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회장 死後 ‘가문의 영예’ 지킴이로…
호남 만석꾼의 손녀… 外家도 신한제분과 전남방직 집안
용문학원 이사장인 어머니는 이화여대 ‘메이 퀸’ 출신
현정은 회장의 어머니 김문희 여사, 그는 은연중 딸에게 경영자교육을 시켰다. 피아노·그림·발레·고전무용·수영·테니스와 요가까지… 당시 최고의 선생을 붙여 일류의 의미를 깨닫게 했던 것. 어린 날 김수용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새엄마>의 ‘어린 김지미’역 출연을 제안받고 놀랐던 일, 덕수초등에서 청운초등 월반 후 경기여중에 합격해 화제의 여학생이 됐던 사연….
서울 워커힐 호텔(1960년대 초 그곳은 수영장이 딸린 골프장이었다)로 수영하러 간 초등학교 2학년짜리 소녀가 있었다. 마침 거기서 영화를 찍던 김수용 감독 눈에 띄었다. 영화는 김지미가 주연하던 <새엄마>였는데, 김 감독은 김지미의 어린 시절 역할을 소녀에게 맡기고 싶어했다.
“너 참 예쁘구나. 피부가 가무잡잡해서 더 매력적이다. 어머니 어디 계시니? 영화를 한번 찍어보지 않겠니?”
소녀는 김 감독의 제안이 겁이 나 잡힌 손을 뿌리치고 마구 도망쳤다. 안 그래도 저 배우들은 도대체 창피해서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할까 의아해 하면서 촬영을 구경하던 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감독이 한 말을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엄마가 영화감독하고 연결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40년 후, 그토록 수줍던 소녀 현정은은 현대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어지러운 여러 사건이 있었다.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훨씬 극적인 사연이었다. 국내 최고 기업가의 터무니없는 자살, 미망인의 기업 승계, 믿었던 숙부의 공격, 가정주부였던 새 회장의 절묘한 반격과 반전, 그리고 한 해 반이 흘렀다.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수줍은 듯, 두려운 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던 주인공. 나는 진작부터 현정은 회장을 만나보고 싶었다. 졸지에 남편을 잃어버린 허둥지둥한
모습으로, 울어서 부은 얼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그는 현대그룹 회장실로 출근했다. 월요일 새벽 운전기사에게서 걸려온 난데없는 전화를 받은 것이 2003년 8월이었고, 회장에 취임한 것이 10월이었다. 그 후 현정은은 짧은 시간에 빠르게 변신했다. 그는 “이제 저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미망인이 아니라 현대그룹 회장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라고 당차고 결연히 선언했다.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재능과 힘을 퍼올리면서 “스스로 내게 이런 속배짱이 숨어있는 줄 미처 몰랐다”고 고백할 만큼 사태에 지혜롭고 과감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속배짱! 일견 수줍은 외양을 띠고 잠복해 있지만 위기상황에 처하면 과감하고 단호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생기는 능력을 이르는 말일 게다. 김수용 감독이 그때 수영장에서 초등학생 현정은을 꽉 잡고 배우를 시켰더라도 그는 속배짱을 발현해 좋은 연기자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정은은 누구인가? 고 정몽헌 회장의 부드럽고 조용한 아내, 손수 된장찌개를 끓이는 소탈한 재벌 부인, 시아버지 정주영 회장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머리 좋은 며느리…. 이런 전통적 이미지 위에 ‘침착하고 결단력 있는 기업인’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덧얹게 된 그는 어떻게 길러졌나?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알뿌리를 캐듯 조심스럽게 그의 어린 날을 호미질해 볼 작정이다.
천재 소리 듣기 싫어 일부러 30위권 추락도
취임 1년여가 흐른 지난해 말, 현대그룹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은 ‘관리종목’의 악몽에서 벗어나 사상 최대 순익인 4,279억 원을 벌어들였고, 금강산 관광사업을 주도하는 현대아산도 액수는 적지만 드디어 첫 흑자(8억 원)를 올렸으며 현대엘리베이터(839억 원)·현대증권(580억 원)·현대택배(74억 원)·현대경제연구원(3억 원) 등 계열사가 모두 흑자로 전환했거나 흑자를 지켰다.
2010년까지 6개 계열사 매출을 20조 원으로 끌어올려 재계 10위(현재 19위)권에 입성하겠다는 야심 찬 ‘2010 프로젝트’의 깃발도 세상에 내걸었다. 이제 아무도 현정은을 향해 “경영 경험이 전혀 없는 가정주부 출신”이라는 식의 눈초리를 보내지 못하게 됐다. 진작에 그는 그런 의혹을 향해 간결하게 한마디를 던진 적이 있다.
“경험이 없는 것과 경영 능력이 없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부끄러워 김수용 감독에게서 도망친 이후 현정은은 덕수초등학교 5학년에서 청운초등학교 6학년으로 월반한다. 정식 월반 제도가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전학해서 6학년 교실에서 몇 달 청강했는데 한 학년 어렸음에도 검정고시를 거쳐 경기여중에 거뜬히 합격했다. 그 바람에 절로 월반이 인정돼 버렸다.
경기여중에서는 선배와 동급생들이 현정은이 도대체 누구인지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쑥스러운 노릇이었다. 창문 너머로 들여다본 아이들은 “뭐 천재도 우리랑 똑같네” 하며 실망하고 돌아갔다. 그 아이들 뒤편에서 현정은은 남들과 달라서는 안 된다고, 남들 눈에 튀어 보이지 말자고 굳게 다짐한다.
천재 어쩌고 하는 말들의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입학 후 첫 시험에서는 일부러 학급 석차 30등 대로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이 현정은을 침착하게 키운 것 같다. ‘숙부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경영권 다툼을 8개월씩이나 버텨낸 것도 일찍부터 자신을 혼자 다스려온 힘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어린 날의 다짐과 달리 현정은은 어쩔 수 없이 남들 눈에 띄는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모양이다. 얼마 전 <자유죵>이라는 도발적 소설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소설가 김수경을 만났더니 우리나라 현존인물 중 소설의 주인공으로 현정은 회장만한 모델은 다시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천재소녀, 명문가의 딸, 재벌가 며느리, 남편의 불의의 죽음, 그룹 회장 취임 등이 두루 드라마적 요소가 충분하지만 그보다 더 하이라이트는 현대를 다시 나라 안 최고 기업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그룹으로 키워내는 결말 부분 아니겠느냐고 했다.
늘 그렇듯 현정은 회장은 수수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저 단정한 투피스에 별다른 액세서리도, 수행하는 비서도 없다. 침착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다 갑자기 확 웃기도 하는데, 그 웃음은 나이와 위치를 잊게 할 만큼 순진무구했다. 그 때묻지 않음은 현정은의 한계이기도 하고 저력이기도 하다.
큰 기업가가 되려면 남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변에서 충고하지만, 그는 손해 보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을 믿는 편을 택하려고 한다. 아니, 선택이라기보다 기질적으로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는 ‘애(愛)인(人)’은 타인의 입장에 설 줄 아는 마음이고, 타인의 결함을 용납해 감싸안을 줄 아는 마음이다. 기업인으로 이 이상 가는 자질이 또 있을까?
그는 내게 꿈 이야기를 두 개 했다. 첫번째는 초등학교 시절의 꿈.
“꿈에 김일성의 환갑잔치에 초대받아 갔는데 화려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죽 둘러앉아 있어요. 그런데 김일성이 우리 할아버지라는 겁니다. 즐겁고 편안한 잔치였어요. 1980년대 시아버님 정주영 회장이 북한에 가실 때 그 꿈이 생각나 혹시 우리 생전에 정말 그런 일이 있으려나 기대했는데….”
김일성을 할아버지로 설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성장 환경, 거기서 만들어진 자신감과 친화력, 이런 것이 현정은 회장의 속배짱의 근간일 것이다.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친가·외가 두루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보고 자란 견문이 DNA에 녹아 절로 발현되기도 했을 테고, 무엇보다 명성과 지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는 점이 그를 대범하게 만들었으리라고 나는 판단한다.
또 다른 꿈에는 남편 정몽헌 회장이 등장한다.
“엊저녁에는 애아빠가 꿈에 보였어요. 통 꿈에 나타나지 않던 사람인데…. 힘들 때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 꿈에는 자주 나와 ‘고맙다’고 말하고는 했다는데, 정작 내 꿈에는 안 보였거든요. 붉은 줄무늬 셔츠를 입고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논두렁이 세 개 있는데, 가운뎃길로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걸어오더라고요. 가족들을 찾아 온다고 하는데, 유리창 밖에는 장총을 든 사람들이 이렇게들 서 있고…. 아마 애아빠를 잡으러 온 사람들 같았어요.”
그는 아직도 꿈에서 이런 절박한 상황을 보는가? 불안에서 덜 헤어난 건가? 남편의 죽음을 자살로 인정하는 것도 힘들었다. 성격상 아무런 조짐도 징후도 없이 그렇게 느닷없이 가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분명 애절한 이야기인데, 이런 말을 할 때조차 그는 나약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남 이야기하듯 대범하게 슬쩍 넘어갈 줄 안다.
남편과는 그 나이 부부들의 평균치보다 훨씬 사이가 좋았다. 애정표현을 각별히 한 것은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처가 식구들과 자주 어울리고는 했다.
“바로 위의 형부와 애아빠가 동갑이어서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일요일이면 만나서 식사를 하고는 했는데 애아빠가 없으니 언니네와도 자주 만나지 못해요. 애아빠가 늘 먼저 밥 먹자고 전화하고는 했는데….”
초등학교 시절 꿈에 나타난 김일성
그 형부는 유한양행 유일한 회장의 동생인 유유산업 유특한 회장의 아들로, 수입 침장 ‘쉐르단’으로 알려진 홈텍스타일코리아의 유승지 회장이다. 정몽헌 회장이 마지막으로 보낸 날 밤에도 그 가족은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몇 시간 후 있을 일을 예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정은은 1955년 1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현영원은 1950년부터 한국은행 도쿄(東京)지점에 근무하다 그 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탄생 무렵의 디테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통의동에 사셨고, 외가는 효자동이었어요. 아버지가 서울상대에, 어머니가 이화여대에 다니셨는데, 전차에서 매일 서로 만났대요. 누구를 시켜 편지를 주고받고 그랬나 봐요. 약혼 후 외할아버지가 초대 일본공사로 나가시게 되어 어머니도 일본으로 가셨는데, 아버지도 곧 도쿄로 따라가신 거죠. 두 분은 도쿄에서 결혼하셨어요. 두 살 위 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이름이 ‘일선’이죠. 나는 일본에서 배서 서울 와서 낳았대요. 언니와 나는 생일이 같은데, 아버지가 언니의 생일 케이크를 사들고 들어오시면서 엄마의 부른 배를 보고 ‘같은 날 태어나면 케이크를 하나만 사도 될 텐데…’라고 농담을 했대요. 그랬더니 정말 그날 밤에 태어났다고….”
바로 옆 골목에 이광수의 부인인 허영숙 씨가 살았다. 산파 허영숙이 그날 밤 집으로 불려와서 현정은을 받았다.
“허영숙 씨는 우리 할머니의 친구였어요. 할머니는 경기여고 1회 졸업생인데, 결혼 후 할아버지를 따라 도쿄에서 그림공부를 했지요. 화가 나혜석과 도쿄여자미술학교 동창이었답니다.”
집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딸만 넷이었지만 남녀차별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 현영원은 밖에서 일어난 일을 집에 와서 자상하게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다.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반드시 어머니의 의견을 미리 물었다. 저녁밥은 늘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먹었다. 대신 딸들의 귀가 시간을 6시 반으로 제한해 대학생 때도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가정적인 줄 알았어요. 로타리클럽에도 초창기부터 나가셨는데, 거기 회원들이 거의 사업가이셨고, 가족모임을 많이들 하셨죠. 그래서 어려서부터 막연히 사업하는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시댁에 갔을 때 그 문화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정반대였어요. 밖에서 일어난 일을 집에 와서 전혀 말하지 않는 분위기에, 남자들 위주의 사고방식에 적응하느라 한참 애를 먹었죠.”
어려서는 한동안 외가에서 자랐다. 어머니 김문희 여사가 이화여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정외과 강사로 바쁘게 지낼 때였으므로 둘째를 친정에 맡긴 것이었다. 외가 역시 신한제분과 전남방직을 경영하던 사업가 집안이었다. 당시 라디오에 광고를 해 “닭이 운다, 꼬끼오~” 하던, 그 CM송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외손녀 현정은을 특별히 사랑하셨던 김용주 씨는 원래 사업가였으나 앞에서 말했듯 초대 일본공사로 나간 적도 있고 한때 참의원(야당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김용주 씨의 외딸인 어머니는 장안 최고의 멋쟁이였다. 이화여대 ‘메이 퀸’으로 뽑히기도 했고, 의지력이 대단해 아파도 자리에 눕는 법이 없었으며 자식들 교육에도 엄격했다. 나중에 걸스카우트 총재, 여성유권자연맹 총재, B.P.W.(전문직여성클럽) 총재를 지냈고, 지금은 용문학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잠잘 때는 늘 외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잤어요. 나 잠들면 어디 가버릴까 봐. 할아버지가 6·25 때 일본공사셨는데, 미군기지를 찾아가 맥아더와 담판했다고 들었습니다. 미군이 원래는 서울을 융단폭격할 계획이었대요. 할아버지가 경복궁·덕수궁·종묘 같은, 폭격해서는 절대로 안될 곳을 지도에 동그라미 쳐서 미군 폭격기들에게 전하도록 했답니다. 돌아가신 후에 그게 밝혀져 훈장을 받기도 하셨지요.”
사업가로서 외교와 정치계를 잠깐씩 경험했던 외조부는 가끔 “사업하는 사람은 정치하는 게 아닌데…”라고 말하고는 했다.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에 출마할 때 그 말이 생각났지만 시아버지 앞에 내놓고 말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김문희 여사는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워낙 컸다. 어린 현정은 자매에게 온갖 교육 경험을 제공했다. 피아노·그림·발레·고전무용·수영·테니스와 요가까지 각각 장안 최고의 선생에게 배웠다.
“만 네 살 때 한동일 씨 어머니께 피아노를 배웠어요. 내가 손가락에 힘이 있어 피아노를 치기에 완벽한 손이라고들 했지요. 외숙모의 친정에도 가서 피아노를 배웠는데, 외숙모 친언니가 피아니스트 오정주 씨예요. 동생은 미스 코리아 오현주 씨고. 그 집 안방에 나폴레옹 사진이 커다랗게 붙어 있던 것이 기억나요.”
어머니는 피아노를 전공시키고 싶어하셨지만 정작 본인은 지겨워 했다. 중2 때까지만 치고는 손을 떼 요즘도 피아노 앞에는 잘 앉지 않는다. 경복궁 안 연못에서 가족 모두 스케이트를 배웠다.
할아버지 현준호는 호남의 만석꾼
“어머니도 함께 스케이트를 타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같이 타신 거였더라고요.”
현정은 회장의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애정, 좀처럼 지치지 않는 체력은 이렇게 길러졌다. 김문희 여사는 은연중에 딸을 경영자로 키우기 위해 교육했던 것이다. 상황에 재빨리 대처하는 법과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내는 법을 어려서부터 하나씩 습득시켰다.
아버지 현영원은 합작회사로 대한제철을 경영하다 훗날 현대해상에 합병된 신한해운을 창업한다. 서울 오류동에 있던 대한제철 뒷산으로 현정은 자매는 쑥을 뜯으러 가고는 했었다. 조부 현준호는 호남의 만석꾼이었다. 메이지(明治)대 법과를 졸업하고 인촌 김성수, 가인 이병로, 의제 허백련 등과 교유하던 호남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현준호는 일제시대 민족은행인 호남은행을 설립한다.
일본인에게는 대출도 안 해주고, 일본인 직원은 채용도 안 하는 고집을 지켜오다 1942년 결국 일본계 은행인 동일은행에 합병되고 만다.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기도 했던 조부는 6·25 때 인민군에게 학살당해 현정은은 조부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농사지을 땅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 일찍이 간척사업도 벌였다고 들었다.
“시아버님이 서산만을 간척하실 때 조부의 간척에 대해 저한테도 물어보시더라고요.”
증조부 현기봉은 1주일에 한 번씩 걸인들을 모아놓고 먹이고 입히는 일을 해서 초상이 났을 때는 영암 일대의 걸인들이 다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들었다.
“광주 호남동 집은 대문을 항상 열어 놓았어요. 광주 시내 학생들이 소풍을 오고는 했는데 예고 없이 와도 150명쯤은 한 시간 내에 밥상이 차려져 나왔대요. 학동집은 할아버지가 금강산을 좋아하셔서 장안사를 본떠 지으셨는데, 나중에 은행에 기증했다고 들었어요.”
현준호 선생의 예술 애호는 여기저기 남은 자료에서 두루 발견된다. 이당 김은호, 의제 허백련 같은 분을 금강산에 보내 그림을 그리게 했고, 숱한 도쿄 유학생들의 학비를 부담했고, 예술인들 후원에 특히 발벗고 나섰다. 부인이 그림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당시 그림 전시회가 끝나면 안 팔린 작품들은 거의 현준호 선생 댁으로 리어카에 실려 갔다.
이런 작품들은 거의 주변 친지들에게 선물로 전해졌다. 황소 한 마리가 5원 할 때 1만~2만 원을 화가들에게 지원하는 일이 잦았고, 명창 김소희 선생의 회고에도 현준호 선생 사랑에 불려가 소리하며 나라 잃은 설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현정은의 고향집에는 당대의 내로라 하는 예술가들이 숱하게 묵어갔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한국에 오시면 현준호 씨 댁 사랑에서 묵었다.
“아버지는 어려서 임시정부 요원들에게 독립자금을 전하는 할아버지 심부름을 여러 번 맡았었대요. 경찰에 잡혀 몸수색도 많이 당하고….”
4·19와 5·16의 총소리를 집안에 앉아 다 듣던 현정은은 중학생 때 터가 좋다고 소문난 사직동 도정궁터로 이사했다. 선조가 태어나신 곳이라고 했다.
청년기의 그가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다. 현정은은 돌아다니기를 유난히 좋아했다.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해서 아쉬웠지만…. 어머니의 사회단체 활동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 사회현상 분석에 관심이 많았기에 대학은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지망했다. 72학번이다.
최근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이 한국사회에 새 이슈로 등장했다. 알 만한 여성 인사나 고위층의 부인들이 비슷한 무렵의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인 경우가 대충 잡아도 스물은 넘는다. 이해찬 총리 부인 김정옥 여사가 동기고, 오거돈 해양수산부 장관 부인 심상애 씨는 한 해 선배이고, 김근태 장관 부인 인재근 씨는 한 해 후배다. 홍석현 주미대사 부인 신연균 씨, 지은희·장하진 장관, 최영희 청소년보호위원회장은 선배이고,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은 후배다.
정주영 회장 낙점 전 윤보선家와 혼담
“사업하는 데 여자이기 때문에 난관이 있다면 남자들처럼 각계에 동창들이 포진해 있는 그 메리트가 없다는 점이에요. 그런데 동창들이 잘 돼 있어 아주 든든하죠. 다만 부인과 친구라고 하면 남편들은 일단 경계부터 하려 드니 그것은 조심해야겠던데요. 하하….”
이효재 교수가 어머니의 친구였다. 이 교수는 은근히 현정은을 윤보선가(家)에 중매하고 싶어했다. 교수실로 불러 가봤더니 어떤 여자분이 앉아 계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공덕귀 여사의 동생인 적도 있었다. 가택연금된 윤보선 전 대통령이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안국동 집에 들르기도 했다. 그때 며느리도 이 집에서 살게 할 거라고 말씀하시는데, 당시에는 한옥살림이 두렵고 싫다고 느껴졌다. 재미있는 것은 정몽헌 회장과 결혼하면서 그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신혼 살림을 차리게 된다는 거다.
“그 댁 아이랑 우리 둘째랑 이화여대 부속 유치원에서 만나 친구가 됐지요. 이효재 교수님은 내가 현대가의 며느리가 되자 섭섭해 하시더니 나중에 우리가 대북사업을 시작하자 전화해서 축하해 주시더라고요.”
대학 4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울산의 현대중공업 선박 명명식 자리에 참석했다. 오아시스보다 더 큰 회사라는 세계적 항운회사 사장의 아들 둥젠화(董建華: 나중에 홍콩의 행정장관이 된다)가 홍콩에서 방한해 동행한 길이었다. 거기서 정주영 회장을 처음 만났다.
“누가 내 가방을 받아 주셨는데 그분이 정 회장인 줄도 몰랐어요.”
정 회장은 그날 발랄하고 순진한 현영원 회장의 따님을 며느릿감으로 낙점했던 모양이다. 몇 달 후 아들 몽헌이 휴가를 나오자 둘의 만남을 주선한다.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신선했다. 머리가 짧아서인지 남자답게 보였고, 부잣집 아들 티가 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흙길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서정적인 남자였다.
“나이 들면서 나도 그런 것을 좋아하게 됐어요. 그때는 도시적이어서 그런 말이 신기하기만 했는데…. 부대로 돌아간 후 편지가 두 번 왔었어요. 서두에 ‘지금은 다래가 익어갈 무렵’이라고 썼던 것이 기억나요. 하하…. 나는 다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천천히 사귀어볼 요량이었는데 시아버지가 워낙 추진력이 대단한 분이어서 시간을 끌 여유를 주지 않았다.
“데이트할 때마다 오늘은 청혼했느냐고 물어보시더래요.”
11월에 제대하고 3월에 약혼하고 7월에 결혼했다.
“아들 여덟에 다섯째이니 홀가분할 것이라고 친정 부모님은 좋아하셨지요. 친정은 아들이 없어 아들 많은 집인 것도 흡족해 하셨고…. 형제 간에 우애 있고 재산 다툼이 전혀 없다는 것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 예상은 빗나갔지만, 현정은은 시부모의 사랑을 흠씬 받으면서 현대가에 입성한다. 1976년의 일이니 막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완공될 무렵이었다.
“그때쯤 포니가 나오고, 중동 붐이 일어나고, 아버님이 전경련 회장도 되셨지요. 현대아파트가 잘 지은 집으로 소문나 중동 고객들이 모델하우스 대신 우리집으로 구경도 왔어요.”
하나뿐인 시누이가 위아래로 살고 옆 동에는 큰형님네가 살았다.
“어머님이 형제들을 가까이 두면 다툴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시자 아버님이 다른 사람은 다 다퉈도 그애들(현정은 내외)은 다투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더래요.”
결혼하기가 무섭게 시어머니 변중석 여사는 애 낳는 한약을 지어 오고, 손수 만든 명주 속치마를 한아름 들고 왔다.
“어머님은 친정이 이북에 있어 외로우신 분이라고 시숙모님이 늘 말씀하고는 했지요. ‘해가 뜨면 그림자와 나 둘이고, 해가 없으면 나 혼자로구나’ 하는 시 같은 편지도 쓰셨대요.”
결혼 후 남편은 연세대, 아내는 이화여대 대학원에 다녔다. 학교에 나가는 1주일 중 사흘은 시댁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복 입는 게 낯설었을 뿐 힘든 일은 없었다.
“동짓날 단팥죽을 먹는데, 우리집에서는 새알을 넣었지 쌀을 넣지는 않았거든요. 쌀 든 것을 처음 보는데 못 먹겠어서 망설이고 있었어요. 아버님이 눈치채시고는 웃으시면서 ‘얘야, 맛 없거든 먹지 마라’ 하시던 것이 또렷하게 기억나요.”
주말에는 집 앞 테니스장에서 부부가 함께 게임을 즐겼다. 압구정동에는 당시만 해도 배밭이 가득했다. 한창 아파트 살림에 재미가 붙는데 첫아이를 임신했다. “아버님이 큰애는 새집에서 낳아야 한다”며 동숭동에 집을 짓기 시작해 이사한 집에서 출산하게 한다.
대학원의 지도교수는 한완상 선생이었다. 친정어머니의 여성단체 일을 곁에서 거들었기에 여성운동에 관한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일제하 민족운동에 앞장서던 여성단체인 ‘근우회’를 알게 돼, 학위 논문을 ‘근우회 연구’로 잡았다. 학교에서는 심지 깊고 명민한 현정은이 학교에 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가 며느리의 사회활동을 금하는 현대가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버린 것을 다들 아쉬워했다.
“소떼 방북 당시 들은 이야기인데, 이북에서는 근우회를 높게 평가한답니다. 제가 근우회 연구를 했다는 것을 듣고 그렇게 반가워하더래요.”
“큰딸 지이와 함께하면 힘 솟는다”
한완상 선생이 부총리가 된 후 정주영 회장과 비행기에 동석할 일이 있어 “며느님 중 누가 제일 맘에 드세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정 회장이 “정은이”라고 했을 때 한 부총리가 “집안에 숨겨놓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넌지시 며느리를 사회에 내놓기를 종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첫딸을 낳은 후 아기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페어리 디킨슨 대학에서 ‘인간개발론’을 전공한다. 시어머니 변중석은 여자가 무슨 공부냐고 말렸지만, 시아버지 정주영은 며느리가 미국에서 새로운 공부를 해올 것을 원했다.
“기존의 심리학 이론과는 전혀 다른 학문이었어요. 가족의 역사를 캐낸 후 너는 이런 사람이라고 미리 규정하는 방식을 엄금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중시하는 인간 연구였지요. 오래전 일이지만 요즘 거대한 그룹 조직을 이해하고 구성원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그때 공부한 인성개발학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재능과 장점을 가진 개인들이 서로 긴밀하게 상호 보완하는 유기체가 바로 기업조직이거든요.”
유학 때 데리고 갔던 큰딸은 서울대 고고미술학과와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후 광고회사에 근무하다 아버지 사건 이후 현대상선에 입사했다. 경영권 분쟁 때 시댁 어른들과 만날 때면 현 회장은 늘 큰딸 지이(28)와 동행했다. 딸이 곁에 있으면 힘이 났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현대를 제 위치에 올려놔야 했다.
남편을 나약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대북사업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른바 숙부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현정은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져 그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줬다. 어머니를 닮아 침착하고, 아버지를 닮아 과묵한 지이 씨는 지금 현 회장 곁에서 가장 좋은 친구이고 동반자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지난번 사내 영어능력 평가에서는 전체 1위를 차지할 만큼 막강한 실력파이기도 하다.
“시아버지·남편의 통일 꿈 이어갈 터”
친정 어머니의 교육 방법이 극성스러울 정도로 지독했기에 현 회장은 자녀를 키우면서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았다. 거의 방임에 가깝게 내버려뒀다. 교육법에 관해서도 정몽헌-현정은 부부는 의견이 일치했다. 자연스럽게 아이답게 원하는 것을 하면서 자라도록 두는 것이 최상의 교육이라고 여겼다. 또한 재벌가 아이 티를 내지 않고 평범한 집안 아이들과 교유하면서 자라기를 바랐다. 터울이 뚝 떨어진 둘째 영이(21) 씨는 상명여고 1학년 때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났을 만큼 활달하고 당찬 아가씨다. 보스턴 인근 사립고인 쿠싱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와튼 스쿨 경영학부에서 공부 중이다.
둘째를 가졌을 때도 시아버지는 당사자들도 모르게 성북동에 둘째 낳을 새 집을 지었다. 물론 출산은 새집으로 이사 가서 치렀고, 지금껏 그 집에서 사는 중이다. 막내인 외아들 영선(20) 씨는 지금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아버지 장례식 때 경복고 3학년이었던 영선은 친구들이 하도 많이 조문을 와 화제를 몰고 오기도 했다.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 현 회장의 얼굴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대그룹을 짊어졌지만 그는 역시 어머니다. 자식 기르는 어미의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기업을 투명하고 깨끗하게 윤리경영하겠다는 선언은 그래서 더욱 신뢰할 만하다.
지난 5월 말 현 회장은 개성공단에 입주한 한 의류회사 준공식 겸 패션쇼에 참석했다. 현대그룹 회장 자격으로 연설할 순서가 오자 그는 예의 빠른 걸음으로 단상으로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패션쇼는 우리 민족의 우월성과 새로운 희망을 보여 주는 매우 뜻깊은 행사다. 나는 오늘 남북의 인력들이 활기차게 땀 흘리며 생산활동과 함께 문화행사를 치르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다 보면 머지않아 개성이 500년 도읍지로서의 옛 명성을 되찾아 경제·문화·상업 교류의 중심도시로 거듭 태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진다…. 개성공업단지는 단순히 상품을 만드는 공업단지 이상의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개성공단은 민족의 화해와 화합을 상징하는 평화의 장이고 통일의 초석이 되는 남북 교류 협력의 터전이다. 앞으로 개성공단이 본격화되면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통해 대규모 인적·물적 자원이 교류되고 남북 협력이 획기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물결이 국가적, 민족적 사업으로 뻗어나가도록 나의 최선을 다하겠다.”
요즘 현 회장이 자주 하는 말은 희망과 자부심이다.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인 시아버지 정주영 회장과, 꿈을 못다 이루고 좌절한 남편 정몽헌 회장의 뜻을 이어 현정은 회장이 현대의 미래와 희망을 말하고 있다.
나는 단상에 올라선 현 회장을 향해 손뼉을 쳤다. 그렇다. 당신이 희망이다. 외롭지만 꿋꿋하게, 부드러움 속의 강인함으로 현대를, 기업문화를, 통일을, 민족을 앞장서서 끌고 가라! 신데렐라 아닌, 수줍어 더욱 배짱 있는 ‘준비된 사업가’ 현정은을 지켜보자.
김서령 / 월간중앙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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