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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그 사나이] 04
S#1. 동네 어귀 마을길 (낮)
가방을 맨 지현, 엄청 화가 나 씩씩대며 걸어온다.
택기가 소리치며 쫓아온다.
택 기 야, 니 어데 가! 진짜 서울 갈기가!
달려와 지현을 잡는 택기.
택 기 서울 가시나 이거, 니 삐졌나? 뭘 그런 걸 갖고 삐지나?
지 현 (뿌리치고 가며) 놔. 너랑 말도 하기 싫어.
택 기 (재차 잡으며) 영감님 오실 텐데, 가긴 어딜 가? 니 포도밭 안 받을 기야?
지 현 포도밭이고 뭐고, 너하곤 단 하루도 못살아. (가버리면)
택 기 야, 니는 내한테 더한 짓을 했어! 니 때문에 내가 강간범까지 되가 징역 살 뻔 했는데, 물파스 쫌 바른 거 가지고 뭐? 그리고 내가 발랐나? 지손으로 발랐지?
이때 멀리 정류장에 관광버스가 도착하자,
택 기 어? 클났네? 영감님 오시는갑네? (화급히 잡으러 가는) 야, 니 거기 안 서?
S#2. 동 정류장 (낮)
지현 씩씩대며 걸어오면, 관광버스에서 막 내리는 병달과 만난다.
지 현 (달려가며) 할아버지...!
병 달 아니, 지현이 아니냐?
지 현 할아버지...! (운다.)
병 달 (놀라서) 니 와 그라나?
지 현 (택기를 째려보며) 나 저놈 땜에 못살아요...!
택 기 (막 달려오며, 분위기 살피며) 댕겨오셨습니꺼.
병 달 (지현에게) 아니, 택기 야가 왜?
지 현 글쎄요, 저 놈이요... (택기 노려보면)
이때 갑자기 화면 빠르게 뒤로 되감기 되면서. 3부에서부터 지현이 당하고 고생하던 화면만 효과적으로 퍽 퍽 강조된다. 소리도 엄청 빨리 흘러나오는 효과음. 화면, 현재의 지현이 병달에게 매우 빨리 설명하고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지 현 그래서, 저 놈하고는 도저히 같이 못 살겠어요.
병 달 아니, 택기 니! 내가 농사 가리키라캤지, 사람 잡으라캤나? 어이?
택 기 (더럭 겁나 펄쩍 뛰며) 잡은 건 아니고예.
병 달 퍼뜩 잘못했닥캐라!
택 기 못합니다. 지는 잘못한 거 없어예.
병 달 뭐라? 아니, 이놈이?
지 현 (속마음 소리) 그 봐. 넌 이집 종이라는 걸 알아야지. (대사. 택기에게) 무릎 꿇고 사과해요.
택 기 뭐? 무릎? 웃기고 자빠졌네.
지 현 뭐요?
관광버스에서 내린 노인들이 죽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고,
박영감 (소근대며) 요망한 것이네? 사내를 무릎 꿇릴라 허네?
송할멈 그러게나 말이예유...?
병 달 (노인들 눈치 보며) 드가자, 드가서 얘기하자.
지 현 안돼요. 사과 받기 전에는 절대 못 들어가요.
박영감 워메... 성깔까지 있네, 그려?
병 달 (택기에게) 해라, 퍼뜩! 동네 창피하구로!
택 기 (곤란하다. 마지못해) 미안해. 됐지!
지 현 그게 사과에요?
택 기 니도 서울서 이래 사과 하대? (얼굴 들이대며) 미안하다니까? (가버린다.)
지 현 아니, 저게?
병 달 (궁금해서) 서울이라니...?
지 현 (당황) 네? 아니에요...
병 달 드가자. 가서 얘기하자.
S#3. 시골집 안방 (낮)
병달 앞에 뚱하니 외면하고 나란히 앉아있는 지현과 택기.
병 달 내 없는 동안 둘이 잘 지내라꼬 신신당부를 했더만, 으째 동네 창피하게 싸움질이나 하고, 그기 뭐꼬?
택 기 (뚱하니) 죄송합니더.
병 달 (지현에게) 그럼, 니는 으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지 현 제가 바라는 건요, 인간적인 대우, 그거 하나에요.
병 달 인간적인 대우?
지 현 네. 일단 사람이 잠은 자고, 일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병 달 그렇지.
지 현 하루에 최소한 8시간 수면보장에, 일도 8시간만 하는 걸로 해주시구요...
병 달 그라고?
지 현 일은 한 시간하고 10분 휴식제로 해주세요.
병 달 그래... 사람이 잠깐 잠깐 숨은 돌리야제...
지 현 또 샤워시설을 좀 마련해주셔야겠어요.
병 달 샤와?
지 현 네. 여름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끼얹어야 되는데, 남자들만 사는데다 대문도 없이 뻥 뚫려있어서, 도저히 씻지도 못하고 죽겠어요.
병 달 그래...? 그거는 당장은 안 될 끼고... 차차 어데다 만들낀지 구상을 해보자.
지 현 안돼요. 당장 해주셔야지. 임시루라도 만들어 주세요.
병 달 그래? 그럼 택기 니가 함 해봐라.
택 기 (똥 씹은 표정인데)
지 현 그리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고쳐주세요.
병 달 뭐? 아니, 저 화장실이 으때서?
택 기 (지현 흘기며) 지금 호텔에 왔는 줄 아는가베?
병 달 그런 건 대공사 아이가?
지 현 (속마음 소리) 아이, 씨... 그게 제일 시급한데? (병달에게) 그럼, 그건... 천천히 하시구요... 일단, 읍내에 나가서 쇼핑 좀 해야겠어요.
병 달 샤핑?
지 현 네. 밭에서 일할 때 입을 옷도 좀 사야 되구요,.. 필요한 것도 있고 해서요...
병 달 그래... 그래 하그라.
S#4. 읍내 장터 (낮)
활기찬 시골 장날의 풍경 펼쳐지면, 한껏 멋을 낸 지현과 떨떠름한 표정의 택기가 걸어온다. 서로가 아니꼬운 상태다. 몸빼 옷 좌판에서 멈추는 택기.
택 기 여깄네. (몸빼 들고) 이거 얼마예요? (지현에게) 두 벌만 골라.
지 현 (쳐다도 안보며) 난 이런 거 안 입어요.
택 기 일할 때 입을 옷 산다매?
지 현 누가 이런 거 입고 일한데요?
택 기 이게 일할 때 을마나 편하고 좋은데?
지 현 (콧방귀) 내가 명색이 디자이넌데 이런 걸 어떻게 입어? (가버리면)
택 기 가시나, 저게? (상인에게 만원 주며) 아무 꺼나 두벌 줘요. (서둘러 사가지고 간다.)
S#5. 동 장터거리 (낮)
비닐봉투의 몸빼를 들고 지현에게 오는 택기.
지 현 그걸 뭐 하러 사와요? 안 입는다는데? (뭔가를 찾듯 둘러보면)
택 기 더 돌아다녀 봐야, 다 이런 거야. 다리만 아파. 이제 밭에서 신을 고무신이나 하나 사면 되겠네. 따라 와. (가려는데)
지 현 여기 백화점 없어요?
택 기 백화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 현 무슨 읍내가 이렇게 쪼꼬매? 이게 다예요?
택 기 또 뭐 살 건데?
지 현 영동시내는 어디에요? 멀어요?
S#6. 영동시내 거리, 달리는 트럭 안 (낮)
창 밖으로 시내거리를 두리번거리는 지현.
지 현 (흡족하진 않지만) 그래도 여긴 쫌 낫네. 일단 커피전문점 좀 찾아봐요. 커피부터 마시게. 커피를 언제부터 못 마신 거야...?
택 기 저깄네!
지 현 (반기며) 어디요?
택 기 저깄잖아. 자판기.
지 현 저런 거 말구요! 커피전문점 몰라요? 테이크아웃 커피? 진짜 촌스러워서...
택 기 그럼, 니가 찾아!
S#7. 영동시내, 커피전문점 (낮)
창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지현.
지 현 음! 아! 바로 이 맛이야! 에스프레소...
택 기 (이것저것 진열된 소품 보며 서성이는) 빨리 일나. 가면서 먹어. 테이크아웃이라매?
지 현 잠깐 좀 앉아 봐요. 커피 마시는데 한 시간이 걸려요? 두 시간이 걸려요?
택 기 벌써 30분이야. (마지못해 앉는)
지 현 가만 좀 있어 봐요. 음미하면서... 이런 기분도 좀 즐기게.
택 기 니는 즐기고, 내는 뭐야?
지 현 그러니까 댁도 한잔 마시라니까요? 내가 사줄게요.
택 기 됐어. 몸에도 안 좋은 걸 비싼 돈 내고 왜 사먹어?
지 현 아니, 내가 사준 대니깐요? 내 돈으로?
택 기 싫어.
지 현 참 성격 이상하네. 이렇게 음악 듣고 차 마시는 게 왜 싫지? 이해가 안돼.
택 기 빨 빨 마셔.
지 현 촌스러워서 증말, 같이 다닐 수가 없어. (돌아앉아 차 마시는) 아, 좋다. 여기 온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한 1년은 된 거 같네. 여기만 나와도 좀 살 거 같다. 아, 이 도시의 냄새.
택 기 도시의 냄새는 무슨? 매연이지.
지 현 (답답해서) 그게 아니고, 뭔가 활기찬 분위기가 나잖아요. 젊은 사람들도 쫌 있고, 왠지 재미난 일도 생길 거 같고... 이런 데 오면, 분위기 있게 차 마시면서 대화도 나누고,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택 기 차 안마시면 대화 못하나?
지 현 됐어요. 댁하고 무슨 대화를 한다고. (외면하며 커피 마시는데)
택 기 시끄럽고. 빨리 일나. 밭에 할일이 태산이야. (일어나면)
지 현 (일어나 얼굴 들이대며) 맨날 밭밭밭밭! 지겹지도 않아요? (먼저 휙 나가버린다.)
택 기 아, 저 쪼꼬만 게, 진짜. (따라 나간다.)
S#8. 스포츠 전문매장 (낮)
최신 유행의 트레이닝복을 꺼내서 몸에 대보는 지현.
지 현 이거 무릎 안 나오는 쿨맥스 기능성원단이죠? 다리도 길어보여야 되는데?
택 기 안 돼. 니 몸빼 두벌이나 샀어.
지 현 내 카드로 긁을 거니까 상관 마요. (들고 계산대로 가며) 얼마에요?
점 원 (계산기 두드리며) 세일해서 12만 6천원인데요.
택 기 (놀라며) 네? 이까진 게 무슨?
지 현 (나직이) 진짜 창피하게 왜 이래요? 저리 좀 가요, 쫌!
택 기 그거 하나 살 돈이면, 몸빼 스무 벌도 더 사겠다.
지 현 내 돈 내고 내가 사 입겠다는데, 댁이 왜 흥분을 하고 그래요? 성격 증말 이상해. (계산한다.)
S#9. 인형가게 앞거리 (낮)
택기 무뚝뚝하게 앞서고, 쇼핑백을 든 지현이 신나서 오는데,
택 기 일루와 봐. 고무신이나 사가지고 빨리 가게. 아까 고무신 못 샀잖아.
지 현 싫어요.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야? 고무신을 신게?
이때 인형가게 앞을 지나다 쇼윈도를 보며 멈춰서는 지현.
지 현 아, 예쁘다! 귀엽죠?
택기 보면, 아주 커다란 테디 베어 인형이 놓여있다. 그 인형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쌩끗 웃는 지현. 한심하다는 듯 한숨 쉬더니 먼저 가는 택기. 쇼핑백 들고 얼른 쫓아가는 지현.
S#10. 서울. 편의점 (밤)
누군가 잡지표지 속의 톱스타 여배우의 얼굴을 자기 얼굴에 덮은 채 포즈 취하고서,
(편의점 알바 장난입니다.)
은 영 (목소리도 톱스타 흉내, 섹시하게) 어서오세요. 뭘 드릴까요? (잡지 내리면, 여배우와 똑같은 표정과 포즈 취한 은영이다.)
손님남 어? 깜짝이야. 정말 이영앤줄 알았네... (고른 물건 올려놓으면)
은 영 (바코드 찍어 계산하며) 3천5백원이요.
손님남 웃으면서 계산하고 물건 들고 돌아서면,
은 영 (다른 여배우 잡지로 얼굴 가리며, 다른 포즈와 목소리)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잡지 내리면, 매우 심심하고 지겨운 은영의 표정. 심드렁하게 바코드로 자기 얼굴, 팔뚝을 찍는데, 이때 핸드폰이 울리면 끼고 있던 핸드폰에 연결된 버튼 누르며,
또 다른 잡지 얼굴에 대면서,
은 영 (목소리도 또 다른 배우 흉내, 섹시하게) 여보세요? (잡지 내리며) 어머, 지현이니?
S#11. 시골 지현방 (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지현이 기분 좋게 핸드폰 통화하고 있다.
지 현 그래, 나야. 드디어 내 페이스 대로 잘 돼가고 있는 거 같애.
은 영 (E) 니 페이스?
지 현 응. 할아버지도 내편이고, 강간범 그 놈도 꼼짝 못하게 해놨거든. 앞으로 좀 편해질 거 같애.
은 영 (E) 그래? 잘됐다, 지현아.
지 현 은영아, 넌 어때? 잘 지내?
S#12. 서울, 편의점 (밤)
또 다른 잡지 얼굴에 대고,
은 영 (목소리 흉내) 나 혼자 무슨 재미가 있겠니. 아주 심심해 죽을 지경이야.
지 현 (E) 근데 언제 올 거야? 한번 놀러 온다며?
은 영 (얼른 다른 잡지로 바꾸며) 요즘 쫌 바빠서...
지 현 (E) 니가 바쁘긴 뭐가 바뻐? 백수가!
은 영 (잡지 내리고) 거기 갈라문 여비라도 마련해야지. 어떻게 빈손으로 가니? 조금만 기다려.
S#13. 시골 지현방 (밤)
지 현 알았어. 빨랑 와? 나도 지겨워죽겠단 말이야. 그래. (전화 끊고, 발라당 누우며 기지개 켜는) 아, 오늘은 늘어지게 한번 자보자. 8시간 취침이니까... (시계 보며) 지금이 2시... 푹 자고 한 10시쯤 일어나면 되겠군.
흐뭇하게 눈을 감는다.
S#14. 지현방 밖 & 방 안 (새벽)
깜깜한 방안. 잠을 자고 있는 지현.
이때 갑자기 탕탕탕! 밖에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병 달 (부드럽게) 지현아. 지현아! (문 두드린다.)
지 현 (놀라서 깨며) 네...? 왜요?
병 달 (문 열리며) 뭐하노? 밭에 가야지?
지 현 아니, 할아버지. 벌써 깨우시면 어떡해요? 8시간 취침에 8시간 일하기로 했잖아요?
병 달 그래, 8시간 자고, 8시간 일 해라. 와?
지 현 근데 벌써부터 밭에는 왜 가요? 전 더 자고 10시쯤 갈래요. (다시 눕는데)
병 달 (좋은 말로) 낮엔 더워서 일 못해. 선선할 때 지금 가야지. 빨리 일나라.
지 현 (신경질 내며 일어나 앉는) 저 8시간 못 잤단 말이에요!
병 달 (버럭) 해떨어지면 바로바로 자야 제, 밤에 안자고 뭐했나? 빨리 나와! (사라지면)
지 현 아이, 씨... 도대체 지금이 몇 시야? (시계 보며) 헤! 4시잖아! 두 시간밖에 못 잤는데? 미치겠다, 증말... (일어나 나간다.)
S#15. 동 마당 (새벽)
지현 괴롭게 눈도 못 뜨고 나오면, 택기, 벌써 나와 세수하고 있다.
병 달 (부드럽게) 택기 니도 밭에 가면, 지현이하고 어제 한 약속 잘 지키라. 알았제?
택 기 예.
S#16. 포도밭 (낮)
뜨거운 태양 아래, 아지랑이가 꿈틀대듯 지열로 이글거리는 포도밭. 택기와 지현의 머리가 포도밭 위로 보인다. 이랑을 따라 안개처럼 뿜어져 나오는 액비. 택기가 약대(분무기)를 어깨에 매고 앞서 가면, 지현이 팔에 잔뜩 감은 호스를 풀면서 (혹은 감으면서) 따라간다. 우비에 마스크까지 중무장을 한 두 사람. 이미 머리부터 땀으로 푹 젖어있다.
지 현 (눈으로 들어가는 땀도 못 닦고 눈 깜빡 깜빡거리며) 아 따거. 안 그래도 쪄죽겠는데, 찜찔방이 따로 없네... (줄 낑낑대며) 아이, 씨, 이건 또 왜 이렇게 무거워? 아, 목말라... 좀 쉬었다 하죠!
택 기 (분무기 끄고 돌아보는) 뭐?
지 현 (마스크 벗으며) 잠깐만 쉬었다 하자구요!
택 기 아직 한 시간 안됐는데?
지 현 네?
택 기 한 시간 일하고 10분 쉬기로 했잖아?
지 현 아니, 그렇긴 한데, 이거는 너무 힘들고...
택 기 (시계 보며, 말 자르는) 42분 있어야 한 시간이야. 계속해. (분무기 켜고 다시 간다.)
지 현 (다시 줄 풀며 쫓아가는) 아이, 씨...? 잠도 못자서 졸려 죽겠는데...?
이때 자기가 풀던 호스에 발이 걸려 꽈당 넘어지는 지현.
지 현 엄마야...!
택 기 (분무기 끄며) 뭐해? 오늘 바쁜데? 어제 니하고 씰데없이 영동 나갔다 오는 바람에, 일만 더 밀렸잖아! 빨리 인나. 이거 끝내고, 빨리 가서 감자도 캐야 돼! (분무기 켠다.)
으이, 씨... 우거지상으로 이를 갈며 일어나는 지현.
S#17. 감자밭 (낮)
흙 속에서 쑥 뽑혀져 나오는 감자알들.
흙을 털면 알이 튼실한 감자들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감자밭에 쪼그리고 앉아 감자를 캐고 있는 택기.
지현은 저쪽 그늘아래 앉아 썬크림 바르면서 쉬고 있다.
핸드폰에 헤드폰 연결해 mp3음악 듣고 있다.
택 기 뭐해? 감자 안 캐! 니 10분 일하고, 한 시간 쉬네?
지 현 나중에 8시간 채우면 되잖아요! (입 삐쭉, 혼잣말) 나도 내가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할 거야. 무슨 약속이 자기네 맘대로야? 시골사람들하고 약속을 한 내가 잘못이지.
이때 우연히 고개를 돌리던 지현의 눈에 저쪽에서 병달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재빨리 호미를 잡는 지현.
후다닥 감자밭에 앉아 열심히 감자를 캔다.
갑자기 왜 이런가 의아한 눈으로 지현을 보는 택기. (할아버지는 못 본 것.)
지 현 (택기에게 부드럽게) 힘들 텐데 좀 쉬었다 해요. 물도 한 잔 마시고. 여긴 내가 다 할 테니까.
의외긴 하지만, 별일이네? 피식 웃고는 그늘로 나가 쉬는 택기. 물 마시려는데....
병 달 (뒤에서, 소리) 감자는 많이 캤나?
돌아보는 택기.
지현은 일에 빠져 아무 소리도 못들은 척 열심히 한다.
택 기 나오셨어예?
택기를 지나쳐 지현에게로 가는 병달.
병 달 (지현에게) 안 힘드나?
그제야 올려다보며 깜짝 놀란 듯 과장된 표정을 짓는 지현.
지 현 어머나? 언제 오셨어요? 전 일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오신 것도 모르고...
어이없어 빤히 보는 택기. 아예 피식 웃음이 나오는데,
병 달 (만족한 듯) 힘들 낀데 쉬엄쉬엄 해라.
지 현 아니에요. 해지기 전에 다 끝낼려면 빨리빨리 해야죠. (택기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저렇게 놀기만 해서는 언제 다하겠어요?
택 기 뭐, 놀아?
지 현 더운데 뭐 하러 나오셨어요. 빨리 들어가세요.
병 달 괘안타.
지 현 아니에요. 이런 날 나오시면 더위 드시고 큰일 나요. (택기에게) 뭐해요! 빨리 모시고 들어가지 않고!
택 기 저게 와 저래?
지 현 감자는 내가 다 캘테니까 빨리 할아버지 모시고 들어가요!
택 기 그래...? (엉덩이에 묻은 흙 툭툭 털며 일어나며, 병달에게) 가시지예.
병 달 아이다. 내 혼자 가께.
택 기 아입니다. 혼자 다 캔다 안합니꺼. 지하고 들어 가시지예.
병 달 그래...? 그럼 애 쓰거래이~
택기와 병달 밭두렁으로 걸어 나간다.
아이, 씨...! 두 사람만 쳐다보며 땅을 아무렇게나 톡톡 파며 캐는 시늉만 하는 지현.
이때 갑자기 돌아서는 병달.
병 달 참! 감자 안 찍히게 조심해야 쓴다!
병달이 갑자기 돌아보자 화들짝 놀라 호미질을 팍 팍 힘들여 하는 지현.
그 덕에 호미날에 감자가 퍽! 찍혀 번쩍 들려나온다.
지 현 (찍힌 감자 보며, 배시시 웃는) 네, 찍히면... 안 돼죠... 호호호...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 돌리는 택기. 병달과 함께 간다.
S#18. 다른 논두렁 길 (해질녘)
해가 뉘엿뉘엿 지는 논두렁 길을 걸어가는 택기와 병달.
병달이 앞서 가고, 택기가 그 뒤를 따른다.
병 달 (혼잣말) 에이구, 다리야... 이젠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택 기 (병달 앞으로 쓱 나서, 앉으며) 업히소.
병 달 됐다. 동네사람들 보구로...
택 기 보면 우떻습니까? 지가 영감님 업어 드리는데 이상할 거 있어예?
이내 택기의 등에 업히는 병달.
택기가 병달을 업고 걸어간다.
병 달 에구... 좋구나. 그저 사람은 늙으면 죽어야제...!
택 기 무신 말씀인교? 오래오래 사셔야제.
병 달 아는 좀 우떻드노? 그래 맘에 안 드나?
택 기 지 맘에 들면 또 뭐하겠습니꺼.
병 달 그래도, 맘에 들면 좋제... 포도밭 줘도 되겠드나?
택 기 그거야 뭐... 영감님이 주시고 싶으시면 주시는 거지예.
병 달 당장 팔아먹을 생각부터 안 하드나?
택 기 그런 생각 안 하문 비정상이지예.
병 달 그거는 그렇다... 일은? 좀 배울라 카드나?
택 기 서툴기는 하지만, 열심히는 할라합니다.
병 달 안할라고 꾀부리고 그카지는 안터나?
택 기 괘안습니다. 꾀야 우리도 부리지 않습니꺼.
병 달 그래... 택기 니가 욕본다.
택 기 뭘요...
병 달 내가 살면 을매나 살겠노... 인자 기력이 딸려가 포도밭 한바꾸 도는 것도 힘들고... 정리 좀 미리 해둘라카는 거니까, 그리 알아라.
택 기 예...
병 달 무겁제? 안 힘드나?
택 기 힘들기 뭐 있습니꺼.
병 달 ...
택 기 옛날에 저 어렸을 때는 지를 이렇게 업고 다니셨지예?
병 달 옛날 얘기는 해서 뭐에 쓰나?
택 기 ...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심더.
병 달 고맙기는... 내가 미안채. 피 한방울 안 섞인 니한테 내가 짐은 안될라카는데...
택 기 짐은 무슨 짐이 된다그카심니꺼.
병 달 니 애비가 늦게 널 보고, 어찌나 좋아라캤던지, 그기 눈에 선하다...
택 기 ...
병달을 업고 말없이 논두렁을 걸어가는 택기.
뉘엿뉘엿 지는 햇살이 두 사람을 빠알갛게 물들인다.
S#19. 감자밭 (저녁)
캐낸 감자들이 곳곳에 쌓여있고, 감자밭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호미질을 하고 있는 지현.
서서히 땅거미가 지며 어두워진다.
지 현 뭐야? 그렇다고 진짜 가냐? 야비하게? 아야, 손에 물집 다 잡혔네... (신음소리. 허리 힘겹게 펴고 일어나며) 아!... 아아 어이구, 허리야! 내 허리 끊어지네. (감자밭 둘러보는) 으으으... 이걸 혼자 언제 다 캐~? 으악~!
드넓은 감자밭에 울려 퍼지는 지현의 비명소리. 에코 된다.
S#20. 시골집 마당 (밤)
비틀비틀 집으로 들어오는 지현. 다리가 후들후들 하다.
시원하네, 달다... 하며 마루에서 수박을 잘라먹던 택기와 병달이 지현을 본다.
병 달 감자는 다 캤나?
힘이 없어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끄덕 하며 수돗가로 향하는 지현.
일단 수도물부터 켜고 흐르는 물에 세수 하는데,
병 달 (버럭) 세수하는데 무신 물을 그래 콸콸 트나? 한 바가지면 되지!
지현, 원망스럽게 병달을 보며 수도 끄고는, 바로 자기 방으로 향하는데,
병 달 그기 다 전기로 모타 돌리는 기야. 그래 콸콸 틀어놓으면 모타 멈춘다꼬!
택 기 (횡하니 지나가는 지현에게) 와서 수박 먹지?
그냥 들어가 버리는 지현.
S#21. 지현방 (밤)
지현, 비틀비틀 들어오더니 젖은 얼굴 그대로 방 한가운데 큰 대자로 뻗는다.
지 현 (밖을 노려보며) 일하고 왔는데, 씻지도 못하게 해. 아아아! 아이구 삭신아!... 정말 언제까지 이런 중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거냐...? 내가 미쳤지, 20억이고 뭐고, 당장 때려칠까부다. 하루가 아주 열흘 같으네...
이때 지현의 핸드폰 울린다.
지 현 (받으며) 엄마... (울쌍)
지현모 (E) 그래 지현아. 은영이가 그러는데, 이제 지낼만 하다며?
지 현 지낼만 하긴 뭐가 지낼만 해! 호미질을 어찌나 했는지, 손에 물집 다 잡히고, 알까지 베겼어. 팔다리 허리 안 아픈 데가 없어. 애브리 데이 뻐근해죽겠어. 아주 사람을 종 부리듯 부려먹는다니까...?
S#22. 서울, 지현집 안방 (밤)
지현모의 수화기에 귀를 들이대고 있는 지현부와 지호.
지현모 쪼금만 참어. 그래야 일년이야.
지 호 그래, 누나. 쪼금만 참어.
지 현 (E) 이런 식으로는 일년은커녕 그 전에 죽을거야. 장사치를 준비나 해. (훌쩍인다.)
지현모 (막상 안됐다.) 어떡하겠니. 생각 같애선 내가 가서 대신 좀 해주고 싶다만...
지현부 (놀라서) 지현아, 너 우니?
지 현 (E) 아빠...! (훌쩍 훌쩍)
지현부 너무 힘들면 그냥 올라와라. 응?
지현모 (지현부 밀쳐내며) 이 사람이? 절루 가요.
지 호 (얼른) 누나! 누난 지금 우리가족의 미래를 짊어진 거야! 힘들어도 참어. 알았지?
지 현 (E. 마지못해) 알았어...
지현모 열심히 해라. 너만 믿는다.
힘없이 전화 끊는 가족들.
지현모 좀 안됐네?
지현부 그러게 말이야...
S#23. 뒤꼍 화장실 앞 (이른 아침)
WC라고 쓰인 화장실 문. 지현의 힘쓰는 소리가 끙끙 새어나오고,
화장실 문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카메라.
이윽고, 화장실문이 벌컥 열리더니, 뛰쳐나오는 지현.
땀에 쫄딱 젖어 안색이 창백한 지현이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쉰다.
지 현 하... 질식할 뻔 했네... 아이고, 다리 후들거려... (고무줄로 연결돼 자동으로 닫히는 화장실 문을 노려보며) WC? WC가 뭐에 약잔 줄도 모르면서. 수세식도 아닌 주제에... (배를 문지르며) 이럴 줄 알았으면 엊그제 영동 나갔을 때 화장실이나 들렸다 올 걸... (울쌍) 아, 배야...!
아랫배를 문지르며 마당으로 향한다.
S#24. 동 집 앞 (이른 아침)
지현 뒤꼍에서 돌아 나오면,
밭에 갈 채비를 하는 택기. 병달과 함께 농기구를 꺼내고 있다.
택 기 어디 갔다 이제와? 이것 좀 잡아.
지 현 일요일에도 일해요? (잡으면)
병 달 (지현에게 주고 물러나며) 농사에 일요일이 어딨노? (손 털며 안으로 들어간다.)
지 현 서울은 다 주5일 근무젠데? (택기에게) 그럼 여긴 언제 숴요?
택 기 비 오면 숴. (농기구 들고 경운기로 간다.)
지 현 비? (하늘 보며) 당분간 전혀 올 꺼 같지 않은데? 비 오라고 고사를 지내던지 해야지...
택 기 빨리 안 오고 뭐해?
지 현 가요! 아이, 씨... 아랫배가 띵띵하네... (어기적 어기적 간다.)
S#25. 포도밭 (낮)
땀을 뻘뻘 흘리며 아낙들과 함께 바닥에 검은 비닐을 깔고 있는 택기.
택 기 (문득 둘러보며) 어? 얘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보이네?
명 숙 나도 아까부터 못 봤는데?
이장댁 어데 숨어가 놀고 있을 끼다. 점점 꾀만 부리고 일 안할라한다, 그 가시나.
택 기 (둘러보며) 어데 숨은 기야?
이장댁 하도 머리를 써가 어데 숨었는지 찾기도 힘들더라.
안되겠다는 듯 찾으러 가는 택기.
택 기 야, 양심에 털난 여자. 니 어디 숨었어?
마리아 (택기를 붙잡고) 저기, 저기로 갔다! (어딘가를 가리킨다.)
택기, 마리아가 가리킨 곳을 보면,
멀리 인근 간이 화장실에서 뛰쳐나오는 지현이 보인다.
괴롭게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는 지현의 모습.
택 기 저게 이제 화장실에 숨어가 농땡이를 피네? (씩씩거리며 지현에게로 간다.)
S#26. 동 간이 화장실 앞 (낮)
참았던 숨을 헥헥거리며,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기진맥진해서 아랫배를 문지르는 지현.
지 현 아후, 배야... 또 실패했네... (옷 냄새 맡으며) 아휴, 화장실 냄새가 아주 몸에 뱄네, 뱄어.
휴대용 향수를 꺼내 휙휙 뿌리는 지현.
손에 도르마리 휴지뭉치 들고서 어기적거리며 포도밭으로 간다.
지 현 아, 미치겠다... 변 못 보면 죽나? 설마 죽진 않겠지? 그것이 알고 싶다, 증말...
이때 윙~ 소리 나더니, 갑자기 달려드는 말벌.
지 현 (깜짝 놀라) 엄마야. 뭐야? (벌 보고 더 놀나) 엄마야~! 벌인가봐! (두 팔 마구 휘저으며 도망하면)
택 기 (언제 왔는지, 나타나) 니 왜 그래? 여서 뭐해?
지 현 (호들갑) 벌인가 봐요! 벌!
택 기 (놀라며) 장수말벌이네! (납작 엎드리며) 엎드려! 가만있어! 쏘이면 죽는다! (숙달된 듯 수건으로 목과 얼굴 감싸고 가만있는데)
지 현 (택기 따라 잽싸게 엎드리며) 여기 화장실 앞인데...? 드러워 죽겠네...! (택기와 얼굴만 닿을 듯 마주대고 엎드려 있는 형국.)
택 기 눈이나 감어. 눈에 쏘이면 장님 돼!
지 현 (눈 꽉 감고 발발 떠는데)
택 기 (냄새 맡으며) 니 향수 뿌렸나? 지독하네!
잠시 후, 윙~ 소리와 함께 벌이 멀어지고 사라지자,
택 기 (일어나며) 그런 거 뿌리니까 벌, 모기 그런 게 다 니한테 댐비지!
지 현 그래요...? 갔나? (둘러보며 일어나고)
택 기 밭에 올 때는 향수, 화장품 그런 거 절대 바르지 마!
지 현 썬크림두요?
택 기 그래!
지 현 아이, 씨... 썬크림은 발라야 되는데?
택 기 근데, 니 일하러 와가 일은 안하고, 여 화장실에 숨어서 뭐해?
지 현 내가 뭐 이 화장실이 좋아서 왔겠어요? (옷 털며 가는) 아이, 드러...
택 기 뭐? 니 일하기 싫어가 화장실 들락거리면서 시간 때우는 거 아이가!
지 현 (이때 갑자기 또 변비증상 오는지, 배 잡고 멈춰서며) 아, 배야... 어떡하지?
택 기 어라? 이젠 배가 아프셔? 니 꾀병 안 통한다는 거 몰라?
지 현 저리 좀 가요! 진짜란 말이에요! (괴로운 듯 화장실 보며) 아, 어떡하지? (울쌍인데)
택 기 진짜 아파? 체했어?
지 현 (배만 움켜잡고) 으...
택 기 설사 났어?
지 현 (소리 꽥) 화장실 못가서 아픈 배예요! 됐어요? (그러면서도 화장실은 안가고 배 잡고 웅크리며 돌아선다.)
택 기 화장실을 왜 못가? 여 있는데?
지 현 거긴 가봤자, 안 나오니까 그렇죠! 실은... 여기 내려와서 변을 한번도 못 봤단 말이에요...! (웅크리고 고통스럽게 앉는다.) 아후, 배야... 아후... (최대한 불쌍하게 올려다보며) 혹시 이 동네에 수세식 화장실 있는 집 없어요?
택 기 수세식?
지 현 (몸서리치며) 빨리요! 급하단 말이에요...! (괴롭게) 이러다 또 그냥 들어간단 말이에요...
S#27. 홍이네 집 마당 (낮)
택기가 지현을 데리고 들어선다.
지현은 브레이크 댄스하듯 다리와 몸통 꼬고 몹시 불편한 상태다.
택 기 안녕하셨어예? 집에 계시네예.
홍이모 (완두콩 까다가) 오마야, 택기 니가 웬일이고?
홍 이 어머, 택기오빠!... (쪼르르 달려나오다 지현을 보고) 니는 뭐할라 왔는데?
지 현 (홍이 보고는 외면하며, 속마음 소리) 여기였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안오는 건데... (하면서도 배 아프다. 갑자기 살살 더 급해지는 기색인데)
홍이모 누고?
택 기 서울서 내려온 영감님 손녀딸입니더.
홍이모 그래... 얘기는 들었다.
지 현 (인사할 정신도 없는데, 억지로 인사) 안녕하세요...
홍 철 (역기 내려놓고 다가와) 아이고, 반갑습니다. 박홍철이라고 합니다. (악수 청하는데)
홍이모 이리와, 앉아라. 홍이야, 니 가서 옥시기라도 쫌 내와라.
지 현 (속마음 소리) 아이, 씨... 급해죽겠는데...?
택 기 아닙니다. 저, 화장실 좀 쓸라는데, 괜찮지예?
홍이모 그래, 드가라.
지현, 택기가 가리키는 쪽으로 급하지 않은 척 발만 뽀르르 간다.
모두 멀뚱멀뚱 지현을 쳐다보는 분위기인데,
지현 화장실 문 벌컥 열면, 안에 누가 있는 모양이다. 어머나! 얼른 당황해서 닫으면,
홍 철 맞다. 거기 할배 드갔다. (와서 화장실 문 두드리며) 할배요. 할배! 화장실 전세 냈으요? 빨리 좀 나오소.
지 현 (홍철에게) 어머, 괜찮아요. (하지만 더 급해 비비 꼰다.)
홍 철 아닙니다. (문 두드리며) 할배. 빨리 쫌 나와봐. 서울 아가씨가 화장실 쓴닥하는데, 아직 멀었나?
지현 안절부절인데, 이때 문 열고 나오는 박영감.
박영감 (나오며) 누구여? 나를 나오라 마라 하는 사람이? (하며 지현 보면)
홍 철 (지현에게 친절하게 화장실 문까지 열어주며) 드가이소.
S#28. 동 홍이네 화장실 안 (낮)
지현 들어오면, 순간 입 손으로 꽉 가리며, 어휴, 냄새... 이내 손으로 코앞 휘젓는데...
수세식이긴 하나, 역시 시골 화장실답게 지저분하다.
몹시 급하지만, 발 동동거리며, 찝찝한 표정으로 휴지 풀어 변기 시트에 죽 까는 지현.
공중 화장실을 쓸 때마다 많이 해본 능숙한 솜씨다.
드디어 옷 내리고 안도하며 앉는다.
S#29. 동 홍이집 마당 (낮)
홍 이 (택기에게) 오빠! 저 가시나를 와 우리 집으로 데꼬 와?
홍이모 니는 무신 말을 그래 하나? (택기에게) 옥시기 좀 들어라.
택 기 예... (옥수수 먹는데)
박영감 병달이네는 뒤깐도 없는가벼~? 지네 변소는 어따 국 끓여먹고, 남으 집 변소를 왔데여? (헛기침)
홍 이 저 가시나가 지네 화장실은 더러버서 똥 못 눈다해가 일부러 데꼬 왔답니다.
박영감 그래? 한번 쓰는데 500원 썩 받아야 것구만~? (부채와 지팡이 들고 나간다.)
홍이모 아이구, 아버님도 참...
S#30. 동 홍이네 화장실 안 & 문 밖 교차 (낮)
집중하며 힘쓰고 있는 지현. 뭔가 될 듯 될 듯 고조되는 순간인데...
갑자기 문 밖에서 노크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홍철의 목소리.
홍 철 (E) 아가씨. 거기 휴지 안 모지라요?
지 현 (힘쓰다 말고 허탈한) 아이, 씨... (밖에다) 괜찮아요. (다시 힘주려는데)
홍 철 혹시 모지라면요, 그 위에 보면 화장지 마니 있어요.
지 현 (괴롭다.) 네... (다시 힘주려는데, 이번엔 결정적인 느낌인데)
홍 철 가끔 변기가 역류하고 그라는데, 지난번에 학실하게 고쳤으니까네 오늘은 괜찮을 겁니다. 안심하이소.
지 현 으이~ 씨! 다 들어갔네.
우거지상으로 허탈하게 일어서는 지현.
S#31. 동 홍이네 마당 (낮)
지현 허탈하게 나오면,
홍 철 시원하게 보셨습니까?
지 현 (째려보며 떨떠름) 네... (택기에게로 가는데, 빨리 이 자리 뜨고 싶을 뿐)
홍 철 (따라오며) 우리 고장 구경은 하셨어요?
지 현 네?
홍 철 이 근방에 가볼만한 데가 아주 많아요. 제가 한번 모실까 하는데... (그 와중에도 명함 주는 거 잊지 않고) 언제 시간 나시면 꼭 연락주세요.
지 현 (받으며) 네...
지현이 오자, 택기도 일어선다.
택 기 그럼 그만 가볼랍니다. 밭일하다 와서 예...
S#32. 동 집 앞 (낮)
택기와 지현이 나오면,
홍이모 (마당에서) 심심할낀데, 우리 홍이랑 얘기도 하고, 자주 놀러 와라.
지 현 네...
홍 이 (따라 나와 위협적으로) 웃기지 마. 니 아직 뜨거운 맛을 못 봤나본데, 우리 집 화장실 다시 또 쓸 생각 하지마. 엉덩이를 화악~ 불로 지져 버릴라니까. 알았어?
지현 무시하고 얼른 택기의 트럭에 오른다.
S#33. 동 화장실 (낮)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고 보는 홍철.
킁킁 냄새를 맡아 보더니,
홍 철 (감탄) 역쉬 이슬만 먹은 얼굴이라 그란지, 냄새도 ?고 흔적도 ?네!
S#34. 달리는 트럭 (낮)
지현을 떨떠름하게 보며 투덜대면서 거칠게 운전을 하고 있는 택기.
그 바람에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트럭이 더욱 덜컹댄다.
택 기 (투덜대며, 혼잣말) 지가 무슨 상전이야?
지 현 (여전히 괴로운 표정) 좀 살살 갈수 없어요...! 나 지금 괴롭단 말이에요...
택 기 니 똥은 무슨 황금 똥이야? 아무데서나 누면 되지, 내가 니 똥 누는 거까지 이렇게 에스코트해야 돼?
지 현 (뭔가 말하려다 갑자기 다시 배를 만지는) ...!?
택 기 글고 와 화장실 탓은 해? 그래 안 먹으니, 나올 게 없지. 팍팍 먹어봐. 지가 안나오고 배기나.
지 현 아... 배야...
택 기 왜 그래? 또 나올라 그래?
지 현 아까 밖에서 하두 떠드는 통에... 못 봤단 말이에요! 아... 배야... 미치겠네... 나 이러다 똥 못 눠서 죽고 말거야...!
택 기 (갑자기 다급하게) 많이 아파?
문득 둘러보더니 차를 급하게 모는 택기.
이내 영배네 집 앞에서 끼익~ 멈추더니, 차에서 뛰어내린다.
택 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잠깐만 기다려.
지 현 (괴로운 상태) 어디가요?
S#35. 영배네 집 마당 (낮)
급하게 마당으로 들어서는 택기.
택 기 (들어서며) 행님이요! 영배행님 집에 있습니까? (마당에서 놀고 있는 범수에게) 삼촌 어디 갔나?
범 수 (뒤꼍에 대고 악쓰며) 삼촌! (부르는데)
영 배 (바로 뒤곁에서 나오며) 택기 니가 웬일이고?
택 기 집에 포도 식초 좀 있제?
영 배 포도 식초는 와?
택 기 긴말 할 시간 없고, 한잔만 따라 줘. 급히 쓸데가 있다.
S#36. 길가 택기의 트럭 (낮)
식은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여전히 거북한 듯 배를 쓸고 있는 지현.
택기가 급히 트럭 문을 열고 들어온다.
택 기 (대접 내밀며) 이거 한번 마셔봐.
지 현 ... 이게 뭔데요?
택 기 포도식촌데, 변비엔 직방이야.
지 현 (미심쩍다는 듯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택기와 식초만 번갈아 본다.) ...?
택 기 속고만 살았나. 마셔봐. 직빵이라니까!
지 현 싫어요. 내가 물파스를 누구 때문에 눈 밑에 발랐는데?
택 기 진짜라니까? 피로회복에도 좋고, 피부도 고와져.
지 현 피부요...?
그 와중에도 피부라는 말에 얼른 받아 마시는 지현. 신지 두 눈을 꼭 감고 쭉 마신다.
택 기 어때? 맛도 괜찮지?
지 현 네...
S#37. 마을회관 앞 정자나무 아래 (낮)
노인1과 장기를 두고 있는 병달.
박영감이 뒷짐을 지고 나타나 병달 옆에 슬쩍 앉는다.
박영감 병달이 너 나한테 오늘 500원 주야것다?
병 달 (왕 무시하며) 내가 와 박가 니 눔헌테 500원을 주냐?
박영감 서울서 온 늬 손녀딸이 우리집 변소를 썼으니께, 사용료는 지불해야 되지 않것냐?
병 달 (그제야 돌아보며) 아니, 우리 지현이가 와 너그 집 밴소를 써?
박영감 내 말이 그 말이다, 이놈아. 니네 똥뚜깐이 워찌나 더러운지, 변을 못 본다고 허드라?
병 달 뭐라? 우리 밴소가 더러버?
박영감 그래, 이놈아. 니 놈 똥이 월매나 더러웠으면 우리 집까지 다 왔것냐? 빨리 오백원 내놔라?
갑자기 우락부락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집으로 가는 병달.
박영감이 고소하다는 듯 즐겁게 부채질을 한다.
S#38. 달리는 트럭 안 & 시골길 (낮)
운전하고 있는 택기.
택 기 (지현의 상태 살피며) 어때? 슬슬 효과가 나타나지?
지 현 모르겠어요...
택 기 (갸웃하며) 효과를 볼 때가 됐는데...?
그대로 앞만 바라보며 가는 두 사람.
이때 갑자기 지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지 현 잠깐! 스톱!
놀라 지현을 돌아보는 택기.
지 현 차 세워요! 스톱!!
그대로 ‘끽!’ 멈추는 트럭.
지현이 다급하게 뛰어내린다.
앞 뒤 볼 것도 없이 길가의 콩밭으로 달려 들어가는 지현.
택 기 (튀어나와 지현의 뒤에 대고) 왜 그래? 괜찮아?
하지만 대꾸도 없이 콩밭 한가운데로 달려가더니, 갑자기 콩밭으로 쑥 앉는 지현.
S#39. 동 콩밭 (낮)
무성한 콩잎 사이로 지현의 머리만 빼꼼이 보인다.
한껏 긴장됐던 얼굴이 순간 밝아지며 화사하게 펴진다.
지 현 아... 살겠다...!
이내 고비가 지나가고 나자 힐끗 택기를 의식하는 지현.
택 기 (길가에 선 채, 큰소리로) 으때? 효과 있지? 집에도 장독에 포도식초 담가논 거 많아. 하루에 한 잔썩 마셔! 보름만 마시면 밴비는 싹 없어진다꼬.
지 현 (괴로운 표정) 으이구... 아주 동네방네 광고를 해라, 광고를 해...!
이때 동네 아저씨 한분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60대)
아저씨 (자전거 세우더니, 택기 시선 따라 콩밭 보며) 어이, 택기, 자네 누구하고 얘기허는가?
택 기 (뭐가 좋은 지 싱글벙글하며) 아, 예... (손으로 콩밭 가리키며) 쩌~서 저희 영감님 손녀딸이... 볼일을 쫌 보고 있어서요. (다시 지현에게, 일부러 더 큰소리로) 어때 시원하지? 성공했어?
지 현 저놈이...!
뭔가 한마디 내쏠려고 고개를 들던 지현이
택기 옆에 서있는 아저씨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콩잎 사이로 쏙 숨는다.
지 현 (고개 푹 숙이며) 아... 쪽팔려...!
아저씨 (멀리서) 어이~ 처자! 그럼 일 보고 가더라고!
아저씨가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간다.
택 기 조심해서 가이소.
인사하고는 다시 콩밭을 쳐다보는 택기.
하지만 콩잎만 바람에 흔들릴 뿐 지현의 머리는 보이지 않는다.
택 기 (의아한 듯) 왜 안나와? (다시 큰소리로) 이봐! 아직 성공 못했어? 내가 떠들면 또 실패할지 모르니까, 그럼 난 차에 가 있을게! 맘 편히 보고 와!
택기 슬렁슬렁 걸어서 트럭으로 들어가고, 음악 튼다. 징기스칸이 흘러나온다.
지 현 (콩잎 사이에서) 아이, 씨... 어쩌지? 휴지를 안 갖고 왔잖아? 아이, 다리 저려. 어떡하지? (빼꼼히 트럭 보며) 이봐요... 이봐요!! 아이, 저놈은 왜 꼭 필요할 땐 없어?
S#40. 동 콩밭 & 트럭 안 (낮)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괜히 기분이 좋은 택기.
택 기 (따라 부르는) 징, 징, 징키스칸... 근데 얘 왜 안와?
이때 어디선가 돌맹이 하나가 날아와 톡! 유리창을 맞춘다.
택 기 뭐야?
두리번거리며 트럭에서 내리는 택기.
둘러보지만 여전히 지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콩잎만 하늘거릴 뿐이다.
이때 갑자기 지현의 머리가 삐쭉 올라온다.
지 현 이봐요!
택 기 왜?
지 현 (창피한 듯 말 못하는) ...
택 기 왜?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왜? 실패했어?
지 현 (주저하다가) 아니, 저기... 저... 휴지 좀 줄래요?
택 기 휴지? (활짝 웃으며) 그럼 성공했어? 근데, 휴지 안 갖고 갔어? 진작 말을 하지!
지 현 (혼잣말) 그 놈 진짜 말 많네...! (하지만 난감하게 썩은 미소 날려 보내며) 빨리요!
택기, 트럭 문 열더니 여기저기 뒤져 두루마리 휴지를 꺼낸다.
휴지를 들고 콩밭으로 들어가는 택기.
지 현 (깜짝 놀라며) 어? 스톱! 어딜 들어와요?
택 기 휴지 달라매?
지 현 거기서 던져요!
택 기 여긴 좀 먼데? 쫌 더 가야지. (들어오면)
지 현 스톱!!! 그냥 던지라니까!!!!
택 기 알았어. 잘 받어?
손으로 하나 둘 겨냥하며 휴지를 던지는 택기.
파란 콩밭 위로 휴지가 휙~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휴지를 받으려고 손을 주욱 뻗는 지현.
그런데 휴지가 지현의 뒤로 넘어간다.
어.. 어... 어...? 잡았다...! 휴지를 잡으며 좋아하는 지현.
하지만 순간, 철퍼덕 뒤로 주저앉는다.
뿌지직~! 리얼한 효과음과 함께 사색이 되는 지현.
S#41. 달리는 트럭 안 (낮)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달리고 있는 택기의 트럭.
지현은 택기가 사 놓았던 몸빼로 갈아 입은 채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똘똘 감은 트레이닝 바지뭉치를 옆구리에 숨긴 채 들고 있다.
택 기 (손으로 코앞에서 휘저으며) 이기 뭔 냄새야...? 아이고, 쿠리네!
지 현 (고개만 더 떨어뜨릴 뿐 침묵. 죽을 맛이다.)
택 기 오래 묵어서 그런가? 냄새 참~ 좋네...
지 현 ...
택 기 콩밭에 거름 하나는 진국으로 줬구만? 영배 행님네 콩농사 올해 잘 되겠네!
고개 숙인 채 택기를 째리며 울그락 불그락 하는 지현.
S#42. 시골집 앞 (낮)
트럭에서 내리는 지현. 똘똘 감은 바지뭉치를 감추듯 뒤춤에 들고 있다.
택 기 (내리지 않고) 꾸물대지 말고, 퍼뜩 씻고 다시 밭으로 나와. 오늘 니 땜에 허비한 시간 많아.
지 현 (꼼짝없이) 알았어요.
지현은 집으로 들어가고, 택기는 트럭을 몰고 간다.
S#43. 동 집 마당 (낮)
지 현 아이, 챙피해. 내가 못살아...
궁시렁 거리며 대야에 물을 받는 지현.
막 바지를 물에 담그려 하는데, 병달이 불쑥 들어온다.
병 달 (들어서다 지현보고 화가 나서) 니 오늘 홍이네 화장실에 갔드나?
지 현 (어리둥절) 네?
병 달 와 남의 집까지 가가 밴소를 쓰고 지랄이고? 니 내를 그래 망신 주고 싶나?
지 현 아니, 그게요... (여전히 뭔 말인지, 어리둥절) ???
병 달 우리 집 화장실이 드럽긴 뭐가 드러버? (하면서 지현 옆으로 오는데, 이상한 냄새 감지. 얼른 고개 돌리며) 아... 냄시야...! 화장실 냄시가 여기까지 나네? 드럽긴 드러븐가부다.
지 현 (얼른 손에 들린 똘똘 만 바지 뒷춤에 숨기는데)
병 달 (얼굴 구기며) 진짜 똥냄시가 진동을 하는구마...
지 현 (약간 떨어져 경계하며 서는데)
병 달 니 당장 화장실 청소 싹 해놔라.
지 현 (놀라며) 네? 화장실 청소요?
병 달 (뒷짐 지고 다시 나가며) 집에 몬 있겠네. 냄시 땜시... 화장실 싹 치아놔라. 알았제?
지 현 네? 화장실을 요~?
지현 우거지상이 된다.
S#44. 동 화장실 (낮)
화장실 문이 활짝 열려있고,
우비에 고무장갑, 마스크까지 쓰고 중무장을 한 지현이 빗자루와 양동이를 들고,
화장실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서있다.
지 현 아이, 씨, 내가 이거를 왜 해야 돼...? 난 여기 쓰지도 않는데...?
이윽고 양동이의 물을 화장실 안으로 휙 뿌리더니,
얼굴과 몸은 화장실 밖을 향한 채, 빗자루만 안으로 넣어 바닥을 닦는 지현.
지 현 아이, 씨... 드러. 드러 죽겠네...
S#45. 동 마당 (낮)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고, 옷을 벗는 지현.
지 현 임시루라도 샤워시설 해준다 그래놓고, 왜 안 해주는 거야? 누구 오기 전에 빨리 씻자. (물을 끼얹기 시작하며) 앗 차거. 아, 시원해. 이게 얼마 만에 씻는 거냐...
이때 갑자기 뚝 끊기는 수돗물.
지 현 어? 이게 왜 이래? (수도꼭지 잠갔다가 다시 틀며) 야, 너 왜 그래? 아이, 씨. 정말 모터 고장 났나? (툭툭 때려보고, 수고꼭지에 입대고 빨아도 보고) 야! 야! 여긴 뭐가 이러냐? 아이, 찝찝해. 어떡하지?
이때 마당 한쪽에 눈에 띄는 뚜껑 덮어놓은 커다란 통. (일명 다라이.)
지 현 아, 그렇지!
지현 가서 뚜껑을 열어보면, 그득한 물.
지현 미소 지으며 통 속으로 아예 들어간다.
지 현 아, 시원하다. 아... 좋다! (그 안에서 씻기 시작하는데)
이때 들어오는 택기.
택 기 (수돗가로 직행하며) 아니, 씻고 밭으로 바로 오라 그랬는데, 뭐 하고 안 오는 거야?
지현 놀라 물 속으로 쏙 들어간다.
택 기 (집안에 대고) 야, 양심에 털난 가시나! 빨 나와. (수돗가 보며) 어라? 옷은 무조건 벗어놓기만 하고 빨 줄도 모리네? 내가 아주 징그럽다. (수도꼭지에 물 마시려고 입대고 트는데) 어? 모타 또 나갔네?
통 속에서 코만 쏙 내놓고 숨을 쉬며 괴로운 지현.
S#46. 동 마당 (밤)
택기와 병달이 수돗가에 불을 밝혀놓고 연장을 들고 모타를 고치고 있다.
택기 땀으로 범벅이다.
지현, 여전히 통 안에서 간간이 코만 내놓고 숨 쉬면서 숨어있다.
택 기 이 가스나 어디 가서 여태 안 오는 거야?
병 달 밭에도 정말 안 왔드나?
택 기 예. 이 모타도 이거 그 가시나가 이래 해 논 기 틀림없습니다.
지 현 (물 속에서도 노려보며, 속마음소리) 저 인간이?
병 달 내 물 콸콸 클지 말라꼬 그래 얘기했구마... 그나저나 야가 어델 갔나? 전화 쫌 해 봐라.
택 기 핸드폰이랑 다 집에 있든데예. 멀리 간 거 같지 않아예. 밥 때 되면 오겠지 뭐.
병 달 그래도 어델 갔을꼬? 낮에 내가 한소리 했더만 그래 나간긴가...?
택 기 (수돗가의 지현이 벗어놓은 빨래 보며) 콩밭에서 가온 빨래도 그대로 놔두고... 내보고 빨래까지 해달라는 거야? 뭐야?
지 현 (속마음소리) 아니, 지가 언제 내 빨래를 해줬다고?
병 달 콩밭? 그기 무신 말이고?
택 기 그런 기 있어 예. (다 됐는지, 물 틀면 나오고, 일어난다.) 이제 됐네.
병 달 아이고, 수고했다. 이 땀 좀 봐라. 택기 니는 맥 가이버다. 맥 가이버.
택 기 원래 지 별명이 장 가이버 아닙니꺼? 장 가이버.
병달과 택기, 수돗가에 불 끄고 부엌으로 들어가면,
푸하~ 숨을 내뱉으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지현.
얼굴이 파랗게 질려 사색이 되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지 현 (이를 부딪치며) 아, 추워... 이게 웬 생고생이냐...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는 지현.
막 마루에 놓인 옷을 집어 드는데, 자기도 모르게 재채기가 난다.
지 현 에취!
그 소리에 택기와 병달이 부엌에서 나온다.
깜짝 놀라 재빨리 옷으로 가슴을 가리는 지현.
병 달 니 어디갔다 왔노? 그리 홀딱 벗고?
지 현 (당황해서) ... 네... 날도 덥고 해서 산책을 좀...
병 달 산책?
지 현 (배시시 웃으며) 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후닥닥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지현.
병 달 (지현 뒤에 대고) 다음부터는 산책 살살 하그라.
택 기 (고개 살레살레 저으며) 영감님 손녀딸은 도통 알 수가 없는 여자에요, 도통... (부엌으로 사라진다.)
병달, 뭔가 허탈한 듯 사라진 택기와 지현 쪽을 번갈아 본다.
S#47. 지현방 (새벽)
지현, 꿈을 꾸는지, 표정이 파르르 움직이며 자고 있다.
갑자기 혼자서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잠에서 깨어나는 지현.
지 현 (깨면서) 네, 나가요! 밭에 가요...! (방문을 보면, 닫혀있고, 아무도 없다.) 어? 저절로 눈이 떠졌잖아? (시계 보며) 아이, 씨, 4시밖에 안됐는데. (이불 다시 뒤집어쓰고 눕는다.)
이때 빗소리가 들려오자, 잠시 후 살며시 이불 걷고 방문을 보는 지현.
후다닥 무릎으로 기어가 방문을 열어보면,
마당에 시원하게 비가 내리고 있다.
지 현 (활짝 웃으며) 비 온다...! 오늘 쉬겠네? 그래, 주룩~주룩~ 내려라...! (좋아 죽겠는) 오늘은 늘어지게 잠이나 자자. (다시 방문 닫으려는데)
이때 방문 앞에 불쑥 나타나는 택기.
택 기 일어났으면 나와. 밥해. (가려는데)
지 현 네? 내가 왜 밥을 해요?
택 기 니 여태 내려와서 밥 한번도 안 했잖아. 오늘부터 밥 니가 해.
지 현 내가 농사지으러 왔지, 밥하러 왔어요? (문 매몰차게 닫으려는데)
택 기 (문잡고) 어허... 콩밭!
지 현 (어이없어서) 뭐요?
택 기 콩밭! (마침 안방에서 나오는 병달에게) 영감님. 저 우리 감자밭 가는 길에 영배행님 콩밭 아시지요?
병 달 응, 그 콩밭이 왜?
택 기 어제 그 콩밭에서요, 영감님 손녀 따님이요...
지 현 (벌떡 일어나며) 알았어요! 밥하면 되잖아요... (택기를 노려보며) 비겁한 인간! 남의 약점을 이용해?
택기 밀치며 나가는 지현.
S#48. 부엌 (새벽)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물어보면서 진땀을 흘리며 요리하는 지현.
지 현 엄마. 미역국 어떻게 해? 어... 일단 미역을 달달 볶아?
잘게 썰은 마른 생미역을 남비에 쏟아 붓더니 볶는 지현.
지 현 고기 넣고... (고기 넣고) 참기름 넣고... (참기름 휙 돌리고) 볶다가... 어, 알았어. 됐어. (전화 끊고, 계속 볶는) 이상하네? 왜 미역국이 안 되고, 미역자반이 되고 있지? 아무튼 너무 맛있게 해주면 안돼. 또 하라 그럴 게 틀림없어. 인간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어야 돼! (간장 붓고, 고춧가루 붓고, 설탕 쏟아 붓는다.)
S#49. 동 부엌 (아침)
흔들흔들... 식탁에서 밥을 먹는 세 사람의 머리 위에 흔들리는 파리 끈끈이.
천정에 부착시켜 놓은 끈끈이에는 이미 파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아래서 식사를 하고 있는 세 사람.
병 달 (미역자반 먹어보며) 맛있네.
택 기 (역시 먹어보며) 독특하네요.
지 현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맛있어요? (먹어보며, 우거지상) 어후, 전 도저히 못 먹겠는데요?
택 기 (또 집어먹으며) 아니야. 여자라 그런가 내보다 낫네.
병 달 (또 먹으며) 그래, 앞으로 요리는 지현이 니가 맡아서 다 해라.
지 현 (큰일 났다.) 네~? 그냥 아무렇게나 한 건데...?
택 기 아무렇게나 한 게 이 정도면 앞으로 기대할 만 하네.
병 달 그러게 말이다.
두 남자 말없이 열심히 먹기만 하고,
신경질이 난 지현, 뚱하니 반찬을 향해 젓가락 뻗는데,
이때 갑자기 끈끈이가 식탁위로 뚝 떨어진다.
순간 밥을 먹던 세 사람의 시선이 끈끈이에 멈춘다.
지현, 우웩~ 갑자기 구역질 나오려 하자, 고개 돌리고 억지로 참는데,
병 달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붙이라.
택기도 별일 아니라는 듯 의자 위에 올라서더니 끈끈이를 다시 천청에 걸고,
병달과 택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열심히 밥을 먹는다.
지현만 깨작거리며 괴로운데,
이번에는 끈끈이에서 파리가 한 마리 접시 위에 뚝 떨어진다.
밥을 먹던 세 사람의 시선이 또 파리로 향한다.
택기, 귀찮다는 듯 젓가락으로 파리를 건져내자,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잘 먹는 병달과 택기.
병 달 역시 맛있다. 그자?
택 기 예. 맛있네예.
지현, 속이 미슥거리는지 울컥이는 가슴 부여잡고 숟가락 놓는다.
병 달 왜?
지 현 (배시시 웃으며) 배 불러요. (일어나면)
병 달 (버럭) 밥을 남기면 되나?
택 기 그래. 그래 안 먹으니 콩밭에다 거름을... (하다가 지현 보며 멈추고) 어서 다 먹어. 다 먹고 포도식초 한잔 쭉~ 마셔.
지현, 마지못해 앉지만, 식탁 위에 걸린 끈끈이를 힐끗 보며, 젓가락만 깨작거린다.
S#50. 지현방 (아침)
지 현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으, 질렸다. 도무지 이해 못할 이상한 인간들이야. 그나저나 큰일 났네? 내일부터 진짜 맨날 밥해야 되나? 애라 모르겠다. 일단 오늘은 하루종일 잠이나 자자. 아, 이게 얼마만의 휴식이냐. (행복하게 눈 감는데)
이때 문이 벌컥 열리며 병달이 포장된 새 우비를 내민다.
병 달 (우비 차림) 지현이 니는 이거 입어라.
지 현 (놀라서 일어나며) 네? 그게 뭔데요?
병 달 우비.
지 현 우비는 왜 입어요?
병 달 비 오는데, 우비 입고 밭에 가야지. 안 입고 갈라고?
지 현 네?
S#51. 포도밭 (낮)
비바람을 맞으며 포도나무에 비닐을 씌우고 있는 지현과 택기. (비가림 시설.)
멀리 병달은 우비에 우산 쓰고, 흐뭇하게 일하는 두 사람을 보며 있고,
아낙들도 비가림시설 하고 있다.
지 현 비 오는 날은 쉰다면서요?
택 기 비 오는 날은 쉬는데, 비바람 부는 날은 못 숴.
지 현 네~? (둘러보며) 비바람이요? 무슨 말이 이랬다저랬다 야? 씨! (이때 비닐 바람에 날리면)
택 기 똑띠 잡아. 이거, 저번에 니가 꾀병 안부리고 다 씌워놨으면, 오늘 포도 비 안맞쳤잖아! 이대로 장마 지면 큰일이다. 오늘이라도 다 해야지.
지 현 네~? 이 밭을 오늘 다요?
택 기 그래. 포도 비 맞으면 당도 떨어지고 다 터진다. 농사 배린다.
지 현 아이, 씨. 벌써 팔 아파 죽겠는데?
이때 지현 놓치고, 비닐이 날아간다.
택 기 니 그렇게 밖에 일 못 해?
지현, 비닐을 잡으러 달려가다가 흙탕물에 미끄러진다.
흙탕물 속을 뒹구는 지현.
이때 바람이 더 거세지면서, 지현이 제대로 고여 놓지 않은 비닐들이 계속 날아온다.
택 기 (날리는 비닐들 잡으려 손 뻗으며) 가시나, 잘 고여 노라니까, 어떻게 해 논 거야?
비닐들 계속 투투툭 날아가고,
택 기 야! 그거 다 잡어! 그거 다 돈주고 사는 거다!
이리저리 뛰면서 날아오는 비닐을 잡으려 애쓰는 지현.
뛰다가 뒤로 자빠지기도 하고, 비바람 속에서 비닐들과 사투를 벌인다.
S#52. 병달의 집 마당 (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고,
흙탕물에 흠뻑 젖은 불쌍한 몰골로 후들거리며 들어서는 지현.
택기와 병달도 연장을 들고 뒤 따라 들어온다.
지현 우비 벗으며 자기 방으로 휘청휘청 들어가려 하는데,
택 기 (뒤에서) 들어가기 전에 세차 좀 같이 하지.
지 현 (신경질 적으로 돌아보며) 무슨 세차요?
택 기 비 오는데 세차 좀 같이 하자고.
지 현 아니, 혼자 하면 되지, 그깠 트럭을 뭘 둘이 같이 닦아요?
택 기 경운기는 차 아니야? 트럭은 내가 할테니 너는 경운기 닦아.
지 현 (짜증) 아니... 내가 무슨 철인인 줄 알아요! 난 못해!
택 기 (병달 들으라는 듯) 어허! 콩밭...!
지 현 (잽싸게 꼬리 내리며) 알았어요... 하면 될 거 아니에요...
S#53. 병달 집 앞 (밤)
트럭과 경운기가 서로 마주서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다.
비를 맞으며 빗자루와 걸레로 트럭과 경운기를 닦고 있는 택기와 지현.
지 현 (투덜대는) 어차피 밭에 나가면 금방 더러워질 걸 뭘 닦는다고...!
택 기 그기 말 못하는 기계지만 그래도 지를 아껴주는지 아닌지 금방 안다꼬. 항상 깨끗하게 닦아주고 아껴줘야 말썽을 안 부려. 알아?
지 현 흥, 예수님 나셨네? 그렇게 마음이 좋은 사람이 나는 왜 안 아껴줘? 이렇게 혹사만 시키고?
택 기 목욕도 제대로 못 했다며? 이 기회에 샤워도 해, 엄한 샤워실 만들어 달라고 떼쓰지 말고.
지 현 피, 결국 지 편할라구...! 내일 당장 샤워실이나 만들어요!
택 기 농사일 한숨 돌리고 나면 만들어 주께.
지 현 (노려보며) 뭐요?
택 기 알았어... 만들어 주면 되잖아...
지 현 (닦으며 혼잣말) 어떻게 비 오는 날 일을 더 시켜...! 정말 끊임없이 시키네...! 앞으로 절대 비 오면 안돼.
지현 원망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면,
번개가 번쩍 치며 우르르 쾅쾅! 비바람 더 거세진다.
지 현 엄마야! (움찔하더니, 얼른 닦는다.)
S#54. 지현방 (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들어오는 지현.
지 현 어이구 죽겠다...! (자기 팔뚝 보며 기겁하며) 헤? 벌써 내 팔뚝 굵어진 거 좀 봐! (입술 만지며) 입술도 부르트고... 혓바늘도 돋았잖아? 아이, 아퍼.
앉으며 거울을 들여다보며 혓바닥 내밀어 본다.
순간 깜짝 놀라는 지현.
지 현 이게 뭐야? 기미 생겼잖아? (울쌍으로) 내려온 지 며칠 만에 금방 촌년 다 됐네...!
-시간 경과.
강판에 감자를 가는 지현.
고개를 위로 쳐들고 얼굴에 갈은 감자를 붙인다.
지 현 일단 이렇게라도 한 다음에 빨리 후속조치를 취해야 돼...
이때 문이 열리며 병달 들어온다.
병 달 (웃으며) 오늘 욕봤다. 이거 옥시갱인데...
옥수수를 내밀려다 말고 지현의 옆에 놓인 감자와 강판,
그리고 지현의 얼굴에 덮인 감자를 번갈아 보는 병달.
병 달 (인상 굳어지며) 니 지금 뭐하는 짓이고?
지 현 (여전히 고개 위로 든 채) 네? 얼굴에 기미가 생겨서 감자팩을 좀...
병 달 왜 입에 들어가는 거를 아깝구로 얼굴에 쳐 바르냐꼬?
지 현 네...? 그게 아니라... 기미요, 기미가 여기...
병 달 내 니를 그래 안 봤는데, 생각이 그래 없나? 쌔가 빠지게 지은 곡식을 얼굴에나 쳐 바르고, 니가 지금 정신상태가 제대로 박힌 인간이가?
지 현 (그제야 고개 내려오며) 네? 아니 할아버지...!
병 달 (못마땅한 지) 에이! 으째 애 하는 짓이 영...! 에헴!
헛기침을 하며 찬바람 나게 문을 쾅 닫고 나가는 병달.
지현 어안이 벙벙하다.
지 현 (기분 상해서 감자 그릇 던져놓더니) 아니, 감자팩 한번 한 게 그렇게 큰 죈가...?
이때 핸드폰이 울린다.
보면 은영이 전화다.
지 현 (받으며) 은영아, 나 지금 전화 받을 상황 아니거든? 기분도 꽝이고, 내가 내일 전화할게.
은 영 (E. 다급히) 지현아, 너 빨리 텔레비전 켜봐, 텔레비전!
지 현 왜? 내 방에 TV없어.
S#55. 서울, 은영집 (밤)
전화를 하며 TV를 보는 은영.
홈쇼핑 채널에 지현 회사의 디자인실장이 나와 지현이 만들었던 의상을 팔고 있다.
은 영 (다급히) 지금 니 옷이 홈쇼핑에 나왔단 말이야.
지 현 (E) 뭐?
S#56. 택기방 (밤)
침대 위에 엎드려 농업관련 책을 넘기며,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는 택기.
이때 문이 벌컥 열리며 지현 들어온다. 지현의 얼굴엔 아직 감자 팩이 붙어있다.
택 기 (깜짝 몰라) 와이래? 와 남의 방엔 함부로 들어와?
지 현 (다짜고짜 컴퓨터 앞에 가며) 컴퓨터 좀 쓸게요! (컴퓨터 켠다.)
런닝에 팬티차림의 택기, 순간 당황해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어리둥절 지현을 보는데,
(시간경과)
홈쇼핑 채널 싸이트에 들어가 지금 방송중인 상품을 클릭하는 지현. 지현이 만든 의상과 그 옆에 실장의 활짝 웃는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매진이라는 빨간 글자들도 반짝반짝 인 아웃되고...
지 현 (이를 으드득 갈며) 이런 개 같은 년이!
이 말에 더욱 놀라는 택기. 지현이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간다. 어떨떨해서 일어나 컴퓨터로 가는 택기. 지현이 켜놓은 싸이트를 본다. 지현이 만들었던 의상을 입고 워킹하는 모델들의 동영상이 보인다.
S#57. 지현방 (밤)
감자팩 다 긁어 떼버리더니, 안절부절 하며 왔다갔다 방안을 서성이는 지현.
지 현 (문득 멈추며) 그래, 그깟 20억. 홈쇼핑에서 방송 몇 번만 하면 금방 벌 수 있어. 마음도 몰라주는 저런 인간들하고 여기서 이렇게 생고생할 게 아니라 올라가자. 포도밭이고 뭐고 서울로 가는 거야.
갑자기 짐을 싸기 시작하는 지현.
S#58. 병달집 마당 (새벽)
깜깜한 집안. 삐꺽 문이 열리며 지현이 밖을 내다본다.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가방을 메고 나오는 지현.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간다.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잠시 멈춰서는 지현.
병달의 방과 택기 방을 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돌아서서 집 밖으로 나간다.
S#59. 간이역 역사 안 (이른 아침)
매표구 앞에 서는 지현.
지 현 (돈 내밀며) 서울 한 장이요. 제일 빠른 것으로 주세요.
S#60. 동 간이역 플렛포옴 (아침)
‘서울 행 기차를 이용하실 손님께서는...’ 빨리 탑승하라는 안내방송이 들리고, 역사 직원에서 표를 내고 나오는 지현. 시동을 걸고 서있는 기차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철로 건널목을 건너간다.
지 현 (결심을 굳힌 듯 골똘히 생각에 빠진 굳은 표정. 혼잣말) 그래. 잘 생각했어, 이지현. 넌 바른 선택을 한 거야. 니 인생을 이런 촌구석에서 썩힐 순 없어.
이때 생각에 빠져 빠른 걸음으로 가던 지현이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친다. 부딪친 남자는 ‘미안합니다’ 사과하지만, 생각에 빠져 쳐다보지도 않고 기차를 향해 가는 지현. 이때 뒤에서 방금 부딪친 남자가 지현을 부른다.
남 자 (소리) 어? 이지현!
문득 멈춰서는 지현. 돌아보면, 경민이다.
경 민 지현이 아니니? 너 지현이 맞지?
지 현 (너무나 뜻밖이어서 믿을 수 없는) 경민 오빠?
서로를 마주보는 지현과 경민. 경민도 그제야 활짝 웃으며 지현에게 다가온다.
경 민 어떻게 이런 데서 만나니?
지 현 그러게요?
어리둥절 서로 마주보며 웃는 두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