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가의 시조인 다다히사(忠久)는 미나모토 요리토모로부터..
사쓰마(薩摩)와 오오스미(大隅)의 수호직에 임명되고..
후에 다시, 휴가(日向)의 수호직을 얻어, 남규슈에서 시마즈가가 유력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됩니다.
다다히사는, 원래는 고레무네(惟宗)성씨였는데..
후지와라 섭관가의 필두였던 고노에(近衛)가의 하급 가신 출신이었습니다.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고노에가의 영지였던 시마즈장의 하사직에 임명된 것이 시마즈가의 출발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고노에가의 시마즈장은 당시 일본에서 꽤 알아주는 장원이었다는군요...
하급 가신 출신으론, 그야말로 파격적인 출세였던 터라..
다다히사는 요리토모와 특별한 관계였고.. 그 관계에 힘입어 시마즈장의 하사직에 임명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다히사는 요리토모의 사생아였단 주장이 있는데...
요리토모 부친설이라고도 하는 이 설에 대해서 보충한다면..
시마즈가와 관련한 사서에도, 다다히사의 아버지를 요리토모로..
어머니는 무사시국의 히키군 영주가문인, 히키가의 히키 요시카즈(比企能員)의 여동생이라고 전한답니다.
다다히사의 어머니는, 요리토모의 부인인 호죠 마사코에 의해 추방되어.. 서국으로 내려가던 중..
셋쓰국의 스미요시에 위치한 스미요시신사에서 다다히사를 출산했다고 합니다.
비가 내리는 야밤에, 여우(?)가 불을 밝혀줘 무사히 출산을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다다히사는 사부로(三郎)라 칭해지고.. 고레무네가에서 양육되었다고 합니다.
7세 때, 부친인 요리토모와 가마쿠라에서 대면하였고..
원복이 될 나이에..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로부터, 忠자를 얻어 다다히사라 칭했습니다.
이상이 요리토모 부친설입니다..
1203년에 다다히사는 히키 요시카즈의 전쟁에 연루되어.. 휴가, 오오스미, 사쓰마의 모든 권한이 정지됩니다.
그렇지만,1205년에 사쓰마국의 수호직과 시마즈 장, 사쓰마 방의 하사직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다히사는 시마즈의 장원명을 자신의 성씨로 칭하게 됩니다.
당시의 관념으론, 영지의 이름을 성씨로 칭하는 것은..
그 영지를 근본으로 하여 생활하면서.. 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을 의미했기에..
시마즈를 성씨라고 칭한 것은, 시마즈 장의 전역을 다다히사의 영지임을 선포한 것이 되죠..
하지만, 다다히사의 지배력은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 말처럼 시마즈 장 전역을 완전하게 장악한 것은 아니었기에..
시마즈씨라 칭한 것은, 시마즈 장은 자신의 영지라는 것은 강조하고 싶은 의도였다고 봅니다.
당시 다다히사는 10여국에 분산된 영지를 갖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시마즈 장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고 보여지는군요..
이후, 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를 지나.. 사쓰마국 일국만을 영지로 하게 됩니다.
시마즈가는 초대 다다히사를 거쳐..10대 다다쿠니(忠國) 당주에 이르기까지..
와카사(若狹), 에치젠(越前), 이사쿠(伊作), 소슈(總州), 오슈(奧州), 삿슈(薩州), 호슈(豊州), 소슈(相州)의 각 분가와
야마다(山田), 마찌다(町田), 신뉴(新納), 가바야마(樺山), 기타고(北鄕) 등의 서가가 창출되어 난립하는 양상이 됩니다.
이 중, 소슈(總州)씨와 오슈(奧州)씨 간의 항쟁을 신호탄으로..
시마즈가의 내분이 끊임없이 벌어져.. 산슈는 대립과 분열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특히, 12대 ~ 14대의 삼대 당주들은 모두 유약하여, 수호가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시기였습니다.
드디어, 15대 당주인 시마즈 요시히사(貴久) 때에 이르러..
시마즈 본가가 부흥하고 산슈 통일에 성공하게 됩니다.
요시히사는 1526에 수호가의 가독을 계승한 후.. 내분에 종지부를 찍고,
그의 후손들인 요시히사(義久), 요시히로(義弘), 도시히사(歲久), 이에히사(家久)의 전폭적인 협조로..
규슈 시마즈가의 기초를 쌓게 됩니다.
사쓰마와 본래의 영지였던 오오스미를 장악한 후..
히시카리(菱刈), 시부야(澁谷), 기모츠케(肝付) 등의 유력한 영주들을 포섭한 후..
휴가를 호슈 시마즈가의 다다치카(忠親)의 도움으로 차지하게 되어.. 산슈 통일에 성공합니다.
산슈를 통일한 시마즈가는..
이후 오토모가와 대립하여 다카기성과 미미천의 교전에서 오토모의 대군을 격파..
뒤이어, 류조지가와 대립이 시작되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간언을 무시한 류조지 다카노부를 전사시킨 결과..
규슈의 판도는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즉, 류조지, 오토모, 시마즈 3가문의 균형 관계가 붕괴한 것이죠.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대군이 북상을 하여.. 지쿠고에 침공을 개시..
이렇게 해서, 3가문의 최후 공방전이 지쿠고 방면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1585년에, 오토모가가 류조지와 시마즈 양군의 협공으로 패배하고..
시마즈가가 규슈를 거의 재패할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과 조우하게 되죠..
이상이 산슈를 통일하는데 50여년이 걸렸지만.. 산슈통일 후.. 불과 십년 사이에 규슈의 패자가 된 시마즈가의 간략사입니다.
쇼군에 나오는 시마즈가의 무장들
시마즈 다카히사 (島津尙久 / Shimazu Takahisa) (1514 ~ 1571)
시마즈 요시히사(島津貴久)라고도 합니다.
다다요시(忠良)의 적남으로, 시마즈 본가의 양자가 되어 15대 당주로 본가를 잇게 됩니다.
아들엔, 요시히사, 요시히로, 도시히사, 이에히사가 있습니다.
사쓰마, 오오스미, 휴가 삼국의 태수..
1535년에 사네히사와의 쟁패에서 승리한 후.. 가문의 추천으로 수호로써 공인받습니다.
후에, 가고시마의 내성을 거성으로 정하고 산슈통일에 진력..
다다요시와 함께 시마즈가 중흥의 선조로 평가받습니다.
시마즈 요시히사 (島津義久 / Shimazu Yoshihisa ) (1533 ~ 1611)
1566년에 15대 당주인 요시히사(貴久)는 산슈통일을 달성하고 가독을 요시히사(義久)에게 양도합니다.
히시카리(菱刈)가 토벌을 시작으로.. 1569년에 4형제는 산슈지역을 완전히 제압..
그 후, 요시히사는 형제들과 함께 규슈 재패를 목표로 북상을 개시..
오토모가, 류조지가와의 항쟁에서 기선을 잡고.. 규슈 전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
또한, 선조들의 유훈이던 적군의 공양탑 건립에도 충실(?)하여, 전몰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히데요시의 오토모가와의 화목권고를 무시한 채, 오토모가에 대해 총공세를 가하고..
히데요시의 선봉대를 벳키천에서 격파하지만..
규슈정벌에 직접 나선 히데요시의 대군엔.. 각지에서 연패..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요시히로와 도시히사의 반대를 누르고, 삭발한 채 가와우치의 태평사에서 히데요시와 만나 항복하게 됩니다.
그 후, 영지는 사쓰마와 오오스미 2국이 인정되고..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요시히사는 이들을 잘 설득하여 저항을 단념시킵니다.
1595년에 요시히로에게 가독을 넘기고 은거..
은거 후에도.. 조선 침공, 바이호쿠의 반란, 쇼나이의 전쟁, 세키가하라의 교전 등에 관여..
또한, 시마즈가의 내부문제들이 생기지만.. 요시히로, 다다쓰네와 함께 이러한 위기들을 극복합니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대장의 그릇이라 할 수 있다.시마즈 요시히사에게는 그것이 있다.>
라고 했다는군요.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義弘 / Shimazu Yoshihiro) (1535 ~ 1619)
17대 당주. 요시히사(貴久)의 2남.
1554년 암검성의 교전에 첫 출진한 후.. 부친과 형의 산슈통일에 협력..
1560년에는, 오비성에 들어가 휴가의 이토가의 침공을 잘 막고..
1564년에 마사키원의 이이노로 이동하여, 국경을 지킵니다.
1572년에 벌어진 기자키원의 교전 후.. 적군의 공양탑을 짓고, 전몰자에 대한 공양을 합니다.
그 후, 다카기성과 미미천의 교전, 미나마타성의 구원전 등에서 군공을 쌓고..
그 무용은, 시마즈가에서 제일이라고 불립니다.
1592년 조선 침공 때는, 고령인 요시히사를 대신하여 아들과 함께 참가.. 요시히로군은 강원도 금화에 주둔.
이 때, 히데요시의 명도 있고 해서 사냥도 했다는군요..--
1593년에 같이 츨진한 아들이 병사하고.. 3남인, 다다츠네(忠恒)가 대신 출진하게 됩니다.
1597년에 귀국하던 요시히로군은 히데요시의 재침명령에 따라..
사천에 주둔하게 되고, 전라도 남원성을 함락하게 됩니다..--
20만의 명나라군이 요시히로군이 있는 사천 신성을 포위하는데.. 1만이던 요시히로군은 이를 물리쳤다는군요..--
히데요시 사후, 조선에서의 철퇴 때..
코니시 유키나가의 퇴각을 돕고.. 해군을 거느리고 제일 뒤를 맡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왜군들이 무사 귀국하는데 일조했답니다. (좀, 아깝군요..--)
귀국해서.. 공양탑을 세웠고..
1600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의 교전에선..
요시히로는, 처음엔 동군에 가담하려 했지만.. 문제가 일어나.. 꿩대신 닭이라고.. 서군에 참가하죠.
시마즈군은 패배가 확실해지자, 이에야스 본진으로 정면 돌파하고 퇴각하는데..
이 때, 시마즈군은 스테가마리라고 불리는 전법으로, 대장인 요시히로를 무사하게 퇴각시키는 데 성공..
하지만, 1500명이던 시마즈군의 귀환자는 80여 명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시마즈 이에히사 (島津家久 / Shimazu Iehisa) (1547 ~ 1587)
요시히사(貴久)의 4남.
휴가의 사도와라성의 성주였습니다.
용맹한 무장이 많은 시마즈가의 필두 역할을 했습니다.
중요한 전투에 거의 참가했으며, 특히 오키타의 교전에선 3천명으로 3만의 류조지군을 무너뜨리고..
당주도 전사시켜버리는 무용을 떨칩니다.
시마즈가 철포대의 역할 정립과 발전에 많은 힘을 쏟았고..
1587년에 휴가에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의 군에 항복합니다.
그 후, 히데나가와의 회견 후에 급사..독살이라고도 전해집니다.
시마즈 도시히사 (島津歲久 / 쇼군에선 Shimazu Norihisa로 나오죠.) (1537 ~ 1592)
요시히로에 비견되는 무용을 자랑하는 무장.무용뿐만 아니라 지략에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요시히사(貴久)의 3남으로, 1537년 7월 10일에 이사쿠의 가메마루성에서 태어났습니다.
26세 때, 가모우 교전이 끝나는 무렵에 요시다의 마쓰오성의 성주에 임명되죠.
당시에, 시마즈가가 치룬 대부분의 교전에 참가했으며..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규슈에 와서, 시마즈가에게 최후통첩을 했을 때..
가족들과 가신들 대부분이 항전을 주장했지만.. 도시히사는 싸워도 승산이 없다며 항복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와의 싸움이 벌어지고.. 요시히사(義久)가 항복한 후에도.. 저항..
저항은, 요시히사와 요시히로가 죽은 후에도 계속됩니다. 병을 핑계로 히데요시를 만나지 않았고..
조선 침공 때도, 출진을 거절하고.. 바이호쿠의 전쟁 때 협력했다는 의심을 사서 히데요시를 화나게 합니다.
결국, 1592년에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요시히사가 그를 토벌하는 중에.. 자살하게 됩니다.
시마즈 다다츠네 (島津忠恒 / Shimazu Tadatsune) (1576 ~ 1638)
요시히로(義弘)의 3남.
유년기 때부터, 무술 연마를 좋아했으며, 아버지와 함께 조선 침입에 참가하여 무용을 떨쳤답니다.--
귀국 후, 주가를 업신여긴 이주우인 다다무네를 교토에서 처형하고.. 반기를 든 다다무네의 가문을 멸합니다.
세키가하라의 교전 후, 가독을 잇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알하여, 마쓰다이라(松平)성을 쓰는 것이 허락되고..
시호를 받아 이에히사(家久)라 칭합니다.
첫댓글 글 감사드립니다