10.스님의 법명은 체정(體淨), 법호는 호암 이요 성씨는 김씨로 전북 고창군 흥양 사람이다.
조선조 숙종 13년(1687)에 태어나 영조 24년(1748)에 입적하니 나이 예순 둘,법랍 마흔 일곱이다. 환성 스님에게 법통을 이어 받고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에서 주로 주석 했는데 가르침을 받기 위해 따르는 스님들이 늘 수 백명에 달했다.
11.스님의 법명은 해원(海源),자는 천경(天鏡), 법호는 함월이고 성씨는 이씨이며 함경남도 함흥 사람이다.
어머니 조씨는 꿈에 큰 물고기를 보고 잉태하여 열달이 훨씬지나 아이를 낳았다.
열네 살 되던 해 ,도창사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이래 두루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 다니며 자신을 탁마 하였다. 뒷날 환성 스님을 섬기게 되었는데 입실 10년만에 종문의 묘전을 모두 배웠다.
스님은 조선조 숙종 17년(1691)에 태어나 영조 46년(1770) 80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칠 때 까지 쇠잔한 진리의 등불을 지키며 교화를 폈던 환성지안(喚醒志安)의 의발을 이어받아 전한 당대의 선지식이다.
12.조선 후기의 고승. 성은 천(千)씨. 자는 무이(無二), 법호는 연담(蓮潭). 전라 남도 화순출신. 5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0세에 <통감(通鑑)>, 12세에 <맹자>를 읽었다.
7세 때 아버지가, 13세 때 어머니가 죽은 뒤 숙부 의 보살핌을 받았다. <대학>·<중용> 등 유가경전을 공부한 뒤, 18세 때 승 달산 법천사(法泉寺)의 성철(性哲)을 따라 출가하였고, 19세 때 안빈(安賓)으 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보흥사(普興寺)에서 사집(四集)을 배운 뒤 대둔사(大芚寺) 벽하(碧霞)로부터 <능엄경>을, 용암(龍巖) 밑에서 <기신론 (起信論)>과 <금강경>을, 취서사(鷲棲寺) 영곡(靈谷)으로부터 <원각경(圓覺 經)>을 배웠다.
22세 때 해인사의 체정(體淨) 밑에서 3년 동안 공부하여 선 리를 터득하였고, 상언(尙彦)에게서 <화엄경>을 배우면서 28세까지 시봉(侍 奉)하였다.
29세 때 강원도 장구산(長丘山)에 53불(佛)을 조성하고, 체정을 증 명사(證明師)로 모셨다.
31세 때 보림사(寶林寺)에서 <반야경>과 <원각경> 을, 다음해에 <현담(玄談)>을 강의하기 시작하여 60세까지 30여년 동안 계속 하였다.
58세 때 영남 종장(宗匠)으로 해인사에 있으면서 서산(西山)의 비석을 대흥사(대둔사)에 세웠다.
60세 때 시기하는 승려의 투서 때문에 퇴암(退庵)과 함 께 수일 동안 투옥된 일이 있었다.
78세 때 보림사 삼성암(三聖庵)으로 옮긴 뒤 80세에 입적하였다. 교학(敎學) 뿐 아니라 선도를 함께 닦은 고승으로서, 법맥상으로 볼 때는 체정의 제자이고 상언을 동문이면서 스승으로 받들었다.
서산의 의발(衣鉢)을 전수함으로써 선교(禪敎)의 총본산인 해남 대흥사(大興 寺)의 12대종사(大宗師) 중 1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서장사기(書狀私記)>1권, <도서사 기(都序私記)>1권, <선요사기(禪要私記)>1권, <절요사기(節要私記)> 1권, < 기신사족(起信蛇足)>1권, <금강하목(金剛蝦目)>1권, <원각경사기(圓覺經私 記)>2권, <현담사기(玄談私記)>2권, <대교유망기(大敎遺忘記)>5권, <제경회 요(諸經會要)>1권, <염송착병(염頌着柄)>2권, <임하록(林下錄)> 등이 있다.
13.초의 선사(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이자 다도(茶道)를 정립하신 분이다. 성은 장씨(張氏)이며, 자는 중부(中孚), 법명은 의순(意恂)으로, 초의는 호이다.
16세에 출가하여 불학 이외에도 유학, 도교 등 여러 교학에 통달하였고, 범서(梵書)에도 능통하였다.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과 폭 넓게 교류를 가져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고,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차 생활의 멋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의 불교 사상 또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차를 통하여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좌선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멋을 찾고 불법을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대둔사)의 동쪽 계곡에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을 홀로 정진하다 1866년 나이 80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13대강사는
1.스님의 법명은 원오(圓悟),법호는 만화 이며 성씨는 이씨로 전라남도 해남의 우수영 사람이다.
조선조 숙종 20년(1694) 9월에 태어나 영조 34년(1758) 8월 7일 열반에 들었으니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스님은 어려서 수군영의 공생이되어 관아를 출입 하였으나 성품이 본디 과묵하고 세속적 명리에 관심이없어 대흥사(대둔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만화 스님은 당시 전국에서 이름을 떨치던 당대의 선지식 환성지안 과 호암제정 을 모시고 경론을 배워 나이 30에 이르러 마침내 여러 경전의 깊은 뜻에 두루 통달하게 된다. 스님은 순천 송광사에서 입적 했으며 영각은 만일동국선원에 있다.
2.연해 스님은 대흥사 13대 강사의 한 분이다. 13대 강사로 꼽히는 스님들은 모두 제10대 대종사 였던 호암체정(虎岩體淨,1687∼1784) 스님의 문도 들이다.
연해 스님은 호암 스님의 법을 전해받은 법제라고만 알려졌을 뿐,출생 또는 입적연대나 행적이 분명치 않다. 다만 대흥사 고기(古記)에는 스님이 늘 대흥사의 약사전에서 강회를 개설했다고 적고 있을 뿐이다.
성격이 호탕하고 이야기를 잘하였으며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 하면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3.스님의 법명은 영우(永愚)이고 법호는 영곡 으로 , 전북 고창군 선운사 사람이다. 대흥사 13대 강사중 세번째로 꼽히는 분이다.
호암체정(1687∼1748)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의 법형이다. 영곡스님에 관해서는 생몰 연대를 비롯,상세한 행장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다행이 법제인 연담 스님의 자술연보의 기록을 통해 생의 편린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영곡스님은 대흥사에서 크게 강회를 열었으며 그 성대함과 장엄함이 부처님의 영산법회를 방불케 하였다고 전했다. 영곡 스님의 문인은 11명인데 모두 북쪽 지역에 있으며 현해모윤(懸解慕潤)의 일파는 두륜산, 또 다른 일파는 월출산 에서 이름을 떨쳤다. 스님의 입적 연대는 분명치 않다.
4.스님의 법명은 승제(勝濟),법호는 나암 으로 전남 화순군 능주면의 쌍봉사 사람이다. 대흥사 13대 강사중의 한 분이다. 설담자우(雪潭自優)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모은지훈(暮隱智薰)의 손자뻘 제자이고 화월현옥(華月玄玉)의 종손뻘 제자이며 그리고 청허휴정의 법을 이은 제자 소요태능 에게는 6세 법손이 된다.
나암 스님은 우연히 대둔사에 들렀다가 설담자우의 회하에서 입실제자가 되어 법맥을 이었다. 나암은 만년에 자신에게 <화엄경>을 가르쳐준 설파스님 이 주석 하고있는 지리산 영원사로 찾아갔다 병을얻어 서녘 땅 으로가 쓸쓸히 입적했다.
5.스님의 법명은 성규(聖奎),법호는 영파 로서 함월의 법을 이어 받은 제자이고 환성의 손자뻘 제자이다.경남 합천군 해인사 인근 마을 출신이다.
영파 스님의 자는 회은(晦隱)이고 성씨는 전(全)씨로서 고려 옥산군(玉山君)영령의 16대손이며 만기(萬紀)의 아들이다. 어머니 박씨는 꿈에 큰 별 하나가 품안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잉태,조선조 영조 4년(1728) 기이한 골격을 갖춘 아이를 낳는다.
어려서 부터 슬기로움이 뛰어나 학문에 통달하고 글씨도 뛰어났다. 15세 무렵 출가를 결심 , 4년이 지난뒤 용천사로 찾아가 환응(喚應)장로에게 간청, 머리를 깎고 계율을 받아 수행의 길로 나선다. 이후부터 스님은 <화엄경>에대한 공부를 본격화, 30년 세월을 하루같이 공부에만 전념한다.
영파 스님은 설파와 함월 두 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의 종지와 선교의요령을 모두 터득한뒤 함월 스님의 의발을 전해 받고나서 영조 30년(1754)이래 등단설법 하다가 순조 12년(1812) 생애를 마쳤다.나이 85세, 승랍 66세였다.
6.운담 정일 대강사는 제4대 대강사였던 나암 승제 스님의 사제가 된다 .
늘 대흥사(대둔사)의 정진당에서 강의를 열었다고 하며 저술로서 『운담시문집(雲潭詩文集)』 1권이 현존한다.
7.퇴암 태관 대강사는 설파 상언 화상의 법사이며 호암 화상이 법손이 되는 셈이다.
청운당에서 강의를 열었다고 전한다. 특히 화엄사상의 대가였으며 성품이 엄준하여 고요한 곳을 찾아 참선을 즐겼으나 번잡한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오래 은거하다 대중의 간청으로 대흥사(대둔사)에서 법회를 열었으나 만년에는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부도와 탑은 담양(潭陽)의 용흥사(龍興寺)에 세웠다.
8.벽담 행인 대강사는 서산의 법제인 부휴의 후예로서 『고기(古記)』 에 따르면 영해(影海)의 법손이며, 풍암의 직계 손자이다. 스님이 법회를 주관하던 곳은 대흥사(대둔사) 승당이었다.
9.스님의 법명은 복혜(福慧),법호는 금주이며 성은 권씨이고 전남 나주 사람이다. 조선조 중후기 사상계를 빛냈던 대흥사 13대 강사명단에 9번째로 이름이 오른 스님이다.
성격이 호탕하고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권장군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주 스님에 대한 기록은 출생,입적연대를 비롯, 출가한 연대등 자세하지 않다. 다만 그가 월파태율(月波兌律)의 법을 이은 제자라는 점과 아암혜장(兒庵惠藏)으로 부터 "종풍을 드날릴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 영조시대를 전후하여 생존했던 인물로 보여진다.
10.조선 후기의 스님, 해남 대흥사(대둔사)의 강사. 호는 완호(玩虎, 玩湖), 자는 삼여(三如). 전남 해남군 별진(別津) 사람이다. 아버지는 김시택(金時澤)이다.
1767년(영조 43) 10세에 두륜산 서일(瑞日)에게 출가하여 1774년(영조 50) 구족계를 받았다. 백련도연(白蓮 禱演)에게 교학을 익히고, 연담 유일(蓮潭 有一)에게 선학을 배운 뒤, 도연의 법을 이었다.
1798년(정조 22) 가을 대흥사(대둔사) 청풍요(淸風寮)에서 강경(講經) 대법회를 주재하자, 1백여 학인들이 참석했다. 1808년(순조 8) 겨울 일봉암에서 머물다가 대둔사 낭암 시연(朗巖 示演)의 청으로 다시 강경 법회에 참석했다. 1811년(순조 11) 2월 4일 가리포 첨사가 늦은 밤에 절에 왔는데, 이때 세 사람의 보좌관들이 횃불을 들고 창고에 들어갔다가 불씨가 떨어져 대흥사(대둔사)를 불태운 큰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그는 권선문을 짓고 법당 중건에 참여했다. 인봉 덕준(仁峰 德俊), 풍계 현정(楓溪 賢正), 호의 시오(縞衣 始悟)와 함께 11월 16일 천불을 배에 싣고 대둔사로 향하다가 동래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11일 동안 표류하다가 일본 장기도(長崎島) 축전주(筑前州)에 표착했다.
이 배는 이듬해 6월 17일에야 일본을 떠나 7월 15일 절로 돌아왔다. 천불 중 일본에 표류되었던 석불은 모두 어깨 위에 '일(日)'자를 표시했다.
1826년(순조 26) 월 23일 대둔사 한산전(寒山殿)에서 나이 69세, 법랍 59년으로 입적했다. 조정에서 '선교양종화엄강주...' 운운하는 승직을 추증했다.
두륜산에 부도탑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상국(相國) 권돈인(權敦仁)이 지었다.
11.스님의 법명은 시연(示演),법호는 낭암 으로 전남 영암 사람이다. 스님은 조선조 후기 불교사에 찬연한 학문의 꽃을 피운 대둔사 13대 강백의 한 분이다.
스님의 출생 및 출가 ,입적 연대 등은 전해오지 않고 다만 그가 영암에서 태어나 인근 달마산에 가서 출가 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낭암 스님은 설봉, 벽하, 스님 문하에서 불교 전적 등을 공부했으며 송암 스님의 조실에 들어가 전법계를 받아 법을이은 제자가 되었다. 낭암 스님의 비석는 달마산에 세워져 있다.
12.아함 혜장 대강사는 속성이 김씨요, 자는 무진(無盡)이었다. 어렸을 때 출가하여 대둔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혜장의 법명, 호는 연파(蓮坡)이며 출가 전에 이미 외전(外典)을 통달하였던 스님은 입산 후에는 연담 화상과 운담스님께 내전(內典)을 배웠다.
27세 때 정암 낭원 화상을 뵙고 법을 구하였다.
30세 때 이미 박학과 달변으로 명성을 떨쳐 대흥사(대둔사)의 청풍당에서 법회를 열고 주관하였다. 평소 『논어 』『주역』등을 잘 인용하였고 불교 경전 가운데 『능엄경』과 『기신론』을 특히 좋아하였다고 전한다.
순조 11년 30세로 요절하였다.
학문이 깊어 자주 연담 유일과 대비되기도 하는데 『고기』에서는 연담 유일을 대련(大蓮), 연파(蓮坡)스님을 소련(小蓮)이라 부르기도 한다.
13.조선 후기의 승려이다. 호는 범해, 이름은 환여(幻如)이고, 속성은 최씨로 완도군 군외면 범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철(崔徹), 어머니는 성산 배(裵)씨이다. 14세에 해남 대흥사에서 호의 시오(縞衣 始悟)를 은사로 득도하였다. 하의 정지(荷衣 正持)와 초의 의순(草衣 意恂)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7세에 호의 시오의 법을 이어 진불암(眞佛庵)에서 개당했는데 선교학에 밝았으며, 22년 동안 경전을 강의하였고(講經), 1896(고종 33)년 12월 26일에 77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동사열전(洞師列傳)> 6편 1책을 비롯하여,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 2편 1책, <경훈기(警訓記)> 1권, <유교경기> 1권, <사십이장경기> 1권, <시략기> 1권, <통감기> 1권, <진보기> 1권, <박의기(博儀記)> 1권, <사비기(四碑記)> 1권, <명수집(名數集)> 1권, <동시선(東詩選)> 1권, <은적사 사적기> 등 20여편이 있으나 모두 간행되지 않은 것 같다.
정리 : 茗田 임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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